한국 철학 스케치 1 - 이야기로 만나는 교양의 세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지음 / 풀빛 / 2007년 2월
품절


지눌은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닫기만 한다면 여러 이론을 놓고 다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서로 다른 입장에서의 논쟁을 화해시키려고 한 원효의 사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처음부터 논쟁 자체가 필요 없다는 입장에 서게 된다. 내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고 아울러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는다면 처음부터 차별이 없기 때문에 논쟁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 때문이다. 그러나 욕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 자체도 본래 부처의 마음이라고 보았다. 욕심을 일으키는 것도 마음이고 깨닫는 것도 마음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한 마음에 두 개의 문이 있다고 한다. -84-85쪽

지눌은 돈오와 점수 두 가지 가운데 자신이 부처임을 깨닫는 돈오가 먼저라고 한다. 그래서 선오 후수, 즉 돈오가 먼저고 점수가 나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때 주의할 것은 첫째, 자기 마음이 부처의 마음인줄 모르고 깨닫는 일은 뛰어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나같이 능력 없는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를 낮추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우쭐해져서 더 이상 수양하려고 하지 않는, 스스로를 높이는 태도다. -86쪽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어떤 사물을 대하든지 나라는 존재의 입장을 버리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하자. 그 일은 민족을 또는 우리 마을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다보면 내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그때 내게 이로울 것인가 해로울 것인가를 따진다면 전혀 일이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지눌은 분별을 버리면 나와 남의 구별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남을 위하는 일이 바로 자기를 위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런 의식을 갖고 사물을 보았을 때 비로소 참답게 필요한 일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역사상 거란과 싸운 승병이나 임진왜란에 참여한 승병들은 모두 이와 같은 불교의 정신을 실천으로 나타낸 예다. -90쪽

정몽주는 불교를 엄격히 배척했다. 불교식의 장례를 금하고 유교 장례 의식을 보급한 사람도 정몽주였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승려를 불러다 재를 올리며 종이돈을 태운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매장을 하고, 주자가 정해 놓은 절차대로 죽은 자와 이별하는 예식을 행한 다음 때맞추어 제사를 지낸다. 우리나라에 널리 퍼져 있는 제사 관습은 바로 정몽주에서 시작된 것이다. 또 정몽주는 불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세속을 떠나 도를 닦아야 하는데, 그런 일은 평범한 사람들이 행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반드시 행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처럼 어렵게 도를 닦기보다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등 일상생활 속에서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불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전형적인 성리학자의 태도였다. -117쪽

민본사상과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상은 다르다. 민본의 이념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므로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고, 민주주의의 이념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백성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설명하면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라고 했다. 민본사상은 이 중에서 '국민을 위한' 이라는 면을 생각하지만 '국민의'나 '국민에 의한' 이라는 면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민본사상에서는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122쪽

조광조의 사상은 다음 말 속에 집약되어 있다. "도학을 높이고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를 일으킨다." 여기서 도학은 '도'를 배우는 학문을 뜻한다. 도는 본래 '길'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 길을 따라 가지 않으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길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거리에만 길이 있는 것이 아니며 마음 속에도 길이 있다. 거리의 길이 장소를 옮겨가기 위한 것이라면 마음 속의 길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한 길이다. 길을 잘못 들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듯이 마음 속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지 못하고 짐승과 다름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139-140쪽

철학은 본래 체계를 갖춘 사유다. 따라서 생각하는 목적이나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르면 생각하는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에 논쟁이 생긴다. 철학 논쟁은 자신의 의견이 옳고 상대방의 의견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싸움이다. 하지만 논쟁이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논쟁은 자기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 자기 생각을 체계적이고 날카롭게 다듬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논쟁이 풍부했던 철학은 그만큼 발전하게 된다. 또한 논쟁은 단순히 이기고 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참다운 논쟁은 언제나 논쟁 전과 후의 모습을 달라지게 만든다. 논쟁 과정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나아가 서로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나은 이론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162-163쪽

이언적은 진리가 모든 만물보다 앞서는 궁극적 본질이지만 구체적으로는 경험 세계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주장은 진리가 한갓 사물의 존재 법칙이 아니라 도덕 원리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그 원리를 따른다면 도덕적 실천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도덕적이라는 확신과 아울러 마땅히 그 본성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170쪽

이황은 리와 기가 같이 있다고 해서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로 본다면, 결국 인간의 순수한 마음과 욕심 섞인 마음을 하나로 보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침내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군자는 자신의 인간다움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갈고 닦는 지성인이고 소인은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욕심꾸러기다. 이황의 주장은 우리가 사는 현실에는 옳고 그름을 따지다가 비록 목숨을 잃더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 꿋꿋이 실천해 가는 군자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짓밟고 해치는 소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단은 언제나 선이기 때문에 사단을 따르는 사람은 소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단이나 칠정이 모두 악이 될 수도 있는 기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결국은 군자와 소인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182쪽

허균은 똑똑하고 글을 잘 지었지만 행동은 어떤 것에도 속박되지 않았다. 그래서 '남녀의 정욕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고, 남녀가 나뉘는 윤리와 도덕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으니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감히 하늘이 준 사람의 본성을 어길 수 없다."라고 했다.
(안정복의 <천학문답>, 심재의 <송천필담> 中)-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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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절판


당신은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인간이 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당신은 칸트처럼 인간의 행복이 도덕적 의무의 준수에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벤담처럼 쾌락의 증대에 있다고 보는가? 어느 쪽을 추구하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이다. 유토피아는 당신의 철학과 가치관과 취향을 간섭하지 않는다. 유토피아가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업의 목적은 생존을 위해 투여해야 하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늘리는데 있다. 행복은 당신이 찾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누리는 것이다. 유토피아의 목적은 모든 시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데 있다.
(토마스 모어 편 中)-188쪽

"유토피아에서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열심히 일합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이 공동의 소유이므로 결핍과 공포가 없습니다. 유토피아에서는 돈이 사라졌고 아울러 돈을 벌려는 열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돈으로 인한 많은 범죄가 사라졌습니다. 금전 사용의 종말은 사기, 절도, 강도, 말다툼, 분규, 반란, 살인, 배신, 독살 등 많은 범죄의 종말을 의미합니다. 돈이 사라지면 돈으로 인한 불안, 긴장이 사라집니다. 그렇습니다. 가난, 그것이 돈의 결핍을 의미한다면 화폐의 소멸은 가난의 소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 中)-192-193쪽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인간이 어떤 사회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이다. 의원이 환자의 고름을 빠는 것은 그의 도덕적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이해관계 때문이란다. 장의사는 그의 이해관계 때문에 죽음을 바라는 악마적 심성을 갖는 것이고, 이렇게 한비자는 인간의 이기심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 섭섭해하는 분이 있다. 스미스의 대선배 격인 홉스가 한마디 아니 할 수 없다.

... 중략 ...

만일 국가가 없다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홉스는 단언한다. 그야말로 인간을 아프리카 초원의 동물이나 다름없는 존재라고 본 것이다. 이렇듯 홉스는 한비자나 모두 인간을 이기적인 조재로 보았는데, 우리는 왜 유독 스미스의 이기심에 주목하는가? 홉스가 한비자 모두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전제로 전제군주의 강력한 통치를 역설했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스미스는 "정부는 경제 활동에 간섭하지 말라" "각자 자신의 이기심에 충실하도록 자유방임하라" "그것이 공익을 실현하는 지름길이다" 라며 자유주의 경제 이론을 제시했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03쪽

"그들은 자신이 세운 이상적인 계획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계획이 조금이라도 수정되는 것을 참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과 수많은 이해는 아무 고려도 하지 않은 채, 계획의 모든 부문을 완벽하게 짜나간다. 그들은 장기판에서 말을 옮기는 것만큼 사회를 계획하는 일을 쉽게 생각한다. 장기판의 말은 손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지만, 인간 사회라는 거대한 사회는 저마다 자신의 독자적인 운동 원리에 입각하여 움직인다. 인간 사회가 독재자의 의지대로 움직여준다면 사회는 조화롭게 굴러가겠지만 독재자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을 경우 사회는 불행해진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207쪽

"우리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욕구는 자궁에서 태어나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지속적인 욕구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람은 자신의 상황에 완벽하게 만족하는 경우가 단 한 순간도 없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

토머스 모어가 대중을 사회의 주체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넘어섰다면, 애덤 스미스는 대중을 역사 변화의 창조자로 파악한 점에서 플라톤을 능가했다. 역사는 철인의 지혜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대중의 창의에 의해 발전하는 것이다. 스미스의 사상은 이기심을 존중한 점에서 한비자와 유사하다면, 대중의 경제 활동을 존중한 점에서 맹자와 유사하다. 안정된 생산 활동이 안정된 심성을 낳는다.
(애덤 스미스 편 中)-208쪽

고대 공동체 내의 분업과 근대 공업 내의 분업은 무엇이 다른가? 고대 공동체에서 생산물의 대부분은 공동체 자체의 직접적 수요를 충족하는 물품인 반면, 근대 공업의 생산물은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한 상품이다. 고대 공동체에서 생산물을 분배하는 원리는 관습인 반면, 근대 공업에서 각 생산물의 가격을 매겨 적당한 보수를 받게 하는 것은 시장이다. 고대 공동체에서 작업자는 물품의 전 공정을 다루는 장인인 반면, 근대 공업의 작업자는 무수히 많은 공정으로 잘게 나누어진 부분 노동의 수행자이다. 요컨대 근대 공업 노동자 그 자체가 기계의 부속품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10쪽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경제의 효율을 추구하는 것을 합리적 행동으로 간주했고, 효율을 위해서 자유로운 경쟁을 자연법칙으로 내세웠다. 그 결과 발생하는 사회의 불평등은 아프리카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처럼 불가피한 현상이다. 이에 반해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이들은 경제의 형평을 추구하는 것을 정의로운 행동으로 간주했고, 형평을 위해서 사회적 연대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그 결과 발생하는 경제의 비효율이나 노동자의 게으름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자유냐 평등이냐?
(애덤 스미스 편 中)-216쪽

인간의 본질은 노동에 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과 소통하며, 노동의 열매를 사회에 제공하면서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진화해왔으며, 노동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한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이 노동의 과정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외적 강제에 의해 통제되는 한, 인간은 불행하다. 자아를 실현하는 이 노동 과정이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했을 때, 노동자가 느끼는 것은 비참함이요, 자아의 상실이다.
(애덤 스미스 편 中)-219쪽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이라고 상정하더라도 인간의 본성에는 분명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 원리가 존재한다. 이 원리들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지켜보는 즐거움 밖에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이 이런 종류의 원리이다. 타인의 비참함을 목격하거나 생생하게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느낀다."
(애덤 스미스, <도덕감정론> 中)-220-221쪽

"거미는 직포공이 하는 일과 비슷한 일을 하며 꿀벌의 집은 많은 건축가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나 가장 서투른 건축가라도 가장 훌륭한 꿀벌보다 뛰어난 점은, 그는 집을 짓기 전에 미래 자기의 머릿속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이다. 노동 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노동자는 자연물의 형태를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가 의식하고 있는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본론> 中)-228쪽

"1.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독립된 특정의 생산관계 속에 편입된다. 생산관계는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 발전 단계와 조응한다. 이러한 생산관계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이 경제구조 위에 법적, 정치적 상부구조가 세워지며(교육, 예술, 종교, 윤리 등) 특정 형태의 사회의식들이 이 상부구조에 조응한다. 물질생활의 생산양식은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활동 전반의 성격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의식을 결정한다."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中)-251-252쪽

"2. 기존의 생산관계는 생산력을 구속하는 질곡으로 변한다. 이리하여 사회혁명의 시기가 도래한다. 경제적 기초가 변하면 거대한 상부구조 전체가 재빨리 변혁된다. 어떠한 사회구성체도 생산력이 그 안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한 결코 사멸하지 않으며, 보다 높은 새로운 생산관계는, 낡은 사회의 태내에서 새로운 물질적 조건들이 성숙하기 이전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류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자기에게 제기한다.'
(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中)-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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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와 떠도는 사원
김용규.김성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2월
품절


오늘날은 전문인의 시대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전문인이 되려고 노력하며 또한 되어야만 한다. 전문인이란 기술자, 과학자, 관리자, 경영자, 의사, 법률가, 디자이너 등과 같이 도구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의 힘은 실용성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문인의 활동은 그 본성상 개인적이며 합목적적이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 거시적 전망이 요구되지 않는다. 여기에 이들이 중심이 되는 현대 사회의 위험성이 잠재되어 있다.
문제는 또한 우리의 삶이다. ... 중략 ... 우리의 삶과 사회를 의미 있고 풍요롭게 하는 다양하고도 숭고한 인류 보편적 가치들 대신에 실용성, 경제성이라는 획일적 가치만을 추구하면서, 기계적이고도 과도한 경쟁 체계 속에 살아야 하는 오늘날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황폐해지고 있다. 이들의 삶은 마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열차에 오른 것과 같이 불안하다.
(초판 저자 후기 中)-477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해결의 열쇠는 지식인이라는 말에 있다. 지식인이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수호하며 사회에 구현하려는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자이다. 때문에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초개인적이고도 합리적이며 도덕적이고 또한 인간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와 행동에 의해서만 사회가 발전하며 개인의 삶이 풍요로워진다.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단순한 전문인이 아니라 지식인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지식인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보편적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한다. ... 중략 ...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바르고도 바람직한 지식과 견해를 가져야만 하는데, 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곧 사상들이다. ... 중략 ...
<알도 시리즈>는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예술, 교육, 철학, 종교 등등 각 분야에 관한 다양한 사상들을 소설 형식에 담아서 독자들이 건전한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각종 지식들을 흥미롭고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초판 저자 후기 中)-4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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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4-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문구가 마음에 드셨나요? :)
이 책 뒤에 초판 저자 후기 문구들이 전부다 맘에 쏙 들어왔습니다. 환타지 소설이지만 지향점은 그곳에 있죠. 굉장히 재밌게 봤습니다. 곧 리뷰도.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 고소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4
김용규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9월
구판절판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빠진 미성숙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숙함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 무능력함을 말한다. 이것의 원인은 이성의 부족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결단과 용기의 부족함에 있다. 때문에 이러한 미성숙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용기를 가져라! 자신의 고유한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야말로 바로 계몽의 좌우명이다."
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中-17쪽

첫째, 참된 지식의 근거를 이성에 두었다는 것. 둘째, 직관에 의해 얻어지는 제일원리를 인정한다는 것. 셋째, 제일원리로부터 모든 참된 지식을 차례로 연역해 내는데, 그것들이 결국 하나의 정합적인 체계를 이룬다는 것이다.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공통점)-22쪽

첫째,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나온다. 둘째, 우리의 정신 안에는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는 본유관념이나 원리는 없다.
(로크, 버클리, 흄의 공통점)-22쪽

우리는 오직 경험을 통해 사물에 대한 감각들을 받아들이는데, 그 감각들이 텅 빈 우리의 정신에 반영된다. 그 결과로 우리의 정신이 얻는게 사물에 대한 관념인데, 이것이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해 아는 지식의 전부이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사과'하나를 거울 앞에 가져다 놓으면 그 사과가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정신이라는 거울은 자신에게 비친 사과를 관념으로 얻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의 정신을 '빈서판'보다는 '빈거울'에 비유하는게 더 나을 것 같다.
(로크, 버클리, 흄의 공통점) -25쪽

"우리는 관념을 가지는 것 외에 어떤 지식도 가질 수 없다." (로크) -25쪽

"경험에 의거한 어떠한 논증도 과거와 미래 사이의 유사성을 증명할 수 없다" (흄)-29쪽

우리의 모든 지식은 판단의 형식을 취하며, 판단에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 두 가지가 있다.
분석판단이란 '모든 물체는 연장(공간의 일정 부분을 차지하는 물체의 성질)을 갖고 있다.' 나 '삼각형은 세 변을 갖고 있다'와 같이 술어 개념이 이미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어서, 경험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오직 주어진 개념의 분석만을 통해 술어 개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판단이다. 때문에 분석판단은 선천적으로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진다. 술어가 주어를 설명한다고 해서 '설명판단'이라고도 부른다.
종합판단이란 '모든 물체는 무게를 가진다' 나 '이 사과는 빨갛다'와 같이 술어 개념이 주어 개념에 포함되어 있지 않아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내릴 수 없는 판단을 말한다. 이런 판단은 후천적이며 당연히 개별성과 우연성을 갖고 있다. 술어가 주어에 새로운 개념을 더한다고 해서 '확장판단'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니까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분석판단이지만, '나의 이웃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다'는 종합판단이다.
(칸트의 인식론 정리)-30-31쪽

과학과 수학의 판단들이 수학의 판단들처럼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려면 결국 '선천적'이어야 하며, 우리의 경험과 맞아떨어지려면 '종합판단'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식이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면서도 경험과 맞아 떨어지게 하는 방법, 즉 우리의 지식이 이성과 경험 모두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있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이 둘을 종합하여 지식이 '선천적 종합판단'이 되게 하면 된다. -32쪽

"인간의 인식에는 단지 이 두개의 근본적인 줄기만이 있다. 이 줄기들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나의 뿌리에서 발생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감성과 오성이다. 감성에 의해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며, 오성에 의해서 대상이 사유된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34쪽

감성이란 우리의 정신이 감각(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을 통해서 대상들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오성이란 감성을 통해 받아들인 내용들을 정리하여 개념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34쪽

"감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며, 오성이 없으면 어떠한 대상도 사유되지 않을 것이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그러므로 '개념을 감성화하는 것'(즉, 개념에 의해 그 대상을 직관에 부여하는 것)은 '직관을 오성화하는 것'(즉, 직관을 개념 아래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 이 둘의 종합에 의해서만 인식이 나올 수 있다."
(칸트, <순수이성비판>) -36쪽

참된 지식은 이제 '실재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정신이 구성한 '현상에 대한 지식'이다. 즉 객관적 지식일 뿐이다. -46쪽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의 질서와 규칙성은 우리 자신이 집어넣은 것이다. 만약 우리가, 혹은 우리의 마음이 질서와 규칙성을 집어넣지 않았더라면 이것들은 자연 속에서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칸트, <순수이성비판>)-51쪽

모든 지식은 '사실을 통해 입증', 곧 실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실증할 수 없는 종교적 또는 형이상학적 지식은 무의미하다. 또 지식의 목적은 진리를 알아내려는 데에 있지 않고,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데에 있다.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이론적으로 무한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비트겐슈타인과 검증주의 中) -82쪽

"우리는 과학적 세계 파악을 두 가지 모습에 의해 본질적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첫째는 경험주의적이고 실증주의적이다. 지식은 오히려 경험에서 유래한다. 경험은 직접 주어진 것에 의존한다. 경험이 정당한 과학 내용의 범위를 정한다. 둘째로 과학적 세계 파악은 특별한 방법, 곧 논리적 분석으로 특징지어진다. 과학적 노력의 목표는 논리적 분석을 경험적 질료에 적용함으로써 통일과학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 <비엔나 학단의 과학적 세계 파악> 中)-89쪽

"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 명제를 '참'으로 만드는 특별한 상황과 '거짓'으로 만드는 특별한 상황을 정확히 지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상황'이란 경험의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경험이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한다. 즉 경험이 명제를 검증한다."
(슐리크, <경험의 새로운 철학> 中)-93쪽

"철학적인 사항에 관하여 씌어진 문장과 질문의 대부분은 거짓이 아니라 비의미하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질문에 우리는 도대체 대답할 수 없고, 단지 그것들의 비의미성을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4.003) -94쪽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사실의 그림을 그린다. ...... 그림은 실재의 모형이다. 그림에서 그림의 요소들이 대상들에 대응하낟. 그림은 그 요소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림은 사실이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2.1-2.141) -97쪽

"세계는 모두 사례들이다.'
"세계는 사물들의 총합이 아니고 사실들의 총합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 <논고> 中)-102쪽

사회다윈주의는 다윈의 진화론의 두 가지 원칙, 즉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사회학에 받아들임으로써 탄생한 이론이다. 즉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쟁을 통해 사회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 예컨대 장애인이나 정신병자 또는 극빈자들 같은 사회적 약자 등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131쪽

포퍼는 어떤 설명적인 보편적 과학이론도 검증(또는 귀납적 방법)에 의해서는 그 무한정성 때문에 완전히 증명될 수 없지만, 그 반증은 가능하다고 했다. 왜냐하면 반증이란 단 하나의 '반대적 사례'에 의해서도 증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137쪽

데카르트가 시를 뿌리고 칸트가 거둔 합리적인 열매인 '객관적 지식'이라는 말은 '언제 누가 보아도 그렇다고 인정되는 지식'을 뜻한다. "빨간 사과가 실제적으로 빨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는 모두 그것을 빨갛게 인식한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이 사과는 빨갛다"라는 내 생각과 달리 "이 사과는 파랗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자. 그러면 나는 당연히 그가 틀렸다고 생각할 것이다. 객관성을 믿는 합리적 인간에게 '다르다'는 것은 곧 '틀리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 선의에서라도 - 그것을 바로잡아 옳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합리성->객관성->획일화->지배'라는 연결고리로 이어지는 근대성의 특징이다.-169쪽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유동적인 한 무리의 은유, 환유, 의인관들이다. 간단히 말해서, 시적 수사학적으로 높여지고 위엄 있게 치장하고 장식되어 이를 오랫동안 사용한 종족에게는 확고하고, 교훈적이고,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적 관계의 총체이다. 진리는 환상이다."
(니체,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허위에 대하여>)-170쪽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연구할 때에 현재의 관점, 곧 과거에서 본다면 '사후적 관점'에서 과거를 이해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선, 현재의 유리한 관점에서 과거 과학자들의 사상을 뒤돌아본다면, 그 사상이 본래 가진 본질을 그대로 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해하게 된다. 더욱 나쁜 것은,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엉뚱하게 생각했나?' 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어 현재의 과학지식이 그 전 시대의 것보다 더 우월하다는 생각과 역사가 어떤 획일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쿤의 '아하체험'을 통해 알아낸 사실)

-172쪽

포퍼는 실용주의는 '참'과 '유용성'을 혼동하고 있다고 했고, 러셀과 무어는 '거짓'도 때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참'도 경우에 따라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서, 이 이론은 도덕적으로도 반대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우둔하다고 평가했다.
-190쪽

로티가 비트겐슈타인으로부터 배운 것은 철학이 진리를 탐구하는 작업이 아니라 각각의 언어 게임 안에서 사용된 언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쿤으로부터 배운 것도 역시 과학이 객관적 지식의 탐구가 아니고 과학자 사회가 공통적으로 인정한 '합의', 곧 패러다임을 이끌어가는 '활동'이라는 점이었다.
-191쪽

"우리의 긴념에 관한 질문은 그것이 실재에 관한 것이냐 현상에 관한 것이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가장 좋은 행동 습관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아는 한 어떤 신념이 '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밖의 어떤 대안적 신념도 우리가 아는 한 더 나은 행동 습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티, <상대주의 : 발견하기와 만들기> 中)

-193쪽

로티의 '유대성의 철학'이 제시하는 '희망'이란 '인류가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에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내적 본성에 전념한다면 항상 우리의 세계관, 우리의 도덕 이상, 우리의 예술과 같은 것이 햇빛을 보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 인간적 진보를 인류를 위해 미리 준비된 장소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으로서 생각하지 않고, 보다 관심있는 사물을 행하고 보다 관심 있는 인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생각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197쪽

누구에게나 똑같이 파악되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란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각의 생물체가 구성하는 수많은 '비누방울'과 같은 다양한 환경 세계들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 세계 사이에는 어느 것이 더 '참되다'거나 더 '객관적'이라는 기준이 전혀 없다. 각자에게는 자기가 구성한 환경 세계가 참되고 객관적인 세계이다.
(윅스퀼이 연구로부터 주장하고자 하는 것) -231쪽

인식이란 - 지금까지 보아온 것처럼 - 인간이 어떤 사물에 대하여 갖는 참된 개념이나 그것을 얻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때 인식이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인식주체라 하고, 인식되는 사물을 인식객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 과정을 통해 얻어진 기호적(언어나 수식) 생산물이 곧 지식이다.
이와 달리, 인지란 본래는 사람이나 동물이 지각, 기억, 상상, 판단, 추리 등을 하는 것이나 그 과정을 뜻하는 심리학적 용어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지과학 이라는 학문의 발달과 함께 보다 폭넓게 쓰인다. 즉 사람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컴퓨터에 의해 구성된 인지 시스템 등이 어떤 자극을 받아들이고, 저장하고, 인출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일련의 정보처리 과정을 가리킨다.
(마투라나의 인지론과 관련하여)-240쪽

'괄호 없는 객관성'이란 칸트의 구성주의가 보장하는 객관성이다. 즉, '나에게 빨간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빨갛다'라고 생각하는 객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것을 포함한 객관성이기도 하다.

'괄호 친 객관성'은 마투라나의 급진적 구성주의가 보장하는 객관성이다. 즉 나에게 빨간 것은 단지 나에게 또는 나와 같은 인지 시스템을 가진 존재에 한정하여(또는 괄호 쳐서) 빨갛다고 생각하는 객관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모두에게 타당한 지식을 알았다고 주장할 수 없고 무수하게 다양한 세계와 그 세계에서 타당한 지식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내 생각과 다른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의 주장을 - 역시 괄호 쳐서, 하지만 충분히 -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하는 객관성이다.
(마투라나의 인지론과 관련하여)
-251쪽

"언어의 통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언어의 섬들만이 있을 뿐이다. 이들은 각각 서로의 규칙 체계에 의해서 지배되고, 어떤 것도 다른 것으로 번역될 수 없다."
(리오타르, <포스트모던적 조건> 中)-252-253쪽

"...... 누구나 다 아는 이 세계는 오직 한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들과 함께 내놓은 '어느 한' 세계임을 깨닫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그리고 우리가 다르게 살 때만 세계가 변할 것이라는 것을 알도록 우리를 얽어맨다. 앎의 앎은 우리를 얽어맨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면, 더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마치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257쪽

"우리의 세계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 내놓은 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다른 이들과 다투더라도 '그들과 계속 함께 살야 하는 한' 자신만의 확실한 어떤 것을 진리라고 고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것을 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살고 싶으면 그것이 아무리 마땅치 않게 보인다고 해도, 그들에게 확실한 것 또한 '우리의 것만큼이나 정당하고 타당함'을 인정해야 한다. ...... 이런 행위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좀 약하게 표현하면 일상생활에서 내 곁에 남을 받아들이는 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투라나, <인식의 나무> 中)-258쪽

윤리와 지식에 대한 마투라나의 입장은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는 그의 아포리즘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함'과 '앎'을 각각 행위와 경험, 곧 '세계를 내놓은 행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라고도 표현했다. 그렇다면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 라는 아포리즘에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세계를 내놓은 해위'와 '세계를 인지하는 경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 즉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세계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방식'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함'과 '앎'이 서로 반복하여 순환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으면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며, '그렇게' 구성된 세계를 경험하면 다시 '그렇게' 세계를 구성해 내놓는다는 말이다. 달리말해, 우리가 '그렇게' 존재하면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나타나고, 세계가 우리에게 '그렇게' 나타나면 우리가 다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투라나의 인지론에서 지식과 윤리가 서로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이유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함'과 '앎'의 이러한 순환구조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윤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함'과 '앎'의 순환은 당연히 그것을 결정한다. 즉 '세계를 내놓는 행위',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선하면 선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악하면 악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260-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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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논문작성법
고려대학교 출판부 엮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1년 6월
품절


논문이란 '새로운 견해를 제시함으로써 학문의 발전에 공헌하고, 나아가 인류의 지식의 총화에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개념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1쪽

학위논문은 연구자의 능력 과시를 그 기능의 하나로 하기 때문에 완벽한 방증, 다루고 있는 주제에 대한 연구사적인 고찰, 충분한 자료의 제시 등 연구자에게 보다 많은 노력과 분석적인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 상례이다. -5쪽

우선적으로 논문에는 독창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독창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소재의 새로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다루어진 소재라도 기술 방법이나 관점 또는 결론으로 이끄는 방식이 새로우면 독창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논문에서는 조사, 연구해서 알아낸 사실과, 이에 대한 연구자 자신의 비평이나 평가와 요구된다. 즉 다른 사람의 저술이나 견해를 비판 없이 옮기거나, 입증되지 않은 개인적인 견해를 주장하는 것 혹은 출처를 밝히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저술을 인용하는 것은 논문을 읽는 독자뿐만 아니라 연구자 자신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6쪽

번역물은 일차자료가 아니다. 번역이라는 행위는 그 내용이 다른 언어로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번역자의 의도나 사고가 반영될 수 밖에 없는 창조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역물이 원래의 의미를 잘 전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번역자의 사고가 번영되기 때문에, 이것 역시 일차자료를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차자료일 뿐이다. 따라서 번역물에만 의존해서는 정확한 논문을 쓸 수 없다. 만약 '퇴계의 사상'에 관한 글을 쓴다면 그가 저술한 책을 직접 읽을 수 있는 한문 실력이 갖추어져야 한다. 퇴계의 모든 저술이 한글로 번역되어 있다 할지라도 원문을 직접 읽을 수 없으면 퇴계에 대한 좋은 논문을 쓸 수 없다. -40쪽

1) 논문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예술적 창의성과 달리 학문적 창의성은 '새로운 표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표현이 가리키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나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 방법'에서 드러난다. 결국 새로운 표현이라 하더라도 결코 표현의 기법에 관한 문제만일 수 없고 새로운 발견을 향한 학문적 열의와 문제 의식 그리고 연구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천착이 사실상 논문의 학술적인 창의성의 전제가 된다. 그러므로 학술논문에서는 집필자의 창의적인 대목이 논문의 중심이 되는 위치에 오도록 서술해야 한다.

2) 사고의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여러 가지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수집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정리하여 체계적으로 논리를 펼쳐 나가는 것은 논문 집필의 핵심이며, 최초의 발상에서부터 마지막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일관된 사고가 이어지지 않고서는 학문적 주장으로서의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최초의 착상을 얼마나 흔들림 없이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58쪽

인용의 원칙
1) 권위 있는 이론이나 주장, 또는 표현을 제시함으로써 자기 논리의 타당성,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2) 남의 이론이나 견해와 자기 주장과의 차이점을 밝힘으로써 역시 자기 논리의 저당함과 정확함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삼는다.
3)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학설이나 견해가 있을 때 이를 비교, 대조함으로써 자기의 주장을 전개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다. -61쪽

직접인용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필요하다.
1) 원문의 표현이 아니고는 다른 적나 표현을 찾을 수 없을 때
2) 원문을 그대로 제시하지 않으면 독자가 그릇된 해석을 하게 될 염려가 있을 때
3) 자기의 것과는 상충되는 견해를 더욱 뚜렷하게 노출시키고자 할 때 -62쪽

인용부분 전체는 지문의 좌측기선에서 우측으로 두세 자 들여앉힌다. 이른바 들여쓰기가 필요하다. 또한 이 때의 인용부분은 지문보다 행간을 좁히며, 특히 글자 크기를 지문보다 작은 것으로 하는 것이 관례이다. 인용부분을 지문과 분리해서 처리할 때 특히 유의할 것은 따옴표(" ")를 붙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63-64쪽

인증과 주
1) 주석은 인용문의 출처를 밝히기 위하여 사용한다.
2) 주석은 증거 자료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용한다.
3) 주석은 본문의 내용에 대해서 확장의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사용한다.
4) 주석은 본문의 내용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데에 사용한다. -68쪽

논문의 문장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1) 논문 문장은 평이해야 한다. 현학적이고 난삽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그 논문을 읽을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 논문이 학계에 기여할리 만무하다.

2) 논문 문장은 간결해야 한다. 논문은 명제와 논거로 되어 있다. 이들이 명료하지 않으면 논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다. 때문에 논문의 문장은 가능하면 하나의 문장에 하나의 중심 사상을 담는 경제적이고 간결한 것이 좋다. 형용사나 부사와 같은 수식어의 남용은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아울러 본문의 내용은 논지 전개에 꼭 필요한 것들만을 엄선해서 쓰고 불가피한 경우 주석, 인용, 부록 등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3) 논문의 문장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이성에 토대를 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표현만이 요구될 분, 지나친 감정의 노출이나 수사적인 표현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울러 단정적인 표현이나 최상급의 평가는 피하는 것이 좋다. 아뮐 확정적인 진실이라고 하더라도 가능한 한 개연성을 주장하는 정도에 머무는 것이 좋다. 상대방을 지칭할 때 존칭을 써서는 안 되며, 자신을 지칭할 때는 3인칭을 써서 자신을 객관화해야 한다.

4) 논문의 문장은 정확해야 한다. 논문은 설명적인 글이다. 따라서 설명이나 논증과 같은 설명적인 진술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 묘사와 서사와 같은 창작적인 진술 방식을 사용하여 함축적이고 내포적인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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