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누구라도 세계 곳곳에 있는 역사의 현장을 직접 방문할 수 있다. 참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이 달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1980년대만 해도 해외여행은 거의 모든 시민에게 그림의 떡이었다.

우선 가고 싶은 도시를 선택하고, 여러 달 동안 그 도시와 나라의 역사를 자세히 공부한다. 마침내 목적하는 도시에 도착하면 열흘 이상 그곳에 한가로이 머문다.

여행자들은 대개 짧은 시간에 되도록 많은 명소를 둘러보려고 애쓴다. 다시 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는 구태여 많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루에 한두 곳만 자세히 살피고, 그 향기를 깊이 느끼는 것으로 족하다.

새것을 구경하기보다는 지나간 역사를 반추하는 데 여행의 목적을 두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가는 도시의 정치적 변천을 포함해 그곳의 사회경제적 변천을 미시적 또는 거시적 관점에서 들여다보는 작업이 내게는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한 역사가의 수학 여행기와도 같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여행 정보를 담은 책은 아니다. 내가 둘러본 모든 유물 유적을 빠짐없이 기록한 여행안내 책자도 아니다. 이 책은 내가 가장 애호하는 유럽 도시들에 관한 일종의 문화적 체험담이다.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국가들은 모두 도시였다고 볼 수 있으니, 도시는 어디서나 역사의 중심 무대였던 셈이다.

조용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한편으로 나는 이런 도시를 어떻게든지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매력에 빠져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음을 발견한다.

유럽의 종교인 기독교도 근본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유교, 불교에 못지않게 금욕적이었다. 하지만 유럽 사람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별로 구애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 조상과는 달리 물질적 욕망을 추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멀리 떠남으로써 도리어 가까워진다. 산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우선 꼭대기에 올라갈 일이다. 그래야 언덕과 수풀에 가려 보이지 않던 길이 손금처럼 환히 드러난다.

그리스의 관문은 예상 밖이었다. 깐깐한 입국 절차는 없었다. 허술하다 못해 허망할 정도였다.

전국 어디든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총동원해 사소한 지명까지도 일일이 표기한 우리나라의 과잉 친절과는 너무도 다른 풍경이었다.

지금 나는 아테네 사람들의 무신경을 은근히 비꼬는 것이 아니다. 외부인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 또는 약간의 불친절에 도리어 감사를 느꼈다. 덕분에 아테네 여행은 훨씬 자유롭고 평안했다. 그곳에 머문 2주일 동안 아테네는 매우 친숙하면서도 때로는 낯설어 보이는 친구처럼 다가왔다.

우리들의 조상은 이미 오래전에 어느 특정 민족이나 영토의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이미 여러 세기 전에 그들은 그리스를 벗어나 서구로 갔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 새 문명을 만들어냈습니다. 이제 서구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고 존경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또 그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고대 그리스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의 선조가 된 것입니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옳은 말이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 서구 문명이 탄생하였고, 이것이 발전하여 전 지구를 지배하는 현대문명이 이룩되었다. 우리가 지구상 어느 나라에 살든지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인과 예술가와 신들의 후예요 제자가 된 것이다. 모두가 그리스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낭만적이기만 한 고대 황금기의 그리스는 거대한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그리스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경험한 적도 없다.

기원전 5세기에 특히 찬란한 빛을 내뿜었던 휘황한 영광도 지리적 결핍의 산물이었다. 날 선 산맥으로 인해 국토가 종횡으로 갈라진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날씨 또한 덥고 건조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는 자급자족하지 못했다. 살기 위해서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지중해 바다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은 그리스인들의 용기가 그들을 고대의 무역 대국으로 키웠다.

그리스인들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던 쪽은 스파르타였다. 들판이 넓고 토질이 비옥했다. 그리하여 스파르타 사람들은 자급자족하는 농업사회에 그쳤다. 그들은 지중해로 진출해 외부세계와 활발하게 교역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아테네는 이 동맹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제국주의적인 침략 야욕을 실현할 군사, 외교적 도구로 이용하였다. 선한 군사동맹 같은 것은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고나 할까.

어떤 역사가들은 이 신전이 델로스 동맹의 중앙은행 역할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신탁으로 이름난 델포이 신전이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보물창고 또는 은행이었다면 이곳은 아테네의 금융센터였다는 뜻이다. 그럴 법한 주장이다.

파르테논신전, 이야말로 고대 아테네의 영광을 길이 후세에 전하는 금자탑이요, 갖은 악조건에도 꺾이지 않고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아테네 시민들의 용기와 지혜를 상징하는 기념탑이다. 머지않아 그리스는 현재의 경제적 고난을 이기고 반드시 다시 비상할 날을 맞이하고야 말 것이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한 사람의 역사가로서 이른바 ‘발전론’이란 것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거듭 깨달았다. 역사는 한 단계 한 단계씩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믿음은 허황한 것이다. 그리스문화를 살펴봐도 그렇다.

지금은 이들 여러 강대국이 그리스의 지정학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하고, 자국의 이익을 키우기 위해 마구 이용하려고 하는 모양이다. 중국은 피레우스 항구를 사실상 독차지했고,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그리스를 지배한다. 그런가 하면 독일은 유럽연합의 깃발 아래 이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한다. 러시아 역시 그리스 반도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 나라가 투명성과 청렴성을 자랑하는 현대국가로 재탄생하기까지는 앞으로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 우리들의 조국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여기에도 허다한 비정상적 관행이 차고 넘친다. 두말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손들에게 어려운 일이라면, 단군 자손에겐들 쉬울 리가 있을까.

전설 속 로물루스 형제가 티베르 강가에 나라를 세우고 1천 년이 지난 뒤였다. 전성기를 지나 오랫동안 혼미를 거듭하던 서로마제국이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무너졌는데, 공교롭게도 로마의 마지막 황제도 그 이름이 로물루스였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로마제국의 속담이다. 로마인들은 유난히도 변화와 실용을 좋아했다. 그리하여 타민족의 기술, 특산품 및 장점을 수용하는 데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좋게 말해 로마 사람들은 실질을 숭상했다. 일반적으로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법률 같은 것조차 로마인은 다르게 대했다.

그들은 누구보다 유연해, 정복지의 사정에 맞추어 법률을 개정하였다. 그들은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고, 통치는 현지의 지배 세력에게 위임했다. 그러면서도 정복지의 백성들을 로마 시민으로 탈바꿈시키는 비상한 재주를 가졌다. 로마 이후에도 곳곳에서 거대한 제국이 들어섰으나, 로마처럼 피정복지역의 동화에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역사의 실험실 ’ 이탈리아

하필 내가 로마에 있을 때 한 사람의 이름난 천재가 세상을 떠났다(2016.2.19.). 『장미의 이름』(1980)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1932~ 2016)이다. 그로 말하면 현대 유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요 언어학자이자 고전학자였다. 유럽 문화에 박통했던 그는, 이탈리아를 ‘역사의 실험실’이라고 불렀다.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나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던 터이다.

무솔리니의 등장, 이것이 마침내는 1945년 이후에 전개될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탈리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의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로마제국은 양극화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 통치자들은 로마의 기득권층을 설득하여 경제적으로 양보하도록 유도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중주의라는 우회적인 수단을 선택하였는데, 끝내는 그것이 제국의 비극적 운명을 낳은 독배가 되었다.

스톡홀름은 스웨덴의 수도요,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제일 큰 도시이다. 14개의 섬을 57개의 다리로 연결한 도시라서 ‘북방의 베네치아’라는 별명이 있다. 알다시피 스웨덴은 지구상에서 복지제도가 가장 완벽하게 갖춰진 나라이기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때는 가장 무자비했던 바이킹의 후예들이다. 그들이 마침내 자유와 평화를 구가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생각해 보니, 바이킹 시대에도 그들의 가공할 힘은 협동에서 나왔다. 우두머리의 명령에 따라 바이킹 전사들은 한몸처럼 움직였다. 그들은 용머리가 장식된 기다란 배, 즉 용선을 타고 죽음의 바다로 곧장 나아갔다. 위험천만한 항해였다.

바이킹은 강의 상류에 이르러 물줄기가 끊어져도 항해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기름칠한 통나무를 땅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깔았다. 그 위로 용선을 조금씩 밀었다. 이런 방식으로 바이킹은 수십 킬로미터 숲길도 헤쳐나갔다. 강물 줄기가 나올 때까지 배를 끌고 밀면서 전진하였다. 우두머리는 강한 용기와 신념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부하들의 단결심과 복종심도 대단해, 바이킹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유럽 대륙 어디에도 없었다.

노벨과 아바, 린드그렌에서 이케아까지

이후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의 물결이 스웨덴에도 이르렀다. 그때 알프레드 노벨이 등장하여 창의적인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했다. 알다시피 그는 다이너마이트 사업으로 거부가 되었다. 그러나 재산을 가족에게 물려주지 않았고, 유언장을 작성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였다. 노벨은 문명 발달에 공헌한 사람들을 찾아내 고무 격려하고자 했다.

오늘날의 스톡홀름은 탁월한 문화도시이다. 음악을 좋아하는이라면 누구나 그룹 아바(ABBA)를 기억할 것이다. 1972년부터1982년까지 활동한 4인조 남녀 혼성 그룹 말이다. 아바의 앨범은 무려 3억7천만 장 넘게 팔렸다고 한다. 아바의 리듬과 선율에 담긴 북유럽 특유의 독특하고 순수한 정서가 전 세계 대중음악 팬을 사로잡았다.

문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느 날인가 사랑하는 딸이 병석에 누웠다. 엄마는 즉석에서 지은 이야기를 들려주며딸을 간호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 유명한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이 탄생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화를 통해 은연중 주입되는 얌전한 소녀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삐삐 롱스타킹’은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어린이의 인격적 독립을 촉구하는 무언의 항의이기도 하였다.

여행이란 한 사회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깊이 숨어 있는 본질을 실감하는 기회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나는 틈만 나면 유럽의 여러 도시를 즐겨 찾는다.

1879년, 스웨덴 사람 라스 올슨 스미스가 앱솔루트 보드카를 처음으로 생산했다. 보드카는 물론 러시아 국민주로 유명하지만 가장 도수가 높은 보드카를 만든 것은 스웨덴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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