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카오산 로드에서 툭툭을 타고 라차담넌 스타디움으로 달렸다. 길은 오래된 수도관처럼 답답했다. 낡아빠진 차들이 도로를 점액질처럼 메우고 있었다. 신호등이 쿨럭쿨럭 몇 번이나 애를 썼으나, 결국 사거리를 뚫어내지 못했다. 나는 얼른 값을 치르고 차에서 내려 걸었다.
라차담넌은 방콕의 노른자위에 있었다. 경기가 이미 시작했는데도 경기장 앞은 사람이 바글거렸다. 카운터에 제출하려고 미리 뽑아둔 티켓을 꺼냈는데, VIP의 위력인가, 안내자가 잽싸게 나타났다. 까무잡잡한 피부, 스파이키 헤어, 왕의 신민인 주제에 탱글탱글한 자본주의 미소를 날리며. 그는 티켓의 점선을 뜯어내며 나를 위 아래로 훑었다. 문장은 잽처럼 툭 날아왔다. “Are you Boxer?” 에? 그의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지만 떨떠름하게나마 대답한 것은 그것이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나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Yeah, I’m a boxer.”
그는 다시 물었다. "Do you wanna fight?" 요지는 라차담넌에서 이벤트 파이트를 하는데 도전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 파이트 머니도 두둑하다며 그는 힙색에서 지폐다발을 꺼내보였다.
뭘까? ‘불리비트다운’이라는 미국 리얼리티 쇼 프로가 있다. 일반인들 중 주먹깨나 쓰는 자들(거의 불량하고 남 괴롭히기를 일삼는다)을 모아 프로파이터들과 일전을 벌이게 하는 컨셉이다. 난 그 프로를 영 좋아할 수 없었는데, 무엇보다 진행자의 득의만만한 표정에서 느껴지는 어떤 권위의 후광 때문이었다. "2라운드만 버티면 돼." 대체로 겁 모르는 불리들은 미끼인 줄도 모르고 상금을 덥썩 무는데,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은 10초도 안 돼 느끼게 된다. 온 몸으로. 빙글거리는 스파이키는 라차담넌의 권위를 후광처럼 누려가며 나를 언더독 취급하는 것이다. 이 녀석! 포기하는 것도, 아무 준비도 없이 시합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려운 문제가 됐다.
#. 2
라차담넌은 룸피니와 쌍벽을 이루는 무에타이의 성지다.
무에타이는 어떤 무술인가.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중 버마의 전사 크놈톤은 태국군에 사로잡혔다. (사실 무에타이는 태국의 무술이 아니다. 태국의 것이 유명할 뿐.) 적들은 그에게 유희적 요소가 가미된 사형선고를 내린다. “7명의 태국 전사를 이기면 풀어주겠다.” 크놈톤은 제안을 받아들였고, 혈투의 끝에 모두를 떡실신시키고 전설이 되었다는 이야기.
무에타이는 오늘날 복싱과 더불어 MMA의 전공필수과목 노릇을 하고 있다. 주먹, 팔꿈치, 무릎, 정강이, 8개 신체부위를 이용하며 1910년부터 서양 복서들과 교류하며 펀칭기술과 룰, 글러브와 링 같은 ‘시스템’을 받아들였다. 지금이야 신사적인 스포츠라고 할 수 있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낙무아이들은 주먹에 로프만 달랑 감고 싸웠다. 로프를 감는 것은 물론 주먹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충격을 배가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가랑이에 훈도시만 달랑 감고 싸우는 스모와 더불어 가장 문화적으로 낙후된 스포츠라 할만 했다. 조금 더 이전에는 그 로프에 유리가루를 묻혀서 싸웠다. 거칠기로 유명했던 옛날 스모선수들도 훈도시에 유리가루를 묻히고 싸우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라차담넌의 캔버스 바닥은 대체 몇 드럼의 피를 머금었을까?
지금은 전설이 된 남삭노이 윷타카캄통도, 쌈코 끼앗몽텝도 여기에서 싸웠다. 대중들이 널리 알고 있는 낙무아이라면 K-1챔피언에 오른 쁘아까오 포 프라묵이겠지만, 라차담넌에서도 1류는 아니었다. 그의 얘기를 조금 더 해볼까? 2004년 데뷔와 동시에 압도적인 기량으로 일본의 격투영웅 마사토를 패퇴시키고 K-1 챔피언벨트를 차지한 쁘아까오는 주최측에겐 재앙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한 변방국의 파이터를 자국 팬들이 환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를 견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그 중 최고의 코미디는 빰 클린치(양 손으로 목 뒤를 거는 클린치 기술)와 연속 니킥, 연속 프론트킥을 금지시킨 룰 개정이다. 세상에 두대는 연속으로 때리지 말라는 격투 룰이라니 노벨 평화상 급이다. 거기에 판정특혜까지 얹어 쁘아까오를 밀어냈지만 솔직히 그의 라이벌이던 앤디 사워도, 타니가와 프로듀서도, 팬들도 다 알고 있었다. 그가 최강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비록 파이트 머니가 적어도, 라차담넌의 정상급 파이터들은 라차담넌을 떠나지 않는다. 라차담넌이 최고의 무대라는 자긍심 때문이다. 반대로 세계 모든 입식타격가들은 작은 파이트 머니라도 라차담넌을 동경한다. 과학도가 MIT나 칼텍을, 경제학도가 하버드나 시카고를 동경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름이 무색하지 않게 어쩌다 라차담넌의 최상위 랭커들이 해외에서 경기라도 갖게 되면 꼭 전설을 써낸다. 남삭노이는 네 체급이 높은 유럽 챔피언으로 김장을 담궜고, 쌈코는 일본 킥복싱의 자존심 고바야시의 오른팔을 부러뜨렸다. 당시 쌈코의 전략은 단순했다. ‘왼발로 미들킥을 찬다.’ ‘왼발의 쌈코’에 열광하는 팬 서비스 차원으로 전혀 영리한 전략은 아니었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왜 태국인들은 그렇게 무에타이에 목숨을 거는가. 먹고 살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광산업이 있나, 제조업이 있나. 건강하고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은 4~5살부터 무에타이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투기종목인구를 모두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인구가 건물 옥상에 닭장같은 체육관을 만들어 놓고 샌드백을 치고 있다. 전철역에서 퍽퍽 소리가 들려 쳐다보면 여지없이 주변 건물 옥상에 설치된 샌드백 소리다.
선수들은 10대 초반부터 커리어를 시작하고, 20대 중반 쯤 되면 초현실적인 경력을 쌓게 된다. 남삭노이는 20대 후반에 은퇴했는데, 총 전적은 300전 280승 15패 5무였다. 그렇게 싸우면서 죽거나 다치거나 밀려나지 않는 기적이 허락된다면 라차담넌에 설 수 있다.
#. 3
그런 귀신들이랑 싸우라고? ‘Kidding me?’라고 받아쳐야 되는데, 영혼과 육신이 이원화되며 나의 뚫린 입은 이렇게 지껄인다. "I wanna fight." 오, 데카르트 선생. 영육이원론 ㅇㄱㄹㅇ?
그 순간, 한편으로는 라차담넌으로부터 불어 온 얼음폭풍이 나의 영혼을 펄럭이게 했고, 또 한편으로는 격분한 늘보가 뿜어내는 불꽃안광이 나의 혼백을 불사르고 있었다. 졸지에, 이게 왠 얼음과 불의 노래냐.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