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실재론’과 독일적인 ‘정신’의 부활?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유물론)과 호응하듯이 독일에서도 실재론적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철학자가 마르쿠스 가브리엘입니다. 1980년에 태어나 아직 30대지만 현재 본대학교 교수이며, 발표한 저서도 숱하게 많아서 종종 ‘천재’로 평가받죠.

2013년에 출판된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가 철학서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며 가브리엘의 재능을 널리 알렸습니다. 이 책은 굳이 따지자면 전문서라기보다 일반 독자 대상이라서 신실재론이 아주 간결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브리엘은 신실재론은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의 문제점은 ‘구성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구성주의’의 원천은 메이야수와 마찬가지로 칸트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칸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세계를 그 자체로 알기란 불가능하다. 칸트는 우리가 무엇을 알려고 해도 어떤 면에서 인간에 의해 늘 가공된다고 생각했다.

가브리엘은 클라이스트의 ‘녹색 안경’(미디어·기술론적 전환에서 이미 설명했죠)의 예를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구성주의는 칸트의 ‘녹색 안경’을 믿는다.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음과 같이 덧붙여 설명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단 하나의 안경이 아니라 수많은 안경이다. 과학, 정치, 사랑의 언어게임, 시, 다양한 자연언어, 사회적인 규약 같은.

가브리엘은 이런 포스트모던적 구성주의를 대신해 신실재론을 제창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실재론은 어떤 사상일까요? 먼저 가브리엘이 제시한 구체적 예를 들어보죠. 그는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제시했습니다.

아스트리드라는 이름의 한 여성이 소렌토에서 베수비오산을 보고 있다면, 우리(당신과 나)는 나폴리에서 베수비오산을 보고 있다.

먼저 구실재론(가브리엘은 형이상학이라고도 부릅니다)에 따르면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베수비오산뿐입니다. 이 산이 어느 때는 소렌토에서, 또 어느 때는 나폴리에서 우연히 보이는 것뿐입니다. 구성주의 입장에서는 세 가지 대상, 즉 ‘아스트리드가 보는 베수비오산’ ‘당신이 보는 베수비오산’ ‘내가 보는 베수비오산’만 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대상과 사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가브리엘이 말하는 신실재론에서는 적어도 네 가지 대상이 존재합니다. ① 베수비오산, ② 소렌토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아스트리드의 관점), ③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당신의 관점), ④ 나폴리에서 보이는 베수비오산(나의 관점)입니다. 그는 이 모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죠. 나아가 "화산을 볼 때 느끼는 나의 은밀한 감각조차 사실이다"라고 서술했습니다.

가브리엘에 따르면 구실재론은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를, 구성주의는 ‘보는 사람의 세계’만을 각각 현실로 간주합니다. 반면에 가브리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며 신실재론을 정당화합니다. "세계는 보는 사람이 없는 세계도 아니고 보는 사람만 있는 세계도 아니다. 이것이 신실재론이다."

이렇게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물리적 대상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사상’ ‘마음’ ‘감정’ ‘신념’, 나아가 유니콘 같은 ‘공상’마저도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실재론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가브리엘은 이처럼 존재하는 대상을 확장함으로써 무엇을 의도했을까요?

2015년 출판한 《나는 뇌가 아니다》라는 책 제목이 답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이 책에서 가브리엘은 정신을 뇌에 환원하는 듯한 현대의 자연주의적 경향을 비판했죠. 자연주의에 따르면 물리적 사물이나 그 과정만 존재하고 그 밖의 것은 독자적 의미가 없습니다. 가브리엘의 신실재론은 이런 움직임에 맞서, 근본적 차원에서 존재를 다시 생각해보려 했습니다.

신실재론을 말할 때 우리는 어쩌면 과학적 대상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연주의를 떠올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가브리엘이 구상하는 신실재론은 과학적 우주만이 아니라 마음(정신)의 고유한 움직임까지 긍정합니다. - P55

결과를 전부 생각한 뒤 움직이려 들면 인간도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무엇이 목적과 관련된 중요한 결과인지도 확신할 수 없죠. 인간은 단순히 프레임 문제에 구애받지 않고 행동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탓에 ①번에서처럼 폭파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그런데 인공지능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프레임 문제에 빠지지 않고(해결이 아니라)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빅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어서죠. 자율주행 자동차 실용화를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요? - P101

최근의 기술적 유행으로서 IoT, 즉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이 급속도로 도입되고 있습니다. 인간을 거치지 않고 사물끼리 통신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자율주행을 생각해봅시다. GPS와 레이더와 카메라에서 얻는 모든 정보는 인간을 거치지 않고 자동차로 직접 전달됩니다. 이런 IoT는 가전 분야에 차츰 침투하고 있죠. 이 변화를 새로운 산업혁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혁명의 발전 여부는 자율형 인공지능에 달린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율형 인공지능은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요? 이런 의문에는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이름 붙인 ‘계몽의 변증법’(1947)이라는 개념이 힌트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망명지인 미국에서 《계몽의 변증법》을 집필하고 근대사회의 미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드러냈습니다.

왜 인류는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가는 대신 새로운 종류의 야만 상태에 빠지는 것일까?

‘계몽’이란 인간을 무지몽매한 미신에서 벗어나게 한 ‘합리적 이성’을 뜻합니다. 근대과학과 근대시민사회와 자본주의경제도 이런 계몽에서 탄생했죠.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이런 합리적 계몽은 머지않아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반(反)계몽인 신화와 폭력으로 전환됩니다. 그들은 나치주의와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를 반계몽으로 보았습니다.

계몽에서 반계몽으로 가는 변증법은 인공지능의 미래를 생각할 때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은 인간에 버금가는 지능을 갖도록 제작되었는데, 이제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율적으로 학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인간의 지능을 크게 뛰어넘으려고 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으로부터 자립하여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인간에게 대항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아이, 로봇》에 나오는 로봇 3원칙은 지금까지 공상과학으로만 존재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눈앞에 닥친 미래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제1조 로봇은 인간에게 위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조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단, 그 명령이 제1조를 위배하는 경우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제3조 로봇은 앞서 제1조 및 제2조를 위배할 위험이 없는 한, 자기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 P107

이 책에 실린 논고 <부디 클론 인간을 처벌하지 말아 주세요>에서 펜스는 과거의 편견과 싸우기는 쉽지만 "현재의 편견과 싸우기는 쉽지 않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실제로 과거의 편견이던 인종차별과 여성차별을 지금 이 시점에서 비판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 P126

하지만 통상적인 친자관계와 비교했을 때, 복제 인간이 그렇게나 다른 것일까요? 통상적인 부모자식 사이에도 물려받은 유전정보가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줍니다. 또 복제 인간으로 태어나도 성장하면 부모에게서 독립해 독자적인 인생을 살게 될 겁니다. 복제 인간은 노예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복제 인간의 무엇이 문제인 걸까요?

복제 인간에게 탄생의 소여성(所與性: 주어진 바)은 어떤 우연적 상황이 아닌 의도적 행위의 결과다. 다른 사람에게는 우연한 사건이지만 복제 기술은 타인에게 책임을 돌릴 여지를 남긴다. 이용 불가능한 영역으로의 의도적인 개입이 귀책 가능성과 함께 도덕적·법적으로 중요한 구별을 만드는 것이다.

일반적인 친자라면 아이가 유전 프로그램을 물려받아도 그것이 우연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복제 인간은 처음부터 타인이 그에게 어떤 유전 프로그램을 물려줄지 결정합니다. 즉, 하버마스는 타인이 관여하느냐 마느냐가 결정적 차이를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하자면 설계자와 그 산물의 관계와 유사하며, 둘 사이에 인간관계의 대칭성 조건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하버마스는 《인간이라는 자연의 미래》에서 복제 인간을 포함해 인간에 대한 유전자 조작을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논거가 바로 다음의 구절입니다.

우연에 의해 이루어져온 종의 진화가 유전자공학이 개입할 수 있는 분야가 되면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행위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생활세계에서는 확실하게 구별되었던 ‘만들어진 존재’와 ‘자연스럽게 탄생한 존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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