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재론’과 독일적인 ‘정신’의 부활?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유물론)과 호응하듯이 독일에서도 실재론적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철학자가 마르쿠스 가브리엘입니다. 1980년에 태어나 아직 30대지만 현재 본대학교 교수이며, 발표한 저서도 숱하게 많아서 종종 ‘천재’로 평가받죠.

2013년에 출판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가 철학서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가브리엘의 재능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 책은 굳이 따지자면 전문서라기보다 일반 독자 대상이라서 신실재론이 아주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은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문제점은 ‘구성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성주의’의 원천은 메이야수와 마찬가지로 칸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를 그 자체로 알기란 불가능하다.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알려고 해도 어떤 면에서 인간에 의해 늘 가공된다고 생각했다.

가브리엘은 클라이스트의 ‘녹색 안경’(미디어·기술론적 전환에서 이미 설명했죠)의 예를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구성주의는 칸트의 ‘녹색 안경’을 믿는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이 덧붙여 설명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 하나의 안경이 아니라 수많은 안경이다. 과학, 정치, 사랑의 언어게임, 시, 다양한 자연언어, 사회적인 규약 같은.

가브리엘은 이런 포스트모던적 구성주의를 대신해 신실재론을 제창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실재론은 어떤 사상일까요? 먼저 가브리엘이 제시한 구체적 예를 들어보죠. 그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아스트리드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소렌토에서 베수비오산을 보고 있다면, 우리(당신과 나)는 나폴리에서 베수비오산을 보고 있다.

먼저 구실재론(가브리엘은 형이상학이라고도 부릅니다)에 따르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베수비오산뿐입니다. 이 산이 어느 때는 소렌토에서, 또 어느 때는 나폴리에서 우연히 보이는 것뿐입니다. 구성주의 입장에서는 세 가지 대상, 즉 ‘아스트리드가 보는 베수비오산’ ‘당신이 보는 베수비오산’ ‘내가 보는 베수비오산’만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대상과 사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가브리엘이 말하는 신실재론에서는 적어도 네 가지 대상이 존재합니다. ① 베수비오산, ② 소렌토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아스트리드의 관점), ③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당신의 관점), ④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나의 관점)입니다. 그는 이 모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죠. 나아가 "화산을 볼 때 느끼는 나의 은밀한 감각조차 사실이다"라고 서술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구실재론은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를, 구성주의는 ‘보는 사람의 세계’만을 각각 현실로 간주합니다. 반면에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신실재론을 정당화합니다. "세계는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도 아니고 보는 사람만 있는 세계도 아니다. 이것이 신실재론이다."

이렇게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물리적 대상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사상’ ‘마음’ ‘감정’ ‘신념’, 나아가 유니콘 같은 ‘공상’마저도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실재론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가브리엘은 이처럼 존재하는 대상을 확장함으로써 무엇을 의도했을까요?

2015년 출판한 《나는 뇌가 아니다》라는 책 제목이 답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 책에서 가브리엘은 정신을 뇌에 환원하는 듯한 현대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비판했죠. 자연주의에 따르면 물리적 사물이나 그 과정만 존재하고 그 밖의 것은 독자적 의미가 없습니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이런 움직임에 맞서, 근본적 차원에서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려 했습니다.

신실재론을 말할 때 우리는 어쩌면 과학적 대상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연주의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구상하는 신실재론은 과학적 우주만이 아니라 마음(정신)의 고유한 움직임까지 긍정합니다. - P55

결과를 전부 생각한 뒤 움직이려 들면 인간도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무엇이 목적과 관련된 중요한 결과인지도 확신할 수 없죠. 인간은 단순히 프레임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탓에 ①번에서처럼 폭파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그런데 인공지능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프레임 문제에 빠지지 않고(해결이 아니라)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빅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어서죠. 자율주행 자동차 실용화를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요? - P101

최근의 기술적 유행으로서 IoT, 즉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급속도로 도입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거치지 않고 사물끼리 통신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자율주행을 생각해봅시다. GPS와 레이더와 카메라에서 얻는 모든 정보는 인간을 거치지 않고 자동차로 직접 전달됩니다. 이런 IoT는 가전 분야에 차츰 침투하고 있죠. 이 변화를 새로운 산업혁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혁명의 발전 여부는 자율형 인공지능에 달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율형 인공지능은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이런 의문에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름 붙인 ‘계몽의 변증법’(1947)이라는 개념이 힌트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지인 미국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집필하고 근대사회의 미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드러냈습니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가는 대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지는 것일까?

‘계몽’이란 인간을 무지몽매한 미신에서 벗어나게 한 ‘합리적 이성’을 뜻합니다. 근대과학과 근대시민사회와 자본주의경제도 이런 계몽에서 탄생했죠.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이런 합리적 계몽은 머지않아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반(反)계몽인 신화와 폭력으로 전환됩니다. 그들은 나치주의와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반계몽으로 보았습니다.

계몽에서 반계몽으로 가는 변증법은 인공지능의 미래를 생각할 때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갖도록 제작되었는데, 이제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지능을 크게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으로부터 자립하여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대항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아이, 로봇》에 나오는 로봇 3원칙은 지금까지 공상과학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앞에 닥친 미래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제1조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조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그 명령이 제1조를 위배하는 경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제3조 로봇은 앞서 제1조 및 제2조를 위배할 위험이 없는 한,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 P107

이 책에 실린 논고 <부디 클론 인간을 처벌하지 말아 주세요>에서 펜스는 과거의 편견과 싸우기는 쉽지만 "현재의 편견과 싸우기는 쉽지 않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과거의 편견이던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지금 이 시점에서 비판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 P126

하지만 통상적인 친자관계와 비교했을 때, 복제 인간이 그렇게나 다른 것일까요? 통상적인 부모자식 사이에도 물려받은 유전정보가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줍니다. 또 복제 인간으로 태어나도 성장하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독자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복제 인간은 노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복제 인간의 무엇이 문제인 걸까요?

복제 인간에게 탄생의 소여성(所與性: 주어진 바)은 어떤 우연적 상황이 아닌 의도적 행위의 결과다. 다른 사람에게는 우연한 사건이지만 복제 기술은 타인에게 책임을 돌릴 여지를 남긴다. 이용 불가능한 영역으로의 의도적인 개입이 귀책 가능성과 함께 도덕적·법적으로 중요한 구별을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인 친자라면 아이가 유전 프로그램을 물려받아도 그것이 우연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복제 인간은 처음부터 타인이 그에게 어떤 유전 프로그램을 물려줄지 결정합니다. 즉, 하버마스는 타인이 관여하느냐 마느냐가 결정적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설계자와 그 산물의 관계와 유사하며, 둘 사이에 인간관계의 대칭성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하버마스는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복제 인간을 포함해 인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논거가 바로 다음의 구절입니다.

우연에 의해 이루어져온 종의 진화가 유전자공학이 개입할 수 있는 분야가 되면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행위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생활세계에서는 확실하게 구별되었던 ‘만들어진 존재’와 ‘자연스럽게 탄생한 존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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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발리스는 낭만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평범한 것에 높은 의미를, 일상의 것에 신비로운 겉모습을, 잘 아는 것에 모르는 것의 품위를, 유한한 것에 무한한 모습을 주어서 나는 그것을 낭만화한다.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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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을까? - 샐리 앤 테스트

마음의 이론은 특히 다섯 살 이하 어린이들에게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샐리 앤 테스트’라고 불리는 간단한 테스트로 확인해볼 수 있다. 간단한 상황을 그린 만화를 보여주고 그 상황에 대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는지 보면 된다.

샐리와 앤이라는 두 명의 아이가 각각 바구니를 가지고 있다. 샐리에게는 구슬이 하나 있다. 앤이 보는 앞에서 샐 리가 이 구슬을 자신의 바구니에 넣는다. 그리고 샐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샐 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앤은 샐리의 바구니에 있던 구슬을 꺼내 자기 바구니에 넣는다. 잠시 후 샐 리가 다시 돌아온다. 샐리는 구슬을 어느 바구니에서 꺼낼까?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당연히 자기 바구니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샐리는 앤이 구슬을 옮겨 놓은 것을 모르니까.

아주 쉽고 간단한 것 같지만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샐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은 나와 별개로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샐 리가 앤의 바구니에서 구슬을 꺼낼 거라고 답할 것이다. 샐리는 앤이 구슬을 옮긴 사실을 모르지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슬이 앤의 바구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대답을 한다면 앤의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게 맞다.

실제로 다섯 살이 안 된 어린아이들이나 자폐 증세가 있는 사람 대부분이 이 같은 대답을 한다. 이들에게서는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뇌 영역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 또 자폐 증세가 있는 사람 다수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나와 독립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 P230

사랑=성적 욕망?

성적 욕망을 느끼는 대상을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적 욕망을 전혀 느끼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과 성적 욕망은 완전히 똑같은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낭만적인 사랑, 정신적인 사랑과 성적 욕망이 어떻게 다른지, 그 둘을 구분하려 시도한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현실 세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또 반대로 성적 욕망을 느끼는 대상과 사랑에 빠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가족 간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느끼는 감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또 연인 사이라고 해서 성적 욕망을 매 순간 느끼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도 서로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일종의 ‘애착관계’라고 볼 수 있다. 사람을 비롯한 동물들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고,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상대를 찾게 된다. 그리고 그 대상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나에게 의지하게 하고, 내가 보호하고 안정감을 주는 대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표적인 관계가 바로 부모와 자식이다. 이런 애착관계에서는 ‘옥시토신’이라는 호르몬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과학자들은 연인 사이에서 순수하게 정신적이고 낭만적인 사랑이 특별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인과, 알고 지낸 기간이나 친밀함을 느끼는 정도가 비슷한 이성인 친구의 사진을 보여주고 뇌의 활성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두 경우에 대해 뇌에서 활성화되는 영역과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났다.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뇌 활성도를 측정하기 전에 설문조사에 응했다. 피험자의 응답에서 그들이 자신이 연인의 사진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성적 욕망이라기보다 정신적인 사랑의 감정인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이 실험에서 확인한 뇌의 반응은 성적 욕망보다 사랑의 감정을 느낄 때 반응하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시각 영역과 크게 관계가 없었다. 활성화된 영역 중에는 사회적 관계에서 행복함을 느낄 때 활성화된다고 알려진 전대상피질이 있었다. 또 좌뇌의 섬이랑이 활성화되었는데, 섬이랑에서 보통 느낀다고 알려진 혐오감은 앞쪽 부분이 관여하며 여기서는 익숙하지 않은 얼굴에서 매력을 느낄 때 활성화된다고 알려진 뒤쪽 부분이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슬픔이나 우울함과 관계된 것으로 알려진 전전두피질의 오른쪽 중앙 부분과 두려움, 부정적인 감정과 관계된 것으로 알려진 편도체의 뒤쪽 영역은 반대로 그 활성도가 떨어졌다. 전전두피질 영역은 특히 두부자기자극장치(쓴. 머리 표면에 자기장을 발생시킬 수 있는 유도 장치를 대어 뇌에 간접적으로 자극을 가하는 장치)를 통해 인공적으로 억제해주면 우울증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잘 알려져 있기도 한 영역이다.(왜 전전두피질을 활성화해야 한다는 김주환교수 주장이랑 다르지?)

이 연구에서 관측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 활성화되는 영역은 다른 감정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에 비해 매우 좁은 영역이었으며, 함께 활성화되는 영역 간의 연결이 매우 견고하게 보였다. 어쩌면 진짜 ‘사랑의 회로’가 뇌에 존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적 욕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 활성화된 영역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아, 정신적 사랑과 구분됨을 보여주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볼 때 활성화된 영역의 근처 영역이 일부 활성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 P238

회고절정

사람의 기억은 5세부터 남는다고들 한다. 0세부터 5세까지 있었던 일은 어른이 된 뒤에 기억에 거의 남지 않는다. 그럼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시기는 언제일까?

나이가 든 뒤 과거를 회상해보면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일이 가장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이 시기의 기억이 특별히 선명하게 자주 떠오르는 것을 ‘회고절정’ 현상이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생애 첫 경험을 하기 때문에 기억이 강렬하게 생성될 것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자아형성에 중요한 시기여서 더 기억에 남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인간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이 믿고 있는 자아상에 부합하는 행동과 말을 하려고 더욱 노력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뇌가 인식하고 있는 나의 모습과 실제 관찰하는 나의 모습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인간 사회에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아상이 형성되는 시기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고, 이 시기에 했던 경험들이 내가 믿고 있는 자아상과 부합하는 경우가 많아 점점 강한 기억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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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는 이런 과거 시험의 전통을 언제 잃어버린 걸까요? 바로 식민지 시기입니다. 우리나라는 운이 없게도 식민지 시절에 근대 교육이 정착됐습니다. 식민 교육의 특징이 뭘까요? 당시 일본인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조선을 통치하고 있는데, 조선인들에게도 무언가 가르치기는 해야겠지요. 그런데 조선인들이 교육을 받은 결과 자기의 생각, 자기의 사상, 자기의 아이디어, 이런 것을 발전시키면 어떻게 될까요? 큰일 날 일입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가장 위험한 일이지요. 그래서 일본은 조선 사람들에게 ‘정답’이 이미 존재하는 것만 가르칩니다. 정답이 이미 존재하는 것만 물어보고요. 우리가 그런 교육을 100년쯤 지속해 온 겁니다. 해방 이후에 미국으로부터 사지선다의 객관식 시험 형식이 수입되면서 이것이 더욱 심해지지요. - P26

그럼 본격적으로 4차 산업 혁명 이야기를 해 보죠. 요즘 모두들 알파고와 4차 산업 혁명 이야기를 해 대서 저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이 종종 들어옵니다. 그러면 저는 우선 4차 산업 혁명을 지나치게 ‘기술’ 수준에서 이해하려 하지 말라고 말씀드려요. 그냥 몇 가지 들은 풍월, 그러니까 인공 지능과 사물 인터넷과 빅 데이터 등등이 큰 변화를 일으킨다는 정도로 알면 됩니다. 왜냐고요? 기술이 어떤 방향과 속도로 진화할지는 어차피 전문가들도 잘 예측하지 못하거든요. - P60

저는 복지가 많을수록 좋다는 식의 담론에 대해 상당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어요. 복지는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그 모든 것이 똑같이 중요할까요? 우선순위가 있을 거예요. 그럼 가장 중요한 복지는 뭘까요? 저는 세 가지라고 보는데 첫 번째가 고용 보험이에요. 내가 회사에서 잘리거나, 회사가 망해서 실직 상태가 되어도 상당 기간 생활비가 보장된다면 여유 있게 이것저것 알아보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울 수도 있지요. 특히 새로운 직업을 위해 뭔가를 배울 기회를 갖는 것은 산업의 수준을 높이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복지는 최저 생계 보장입니다. 우리나라엔 가난한 노인들이 엄청 많아요. 노인 빈곤율이 40%가 넘는데, 오이시디(OECD)에서 2위를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리는 1위입니다. 세 번째가 보육인데 이건 우리나라 출산율이 1.1에서 1.2 사이, 사실상 전 세계 꼴찌임을 감안하면 정말 중요합니다. - P65

스웨덴은 대학 진학률, 그러니까 고등학교 졸업 후 1~2년 안에 대학에 가는 비율이 한국의 절반을 좀 넘는 수준인데, 성인 중에서 대학 교육을 이수한 사람의 비율은 한국하고 비슷해요. 좀 오래된 통계이긴 하지만 2006년 기준으로 스웨덴 30대(30~39세) 전체 인구 중 13%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40대 이상 인구 중 3%가 대학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한참 뒤에 재교육 차원에서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대학을 꼭 고등학교를 나온 뒤에 바로 가야 할까요? 유럽 나라들처럼 직장 생활을 먼저 하다가, 혹은 전공을 바꾸고 싶을 때 대학을 다니면 안 되는 걸까요? - P66

자기 주도 학습은 네 단계로 되어 있어요. 학습의 목표 설정, 수단 선택, 실행, 평가. 이 네 가지를 모두 자기 주도적으로 하는 게 바로 자기 주도 학습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대부분 목표 설정을 자신이 하지 않았어요. ‘중간고사 100점’이라는 목표를 갖고 달리는 것은 자기 주도 학습이 아닙니다. 자기 관리 학습이지요.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엄마 관리 학습’보다는 훨씬 좋아요. 그리고 자기 관리 학습도 쉽지 않아요. 자기 관리 학습을 정의해 보자면 ‘자기 성찰을 통한 체계적 복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도 쉬운 건 아니죠. 하지만 자기 관리 학습은 ‘목표 설정’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자기 주도 학습’과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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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는 용기가 필요한 거다.

아버지의 나직한 말이 금간 허공에 새겨졌다. 나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순 없는 거다.

그 말은 여전히 우스꽝스러웠다. ‘속인다’는 동사와 ‘자신을’이라는 목적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속일 수 ‘없다’고 했겠지만, 감히 그 두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그 두 단어를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연결했고, 이음새조차도 깨끗이 봉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나에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약한 구역질이 치밀어올랐으나, 그것이 유난히 따가운 가을 햇볕 때문인지, 졸음결에 먹은 점심 때문인지, 금간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부서진 세계 때문인지 나는 아무래도 확신할 수 없었다. - P67

외가의 선산까지 나는 영정을 들고 갔다. 햇빛이 좋은 날이었다. 외삼촌의 관 위로 흙삽이 부어졌을 때 아버지는 눈가에 번쩍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나는 마치 낯선 이물질을 보듯 그 눈물을 올려다보았다. 눈물 역시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임을 그때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놀랄 필요는 없었다. 이미 내 유년은 끝난 지 오래였다. - P74

그러나, (나를) 가리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것인가? 침묵하면 그만 아닌가. 손을 멈추고 있으면 그만 아닌가. 보여주면서도 집요하게 숨기고자 한다는 것은 어떤 모순인가. - P90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들도 언젠가는 병이나 죽음, 혹은 이익과 체면이 걸린 사소한 문제 앞에서 치명적인 약한 면들을 드러내고 만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안쓰러워 보일 만큼 속물적이던 이들도 어느 순간에 이르러 자신만의 고귀한 면모를 드러내는 걸 목격하기도 했지. - P96

오랜 버릇대로, 나는 반사적으로 중립적인 대답을 했다.

"글쎄."

L의 눈의 광채가 실망의 빛과 함께 사그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좀더 성의 있는 대답을 해야 했다. 나는 입술을 열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아니겠지."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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