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리구리
#. 1
그 분께서 나를 고소하셨다. 무려 ‘명예’훼손죄로.
미처 몰랐다. 그에게도 명예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또 내가 병아리 가슴털처럼 보송보송하니 소중한 당신의 그것을 그리도 무참하게 훼손하였다는 사실.
깊게 반성했다. 거의 없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였구나. 오히려 희소할수록 더욱 소중한 법이라는 것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구나. 그래, 한낱 반짝이는 돌덩어리인 다이아몬드는 무슨 효용이 있어 소중한가. 단지 희소할 뿐이다.
하여, 이 사태에 대한 나의 공식적 입장은 다음과 같다.
‘ㅋ..’
#. 2
물론 법원까지 갈 일은 없다. 하지만 시절의 하수상함과 근래 대한민국 사법체계의 신뢰성을 의심케 한 몇 몇 사건들을 고려해 봤을 때, 혹시 모르겠다 싶은 생각도 든다. 세계경제포럼(WEF)의 ‘2014년 국가경쟁력 평가’에 따르면 대한민국 사법부의 독립성은 82위, 아산정책연구원의 ‘기관 신뢰도 조사’에서는 총 11개 기관 중 10위에 불과하다. 단순히 상식과 법리만을 따질 수 없는 것이 오늘날 법조계의 현실이 아닌가.
만약(물론, 정말 만약에) 내가 법정에 서서 그분과 법리를 다투게 된다면, 사회와 후손들에게 보다 정의에 가까운 판례를 남겨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약간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돈 말이다.
사실 돈은 충분하다. 수입은 꾸준하고,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내 씀씀이야 뻔하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라면 가끔 마음에 드는 책을 사거나, 한 달에 한번 쯤 포카칩 파란색을 사먹는 정도. 하지만 님에게 드릴 돈은 없다. 차라리 강남 대로에 뿌리면 뿌렸지. 소송비용은커녕, 님과 관련해서 쓰는 전화비조차 아깝다. 따라서 소송비용을 지출하게 될 수 있다는 가정은 돈 개념이 박약한 편인 내게도 짜증이 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불로소득을 조금 만들어 보기로 했다. 썩 내키지는 않지만.
#. 3
마침, 작년 여름 현자를 만났다. 그는 낮에는 의료설비 수리공이고, 밤에는 투자가다. 낮의 동료들은 밤의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고, 밤의 동료들은 낮의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하였다. 좀 이상한 대신 그는 해박했다. 그리고 몇 푼 수익을 얻기보다 시장에 맞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을 즐기는 자였다. 공자왈, 명석한자는 즐기는 자를 따르지 못한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숫자의 흐름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그의 모습은 파도를 즐기는 서퍼같았다. 나는 영 쓸 곳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얘기를 새겨들었다. 대가에 대한 예의였다.
그가 알려준 코스톨라니 달걀 모델을 떠올리며, 금리의 변동상황을 스마트폰 창에 띄워놓고 오랜만에 주식 계좌를 열었다. 점심시간의 어느 커피숍이었다.
#. 4
사실, 돈은 땀 흘려 벌어야 제 맛이다. 노동의 신성성을 주장한 칼뱅의 견해를 지지한다. 뷔페에서 일하던 시절, 하얀 봉투에 주급으로 담아주는 빳빳한 만원짜리 지폐를 셀 때의 쾌감은 투자로 소득을 얻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계좌에서 계좌로 전기 신호로 흘러가는 돈에는 촉감도 냄새도 없다. 그건 사실 돈도 아니다. 내 재테크가 엉망인 건 아마 생각이 고리타분하기 때문인가보다. 달랑 CMA계좌 하나에 유흥비 축적 목적 비자금 계좌 하나 뿐. 그 흔한 적금조차 없다.
똥 얘긴 충분히 했으니, 돈 얘기나 더 해볼까.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돈 냄새부터 맡아야 한다. 최소한 내 지갑에서 나는 냄새는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세상의 돈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채권인가, 부동산인가, 예금인가, 주식시장인가. 아파트 값은 지지부진하고, 금리는 떨어져서 예금은 줄고, 그러니 가계대출은 산더미처럼 늘어나고. 채권은 뭐 늘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그렇다면 그나마 주식시장이라고 생각했다. 시장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자, 세계의 흐름을 보자.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는 돈을 풀어 호황을 급조했고, 다우지수는 신고가를 뚫고 치솟았다. 애플의 시가총액은 지구역사상 최고점을 갱신했다. 질세라 아베와 BOJ(Bank of Japan)는 돈을 풀어 엔화약세 흐름을 만들어냈고 수출 경쟁력을 확보해 장기불황을 타계할 계획이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ECB(European Central Bank)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유로존의 위기를 타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미국, 일본, 유럽, 각 국에서 소모되지 못한 눈먼 돈 들은 이제 더 높은 수익을 찾아 바다를 건넌다. 'emerging market'. 어디가 떠오르는 시장일까. 경상수지가 연속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내실있는 무역국. 대한민국.
유럽보다 조금 먼저 고유가로 막대한 돈을 빨아들이던 사우디와 북유럽, 텍사스의 유전은 갑작스럽게 저유가 기조로 돌아섰다. 셰일가스 산업을 견제하려는 사우디의 맹공에 전체 유가가 동조하여 하락하는 현상이었다. 작년 7월 100달러를 상회하던 두바이유가 올해 초 45달러까지 떨어졌다. 유가가 반토막이 나자 향후 100년간 대체에너지원으로 끄떡없다던 미국 셰일가스 업계는 석유와 경쟁할만한 생산단가를 맞추는데 실패했다. 세계 에너지 자원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사우디가 승기를 잡았다는 거다. 셰일가스 시추공 숫자는 석달만에 1930개에서 1670개까지 줄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줄어가고 있다. 당연히 화석연료가격은 폭락했다.
그럼 이 시간 한국의 철강업계는? 업계는 지금까지 '졸라 싼 한국의 산업전기'로 고로를 돌려왔다. 화석연료로 고로를 돌리는 해외 업체들에 맞서 그게 그들의 가진 가격 경쟁력의 핵심이었다. 경쟁력이 저하된데다 철광석 가격 하락의 악재까지 겹친 포스코의 시총은 전성기와 비교해 1/3토막. 불과 3년 전 고유가를 등에 업고 한국경제성장을 주도하던 자동차, 화학, 정유산업은 바닥을 알 수 없는 동반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그렇다면, 고유가와 함께 호황을 이루던 산업군은 과연 영원히 끝장인가. 나는 1929년, 1987년 미국 증시의 폭락장에서 기술적 반등움직임에 주목했다. 그 어려웠던 시대에도 주가는 때로 50%이상 반등하기도 했다. 유가도 반년이상 하락해온 스트레스가 분명히 존재하리라. 사우디를 제외한 대부분의 원유생산국도 셰일가스처럼 마진을 제대로 맞출 수 없는 위기상황에 당면했다. 러시아와 베네수엘라등 몇몇 산유국은 모라토리움 위기에 몰렸다. 푸틴의 인상이 험악해지고, 정치적 압력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때마침 중국이 하루 1800만 배럴씩 전략비축유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유가의 수급현황을 보다가 확신했다. 유가는 단기 반등한다. 나는 유가 하락분을 감안하고도 저평가 되어있던 철강업계의 관련주를 샀고, 역시나 유가의 60달러 가까이 반등했다. 쏠쏠한 수익이었다.
금융업을 볼까? 회사가치에 정확히 들어맞는 적정주가가 존재하며, 실제 주가라는 시계추가 적정주가의 왼편과 오른편을 왕복하며 차트가 성장한다고 가정한다면 몇몇 대형 금융주는 그 동안의 악재로 저평가 상황이었다. 대형 우량주의 가격 복원력과, 그 회사가 당면한 몇 가지 상황을 고려했을 때, 투자메리트는 충분했다. 역시 짭짤했다. 물론, 제약과 바이오 주도 괜찮은 수익을 올려줬다. 불과 며칠 전 얘기다.
한은은 돈을 풀기 위해 금리를 내려대는 미국, 유럽, 일본과 통화전쟁을 벌이며 역시 몇 년간 지속적으로 금리를 내려왔다. 저금리를 이기지 못한 국내 자본은 돈 냄새를 맡고 은행에서 이탈하고 있다. 이머징마켓 중 경상수지가 건전한 국가를 찾아헤메던 미국발 돈들과, 은행에서 이탈한 한국의 돈들은 코스닥으로 모여들었고, 코스피는 오랫만에 600선을 깨고 솟아올랐다. 한 쪽을 누르면 다른 한 쪽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금융과 차, 화, 정에 몰려 있던 돈이 기술, 제약, 바이오, 헬스케어로 이동하는 형국이다. PER값이 높은 성장주들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시장의 포텐셜은 그 이상이다. 박스권에서 숨죽이고 있던 주식시장에 르네상스가 찾아왔다. 기가 막히는 타이밍이었다.
세상이 좋아져서 손바닥만한 스마트 폰 터치 한 번에 수십개의 세계 경제지표가 뜬다. 개인투자자들이 더 이상 기관투자자들에게 정보력으로 밀릴 이유가 없다. 이 참에 전업할까.
#. 5
..라고는 했지만. 사실, 소경이 코끼리 만지는 격이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부터 세계경기가 침체기에 접어드는 상황을 검색해 보며 알게 됐다. 나는 결국 시장을 이길 수 없겠구나. 내 성격으로는 그 수많은 변수에 언제까지나 관심을 갖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시장은 언제나 친절하지 않고, 위기는 언제나 '도둑처럼 온다.' 매일 잠들기 전에 경제학이나 투자관련 서적만 읽을 수도 없다. 세상에, 오로지 차트로 구성된 꿈을 꾸다니. 역시 나는 점심시간엔 투자보단 산책을 하는 편이 더 행복하다.
지금 경기를 어떤 파동으로 해석해야 할까. 지금의 코스피는 혹은 코스닥은 엘리어트 파동(의미 없지만 영감은 준다.)의 어떤 단계에 와 있을까, 추세는 어떻게 이어질까. 갠이라면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볼린저 밴드를 'KB금융' 차트에 적용했을 때 이동평균선이 밴드를 이탈할 확률은? 이런 건 몇 퍼센트 운영마진으로 대신 고민해주는 펀드 매니저들이 쌔고 쌨다. 아무래도 경제학 근처에도 못 가본 나보단 낫겠지.
나는 지난 몇 달간 데이 트레이더였고, 스윙 트레이더였고, 중기 투자자였고, 가치투자자였고, 모멘텀 투자자였고, 추세 추종자였고, 역발상 투자자였다. 바꿔 말하면 제대로 된 투자철학 하나 없이 낭인무사같은 드잡이질로 근근히 이겨온 셈이다. 다만 운이 좋았다.
많이는 아니라도 충분히 벌었고, 윤리적으로 옳은 일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곧 관둘 생각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시장을 극복하도록 도와준 피터 린치와 벤자민 그레이엄, 박경철과 최준철, 최진기, 홍춘욱, 장하준, 김늘보에게 감사한다. 모두 경제와 투자 분야의 대가들이다. 또, 내가 며칠 밤을 새도 못 할 분석들 대신해 준 ‘광대한 네트’의 분석가들에도 감사한다. 명예로운 '그 분'에게도 돈은 못 드려도 감사한 마음만은 전한다. 저를 귀찮게 해 주신 만큼 조만간 뜨거운 격려의 채찍질로 화답해 드릴 생각이다. 엉덩이가 뜨거울 때, 무릎 걸음으로라도 '진보'하시길. 10년이 넘도록 그 모양 그 꼴인 당신 인생도 이제 좀 나아져야지.
#. 6
얼마 전, 오래 미루던 유니세프 정기 기부를 하게 됐다. 사실 타 단체에 기부를 고려중이었는데마침 길에서 유니세프 청년을 만나고 만 것이다. 호주에서 궁핍하게 살던 시절 매몰차게 기부를 거부했던 심정적 빚을 청산해야 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계좌번호를 적고 말았다.
마음이 어찌나 홀가분한지. 사인을 하고 나니까 아저씨가 그랬다.
“마음이 따뜻한 분의 손, 제가 한번 잡아 봐도 되겠습니까.”
어우 참, 아저씨 오글거려여. 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는 어머나, 내 차가운 손을 덥썩 잡았다.
그 동안 미안했어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내 돈 펑펑 써 주세요.
주머니도 두둑해졌고, 기부금액을 늘릴 생각이다. 이것도 모두 당신 덕분이다. 히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