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구원
임경선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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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 작가의 책이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패싱 했을 작가였다. 나는 이 작가에 나는 무척이나 인색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책은 고작 두 권 읽었다. 그중 <태도에 관하여>를 읽었을 때 느꼈던 부정적인 충격이 아직도 선연하다. 내 인생에 실망은 있었을지언정, 실패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을 근거로 나의 직립된 가치관은 빛을 발했다. 내가 잘난 줄 알고 지냈다. 2015년 가을 전까지는. 그리고 2015년 가을부터는 나는 세상에 대한 모든 회의를 지니게 되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것을 상실했고, 그로 인해 내가 가지고 있던 가치관이 전부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그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그때 느꼈던 그 괴리감,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글을 쓰는 것이 그 사람의 일이라면, 그 글을 읽고 판단하는 것은 오롯한 내 일이었다. 그 판단에 오류가 있든 없든, 어쨌든 읽히라고 쓴 글이 아니던가. 이 사람은 어떤 일에 대해 실패를 해본 적 없겠고, 중요한 것을 ‘상실’ 해본 적도 없는 사람이겠다. 그렇기에 가치관이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사람이겠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사물과 현상에 대해 타인이 받을 상처는 생각 않고 확실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겠구나. 솔직함을 가장한 무례함이 있다는 것을, 그의 글을 읽고 처음 느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내가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구나. 이 사람의 글을 읽어내는 것이, 내게는 나의 상실을 극대화하는 것이겠구나. 그럼 이만 안녕.하고 돌아섰다.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때와 같은 느낌이 들면 당장 덮어버리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야 나는 책장을 펼칠 수 있었다. 그는 부모님을 여의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있었다. 현실에 숨이 턱턱 막혀올 때 생각난 곳이 있었으니, 그곳은 리스본이었다. 열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살던 곳을, 그때 자신의 나이와 꼭 닮아있는 딸과 함께 떠났다. 올리브 나무의 암녹색을 떠올리게 한다는 리스본에.

그런데 읽을수록 나는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난을 하거나 책망하거나 힐난하는 눈초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글을 쓸 때에 유약해진 탓에 퍽 감상에 젖어 그런 걸까, 둥근 돌을 매만지는 기분이었다.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상냥해진다는데, 행복이 전부였던 시간을 보냈던 그곳에 나의 모든 것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이와 함께 있으니 더욱 그렇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게 다정한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본다. 늘 달랐다. 어떤 시기에는 기차 플랫폼이었고, 어떤 시기에는 계절마다 나무색이 다르게 비치는 호수였으며, 어떤 시기에는 지는 해를 볼 수 있는 다리(

)이기도 했다. 이것은 내가 생활하는 곳이 매번 달라지는 까닭이다. 그것 외에 더 확실하고 명확하게 나를 위무해준 것은 포르투갈의 호카곶이었다. 가감 없이 행복했던 때를 기억해내라고 하면 단연 몇 시간 남짓의 그곳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에서 뭘 한 것도 아니었는데, 힘들어죽을 것 같은 날에는 그때를 떠올렸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공기, 그날의 햇빛, 그날의 감정, 그날의 나, 그리고 당신, 우리. 하나도 잊을 수 없다. 그렇기에 다시 갈 생각은 (아직까지는) 없다. 그때의 행복을 꽁꽁 잠그고 원하는 때에 들여다보고 싶다. 그날의 날것들을 다시 느낄 리 만무하므로. 나에게 호카곶은 그날의 호카곶으로도 충분하다. 그때를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처음 느껴보았는데, 그런 행복감을 느낄 날이 앞으로도 종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덧.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면서 이번 책의 다정함 때문에 혹여라도 내가 이전 작()을 오해했나 싶어 부러 찾아 펼쳐들어 중간 페이지부터 읽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리며 책을 꽂아두었다. 그럼 그렇지. 책의 서두에 쓰셨던 것처럼, <위대한 개츠비>의 "누구를 비판하고 싶어질 땐 세상 사람들이 다 너처럼 좋은 조건을 타고난 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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