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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받는 기분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52
백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4월
평점 :
백은선 시집 《도움받는 기분》을 사두고 몇달이 흘러서야 봤습니다. 시집은 그리 두껍지 않은데 백은선 시집 《도움받는 기분》은 두껍습니다. 이렇게 두꺼운 시집 처음 만나지는 않았네요. 심보선 시집과 이제니 시집도 두꺼웠습니다. 시집이 어떻다는 말보다 두껍다는 말부터 하다니. 시집이 두꺼워서 여러 날 동안 봤습니다. 이 시집을 봐서 제 기분이 가라앉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시집 보기 전에도 게을렀지만, 이 시집을 보니 더 게을러졌습니다. 이걸 보고 나니 다른 건 하기 싫더군요. 마음은 빨리 보고 다른 책 보고 싶었는데. 시집 보면서 무슨 말을 쓰면 좋을까 했습니다. 책을 다 보고 바로 쓰기도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쓰기도 합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쓰기를 피한다고 할까. 그럴 때는 책을 끝까지 안 보고 조금 남겨둡니다. 미룬다고 할 말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언젠가도 책을 보고 쓰기 힘들었다고 했군요. 이 말 자주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은선 시집은 이번이 세번째인데 저는 이걸로 처음 만났어요. 이 시집 보기 전에는 이름 몰랐던 것 같아요. 2021년에 백은선 산문집과 시집이 나왔어요. 몇해 전부터 가끔 어떤 시집이 나왔는지 찾아봤어요. 백은선 시집은 그렇게 알고, 시는 다른 분이 소개해서 알았습니다. 그때 시 보고 시집 보고 싶다 했는데 시가 어렵네요. 이 말 빠뜨리지 않고 하네요. 시집 제목인 ‘도움받는 기분’은 시집 제목이기도 합니다. 도움받는 기분은 어떤 걸까요. 무엇에 도움을 받는지가 더 중요하겠습니다. 시인은 시에 도움 받겠지요. 자신이 쓰는 시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쓴 시에. 이건 시인만 그러지 않겠습니다. 글은 누구한테나 도움을 줍니다.
나는 네게 시를 읽어준다. 제목은 학교야. 이렇게 시작해. 학교에 가면 책상이 없었다. 책상을 찾아 다녔다. 어떤 날은 화장실에서, 어떤 날은 화단에서 책상을 찾았다. 책상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씨발년 죽어. 이런 시야. 너는 음, 소설 같은데 하고 말한다. 나는 빨간불이 켜진 교차로에 서서, 그건 정말 있던 일이야, 그래? 그래서 서사적인가 봐. 네가 말한다.
다시 학교를 읽어본다. 네게 읽어주지 못한 뒷부분도 읽는다. 매일 혼자 벤치에 앉아 있던 얘기,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해주세요. 종말이 오게 해주세요. 빌고 빈 얘기. 아침이 오는 게 싫어 밤 새 깨어 있던 얘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로 끝나는 마지막 문장까지.
너희가 보낸 발신자 없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미칠 것처럼 무서웠다. #죽어. 죽어. 죽어.# 문자들. 책상을 찾아 교실 맨 뒤에 놓고 엎드려 있으면, 너희는 키득거리면서 웃었지. 미친년 밤마다 한강에 가서 서 있는대, 그러면 폭주족들이 태우고 다니다가 돌아다니면서 한대, 손가락질 하면서 까르르 웃었지.
내가 스무 살이 되어 처음 데이트를 했을 때, 너희는 뒤 테이블에 앉아 있었지. 너희는 크게 다 들리게 욕을 했지. 애인도 나를 창피해했다. 나는 슬프고 무섭고 화가 났어.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어. 왜.
나에게만 다른 중력이 작용했어. 이렇게 파랗고 무겁고 사람이라는 것이 이렇게 악의로 가득 찰 수 있다는 게, 이상했어. 그치. 봉인된 검은 상자들이 내 안에 쌓여. 그 안에 기억들이 켜켜이 썩고 부서지고 지독한 냄새를 풍겨. 어떨 때 나는 단지 상자들로 이루어진 부패덩어리지.
참 이상하다 그치. 이 시는 발표하지 못할 거야. 나는 자꾸만 중학교 때로 돌아가 그때를 생각한다. 빈집에 돌아오면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읽고 또 읽었다. 영스트리트 스위트뮤직박스 고스트스테이션 고질라디오가 끝날 때까지 라디오를 들었다.
사물함 뒤에서 머리카락이 몽땅 잘렸을 때
가윗날이 귀 끝을 스칠 때 차가움과 공포
계속 걷다가 걷다가 끝없이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던 순간, 그렇게 무언가를 건너고 다른 사람이 된다면 어떨까, 상상하던 오후의 빛, 칼처럼 꽂혀 있다. 마음.
왜. 너희에게 주고 싶던 한마디. 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쓴다. 읽어봐. 기억나? 책상을 찾아 헤매던 찢긴 그림자. 물에 젖은 여자애. 비명처럼 가벼운 날들.
나는 어쩌면 너를 만나 이것을 다시 읽어줄 거야. 응, 골목을 헤매는 생쥐 같은 심정으로 전부 다시 쓸 거야.
하얀 얼굴과 초록. 정적 속에서 일어나던 살인 사건. 그걸 해결하는 늙은 신부. 펄럭이는 커튼, 가느다란 기도 소리, 피가 빠져나간 몸의 형상. 종이를 펼쳐 적었지. 먼 미래는 없고 기적만 있는 과거들과 표현할 수 없는 길들. 보도블록의 금들 회색 붉은색 건너뛰며 걷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하늘을 멍하니 보면서 선 캡을 고쳐 쓰며 나는 많은 친구야. 지하철에 앉아 버스 정류장에 앉아 꾸벅꾸벅 졸면 매번 새로운 꿈, 매번 똑같은 꿈. 무지와 기억을 탓하면. 조금씩 어려졌지.
우물에 대해
들판 한가운데 놓인
우물에 대해
자정에 우물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달이 들어 있고
가늠할 수 없는 찬란과
어둠이 함께 흔들린다
이계의 창처럼 숨막히게 아름답지
서로 마주 보는 기쁜 마음
모두 죽게 될 거야
-<도움받는 기분>, 30~33쪽
시가 참 길기도 합니다. 이것보다 더 긴 시도 있군요. 이 시를 보고 이건 시인이 경험한 일일까 했는데, 어떨까요. 경험과 다른 일이 섞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시라고 해서 다 시인이 겪은 일을 쓰지는 않을 거예요. 스치는 생각을 붙잡거나 다가오는 이야기를 쓸 듯합니다. 누군가한테 괴롭힘 당하면 그 일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지 못하겠지요. 그 일은 오랫동안 자신을 힘들게 하겠습니다. 이 시에서도 말하는 사람이 자꾸 중학교 때로 돌아간다고 하잖아요. 여기에서 말하는 사람이 이 시를 쓰고 조금은 나아졌기를 바랍니다.
앞에 옮긴 시를 보면 시에서 말하는 사람은 중학생 때 브라운 신부가 나오는 소설을 봤군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이 시보다 앞에 나온 <비유추의 계>를 보다보면 미스터리 범죄소설이 생각나서예요. 살인사건이 일어난 듯한. 피해자는 여자아이예요. 여자아이가 산에서 묻히는 건 다른 걸 나타낼지도 모르겠지만, 마음이 죽임 당한 걸지. 그런 거 보면서 남자한테 맞고 죽임 당하는 건 여자아이나 여성일 때가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자아이나 남성도 죽임 당하는 일 없지 않지만. 남자는 여자보다 힘이 셉니다. 갑자기 헤어진 남자친구한테 스토킹 당하다 죽임 당한 사람이 생각나는군요. 그건 라디오 방송에서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지금 더 많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요. 예전에는 드러나지 않았고 지금은 드러났겠습니다. 사람한테 집착해 봤자인데.
지지 마
꼭 이겨줘
마음껏 생각할 수 있게
생각한 대로 말하고 움직일 수 있게
쓸모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 있어도 된다고
죽을 때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우리가 거의 죽은 날>에서, 126쪽)
다른 시도 한편 소개해야 할 텐데 길고 잘 모르겠어요. 앞에 옮긴 건 <우리가 거의 죽은 날>에 있는 한 부분이에요. 이 시도 길군요. 여기에서는 ‘쓸모를 고민하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하는 말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시 전체가 좋으면 더 좋겠지만, 마음에 드는 시구가 한줄이어도 괜찮겠지요. 그런 말 더 있기도 한데 적어두지 않았습니다.
여기 담긴 시 어렵지만 읽어볼 만합니다. 시는 다 알지 않아도 괜찮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말에 기대 시를 보는군요. 시도 오래 보면 몰랐던 걸 알기도 할지. 그런 적이 없어서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모르는 건 여러 번 봐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가면 좀 다를지도.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보면 다른 느낌이 들겠군요. 이 시집 다시 볼 날이 올지. 시간이 흐르고 제가 좀 더 나아지면 좋을 텐데.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