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야. 나오코도 모를 거야. 그건 두 사람이 앞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결정할 일이 아닐까 싶어. 그렇잖아? 설령 무슨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지. 서로를 잘 이해한다면. 그 일이 옳은지 아닌지는 그다음에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 P204
나는 거의 얼굴도 들지 않고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따름이었다. 내 눈에 비친 것은 무한히 이어지는 수렁뿐이었다. 오른발을 내딛고 왼발을 들어 올리고 다시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확신도 없었다. 다만 어디로든 가지 않을 수 없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따름이었다. - P461
만약에 반대로 미도리가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어딘가로 이사를 가 버린 채 삼 주나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난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나는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것도 꽤 깊은 상처를. 왜냐하면 우리는 연인은 아니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그 이상으로 친밀하게 서로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그것도 소중한 상대의 마음에 모르는 새 상처를 주었다니, 정말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 P473
"인생이란 비스킷 깡통이라 생각하면 돼." 나는 몇 번 고개를 젓고 미도리 얼굴을 보았다. "내 머리가 나쁘기 때문일 테지만, 때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갈 때가 있어."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 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그거 철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정말이야. 나는 경험적으로 배웠어." 미도리는 말했다. - P488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해서는 안 돼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고, 그 애정이 성실하다면 누구도 미궁 속에 버려지지 않아요. 자신감을 가져요. 내 충고는 아주 간단해요. 먼저, 당신이 미도리라는 사람에게 강하게 이끌린다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거예요. 그 사랑이 순조롭게 잘 이루어질지 아니면 잘 이루어지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에요. 사랑이란 원래가 그런 거니까. 사랑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죠. 난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도 성실의 또 다른 형태가 아닐까 해요. - P520
날씨 좋은 날 노를 저어 호수로 나아가 하늘도 푸르고 호수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거나 다름없어요. 고뇌하지 마요. 가만 내버려 두어도 흘러가야 할 곳으로 자연스럽게 흐러갈 것이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사람에게 상처를 주어야 할 때는 상처를 주게 되는 법이니. 좀 잘난 체를 할게요. 와타나베도 인생의 그런 모습을 이제 슬슬 배울 때가 되었어요. 당신은 때로 인생을 너무 자기 방식에만 맞추려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정신 병원에 들어가는 게 싫다면 마음을 조금 열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요. 나처럼 무력하고 불완전한 여자도 때로는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멋진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거든요. 정말이에요, 이거! 그러니 더 많이많이 행복해져요. 행복해지려고 노력해요. 물론 나는 당신과 나오코가 해피 엔딩을 맞지 못했다는 게 애석해요. 그러나 뭐가 옳은지 그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 그 누구의 눈길도 의식하지 말고, 이러면 행복해질 것 같다 싶으면 그 기회를 잡고 행복해져요. 경험적으로 볼 때 그런 기회란 인생에 두 번 아니면 세 번밖에 없고, 그것을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돼요. - P522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오로지 홀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하루하루 그것만 붙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위스키 몇 병을 비우고 빵을 씹고 수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카락에 모래를 묻히며 배낭을 맨 채 초가을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 - P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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