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6시경 지하철역에서 역무원 아저씨가 잔뜩 흥분해서는 개찰구를 통과하려는 사람들을 막고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것은 '말함' 보다는 '외침'에 더 가까웠다. 대략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즈음 사당역에서 누군가 들어오는 지하철 앞에 몸을 내던졌나보더라.
(* 머머 했나보더라 류의 말은, 참 차갑다. '했나보더라'의 앞에 머머가 무엇이 되든지간에 그것은 나와는 전혀 다른,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그건 내 일이 아니고 나는 그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다는 식의 냉정한 말투. 또 다른 한편 '머머 했나보더라' 는 내가 직접 목격하지 않은 것을 누군가에게 말할 때 사용된다. 어쩌면 이 말이 풍기는 차가움은 사건현장에 몸담은 자가 아닌 누군가로부터 들은 바를 제 3자에게 다시 전달하는데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저 말이 풍기는 차가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저씨는 말했다.
"지금 밑으로 내려가는건 안돼요. 서울역, 사당, 안산 방면 다 안돼고요, 위로 올라가는 노선만 운행합니다. 사람이 죽었어요. 자살했대요. 당분간 운행안돼요. 죽었으니 시체도 치워야하고 그렇잖아요. 내려가는 노선 운행 안합니다."
내가 그곳 주위를 오가는 동안 아저씨는 몇번이나 이 말을 반복해서 말했다. 반대편 쪽에 제대로 설비 갖춰진 역무실이 따로 있었고,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딱딱한 높낮이 없는 음색으로 계속해서 사당, 안산, 서울역 방면 운행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사건의 다급함을 전달하기에는,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의 행위를 저지하기에는 호소력이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니 그들의 행위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역무원이 직접 나서야했다. 간이역무소를 만들어 혼자 표팔고 사람들에게 안내하는 아저씨는 무척이나 바빠보였고, 교통카드에 달랑 350원 남아있던 나는 2만원을 충전하려고 돈을 내밀었다가 돌아섰다. 이따 집에 갈 때 충전하지 뭐. 이 상황에 내가 아저씨에게 일거리를 하나 더 늘려주고 싶지 않았다.
가수 유니가 자살한지 얼마 되지 않아 탈렌트 정다빈이 자살했다. 그리고 티비와 신문에서 아직 정다빈의 체온이 식지 않은 상황에서 또 누군가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고, 직업도, 생김새도, 성별도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이 사당역에서 들어오는 지하철에 몸을 던졌고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그 사람은 이제 '보호받아야'할 사람'이 아니라 '치워야 할 시체'로 취급받는다. 그것이 남은 산 사람이 이미 없는 죽은 사람을 대하는 법이다.
내 삶을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 일부 인간에 가까운 어떤 원숭이류와 사람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떠돌이 쥐 레밍의 경우 자살하는 대표적인 동물로 알려져있지만 엄밀히 그들의 행위는 자살이 아니라 한다. 우리가 자살이라고 말 할 때는 '스스로 선택함'이 전제된다.
에픽테토스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죽음이 찾아왔을 때는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때이며, 내가 살아있는 한, 죽음이 나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곧, 나와 죽음은 같은 시점에서 만날 수 없는 별개의 세계에 속해 있으므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어쩌면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상황과 죽기 직전의 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그랬다. 자살은 순간이라고. 한번도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지만 아직 채 일년도 되지 않은 친한 친구의 자살과 자살을 생각해봤던 그 사람을 보면서,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그 순간에 자살을 하겠다고 계획하고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 순간, 단 한 순간에 자신에게 밀려오는 어떤 감정에 의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잘못된 선택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바람직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말하지도 않겠다. 그들에게 그 순간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 뿐이었을 것이므로. 그것만이 나의 불안함을 멈출 수 있었으므로. 나에게 밀려드는 우울함과 비참함을 끝낼 수 있었으므로.
이제는 누군가가 자살했다고 해도 아무도 이에 대해 관심갖지 않는다. 어제 동시에 지하철 계단을 오르던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더라. 자살이 유행인가보지. 그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죽음 앞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타인의 죽음이 나와 상관없음을 의미한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건, 이제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티비와 신문에서 자살 소식을 너무나 많이 접해, 자살에 무뎌졌기 때문이다. 아무도 타인의 죽음 앞에 냉담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다.
누군가의 자살을 막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주변인의 관심이지 않을까 싶다. 작년 자살한 친구가 가끔씩 전화해 울면서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을 때, 직장 생활에서의 갈등과 연애의 어려움 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 징후가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그저 마음 여리고 감수성 많은 친구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이라 생각했고, 점차 나아지리라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쉴러는 말했다. 인생은 한번, 죽음도 한번, 태어남도 한번, 소멸도 한번뿐이다, 라고. 죽음도 소멸도 한번이지만 태어남도 인생도 한번뿐이다. 한번인 인생 좀 더 소중하게 살아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자살자에게나, 그들의 주변인에게나, 삶은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