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 녀석이 이 세상 사람이 더 이상 아닌지 열흘 이상의 시간이 지나갔다. 남아 있는 자에겐 하루하루는 너무나 짧고 삶은 바쁘다. 죽은 이는 말이 없고, 그보다 덜 친했던 이들은 시간이 가며 더 친해지고, 그는 잊혀진다. 죽음은 서럽다. 친구의 죽음을 접한 순간, 정신이 아득하고 멍해지며 넋놓고 있다가도, 정말 시간이 약이라는 듯이 나는 다시금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꾸려나간다. 그럴때면 그에 대해 많은 생각을 나누지 못하는 것이 미안하고, 내가 나쁜 놈이 된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가 자고 있는 순간에도 시계초침은 끊임없이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건전지를 빼내어 그것을 멈춘다고 해서 시간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니. 더 이상 그 친구를 더 많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과 시간이 흐르며 친구의 얼굴조차 흐릿흐릿해질 것이라는 사실과 그 친구에 대한 추억이, 기억이 하나 둘 희미해져간다는 것은, 안타깝고 불행하다.
수첩을 보다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빌려주면, 특히나 그것이 음반이나 책과 같이 내가 아끼는 것이라면 꼭 적어놓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돌려받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난 적어놓아야 안심이 된다. 그 사람이 내게 돌려주건말건 그것은 상관이 없다. 아마도 이런 건 주는대로 나의 소유가 아님을 전제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에 대한 나의 집착은 큰지라 이름과 빌려준 책이나 음반의 제목을 연결시켜놓고 적는다. "유리 - 키스하기 전에 하는 말들"
유리에게 나는 <키스하기 전에 하는 말들>이라는 내가 아끼는 알랭 드 보통의 책을 빌려줬으며, 그녀는 나에게서 알랭 드 보통을 소개받고 이렇게 혹평을 가한 적이 있었다.
박유리 : 아는게 많은것보다 1,산만해..요점이 없어..주절거리는거같고..2.깊이가 없어..꼭깊어야하는건아니지만 책을만들이유는 있어야하잖아?3.통찰력도없고 위트도 없고 그렇다고 진지하지도 않고 재미없는 수다스런 늙은이같애..너무 가혹한가 ㅋㅋ (08.23 01:49)
박유리 : 추가. 논리적이지도 않고 꼼꼼하지도 않고..그치만..책표지는 매우 이쁘닷! (08.23 01:50)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보통씨를 향해 이렇게 대놓고 말 할 수 있는건 몇 안된다. 아주 제대로 혹평을 내렸다. 그녀의 말이 전혀 틀리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가 지적한 그 모든 것들에서 나는 정반대의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키스하기 전에 하는 말들. 이 책을 빌려준 것이 아마 작년 여름이었나보다. 이후에 1년간 그녀를 보지 못하면서, 아니다 그 이전에 빌려주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돌려받기란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다시 이 책을 구입했더랬다. 그리고 내 책장엔 새 책이 꽂혀있다. 내가 노란형광펜으로 밑줄그어가며 읽은 그 책은 이젠 주인 없는 방의 책꽂이에서 조용히 잠들어있다. 아무도 봐주지 않겠지.
일상적인 삶은 계속 될테지만, 가끔씩 이렇게 그녀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으로, 그러다 넋놓고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할테지. 수첩에 적힌 그 문구는 이제 지워야겠다. 정말, 정말 이제는 다시 돌려받지 못할테니까. 이미 없는 이와의 추억을 들추는 것은, 쓰리도 아프지만 그와 함께 했던 날들에 대한 예의다. 나보다 먼저 군대에 가 백일휴가 앞두고 해뜨는 아침 동해바다에 떠오른 후배녀석과 무슨 일인지 원인을 알지 못하지만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린 그녀에 대한 예의다. 그와 그녀와 각각 알고 지내던 이들과 대화를 하다 아주 아주 가끔씩 그네들의 이름을 입에서 내뱉는 순간, 마치 아직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와 함께 이 공간에 있는 듯한 느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