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미국 총영사관 정문 가까이에 1968년의 구정 공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고 이런 글귀를 적어두었다.
"원숭이해의 설날, 1968년 1월 31일에 민족해방사업을 위해 미국 대사관에 대한 공격 전투에서 완강히 싸우고 영웅적으로 희생된 사이공-자딘 지구 특공 전사들의 공을 조국은 영원히 기록하며, 인민은 그 은혜를 영원히 기억한다."
중국 대륙이 1949년 10월에 공산화된 직후였기에, 미국은 공산 세력이 동남아로 확산되는 데 민감하게 반응했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도미노가 쓰러지듯 이웃한 다른 국가들도 차례로 공산화될 것으로 보았다.
프랑스는 호찌민과 그의 세력이 공산주의자임을 강조했고,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트남이 독립국을 선포하자,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 지배하려고 획책했다. 두 나라는 1946년 말부터 1954년 5월까지 전쟁을 벌였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당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베트남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전쟁을 뒤로하고 미래를 향하여
호찌민시에서 빼어난 건물 가운데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 옛 사이공 시청사를 빼놓을 수 없다. 통일 후 베트남 정부는 호찌민시 인민위원회 청사 앞 광장에 어린이를 안고 있는 호찌민 좌상을 세웠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호찌민을 국부로 모시지만, 젊은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분위기다.
똔득탕은 남부 출신의 혁명가로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고 공산주의 혁명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호찌민이 1969년에 사망한 후 북베트남의 국가주석을 지냈으며, 통일 베트남의 국가주석이 되었다.
비텍스코 타워는 베트남 기업 비텍스코가 발주해 한국의 현대건설이 시공했고, ‘랜드마크 72’는 한국 경남기업의 투자로 지어졌다.
도시의 역사를 비교사적으로 살펴보면, 도시는 문명화의 산물이지 결코 근대화의 산물이 아니다. 세계 ‘4대’ 문명의 개화는 도시의 출현과 성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인구가 수천 명 정도에 불과했던 이들 초기 국가의 도시들에 이어 등장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중에는 아테네와 같이 10만 명이 넘는 곳도 있었다.
고전시기 동남아는 도서부와 대륙부에 정부 조직은 달라도 국가 성격이 같은 두 국가 체계(복수의 국가들이 모여 만든 하나의 체계), 즉 제국을 탄생시켰다. 지금의 캄보디아 씨엠립에 근거지를 두었던 앙코르(크메르)와 수마트라섬 팔렘방 근처에 수도를 두고 있던 스리위자야가 두 전형으로 꼽힌다.
두 제국은 이처럼 지리적·경제적·정치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인도 문명의 영향을 받은 ‘고전국가(classical state)’였다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근대 이전-그러나 대부분 고전시대가 막을 내린 뒤, 또는 ‘후기 고전시기(Post-Colonial Period)’-에 탄생했으나, 도시로서 본격적인 발전은 식민통치기에 이루어진 도시로서, 하노이, 방콕, 족자카르타, 덴파사르, 믈라카, 쿠칭, 치앙라이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 식민통치기에 식민정부의 행정 중심지 또는 한 도시로 처음 건설되어 독립 이후로 이어진 경우다. 싱가포르, 양곤, 호찌민시, 페낭, 수라바야가 이에 해당한다.
요컨대 동남아시아 도시들의 탄생 시기는 다양하나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한 것은 식민 지배와 국가 건설 과정에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