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챌린지 블루 ㅣ 창비교육 성장소설 1
이희영 지음 / 창비교육 / 2022년 6월
평점 :
바림이라는 이름이 한글이 아닐까 했는데 정말이네. 그것도 미술에서 말하는 말이었다니. 바림이 넌 그림을 좋아할 수밖에 없었겠어. 그걸 생각하고 네 이름을 바림이라 지은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너를 만든 작가는 생각했겠지. 그림, 난 그림을 잘 못 그려.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 어린이는 누구나 여기저기 낙서를 한다고 하는데 다 그럴까. 어쩐지 난 그러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해. 어렴풋이 생각나는 어린 나는 노래를 지어서 부른 거야. 다른 건 생각 안 나도 그건 기억하다니. 노래 하는 거 좋아하기는 했어. 그뿐이야. 그걸 죽 해야지 하지도 않고, 초등학생 때는 합창부 연습 오래 하는 거 무척 싫었어. 바림이 넌 친구 해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미술학원에 다녀서 너도 다녔구나. 해미는 그만뒀지만 넌 미술을 죽 했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고등학교 때는 입시미술을 하고. 그저 그림이 좋아서 그리는 것과 입시미술은 많이 다를 것 같아. 난 노래를 죽 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어. 그저 음악을 좋아했지만, 별 재능도 없고 피아노도 잠깐만 배우고 말았어. 더 배우고 싶었는데. 더 배웠다 해도 고등학생 때 그쪽으로 가야지 하지 않았을 것 같아.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은 중요하겠지. 곧 고등학교 3학년이 되니 말이야. 해미가 편의점에 함께 가자고 했지만, 처음에 넌 가지 않는다고 했다가 조금 뒤 해미를 뒤따라갔어. 눈이 와서 미끄러운 길을 걸어야 했는데, 넌 슬리퍼를 운동화로 갈아 신지도 않고 나갔지. 그러다 미끄러지고 손을 다치고 말았구나. 날마다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넌 손을 다쳐서 두주 동안 손가락을 움직이면 안 되었어. 그런 일이 일어나면 걱정도 하겠지만, 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았구나.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돼서 그랬겠지. 넌 엄마한테 시골, 할머니가 살았고 지금은 이모가 사는 곳에 가겠다고 했구나. 겨울방학 제대로 보내고 싶다고. 어쩌면 그건 충동스럽게 말한 거였겠지만, 너한테 경진은 어린 시절 기억이 있는 곳이었어. 어릴 때라고 해도 거기에 오래 산 건 아니었군. 초등학교 1학년 때 여름방학을 보냈지. 그 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한번도 가지 않았어. 할머니가 살아 있었다면 가끔 갔을지도 모를 텐데.
이모는 네 마음을 조금 알아주더구나. 그런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야. 사람이 다른 사람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해도 그대로 받아들여주기만 해도 좋은데.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정말 쓸쓸해. 이런 말을 하다니. 바림이 넌 무척 심각하게 생각했는데, 난 그런 널 보고 이제 열아홉살인데 벌써 다 산 듯하다니 하는 생각을 했어. 사람은 어떤 걸 하면 시간과 돈을 쓴 게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 쉽게 그만두지 못해. 지금 생각하니 난 아예 그런 건 안 하는군. 하다 그만둘 만한 건. 돈이 없어서 그렇지 뭐. 아니 그런 나도 그런 게 아주 없는 건 아니야. 돈을 버린 일도 조금 있어. 그런 걸 몇번 되풀이하다보니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게 낫다고 여기게 된 걸지도. 바림이 넌 나처럼 하지 않을 것 같아. 입시미술을 하다보니 그림이 싫어졌지만, 그게 아니면 여전히 좋아하잖아. 그렇지. 아직 모르겠다고.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되겠지.
해미나 이모는 참 대단한 것 같아. 그렇다고 해미나 이모가 결정을 쉽게 했다고 생각하면 안 돼. 사람은 다 다르지. 용기를 바로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용기를 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사람도 있어. 난 뒤군. 아니 용기를 내는 때가 있기는 할지. 이런 바보 같은 내 이야기를 하다니. 바림이 넌 시간이 걸렸지만, 네 마음을 들여다 보려고 했군. 아니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린 것도 아니었어. 이제 열아홉살이잖아. 나이를 먹은 사람은 내가 열아홉살이면 뭐든 할 텐데, 할까. 난 그런 말 못해. 내가 지금 열아홉살로 돌아간다 해도 난 이리저리 헤맬 것 같아. 나이를 먹어도 다르지 않겠지. 슬프군. 바림아, 이런 말해서 미안해. 네 둘레에는 나보다 멋진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야. 이모와 해미 그리고 경진에서 만난 이레도 있군.
사람은 다 자기 일은 아주 커 보이지만 다른 사람은 뭐든 척척 잘 하는 것 같기도 해. 바림이 너도 그렇게 생각했구나. 이레가 너랑 같은 나이지만, 하고 싶은 것도 있고 글도 써서 동화작가가 되었으니 질투가 나기도 했겠어. 이레가 글을 쓴 건 그게 처음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군. 그동안 글을 쓰고 응모했지만 여러 번 떨어지기도 했으니 말이야. 글을 한번도 안 쓰다 어느 날 글을 쓰고 상을 받는 사람도 있어. 그렇다고 그 사람이 하나도 애쓰지 않은 건 아닐지도 몰라. 쉽게 한 것처럼 말하는 것일지도. 그런 사람 보면 나도 그런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기도 해. 아무리 시간이 가도 난 그런 말 못할 거야. 열심히 하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잘 할지 모르기도 해. 내가 나를 잘 모르는가 봐. 나도 아직 멀었군. 바림이 넌 열아홉살에 자신을 잘 봐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좋겠어.
바림이 네가 지금은 그림 그만둬도 다시 할 날 올 것 같아. 대학이나 상을 받으려고 하기보다 그저 바림이 네가 하고 싶어서 할 날 말이야. 그게 더 좋지. 어린 넌 미술 이론을 하나도 몰라도 네 마음대로 그림을 잘 그렸어. 상상한 아이도 만들어냈군. 그건 자연이었지만. 그 아이를 잊었다니. 다시 기억해 내서 다행이야. 길은 하나가 아니고 하고 싶은 것도 하나가 아니겠지. 멀리 돌아가면서 여러 가지를 보고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면 어딘가에 갈 거야. 그렇게 사는 것도 괜찮겠지. 바림이 네가 늘 즐겁게 살았으면 해.
희선
☆―
“세상 모든 만물은 부딪히며 앞으로 나아가게 돼 있어. 이 나무들도 올곧게 보이지만, 그 뿌리는 이리저리 구불거리잖아. 암석하고도 부딪히고 다른 뿌리와도 뒤엉키고, 그러면서 물을 찾아 깊숙이 더 깊숙이 뻗어 내려가는 거잖아. 길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만들어 가는 거지.” (173쪽)
“후회? 후회는 회전목마 같은 거야. 끊임없이 되돌아오거든. 어떤 날은 ‘그래, 내 선택이 옳았어.’ 하고 자신하다가도 또 어느 날은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하고 땅을 치고 후회하지. 바림아, 어른이 된다는 건 말이야. 완벽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니야. 그냥 후회 자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는 거지. 그것 역시 신중한 선택이었다고. 그 순간을 결정한 스스로를 존중하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결정한 일에 후회가 남을까 두려워하지 마. 그것마저 받아들여. 그리고 잊지 마.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내가 지난번에 말했지. 술취한 등산객이 백오산 돌탑 무너뜨렸다고. 거기에 새 돌탑이 다시 생겼어. 그 사이 사람들이 하나둘 새로 쌓아 올린 거지. 본래 무너지고 다시 쌓아 올리고 이 지난한 일을 되풀이하는 게 삶이야. 멈춰 서는 게 아니고 잠시 쉬어 가는 길이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236쪽~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