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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와 여론의 괴리 현상
다시 의제설정 이야기로 돌아가자. 언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데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할지 모르지만, 언론이 무엇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데엔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며, 이는 독자나 시청자의 지적 능력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작동하는 힘이라는 건 인정하는 게 좋겠다.
‘konstar‘는 정정훈의 칼럼이 아니었더라면, 이와 같은 장문의 댓글을 달진 않았을 게다. 그 내용이 무엇이건 ‘konstar‘로 하여금 종편의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 그 힘, 그게 바로 의제설정 파워다. 어떤 생각을 하건 주로 무엇에 대해 생각하느냐 하는 건 이념 ·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언론이 모든 정치사회적 갈등 요소를 배제하고 긍정과 낙관 일변도의 의제 중심으로 보도하고 논평한다면, 아무래도 정치사회적 갈등에 대해 생각할 기회는 줄어들 것이고, 이는 기존 체제와 현상 유지에 기여할 가능성을 높이지 않겠는가? (중략)
‘투표와 여론의 괴리 현상‘은 대통령 선거 시의 투표 행위는 그 어떤 시대정신이라거나 큰 정치적 바람에 의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언론의 영향력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반면, 대선 후의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상적 여론은 언론의 영향력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괴리 현상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괴리 현상은 한국 신문 시장은 보수의 목소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현실과 맞물려 있다. 쉽게 말하자면, 김대중이나 노무현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대부분도 신문은 보수 신문을 구독한다는 것이다.
투표와 여론의 괴리 현상을 극복하기 어려운 이유는 한국인의 독특한 이중 심리 구조를 웅변해주고 있다. 한국인은 물질적 삶과 정신적 삶에서 상호 융합하기 어려운 2개의 각기 다른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 물질적 삶은 박정희식의 개발독재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다. 반면 정신적 삶은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거부하며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패러다임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한국 사회 도처에 그런 모순이 널려 있다. 정치 · 경제는 곧잘 극우 노선을 걸으면서도 문화 · 학술에선 좌파 노선을 걷기도 하는 보수 신문의 분열증은 같은 분열증을 앓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투표 · 여론 괴리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해보는 것이 어렵겠지만, 이런 가정을 한번 해보자. 보수 신문의 색깔에 맞는 사람만 보수 신문을 이용하고 구독함으로써 ‘투표와 여론의 괴리 현상‘을 극복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재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분열과 증오‘가 크게 약화될 것이다. 피차 너그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무턱대고 남의 것을 탐하진 않지만, 자신이 누려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누리지 못할 땐 분노한다. 정권도 보수 신문의 색깔에 맞는 사람들만 그 신문을 본다면 보수 신문 탓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보수 신문도 자기 분수를 알고 조금은 더 겸허해질 것이다.
바꿔 말해서 신문 시장이 투표 결과를 대체적으로 반영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정치세력화되지 않은 중간파 신문들이 가장 많은 발행부수를 갖고 있고 정파지들이 그 좌우에 비슷한 규모로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그려봐도 좋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정쟁은 일어나겠지만, 정쟁이 극단으로 치닫거나 정쟁의 악순환이 발생하는 건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공정한 심판관이 있고 싸우는 양쪽 모두 부당하다거나 억울하다는 느낌은 갖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건 누가 옳고 그른 문제를 떠나, 어떤 성향과 취향을 가진 사람에게나, 모두를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이다. 이 문제의 본질은 ‘과대평가‘와 ‘과소평가‘의 부작용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신문의 몰락‘을 몰고온 디지털 혁명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다시 의제설정 문제로 돌아가자. 이게 손석희표 저널리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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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벨라 안드레(아마존에서 직접 E-book 형태로 로맨스 소설 시리즈를 발표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책은 빨리빨리 나와요. 내 아이디어에 대해 먼저 에이전시를 설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난 독자가 원하는 책을 바로 쓸 수 있습니다. 나는 곧 나의 독자인 셈이죠." "나는 곧 나의 독자"라는 말은 "나는 곧 나의 유권자"라는 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이 말은 진정한 정치가, 즉 자신의 관점을 고수하면서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 나름의 비전으로 유권자를 한발 앞서 가는 정치가의 소멸을 의미한다. 정치적인 시간으로서의 미래는 사라져간다. - P139

"부단한 미디어의 관찰 때문에, 우리[정치가들]에게는 도발적이고 인기 없는 주제나 입장에 관해 비공개 석상에서 터놓고 토론할 자유도 없어졌어요. 그런 얘기를 했다가는 반드시 누가 그걸 언론에 알릴 거라고 보면 됩니다." - P141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경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청난 소음을 만들어냅니다." 정신의 매체는 고요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고요를 파괴한다. 커뮤니케이션의 소음을 만들어내는 디지털 매체의 가산적 특징은 정신의 걸음걸이와는 거리가 멀다. - P143

20세기 초에 독일의 말 한 마리가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계산 능력이 있다는 이 말은 "영리한 한스"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간단한 계산 문제에 한스는 발굽이나 머리로 정확한 답을 제시했다. "3 더하기 5는 몇?" 이라고 물으면 녀석은 발굽을 여덟 번 두드렸다. 이 신기한 사태를 해명하기 위해 과학자들로 구성된 위원회까지 동원되었으며, 여기에는 철학자도 한 명 참여했다고 한다. 위원회는 이 말에게 계산 능력이 없음을 발견했다. 다만 녀석은 마주하고 있는 인간의 얼굴 표정이나 몸짓에 나타나는 아주 미세한 뉘앙스를 해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정적인 발굽 소리 직전에 청중이 무의식적으로 긴장된 자세가 되는 것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녀석은 이러한 긴장 상태의 느낌을 따라 발굽 두드리기를 멈추었고, 그런 식으로 항상 올바른 답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 P144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편리함 때문에 우리는 점차 진짜 인간과의 직접적인 접촉, 실재와의 접촉 자체를 피하게 된다. 디지털 매체로 인해 진짜 상대방을 마주하는 일은 점점 더 드물어진다. 디지털 매체는 실재를 저항으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점점 몸과 얼굴을 잃어버린다. 디지털은 라캉이 말한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의 삼원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한다. 디지털은 실재계를 해체하고 모든 것을 상상계로 만든다. 스마트폰은 유아기 이후에 거울 단계를 새롭게 재생시키는 디지털 거울로 기능한다. 스마트폰은 내가 나를 품는 나르시시즘적 공간, 상상적인 것의 영역을 열어준다. 스마트폰을 통해 말을 건네오는 것은 타자가 아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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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정치‘가 ‘사랑‘을 압도하는 시대이다. 우리는 누가 적이고 누가 동지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자리를 잡으려고 노심초사하고 있다. 자리를 잘못 잡으면, 불행이 찾아오리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삶은 결코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줄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과 권력의 감언이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이 생계와 생존만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 결과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게 된 것 아닐까? 대립과 갈등이 심화될 때,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려고 드는 것이 바로 자본과 권력의 생리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우리 시대 자본과 권력이야말로 우리가 사랑과 공존의 지혜를 포기하도록 만든 주범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치‘의 길이 아닌 ‘사랑‘의 길도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아닐까? 그만큼 우리는 비속해졌고, 갈수록 약육강식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분명 사랑의 길은 엄청난 고행을 예약하는 길이다. 이성복 시인도 말하지 않았던가? "입으로 먹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것은 생리이며, 결코 인간적이라 할 수 없다. 그에 반해 사랑은 항문으로 먹고 입으로 배설하는 방식에 숙달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비록 힘들지만 사랑을 통해 ‘적과 동지‘라는 해묵은 대립과 갈등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 P276

기독교도들은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을 자주 언급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말이 가진 혁명적인 힘을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육신을 낳아준 아버지보다 우리의 영혼을 창조한 하느님이 진정한 아버지라는 선언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가족, 민족, 인종이란 육체적 구별을 넘어서 모든 인간을 유일한 아버지의 피조물로 볼 수 있었다. 바로 여기에 기독교가 지역 종교가 아니라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던 비밀이 있다. 이제야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이 함축하는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유대인을 지배했던 로마인마저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이다.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란 민족적 구별을 넘어서지 않았다면, 예수가 어떻게 이런 가르침을 선포할 수 있었겠는가? 유대인 입장에서 로마인은 원수지만, 하느님의 시선에서는 유대인이나 로마인이나 모두 자신의 피조물, 즉 자식들에 지나지 않는다. - P279

세 명의 자식을 둔 어느 아버지가 있다. 불행히도 막내 아이는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몸이 성하지 않다. 아버지는 세 명의 자식 중 누구에게 가장 애정을 기울일 것인가? 당연히 막내 아이일 것이다. 몸이 성한 나머지 두 자식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그들은 막내 동생을 사랑하고 돌볼 때 아버지가 가장 흡족해하리라는 것, 그리고 오직 그럴 때에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제 아버지를 ‘하느님=아버지‘로 확장해보자. 기독교도들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당연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이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노동자들일 것이다. 물론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가부장제 사회라면 남성보다는 여성들을 더 아끼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 P280

어느 고등학교에서 인문학과 관련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의 말미에 어떤 여학생이 내게 물어보았다. "선생님. 이상과 현실은 타협할 수 있는 것인가요?" 잠시 숙고하다가 나는 그 학생에게 말했다. "이상과 현실의 타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현실이란 급류, 그러니까 모든 것을 휩쓸어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압도적인 강물과 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이런 급류 속에 있는 겁니다. 그럼 이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건 여러분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나무토막 같은 겁니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그 나무토막을 강바닥에 박고 버텨야만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급류의 힘이 너무 강해 질질 끌려가기 쉬울 겁니다. 그렇지만 강바닥에 박은 나무토막이 없다면, 우리는 급류의 힘에 저항할 수도 없을 겁니다." - P284

사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주체‘라는 말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살았다"는 표현은 인간에게 부여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일 수 있다. 이것은 역으로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보여준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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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은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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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일은 남의 고통을 ‘고치겠다고‘ 덤벼들지 않는 일, 그냥 그 사람의 신비와 고통의 가장자리에서 공손하게 가만히 서 있는 일이다. 그렇게 서 있다 보면 자신이 쓸모없고 무력하다는 느낌이 든다. 바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이 이런 느낌을 갖고 있는 것이다. - P122

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누군가 ‘저 바깥에‘ 있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방법을 수천 가지나 찾아낸다. - P154

"만약 당신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다면 그 안으로 뛰어드세요!" - P160

왜 사람들은 위압적이고 험난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나려 하느냐고? 왜냐하면 자기가 처한 내적인 상황에서 빠져 나올 방법이 그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차라리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P160

그늘을 드리우는 첫 번째 괴물은 자기 정체성과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이다. 많은 리더들이 외향적인 성향을 갖고 있어서 이 그늘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외향성은 때로 자기 불신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발전되기도 한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아니면 단지 그 문제를 피하기 위해 외적 활동으로 뛰어든다. 이것은 특히 남성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증후군으로 나타난다.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어떤 외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다 그 역할을 빼앗기면 우울증에 빠지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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