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는 용기가 필요한 거다.
아버지의 나직한 말이 금간 허공에 새겨졌다. 나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순 없는 거다.
그 말은 여전히 우스꽝스러웠다. ‘속인다’는 동사와 ‘자신을’이라는 목적어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속일 수 ‘없다’고 했겠지만, 감히 그 두 단어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그에게 의심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그 두 단어를 그렇게 자신의 내면에서 연결했고, 이음새조차도 깨끗이 봉해 흔적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을 나에게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미약한 구역질이 치밀어올랐으나, 그것이 유난히 따가운 가을 햇볕 때문인지, 졸음결에 먹은 점심 때문인지, 금간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부서진 세계 때문인지 나는 아무래도 확신할 수 없었다. - P67
외가의 선산까지 나는 영정을 들고 갔다. 햇빛이 좋은 날이었다. 외삼촌의 관 위로 흙삽이 부어졌을 때 아버지는 눈가에 번쩍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나는 마치 낯선 이물질을 보듯 그 눈물을 올려다보았다. 눈물 역시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임을 그때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놀랄 필요는 없었다. 이미 내 유년은 끝난 지 오래였다. - P74
그러나, (나를) 가리려 한다면 무엇 때문에 작품을 제작하는 것인가? 침묵하면 그만 아닌가. 손을 멈추고 있으면 그만 아닌가. 보여주면서도 집요하게 숨기고자 한다는 것은 어떤 모순인가. - P90
아무리 위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이들도 언젠가는 병이나 죽음, 혹은 이익과 체면이 걸린 사소한 문제 앞에서 치명적인 약한 면들을 드러내고 만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안쓰러워 보일 만큼 속물적이던 이들도 어느 순간에 이르러 자신만의 고귀한 면모를 드러내는 걸 목격하기도 했지. - P96
오랜 버릇대로, 나는 반사적으로 중립적인 대답을 했다.
"글쎄."
L의 눈의 광채가 실망의 빛과 함께 사그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좀더 성의 있는 대답을 해야 했다. 나는 입술을 열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마 아니겠지." - P1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