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 찍었어?"

  어릴 때 그랬다. 아무 것도 정치에 대해서는 아는게 없는  - 오로지 대통령이 누구인지만 아는 - 꼬마애가 투표날이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누구 찍었어? 엄마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건 말하는게 아니라면서. 아빠도 그랬다. 그런건 말하는게 아니라고. 왜 그랬을까. 

  아빠는 경찰서에 근무했다. 내가 어린 시절이라고 하면 전두환, 노태우 정권때즈음. 박정희 정권과 같은 독재권력은 아니었지만 전두환이나 노태우나 다 그 나물의 그 밥이었고 아마도 아버지는 직업상 정치성을 드러내기가 뭣했던 것일까. 하지만 아빠는 언제나 그 정권을 찍었는걸. 보수당.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한번 아빠가 엄마에게 누구 찍으라고 이야기하는 걸 얼핏 들은 것 같다. 아 두 분이선 서로 그런 이야기하시는구나. 뭐 아빠가 엄마에게 강요하는건 아니었지만 그냥 지나가는 말로 그랬을 것이다. 어쨌든, 나에겐 누굴 찍었는지 절대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어디가서 말하기라도 하나 뭐.

  정치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은 아니다. 정치성을 드러내는 순간 친했던 사람과 논쟁이 붙어 헤어나올 줄 모르는 토론 속에서 서로 상처만 입은 채 헤어짐을 경험해야할 수도 있고, 처음 만난 사람과도 말싸움만 하다 그걸로 끝일 수도 있다. 정치성을 드러낸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나의 정치성을 아주 대놓고 공개하고 다녔었다. 과거에. 그리고 토론도 많이 했고, 한번은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는 자리에서 그넘이 하도 내가 군대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캐묻자 다 이야기했건만 그 놈은 나를 아주 짓뭉개려 들었다. 충격에 그저 술 취한 적 조용히 있었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라고 하는 짓이 내 의견을 깔아뭉개버리는 것이라니. 다시는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친구는 김&장 로펌에 들어가 일하고 있다 한다. 그게 어떤자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완전 극우였다.

  몇번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으로 난 나의 정치성을 드러내더라도 사람 가리며 드러내게 되었다. 나와 이 사람의 정치성이 비슷한가. 공통되는 부분이 있는가. 아니면 비록 나와 정치성이 다르더라도 나의 의견을 존중해줄 만한 사람인가 등등을 따지게 된 것이다. 일종의 자기검열이다. 당하지 않으려는. 토론으로 안면마비가 왔던 경험이야 몇차례 이야기한 바 있고, 내 몸과 정신을 헤치는 이 같은 짓을 이제는 안하게 된다. 토론. 말이 토론이지 결국 상처입고 끝난다.

  누군가 내게 혹시라도 "누구 찍었어?" 하고 물어온다면 나는 솔직히 대답해 줄 것이다. 열린우리당. 민노당. 나눠줬어. (민노당은 후보조차 안냈다. 어쩔 수 없이 열린우리당 줬다) 하지만 내가 대답해주는 그 사람을 보고서 대답을 할 것이다. 또한 나와 다름을 직감했다면 그 대답으로 끝낼 것이다. 나의 선택에 대해 굳이 내가 변명을 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의 정치성은 좌파자유주의이며 - 테스트를 했더니 그러네 - 이 때의 좌는 좌와 중도의 중간에 위치한다. 중도 좌파. 그러나 때로 나는 나의 정치성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것은 아마도 유럽식의 좌파 우파 개념과 우리나라에서의 좌파 우파 개념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땅에서 나는 좌파일지 모르나 어쩌면 유럽에서는 나는 우파인지도 모른다.

  "누구 찍었어?"  짧은 질문이지만 매우 민감하고 조심스럽다. 그래서 아빠와 엄마는 말하지 않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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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성을 드러내는 다른 페이퍼

http://www.aladin.co.kr/blog/mypaper/484495  (나는 좌파)
http://www.aladin.co.kr/blog/mypaper/484642 (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찬성한다)
http://www.aladin.co.kr/blog/mypaper/503885 (국가 정체성 논란에 대한 단상)
http://www.aladin.co.kr/blog/mypaper/556606 (신행정수도 위헌 판결에 대해)
http://www.aladin.co.kr/blog/mypaper/720200 (알라딘 서재에 드러난 나의 정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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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05-31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누구찍었어?"라는 남자친구의 말에 "00로 몰아줬어"라고 대답하고 "넌?"이라고 물었더니 "비밀선거 몰라?그런건 말하면 안돼~"이래서 어이없었던 -_-;;

마늘빵 2006-05-31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매지님 여자친구인데 뭐 어때 말하면. 그죠.

비로그인 2006-06-01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렬히 4를, 후보가 없는 곳엔 무소속을 찍었지만... 제 표는 사표가 된 거 같은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영 안 좋네요. 이유는 모르지만(?) 이번에 압승한 당에 대한 강한 반발심리를 가지고 있는지라..

마늘빵 2006-06-01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전 무소속 대신 노랭이들에게 한번 더 줬어요. 민노당은 후보를 안내놨던데. 쩝.

얼룩말 2006-06-01 14: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져요~ 쿠쿠

책방마니아 2006-06-01 2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난 아직 나의 정치성이 명확하지 못한데 ... (사실 정치 쪽은 아는 게 없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