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이 대세다. 웹툰이 떠들썩한가 싶더니, 누적 판매부수가 백만부가 넘는다는 얘기가 돌았다. 요즘엔 아예 드라마로 나와서 밤마다 직장인들 혼을 쏙쏙 뽑아가는 모양이다. 죄다 미생 얘기다.
듣자하니 '未生'은 살지도, 죽지도 못한 바둑판의 대마를 얘기한단다. 나는 미생이라는 단어를 여섯 살 때부터 알았지만 의미가 이렇듯 금즉하게 다가온 적은 없는 것 같다. 그건 살얼음판 같은 회사놀음 속에서 속 끓는 비정규직의 삶이겠다. 혹은 집, 회사, 집, 회사를 반복하며 사는 것 같지도, 죽은 것 같지도 않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겠다.
반딧불이를 잡아 유리병에 꽉 채우면 가까스로 책 종이의 글자를 구분할만한 빛이 모인다고 한다. 아까 얼핏 보니까, 유리로 뒤덮인 잠실의 고층 빌딩마다 불빛이 훤하다. 얼마나 많은 직장인 녀석들이 그 속에서 파닥거리고 있을까.
으 추워, 이 엄동설한에 아직도 퇴근하지 못한 친구 B를 생각하며 시를 한 수 적는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서로 사귄 직장동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긴다.
사랑과 그리움에는 괴로움이 따르는 법.
연정에서 근심 걱정이 생기는 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숲속,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 다니듯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서로 다투는 업무적 견해를 초월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도달하여
도를 얻은 사람은
'나는 지혜를 얻었으니
이제는 상사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없어!'라고 말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동료들과의 유희나 잡담
혹은 회식의 유혹에 젖지 말고
관심도 가지지 말라.
꾸밈없이 칼퇴 사유를 말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물속의 고기가 그물을 찢듯이
한번 불타버린 곳에는
다시 불이 붙지 않듯이
모든 번뇌의 매듭을 끊어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퇴근시간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 정진하고
야근의 유혹을 물리치고
평판에 연연하지 말며
용맹정진하여 몸의 힘과 지혜의 힘을 갖추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이빨이 억세고 뭇짐승의 왕인 사자가
다른 짐승을 제압하듯이
궁벽한 곳에 원룸이라도 마련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자비와 고요와 동정과 해탈과 기쁨을
적당한 때에 따라 익히고
모든 세상을 저버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탐욕과 혐오와 헤맴을 버리고
속박을 끊어 일자리를 잃어도 두려워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퇴근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