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세글자 이름 대신 필명이란걸 사용해본 때가 아마도 98년 무렵이었던거 같다. 인터넷 이란게 생기기 전인 98년에 컴퓨터를 샀더니 유니텔이란걸 한달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을 줬고, 단순한 이 장삿속에 순진하게 넘어가 유니텔을 한달 써본다고 들어갔다가 내내 사용하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한달이면 충분히 그 공간에 적응이 되고, 지금같이 블로그를 꾸릴 수는 없었지만, 클럽에 가입해서 나름대로 게시물을 쓰는 재미를 느낄 수 있었으니, 다른 곳을 알았다해도 - 당시엔 너무 어설프게 알았다 - 옮기지 않았을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나는 필명을 여러 차례 바꾸었다. 유니텔에서 처음에 내가 어떤 필명을 사용했는지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나의 기억력이란 이런 식이라니깐. 다행히 전에 이런 주제로 써놓은 글이 있어 살펴봤더니, '머루' '크롬'이라는 필명으로 시작해서, '폐문'으로 한동안 고정해서 사용했다고 되어있다. 가상공간에서의 필명을 만드는 일은 곤혹스럽다. 나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다, 는 생각은 동시에 나는 어떤 사람일까, 에 대한 생각으로 나아간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적절한 대답이 나오지 않고 역시 나오지 않는 대답만큼이나 필명을 짓는 일도 어렵다. '크롬'은 우리 마왕님(신해철)이 당시 낸 음반에서의 필명이 '크롬'이었기 때문에 사용했고, '머루'는 그야말로 유치찬란하게도 필통에 써있는 '머루와 다래'에서 따왔었다. 

  이후 고민 끝에 '폐문'이라는 필명을 얻었는데, 마침 힘든 고등학교 생활에서의 방황이 대학에서까지 이어지던 그때의 내 심정과 마음이 닫혀있다는 문과 같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이름이었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사용했음에도 '폐문'이란 필명을 포기한 것은, 필명이 나를 더욱 그렇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제로 더 어둠의 자식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거기서 '이데아' 란 필명으로 넘어갔는데, 이는 경제학에서 철학으로 전과하면서 철학에 대한 내 애정의 정도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서, 또 당시에 접했던 플라톤 철학에 매력을 느끼면서 그리된 것이다. 

  그 이후에도 몇 가지 더 있었는데, 건너뛰어 대략 최근 2-3년 정도를 살펴보면, '아프락사스'와 '(트로피컬)빠숑'으로 몇 곳에 정착했다. 알라딘 외의 공간은 모두 '빠숑'으로 알려져있다. 두 가지 필명을 사용했던건, 알라딘 공간은 지인들이 드나들지 않길 원했고 일종의 나만의 비밀공간이고 싶었던건데 이미 몇몇 사람들이 알아버려 지금은 '절반의 비밀공간'이 되어버렸다. 이 곳에서는 나의 실제 세계에서의 사소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공간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공간은 - 네이버, 그래24 (네이버는 쓰다보니 창고가 되어버렸고, 그래24는 활동중단 중이다) - 지인들에게 마음껏 공개해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곳에 올리는 글과 이곳에 올리는 글을 구별했고, 그곳에 올려도 될 글만을 선별해 올렸던 것이다. 실제세계의 '나'라는 개인에 대해서는 '아프락사스'로 보는게 더 정확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프락사스=빠숑' 임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대외적인 필명은 '빠숑'이다.

 동시에 혹시나 만일 다른 공간으로 내가 숨어버린다면 다른 필명을 사용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필명을 바꾼다는건, 스스로 본래 사용하던 필명에 덧씌워진 이미지에서 탈피해 내 껍질을 한 꺼풀 더 벗겨내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가상공간에서의 필명의 변화는 실제세계에서의 나의 변화로 연결된다. 아니 실제세계에서 내가 변화하길 원하기 때문에 실제세계가 반영되는 가상공간에서 필명을 바꾸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내 껍질을 하나씩 벗기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사소한(?) 변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아프락사스와 빠숑에 만족하고 있고, 이름을 버리기보다는 좀 더 나아진 '아프락사스'와 '빠숑'이 되도록 노력하련다.

 * 닉네임 = 필명 같은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저로선 둘의 차이를 모르겠어서. 사전에 의하면 '필명'은  "글을 써서 발표할 때에 사용하는, 본명이 아닌 이름"으로 되어있고, '닉네임'은 " ‘별명’, ‘애칭’으로 순화" 이라고 풀이되어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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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9-23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명..이라니깐, 엄청 거창한데요? ^^; 나는 닉네임인데, 아프님은 필명인거?

나의 유니텔시절, 첫 닉은 코울필드였어요. 그 다음은 smila

마늘빵 2007-09-23 00:03   좋아요 0 | URL
엇, 닉네임과 필명의 별다른 차이가 있나요? -_- 저는 둘을 같은걸로 간주하는데. 하이드님도 유니텔 했군요. 그땐 블로그가 없어도 첨이라 그랬는지 푹 빠져 살았었어요. 클럽 몇개 가입해서 막 프로젝트 밴드도 하고, 같은 띠, 같은 학번끼리 모여서 놀기도 하고. 대규모 번개를 몇번 갔는데 한번에 50명씩 와요. -_- 어휴.

tonight 2007-09-23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98년도에 삼성컴터 사면서 유니텔 했었어요!! -_-ㅋㅋ
저의 닉네임은 처음부터 그걸 썼었는지 아닌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제일 오래썼던건 꼬마였을거에요.
키 작은 꼬마 앨리스~ 오오~ 내 얘기를 들어보세요오우~ -_-

마늘빵 2007-09-23 00:28   좋아요 0 | URL
유니텔 '족'들 모이는건가요? 하하. 유니텔에 주로 있고, 공동아이디로 나우누리도 잠깐 했었어요. 나우누리가 더 활성화 되어있었고, 당시에 프로젝트 밴드의 멤버 대부분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빌려서 들어가곤 했죠. 앨리스님 노래하고 싶으신가보다. 크크.

tonight 2007-09-23 02:29   좋아요 0 | URL
에헤.. 이 노래 일하면서 계속 들어서 그렇습니다. ㅠㅠ
박명수 노래랑 계속 입에서 맴돌아요... -_-;;

마늘빵 2007-09-23 09:58   좋아요 0 | URL
토욜까지 일하시고 수고 하셨어요. 오늘부터 푹 쉬세요. :)

Jade 2007-09-23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8년이면..내가 초등학교 졸업할 땐데..ㅋㅋ

마늘빵 2007-09-23 11:07   좋아요 0 | URL
헙. -_-a

토트 2007-09-23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나도 유니텔 했었어요.ㅋ
아프락사스님, 추석 잘 보내세요.^^

마늘빵 2007-09-23 23:33   좋아요 0 | URL
크크. 토트님도 추석 즐겁게 보내세요. 송편도 많이 드시고. 깨든걸로. :)

비로그인 2007-09-2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천리안 ^^ 그때는 <수..> 란 닉이었던 듯.

물 흐르는 대로 살고 싶다는 :)

마늘빵 2007-09-23 23:52   좋아요 0 | URL
천리안은 한번도 안들어가봤는데... 천리안이 당시엔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고 오래된 곳이었지. 나중에 유니텔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나우누리는 후발주자로서 꽤나 급속도로 사람들을 끌어모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