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는데 루리가 들이닥쳐서는 침대 허리께를 엉덩이로 콱 누르고 걸터앉았다.

 

“뭐야.”

 

"머리카락 좀 움켜쥐어도 돼?"

 

이미 손이 내 머리께로 곰실거리면서 다가오고 있었고, 조금만 지체하면 물고문이라도 당하는 독립투사의 몰골이 될 참이었다.

 

"안 돼."

 

"도대체 되는 게 뭐야."

 

뭐지, 이 무법자는.

 


#. 2

 

또 루리가 쳐들어왔다. 체육센터에서 수영을 배우기로 했는데 등록을 해 달라고 했다. 본인 랩탑에 공인인증서가 없다는 이유다.

 

그렇다면 컴퓨터에 없다는 공인인증서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카드를 사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각종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긴 했으나 마치 비둘기의 것 같이 반짝거리는 루리의 눈알은 이미 어떤 반문조차 거부하고 있었다. 체육센터 홈페이지에 강습료를 결제해주자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건넨다. 그래, 고쟁이에서 꺼내 준게 아니라 다행이다.

 

그러고 보니 루리가 수영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너 수영 할 수 있어?"

 

"응."

 

"몇 미터나 갈 수 있는데?"

 

"끝없이."
 
.. 끝없이.. 누구냐.. 넌!

 


#. 3

 

초등학교 때 일이다. 미개한 시절이었다. 토요일 수업이 있었고, 대통령은 김영삼이었다. 나는 사학년 이었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루리를 만나서 함께 집으로 걸어오곤 했다. 오는 길엔 큰 공원이 있었는데 잔디도 넓고 길이 좋았다. 

 

공원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멀리 벤치에서 중년 남자가 우리를 불렀다. 낯설었으나 나는 천진해서 루리를 데리고 그리로 갔다. 발치까지 가서 수줍게 서자 그는 더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들여다보자 그의 무릎 사이에 뭔가 하얗고 굵직한 것이 있었고. 그는 그걸 손으로 쥐고 위로 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아무리 고개를 갸웃거려도 도대체 그게 뭔지,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는 거다. 그래서 오래 그러고 서 있었다.

 

차츰 고여가는 침묵이 천진함의 밑바닥을 들출 때 까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이해보다 빠른 것은 공포였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달음박질 쳤다.

 

얼마나 달렸을까.

 

비로소 생각났다. 아차, 루리가 아직도 거기에 서 있다는 것이 말이다.  


 

#. 4

 

천명관의 ‘고래’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먼지를 닦는 일’이라고. 내 인생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아서 먼지가 잘 쌓이는 편이었다. 그래서, 위에 상술한 그 만큼. 혹은 그보다 더 지저분한 기억을 여럿 갖고 있다.

 

대체로 그 기억들은 그 모든 것과 맞서려고 했던 나의 지난 시간들과, 이 밤의 불면에 빨판상어처럼 달라붙어서 고개를 흔들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 종류다. 척추가 부러져 우는 그 녀석의 눈물, 뭉개진 손가락을 들고 소리 조차 못 지르고 서 있던 그 녀석의 표정. 닦아내는 데 서투른 나는 그렇게 온갖 것을 머릿속에 넣고 사는데, 유독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있다.

 

그 때, 루리는 나에게 뭐라고 말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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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6 00: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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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6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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