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에 정답은 없다 - 출판편집자를 위한 철학에세이 출판기획 시리즈 3
변정수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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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십’과 ‘편집 경력’은 (아주 상관없지는 않겠지만) 거의 무관하다. -21쪽

편집자는 근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구체적인 일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편집자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편집자들 자신이 더 잘 안다. 하지만 ‘편집’이란 무엇인가, 또는 편집자는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가를 물었을 때, 그 답은 편집자가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그 수많은 일들 하나하나로 결코 환원되지 않으며 심지어 그 모든 일의 총합과 등치되지도 않는다. 요컨대 편집은 ‘추상적인’ 일이다.-24-25쪽

편집자는 판단하는 사람이며, 의미를 나르는 기호를 가공하는 사람이며, 상충하는 이해를 조정하는 사람이다. -41쪽

쉼표 하나, 토씨 하나를 넣고 빼는 일에도 주어진 ‘정답’은 없다. 그저 편집자의 ‘판단’이 있을 뿐이다. -47쪽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에 대한 편집자의 판단이 필요하다. 즉 ‘텍스트와의 싸움’이 좀더 완성도 있는 의미의 구조물을 위해 어느 기호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한지에 대한 판단이라면, ‘시간과의 싸움’이란 책이라는 의미의 구조물을 이루는 기호 하나하나가 얼마만큼의 상대적 중요도를 가지는지에 대한 판단이다.
-48-49쪽

대가를 받고 제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신’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잔혹한 일이다. -55쪽

관계를 파악하는 능력이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에 도달하는 일반적인 정신능력, 즉 ‘추상능력’의 발현으로 얻어진다. 추상능력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그물을 더 촘촘하게 짜낼 수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숲을 보는 통찰이 깊어지기를 원한다면 우선 자신의 추상능력을 점검해야 하고, 또한 그것이 더 잘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해야 한다. -80-81쪽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겨도 그만인 것들에서도 분명한 관계를 인식해내는 능력이란, 세상만사의 크고작은 관계들이 얽히고설킨 그물에 스스로를 던져놓을 수 있는 용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82쪽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란 애당초 세계상이 명료하지 못한 사람이거나, 혹 제 나름의 뚜렷한 세계상을 확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너무 협소하고 관념적인 나머지 구체적인 판단의 계기에서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적어도 전체를 보는 통찰을 편집자의 업무능력으로서 평가하는 사람과 전혀 다른 모습의 세계상을 가진 사람이다. -83쪽

하나의 의미를 다른 의미있는 경험과 연관시켜 자신의 경험체계로 조직하는 능력,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93쪽

가공능력이란 의미를 다루는 능력이지 기호를 다루는 능력이 아니다. 물론 의미를 표현하는 것은 기호이므로, 의미를 다루는 능력이 훌륭한 사람이란 당연히 기호를 다루는 능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지만, 의미를 다루는 능력이 없이 기호를 잘 다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의미가 사상되면 그것은 더 이상 기호가 아니기 때문이다.-130쪽

텍스트의 의미를 책의 존재로 인해 매개될 사회적 콘텍스트 속에서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가공’은 없다. -146쪽

텍스트를 장악하지 못하고 텍스트에 치여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노예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전제부터 환기하자. 텍스트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앞서 ‘무엇을’이 ‘어떻게’에 선행한다고 말했지만, ‘어떻게’를 위해 선행하는 것은 단지 ‘무엇을’뿐이 아니다. 그보다 근본적으로 ‘누구에게’ ‘왜’ 전달하는가에 대한 통찰이 텍스트 이해를 지배해야만 편집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장악할 수 있다. -158쪽

텍스트를 장악하지 못하는 편집자란, 텍스트와 관계 맺기에 실패한 것이며, ‘왜냐고 생각하기’를 소홀히 한 것이며, 텍스트에서 아무런 ‘상처’를 받지 못한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삶 속에서 텍스트의 전체적인 맥락을 통찰해내지 못하고 놓친 것이다. -174쪽

편집자에게는 비평가의 ‘눈’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눈’을 외화해낼 비평가의 ‘언어’가 필요하다. -215쪽

스스로에 대한 존중이 체화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수 있으며, 자신을 진지한 대화의 상대방으로 삼아 스스로조차 선뜻 납득되지 않는 자신의 낯선 모습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그 연장선에서 다른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에 나설 수 있다. -218쪽

자존감도 자의식도 없는 편집자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게다가 우리는 어떻든 자신의 노동으로 만들어낸 가치에 대한 대가를 받아 먹고살아야 하며, 그것을 정당하게 인정받아야만 한다. 따라서 존재감의 발현은 필연적이다. 그것을 부인한다면 편집도 없고 책도 없으며, 나아가 편집자의 노동은 마치 가사 노동처럼 사회적으로 비가시화될 것이고 직업으로서의 편집자도 없을 것이다. -238쪽

‘자신의 삶에 대한 긴장’이 구체적이지 못한 사람에게서, 언감생심 ‘텍스트에 대한 긴장’을 기대한다는 것이 차라리 어리석은 일이다. -254쪽

‘텍스트 장악력’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머릿속에 주워담고 있는가 따위보다는 그 사람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으며 살아내고 있는 사람인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254-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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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10-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과 깊이 연관된 책이네요^^ 저랑은 그닥ㅎ

마늘빵 2009-10-10 10:3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 분께 수업도 들은 적이 있고. 눈빛이 강렬하시죠. 귀로 듣던 이야기를 눈으로 읽게 됐네요.

무해한모리군 2009-10-12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편집자를 위한 철학에세이 라는 책이 있다닛!!

마늘빵 2009-10-12 09:25   좋아요 0 | URL
나온지 며칠 안됐어요. ^^ 포스 강한 분이시죠.

네꼬 2009-10-12 0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와. 아프님 훌륭한 편집자 다 된 것 같아! (응?)

마늘빵 2009-10-12 09:26   좋아요 0 | URL
응? 에이 냐옹 씨가 그런 말 하면 부끄부끄.

이리스 2009-10-14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런 책이. 아프군을 위한 책이로구나~ ^^;

마늘빵 2009-10-14 10:39   좋아요 0 | URL
응응. 편집 기술이 아닌 편집 마인드 교육책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