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핑턴이 스마트폰 충전에 주목한 것은 탁월한 통찰이다. 성인 중 95퍼센트가 잠들기 전에 빛을 발산하는 전자 기기를 사용하고 절반 이상이 밤새도록 이메일을 확인한다. 18세에서 64세 사이의 성인 60퍼센트가 스마트폰을 옆에 두고 잠자리에 든다. 이 때문에 성인 중 50퍼센트는 늘 기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잠을 설친다고 말한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수면의 질이 점점 나빠졌는데 특히 지난 20년 동안 저하 폭이 두드러졌다. 전자 기기가 발산하는 푸르스름한 빛이 주범 중 하나다.
지난 수천 년 동안 푸른빛은 오직 낮에만 존재했다. 촛불과 장작불은 적황빛을 띠었고 밤에는 인공조명도 없었다. 이런 불빛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우리 뇌는 붉은빛을 잠자리에 들 신호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푸른빛은 얘기가 다르다. 푸른빛은 아침을 알린다. 따라서 성인 중 95퍼센트는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날이 밝았다고 몸에 신호를 보냄으로써 밤을 아침이라고 착각하는 시차증을 야기한다.
우리 뇌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솔방울샘은 밤에 멜라토닌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멜라토닌은 졸음을 유발하는데 그래서 시차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 멜라토닌을 섭취한다. 푸른빛이 안구 뒤쪽을 자극하면 솔방울샘은 멜라토닌 분비를 멈추고 몸은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한다. - P93

베리지의 견해는 중독이 그토록 흔히 재발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심지어 중독자가 자신의 삶을 파괴한 마약을 증오하게 되더라도 뇌는 계속해서 마약을 절실히 원한다. 마약이 과거에 심리적 욕구를 해소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 갈망이 여전히 남아 있다.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이유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을 증오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가져다주는 행복감을 잊지 못하고 자꾸 새로 고침 버튼을 누른다. 최근의 한 연구에 따르면 연인 사이의 밀고 당기기도 똑같은 효과를 낳는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는 호감은 덜하지만 더 강렬한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상대에게 더 매료된다. - P113

중독에 관한 진실은 우리가 지닌 많은 직관에 의문을 던진다. 위험한 마약과 짝사랑에 빠지는 주체는 몸이 아니라 특정 물질이나 행위를 심리적 고통의 완화와 연관시키도록 학습하는 정신이다. 실제로 중독은 사랑에 빠지는 행위가 아니다. 켄트 베리지가 증명했듯이 모든 중독자는 자신이 중독된 대상을 절실히 원하지만 그 대상을 좋아하는 이는 별로 없다. 아이작 바이스버그, 앤드루 로런스의 파킨슨병 환자들, 34번 쥐 모두에게 중독은 그 대상이 지닌 매력이 사그라진 뒤에도 계속되었다. - P114

책 밖 세상에서조차 목표는 점점 더 벗어나기 힘들어졌다. 인터넷 때문에 사람들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목표를 접하고, 웨어러블 기기 덕분에 목표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갔는지 손쉽게 자동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는 달성할 목표를 자기가 직접 세우거나 찾아나서야 했다. 그런데 이제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새로 달성해야 할 목표가 이메일로 전달되거나 화면에 불쑥 나타난다. 몇 시간, 심지어 며칠이고 그런 이메일을 열어 보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새 메일이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확인하지 않고 못 배기며 이 때문에 생산성이 떨어지고 정신 건강마저 해친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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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년 전에 미국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중심으로 생각, 감정, 행동의 사회전염 현상을 다룬 책이다. 이는 나로 하여금 영화 <아바타>에서 나오는 "Everything is connected" 라는 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본문 중, 2015년 세계 행복의 날(3월 20일)을 맞아 유엔이 선정했다는 World's Happiest Playlist가 눈길을 끌었다. 책에는 최종 선정 목록이 나와 있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해서 선정된 6곡의 목록을 찾아 보았다.





<UN World's Happiest Playlist>(2015)


1. ‘I Got You (I Feel Good)’/ James Brown and His Family (1964)



2. ‘Kiss’/ Prince and The Revolution (1986)



3. ‘Three Little Birds’/ Bob Marley and the Wailers (1977)



4. ‘(Your Love Keeps Lifting Me) Higher and Higher/ Jackie Wilson (1967)



5. ‘Independent Women Pt. 1’/ Destiny’s Child (2000)



6. ‘Made to Love’/ John Legend (2013)


행복이라는 전염병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규정화가 필요하다. 감정을 정의하는 방식은 대체로 주관적이다. 어떤 사람들은 유쾌한 기분, 낙천주의, 탐닉의 차원에서 행복을 이야기한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행복은 감정의 중추인 대뇌변연계가 보내는 신호에 불과하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이르기를 "행복해지고 싶으면 도덕적이고 권력에 책임을 져야 하며 또 사회정의의 짐을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했다. 요컨대, 행복은 노력해서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행복은 갈망의 대상이며 그 수준은 개인 성격에 따라 다르다. 보다 현대적인 견해로는 신경학자이자 정신과의사인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이 행복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행복을 확산하려면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신보다 더 위대한 상대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경우든 얼마다 행복에 민감한지 여부는 철저히 우연적 요인에 따른다. - P237

감정은 사회망을 통해 움직이며 행복은 그 자체로 유쾌한 고통이다. 행복은 전 세계 6,000개의 언어 중 어느 것보다 쉽게 이해가 된다. 이웃이 행복하면 우리가 행복할 기회는 30에서 40퍼센트 증가한다. 일정한 사회망에 행복한 사람이 있을 경우 다른 사람에게 전염될 가능성은 9퍼센트 증가한다.
행복은 또한 우울증의 만병통치약일 수 있다. 우울증 전염과 행복 전염의 가장 큰 차이라면, 이 집요하고도 뿌리 깊은 슬픔의 감정은 자체의 메커니즘으로 확산을 통제한다는 점이다. 행복과 달리 우울증은 대인기피증을 유발하고 사회관계망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미국 청소년-성인 건강 장기 연구National Longitudinal Study of Adolescent to Adult Health」는 미국 고등학생 2,000명을 조사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건강하고 행복한 친구가 다섯 명 이상 있을 경우 6개월에서 12개월 내에 우울증을 극복할 가능성이 두 배가 된다. - P237

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매혹적인 점은 행복이 이별의 세 단계까지 확산된다는 사실이다. 목표와 탐욕처럼 행복은 부지불식간에 서로 전염되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상대라 해도 얼마든지 옮을 수 있다. 최초 감염자가 옆 사람에게 행복을 전할 확률은 25퍼센트이며 옆 사람은 다시 10퍼센트 수준으로 친구에게 행복을 옮길 수 있다. 이제 친구들도 6퍼센트 수준에서 타인에게 행복을 전파할 수 있다. - P238

감정이 야심에 자리를 양보하면 사회전염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한다. 그런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행복의 여건을 조성하고 부정적 감정 효과를 상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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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8-06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행복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산의 정상에 올라가 멋진 경치를 내려다보는 기쁨을 느끼려면 올라가는 수고 - 노력을 해야 하는 거지요.
행복뿐만 아니라 우울도 전염되고 가치관. 선호하는 책 등 많은 것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인간의 상호작용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어요.
알라딘에서도 사람들 간에 전염 효과가 큰 편이라고 봐요 **^^

검색하셔서 찾으신 6곡. 그 정성에 감사드리며 잘 듣겠습니다.

베텔게우스 2021-08-06 16:16   좋아요 1 | URL
네 정말 그렇습니다. ‘행복 바이러스‘ 같은 은유적 표현은 종종 접해 보았었는데, 어쩌면 실제 바이러스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가 아닌가 합니다..
노력해서 행복해지면 내가 좋고, 또 그것이 이웃에게까지 전파 된다면 정말 남는 장사 아닐지. 최선을 다해 행복해져야겠습니다. 하하

제 작은 수고를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요즘 자주 듣고 있는데요. 즐거운 감상 되세요 ~//
 

자기 돌봄은 삶의 목적을 이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세계적인 선승 조안 할리팩스Joan Halifax는 자신의 저서 『가장자리에 서서』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죽음이 임박한 사람들을 오랜 시간 돌보며 내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저 나 자신부터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낮잠을 자고, 등산을 하며, 책을 읽고, 명상을 하는 시간이 간절했다. 무엇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한없이 늘어져 있고 싶었다. 모든 것에 정지 버튼을 누른 채 재충전할 시간이 필요했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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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야. 나오코도 모를 거야. 그건 두 사람이 앞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결정할 일이 아닐까 싶어. 그렇잖아?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지. 서로를 잘 이해한다면. 그 일이 옳은지 아닌지는 그다음에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 P204

나는 거의 얼굴도 들지 않고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따름이었다. 내 눈에 비친 것은 무한히 이어지는 수렁뿐이었다. 오른발을 내딛고 왼발을 들어 올리고 다시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도 없었다. 다만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 없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따름이었다. - P461

만약에 반대로 미도리가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어딘가로 이사를 가 버린 채 삼 주나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난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나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것도 꽤 깊은 상처를. 왜냐하면 우리는 연인은 아니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그 이상으로 친밀하게 서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그것도 소중한 상대의 마음에 모르는 새 상처를 주었다니,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 P473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나는 몇 번 고개를 젓고 미도리 얼굴을 보았다. "내 머리가 나쁘기 때문일 테지만, 때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어."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 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그거 철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정말이야. 나는 경험적으로 배웠어." 미도리는 말했다. - P488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성실하다면 누구도 미궁 속에 버려지지 않아요. 자신감을 가져요.
내 충고는 아주 간단해요. 먼저, 당신이 미도리라는 사람에게 강하게 이끌린다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거예요. 그 사랑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질지 아니면 잘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사랑이란 원래가 그런 거니까.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죠. 난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도 성실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해요. - P520

날씨 좋은 날 노를 저어 호수로 나아가 하늘도 푸르고 호수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고뇌하지 마요. 가만 내버려 두어도 흘러가야 할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러갈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니. 좀 잘난 체를 할게요. 와타나베도 인생의 그런 모습을 이제 슬슬 배울 때가 되었어요. 당신은 때로 인생을 너무 자기 방식에만 맞추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 게 싫다면 마음을 조금 열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멋진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정말이에요, 이거! 그러니 더 많이많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요.
물론 나는 당신과 나오코가 해피 엔딩을 맞지 못했다는 게 애석해요. 그러나 뭐가 옳은지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그 누구의 눈길도 의식하지 말고, 이러면 행복해질 것 같다 싶으면 그 기회를 잡고 행복해져요.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 번 아니면 세 번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돼요. - P522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오로지 홀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하루 그것만 붙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위스키 몇 병을 비우고 빵을 씹고 수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카락에 모래를 묻히며 배낭을 맨 채 초가을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 - P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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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란, 외롭지 않았던 적이 있는 자만이 두려워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 P52

펀칭볼은 승민의 눈높이에 있었다. 눈앞에 있었다. 크기는 어린애 머리만 했다. 나는 펀칭볼의 의미를 해석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해석하지 않는다고 의미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달력을 보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그 새삼스러운 진리를 승민이 일깨워주었다. - P225

난 꼭지가 돌아버렸어. 꺼지라고 밀쳐내고, 세상을 다 태워버리고 나도 타버릴 거라고 악을 썼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될 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내게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줬느냐고, 차라리 몰랐으면 좋지 않았느냐고 울부짖었어. 그러긴 했지만 사실은 잘 알고 있었어. 대장이 내게 비행을 가르친 이유가 뭔지. 세상에는 불놀이보다 더 근사한 일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던 거야. 어떻게든 실명 시기를 늦춰주고 싶었을 거야. 그래서 도시락 통을 들고 코렐을 잡으러 다녔을 거야. 자기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놈을 위해서. - P285

불쑥 불편한 마음이 앞에 나섰다. 벼랑 끝에 몰린 주제에 존재 운운하는 허풍쟁이가 아니꼬워서. 허풍쟁이를 아니꼬워하는 내가 초라해서.
"난 잘 모르겠다. 너로 존재하는 순간이 남은 인생과 맞바꿀 만큼 대단한 건지."
"넌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삶은? 죽음은?"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숨을 아끼라는 충고 한번 했다고 해서 인류가 수천 년을 고민해온 거창한 두통거리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다니. 그것도 한꺼번에 세 가지나.
"난 순간과 인생을 맞바꾸려는 게 아냐. 내 시간 속에 나로 존재하는 것, 그게 나한테는 삶이야. 나는 살고 싶어. 살고 싶어서, 죽는 게 무서워서, 살려고 애쓰고 있어. 그뿐이야." - P286

우울한 세탁부는 조금 망설이는 듯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미스 리 선생님은 왜 안 가?"
나? 어리둥절했다. 당황스러웠다. 이 남자는 왜 내가 가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나로선 그런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내겐 도망쳐서 도달해야 할 만큼 절실한 세상이 없었다.
"나한테 공부도 가르쳐주고, 승민이 탈출하는 거 도와주다 번번이 궁지에 몰리면서, 자기한테는 왜 아무것도 안 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웃으면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무안했다. 제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만 넓은 놈이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나 미스 리 선생님 좋아해. 정말로. 주제넘은 말이지만 선생님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짠하고. 그러면서도 참 이상스러웠어. 이런 사람이 이런 데서 왜 이러고 사나. 그래서 원주에 시험 치러 갈 때 최기훈 선생한테 물어봤어. 미스 리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병이냐고. 도망치는 병이라고 그러대. 그땐 최 선생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어. 그저 무식한 놈 소견으로 그러고 말았지. 자꾸 병원에서 도망쳐서 아버지가 이 산골짝에 가둔 거구나. 내가 거꾸로 생각했다는 걸, 이제 확실히 알겠어."
우울한 세탁부의 다음 말은 통렬하게 가슴을 찔렀다.
"세상에서 도망치는 병이야. 자기한테서도 도망치는 병이고. 그렇지?" - P290

"종일 창가에 서서 무슨 생각을 하세요?"라고 묻는 간호대학생을 만난 적이 있다. 로뎀 병원에서였다. 내 옆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꿈을 꿔요. 창문은 통로죠. 희망은 아편이고요."
해석하면 이런 말이었다.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퇴원을 꿈꾸고, 퇴원하는 날부터 퇴원을 꿈꿀 수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사람들이 병원 규칙에 열심히 순응하는 것은 퇴원, 혹은 자유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갈망의 궁극에는 삶의 복원이라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를 얻어 세상에 돌아가면 희망 대신 하나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것 말고는 세상 속에서 이룰 것이 없다는 진실. 그리하여 병원 창가에서 세상을 내다보며 꿈꾸던 희망이 세상 속 진실보다 달콤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기억의 땅으로 남을 뿐이다. 옛날, 옛날, 내가 한때 그쪽에 살았을 때 일인데.......
나도 그 허망한 악순환을 수없이 거듭해왔다. 그 사이 저쪽과 이쪽을 연결하던 다리는 너덜너덜하게 닳아 외줄이 돼 있었다. 그걸 딛고 다시 저쪽으로 건너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죽을 때까지 이쪽에서 지내는 것도 싫었다. 그저 벼랑 끝에서 닳아빠진 외줄을 만지작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 놔버릴 미래의 어느 날을 두려워하면서.
뜬눈으로 밤을 보냈다. 누가 그랬던가. 물에 빠진 자의 눈에는 일생이 지나간다고. 우울한 세탁부는 나를 물에 빠뜨렸다. 스물다섯 해가 눈앞을 지나갔다. 기억들이 끝없이 흘러가고 되돌아왔다. 세월 저편에서 건너온 소년이 뜻 모를 말을 되풀이했다.
"내 탓이 아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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