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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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 중 「아내와 개오동」
: 1970년대 언론 통제 속 지식인의 고뇌와 좌절, 그리고 아내가 떠안은 생활고

1. 작품 개요

가. 작품의 기본 성격
ㅇ(작품성격) 「아내와 개오동」은 제주 4·3의 역사적 상처를 직접 다룬 작품이라기보다, 신문사 부조리 속에서 회사를 뛰쳐나온 전직 기자 석규의 무력감과 가정의 균열을 다룬 작품임.
ㅇ(시대배경) 작품의 배경에는 1970년대 유신체제하의 언론 통제, 신문사 내부의 갈등, 산업화 담론 속에서 은폐된 저임금 여성노동의 현실이 묵직하게 놓여 있음.
ㅇ(주요사건) 석규는 신문사를 그만둔 뒤 집 안에 틀어박혀 번역 일과 재취업을 생각하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내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밖으로 나가 보험회사 외무사원 일을 하게 됨.
ㅇ(핵심내용) 작품은 조직의 부조리를 떠난 인물이 생활의 궁핍 앞에서 어떻게 무력해지는지, 그리고 그 무력감이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에게 어떻게 부담으로 전가되는지를 보여줌.

나. 제목의 의미
ㅇ(제목구성) 제목의 두 축은 ‘아내’와 ‘개오동’임. 아내는 가장의 실직 후 생활을 감당하게 되는 현실의 인물이고, 개오동은 그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석규의 무력한 상태를 상징함.
ㅇ(대비구조) 아내는 집안 문제와 생활비를 실제로 감당하기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고, 개오동은 집 안에 서 있으나 벌레와 불편만 만들어내는 존재임.
ㅇ(핵심의미) 「아내와 개오동」이라는 제목은 생활을 감당하는 아내와, 그 생활 앞에서 무력하게 굳어버린 석규의 모습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작품의 중심 갈등을 드러냄.

2. 서사 구조와 주요 내용

가. 벌레, 개오동, 방 안의 무력감
ㅇ(마당풍경) 작품은 석규가 혼자 빈집을 지키며 외출한 아내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시작됨. 마당의 개오동은 집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잎사귀에는 벌레가 들끓어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음.
ㅇ(생활불편) 개오동에서는 벌레와 똥이 떨어지고, 아내는 남편에게 벌레를 잡든지 나뭇가지를 치든지 하라고 요구함. 그러나 석규는 방에 틀어박힌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음.
ㅇ(무력상태) 석규는 개오동을 어떻게든 손봐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함. 이 장면은 신문사를 나온 뒤 생활 전체가 멈춰 선 석규의 상태를 그대로 드러냄.

나. 봉봉과 아침 산보
ㅇ(봉봉의등장) 석규는 집 안에 매인 개 봉봉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의식하면서 묘한 유대감을 느낌.
ㅇ(산보의시작) 석규는 봉봉을 데리고 아침 산보를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흐트러졌던 생활 리듬을 잠시 회복하는 듯함.
ㅇ(봉봉의사고) 그러나 봉봉은 트럭에 치여 다치고, 이후 더 이상 석규를 따라 산보에 나서지 않음. 석규의 생활 리듬도 다시 가라앉음.

다. 신문사를 뛰쳐나온 석규
ㅇ(퇴직배경) 석규는 단순히 실직한 기자가 아님. 그는 신문사의 선정주의, 왜곡된 기사 방향, 권위적인 조직문화에 환멸을 느끼고 회사를 박차고 나온 인물임.
ㅇ(초기태도) 그러나 석규를 처음부터 일관된 투사로 보기는 어려움. 그는 제작거부 농성 때도 생계 문제 때문에 백기를 든 심정으로 회사에 복귀한 경험이 있음.
ㅇ(조직변화) 회사는 기자들을 더 강하게 신문사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변함. 전에는 기사 방향을 상의하는 여지가 있었지만, 이제는 데스크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부장이 기자에게 반말과 욕설을 퍼붓는 구조가 됨.
ㅇ(핵심내용) 석규가 신문사를 나온 것은 순수한 영웅적 결단이라기보다, 생계 때문에 타협해 오던 사람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온 결과에 가까움.

라. 기사로 쓰이지 못한 사람들
ㅇ(취재지시) 석규는 남도 어느 해안 지방의 공업단지를 취재하여 르포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음. 그러나 데스크가 원한 것은 저임금 노동의 실태가 아니라, 공장 새마을운동과 산업전사를 부각하는 기사였음.
ㅇ(문옥자와김진숙) 석규가 만난 이들은 홀어머니와 남동생을 부양하며 몸을 혹사하는 문옥자, 간염으로 공장에서 쫓겨나 영등포 사창가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가는 김진숙 등 산업전사로 포장할 수 없는 철저한 약자들임.
ㅇ(기사폐기) 석규가 쓴 기사는 부장의 손에서 욕지거리와 함께 쓰레기통으로 던져짐.
ㅇ(핵심의미) 작품은 언론이 약자의 현실을 기록해야 할 때조차, 조직의 이해관계와 이념적 틀에 맞지 않으면 그 목소리가 쉽게 폐기될 수 있음을 보여줌.

마. 파국과 퇴직 이후의 생활
ㅇ(폭발장면) 석규는 부장의 책상을 도끼로 부수고, 스스로도 심한 충격과 후유증을 겪음. 이는 더 이상 말로 저항할 수 없게 된 사람이 터뜨린 절망의 몸짓에 가까움.
ㅇ(퇴직이후) 회사를 그만둔 뒤 석규는 번역으로 생활을 이어가려 하지만 마르쿠제 번역은 진척이 없고, 신문을 읽는 일조차 괴로워짐.
ㅇ(생활불안) 석규는 술담배를 끊을 만큼 궁핍해졌고, 실직 생활은 점점 그를 방 안으로 밀어 넣음.
ㅇ(방세놓기) 아내는 생활비가 모자라자 자가 단독주택으로 보이는 집에 살고 있음에도 석규가 쓰는 방 하나를 세놓자는 말까지 꺼냄. 이는 생활의 압박이 집 안 공간까지 파고들었음을 보여줌.
ㅇ(핵심의미) 석규는 조직을 떠나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켰지만, 생활을 지키는 데에는 실패함.

바. 아내의 외출과 개오동 잔가지 치기
ㅇ(아내의외출) 석규가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아내는 밖으로 나가 보험회사 외무사원 일을 시작함.
ㅇ(수치와죄책감) 석규는 아내가 집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자신이 생활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깊은 수치심과 자괴감을 느낌.
ㅇ(잔가지치기) 결말에서 석규는 부엌에서 식칼을 들고 나와 나무 위에 올라가 개오동의 잔가지를 쳐내기 시작함.
ㅇ(톱의필요) 석규는 큰 나무를 제대로 처리하려면 친구 완혁에게 톱을 사 오라고 부탁해야겠다고 다짐함.

3. 인물 분석

가. 석규
ㅇ(인물성격) 석규는 신문사의 부조리를 참지 못하고 회사를 나온 전직 기자임. 처음부터 굳건한 투사라기보다 생계와 명분 사이에서 흔들리던 인물임.
ㅇ(내면갈등) 그는 조직과 타협하지 않았다는 자존심과, 그 결과 아내에게 생활의 부담을 떠넘기고 있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함.
ㅇ(핵심의미) 석규는 부조리에 분노하지만 생활 앞에서는 무너지고, 그 무너짐을 가장 가까운 아내에게 떠넘기게 되는 지식인의 모순적 한계를 띠는 인물임.

나. 아내
ㅇ(인물성격) 아내는 석규의 관념과 무력감이 내려앉은 집 안에서 벌레, 똥, 생활비, 남편의 침체를 모두 몸으로 겪으며 실제 생활을 감당하는 인물임.
ㅇ(생활담당) 아내는 개오동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하고, 방 하나를 세놓자고 제안하며, 결국 집 밖으로 나가 보험회사 외무사원 일을 함.
ㅇ(핵심의미) 아내는 석규의 구원을 기다리는 수동적 인물이 아니라, 무너진 생활을 실제로 떠받치는 현실적 인물임.

4. 작품의 핵심 주제

가. 양심과 생활의 충돌
ㅇ(양심의한계) 석규의 직장 이탈은 순수한 영웅담이 아님. 신문사를 박차고 나온 뒤에도 밥값과 생활비, 집안 문제와 가족의 생계는 고스란히 남음.
ㅇ(핵심의미) 작품은 옳은 선택이 곧바로 좋은 삶을 보장하지 않으며, 생활을 감당하지 못하는 양심은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현실적 상처를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줌.

나. 1970년대 언론 부조리와 현실 왜곡
ㅇ(언론통제) 1970년대 유신체제의 언론 통제 속에서 기자 개인의 문제의식은 데스크의 위계적 질서 앞에서 꺾임.
ㅇ(약자의삭제) 언론 조직은 여성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국가 주도의 산업전사 프레임으로 현실을 포장하며 약자의 목소리를 지움.
ㅇ(핵심의미) 언론이 권력과 조직의 논리에 종속될 때, 사회적 약자의 현실은 공론장에서 철저히 폐기됨.

다. 가장의 무력감과 생활 부담의 전가
ㅇ(가정의현실) 석규가 직장을 떠난 뒤 생활 부담은 아내의 노동으로 옮겨감.
ㅇ(행동의부재) 석규는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지만 감정만으로 생활은 나아지지 않음.
ㅇ(핵심의미) 거대 조직의 부조리에 맞선 지식인의 좌절이, 결국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아내의 고통과 희생으로 떠넘겨지는 구조적 모순을 드러냄.

라. 개오동과 봉봉의 상징성
ㅇ(상징의대비) 벌레를 뿜어내는 개오동은 석규의 굳어버린 무력감을, 트럭에 치여 주저앉은 봉봉은 상처 입고 꺾인 석규의 자존심을 각각 상징함. 두 존재 모두 석규의 현신임.
ㅇ(잔가지치기) 석규가 식칼로 잔가지를 치는 행위는 자기 무력감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실천의 시작을 상징함. 그러나 톱이 아닌 식칼을 들었다는 점에서 아직 문제의 근원을 잘라내기에는 준비가 부족함을 보여줌.

5. 종합 평가

가. 작품의 의의
ㅇ(작품의의) 「아내와 개오동」은 1970년대 억압적인 언론 현실과 지식인의 좌절을 거창한 관념이 아닌, 밥벌이와 생활의 위기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잣대로 해부한 작품임.
ㅇ(문학적의미) 조직을 박차고 나온 기자의 영웅성을 기리는 대신, 방 안의 벌레, 읽히지 않는 번역서, 아내의 외출 등 생활의 구체적 붕괴 과정을 통해 양심과 생계 사이의 처절한 간극을 묘사함.

나. 최종 평가
ㅇ(종합평가) 이 작품은 생계 때문에 타협해 오던 인물이 끝내 폭발한 뒤, 생활의 자리에서 다시 무너지고 고립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보여줌.
ㅇ(최종정리) 개오동 잔가지를 치는 결말은 시대의 폭력 앞에서 무너졌던 지식인이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생활 기반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서려는 처절한 안간힘이자, 더 이상 아내에게 삶의 무게를 떠넘기지 않겠다는 윤리적 자각의 출발로 평가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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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서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책을 펼치기만 하면 책장에서 마취성 기체가 피어오르는지 으레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을 아무리 부릅뜨고 책장을 노려봐도 활자들은 그저 생뚱생뚱하고 터진데로 물 새듯 졸음이 새어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적극적인 독서 방법으로 마르쿠제 번역을 해보는 것인데 그것 역시 별 효과가 없었다. 책은 안 읽히고 신문사에 복직되리라는 희망은 점점멀어져갔다.
그야말로 실직 칠개월은 수마(魔)와 싸운 세월이었다. - P176

모자라는 생활비를 충당하려면 번역 일감을 더 얻어야 할 텐데.
어서 완혁을 만나고 출판사들을 돌아다녀봐야지. 늘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는 외출은커녕 전화질조차 하지 않았다. 탈고한 원고를 갖다주고 새 일감을 받아오는 것도 아내에게 맡겼다. 기분전환으로 이따금 바깥출입도 할 만한데 내가 왜 이렇게 두문불출일까?
돈 쓰는 게 무서워서? 하기는 생활비에서 그가 용돈으로 축낼 여유는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한달 생활비 십일이만원이란 가장의 용돈없음을 의미했으니까. 그 때문에 술담배를 끊은 석규였다. - P177

하여간 석규가 개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의식한 것은 실직 후집에 붙어 있게 되고서부터였다. 보니까 개는 노상 매여 있는 것이었다. 아직 구속에 길들여지지 않았던지 죽을힘을 쓰며 몸에 매인자기 집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개를 보면 몹시 안쓰러운 생각이들었다. 그래서 걸핏하면 끈을 풀어놓기를 잘했는데 그 때문에 아내와 다툴 때가 여러번이었다. 개에게 ‘봉봉‘이라는 예쁜 이름까지몸소 지어준 아내가 저렇게 매정한 구석이 있었던가? 그러나 아내는 아내대로 억울하다는 듯이 울먹거리기까지 했다. - P178

"당신 기분은 다 알아요. 그렇지만 나까지 억압자로 몰진 마세요. 누군 개를 학대하고 싶어서 하나요? 온 집안이 더러워지니까그렇지. 아무 데나 똥을 싸고 개털이 온통 부엌에 날아드는데…………
"좋아, 그러면 똥은 내가 뉘지."
그래서 아침 산보가 시작되었다. 아침마다 규칙적으로 똥 누일 요량으로 산보길에 데리고 나갔다. 진돗개와 스피츠의 잡종인 이 개는 무척 석규를 따라서, 산보에 데려가려고 끈을 풀면 어떻게나 반색을 하는지 낑낑 앓는 소리를 내며 오줌을 질끔거리는 것이었다. - P179

이제 녀석은 제 아빠와 놀려고 들지 않는다. 아니,방에만 틀어박혀 있고 수염도 깎지 않은 제 애비가 오히려 두렵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엄마가 외출할 때면 (하다못해 시장에 갈 때라도) 녀석이 기를 쓰고 따라나서는 것은 아마 제 애비와 단둘이 있기가 싫기 때문이리라.
석규를 따르는 것은 오직 봉봉뿐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개를 데리고 강가로 나가 똥을 뉘었다. 아내는 이제 더이상 개를 붙잡아맬구실이 없었다. - P179

이렇게 시작된 아침 산보는 한편 석규의 정신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주어서 쇠락하기 쉬운 실직생활에 미미할망정 생활 리듬의 명맥을 이어가게 했다.
이 새벽의 눈부신 질주는 그러나 몇달 계속되지 못했다. 어느날아침 석규를 따라 강변도로를 횡단하던 봉봉이 트럭에 치이고 말았던 것이다. 개는 물 젖은 걸레뭉치처럼 아스팔트 위에 내던져져맥없이 깽깽거리고 있었다. 털가죽을 뚫고 흰 뼈가 튀어나오고 아스팔트의 황색 차선 위에 선혈이 번졌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랄까. 개는 뒷다리 하나가 으깨져 아주 못쓰게 되어버렸다. 그뒤부터 개는 아무리 잡아끌어도 산보길에 따라나서지 않았다. - P180

석규는 번역 일에 몰두하다가도문득, 자신의 목이 개끈으로 책상 다리에 붙들어매여 있는 게 아닌가하는 엉뚱한 망상에 사로잡혀 슬그머니 목을 쓸어보곤 했다. 어떤 때는 번역 원고지를 한칸 한칸 메꾸어가는 자신이 양계장의 닭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협소한 칸막이에 갇혀 열나게 알만 낳는 닭,
아내는 알을 낳자마자 거둬가는 양계장 주인이고...... 그러나 이젠알도 처음만큼 많이 낳지 못한다. 번역 일거리가 많이 줄어든 것이다. - P181

바람이 다시 불어와 오동나무 잎새들을 흔들어놓았다. 그 소리에 개가 설핏 눈을 떴다. 귀를 세우고 잠시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듣다가 이윽고 석규와 눈이 마주쳤다. 개 꼬리가 보일 듯 말 듯 두어번 맥없이 흔들렸다. 아마 반갑다는 모양이다. 그러나 개는 석규가 채 눈을 돌리기도 전에 먼저 눈을 도로 감고 앞발에다 턱을 묻어버리는 것이다. 개가 석규를 닮아가는 것일까, 석규가 개를 닮아良가는 것일까? 개도 분명히 제 주인처럼 병들어 있었다. - P181

"안되겠어요, 불면증까지 생기고, 이 방에 당신 혼자 내버려둬선정말 안되겠어요. 그러다간 정말 더 큰 병을 얻고 말아요. 이 방은썩은 늘 같애요. 그리고 나도 따로 자니깐 선머슴 닮아가는 것 같고………… 그래서 생각한 건데요, 이러면 어때요? 마침 생활비가 모자라 쩔쩔매는 처지이기도 하니, 방 하나 세놓기로 하죠. 이 방은 세古줘버리고 당신은 안방으로 건너오고...... 좋잖아요?" - P183

아내의 슬하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가 말하는 불면증 치료 방법이란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아내가 어느 여성 잡지 부록에서 읽었다는 것인데, 잠이 안 올 때는 방사가 약이라는 것이다. 아내의 합사 제의는 남편의 불면증을 위한다는 핑계를 세워 제 욕심을 채우려는 심사로 여겨졌다. 두어달 돌보지 않는 사이에 아내의 성(性)은 근지러워 참을 수 없을 지경으로 퉁퉁 부어오른 것이 아닐까?
석규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허구한 날 무력증에 빠져 있는 내가과연 아내의 분방한 성을 감당할 수 있을까? - P183

왜 이 더러운 미련을 털어버릴 수 없는가. 석규가 실직 칠개월동안 투쟁하여 이긴 게 있다면 그건 술담배 끊은 것과 신문을 끊은것이었다.
백해무익한 중독성의 기호물로서 요새 신문은 결코 술담배에 뒤지지 않는다. 저속한 주간지 스타일의 선정주의로 전락한 지 오랜일간지들, 여론을 선도하고 우둔한 독자를 준열히 꾸짖어야 할 언론이 오히려 독자의 천박한 기호에 영합하여 갖은 교언영색을 쓰며 구걸하는 꼴이라니! 석규는 퇴직금 받아가라는 통지를 받은 날,분연히 신문을 끊어버린 것인데, 그것으로 그가 다니던 신문사와의 마지막 연줄은 잘린 셈이었다. - P184

텅빈 편집실. 그림자가 얼룩진 책상과 의자들. 쓰다 만 기사 원고는 자다가 흘린 침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석규는 가슴이 답답하여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숨이 점점 가빠지고 온몸이 부풀린 듯팽창하는 느낌이더니 별안간 저돌적인 충동이 목울대로 치밀어올랐다.
그다음 순간 석규는 그 광기의 거센 폭풍 속에 휘말리고 만 것인데, 그 대목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다만 출입구 쪽 소화기가 비치된 코너로 달려가 벽에 붙은 소화용 붉은 도끼를 떼어낸 것만이 생각날 따름이었다. 의식이 싹 지워진 그 시간은 얼마 동안이었을까?
일분? 아니, 단 몇십초였을지 모른다.
잠시 후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그는 눈앞에 벌어진 끔찍한 폐허를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부장의 책상은 처참하게 부서졌고 도끼는 뭉뚱한 뒤통수를 보이며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
전신에 땀이 비 오듯 했다.
혼신을 다하여 무섭게 도끼를 내리친 뒤 몇십초 동안의 무의식상태를 생각하면 석규는 지금도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날 생긴 오른쪽 눈 흰자위의 붉은 핏발은 오랫동안 삭지 않았고, 급격하게 몸을 혹사해서 생긴 어깨 근육통으로 그는 대엿새 동안 몸살을 앓아야 했다. - P188

그는 "젊은 친구가 안됐어. 틀림없이 머리가 어떻게되고 만 게야" 하고 짐짓 동정하는 투로 나왔으리라. 결국 석규는조울증 환자일 뿐이고, 부서진 책상은 새 책상으로 대치해버리면그만이었다. 파괴된 것은 책상 하나와 석규 자신뿐이었다. - P189

아, 그토록 외면해오던 자신이 다시 이념의 포로가 될 줄이야. 몇년 전 3월 제작거부 농성을 풀고 투항하는무리에 끼여 회사로 복귀했을 때, 그때 벌써 이념이나 대의명분 따위는 포기해버리지 않았던가. - P190

집에 있는 아내들은 그들대로 남편의부장으로부터 걸려오는 전화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드디어 누구누구가 부장을 만났더라는 소문이 나돌고, 누구누구는 건강 핑계대고 빠져나가고, 누구는 집에 잠깐 들렀다가 아내가 말리는 바람에 그냥 눌러앉아버렸다. 드디어 사주로부터 최후의 통첩이 오자투항자가 일시에 무더기로 생겨났다. 석규도 그 무리에 끼여 손들고 나갔다.
張您 - P191

그러다가 작년 10월에 부장 데스크로부터 남도 어느 해안지방의공업단지를 취재하여 르뽀 기사를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 데스크의 의도는 물론 저임금 실태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고 공장 새마을운동에 입각하여 근로자들을 역경을 물리치고 분투하는 산업전사로 부각시켜보자는 것이었다. - P193

그녀가 부양해야 하는 가족 수는 홀어머니와 국민학교 다니는남동생 해서 단둘뿐이었지만 이렇게 식비라도 줄여야 자기 몫의적금을 부어나갈 형편이었다. 일년 만기 십오만원짜리 적금통장이그녀의 유일한 꿈이었다. 아니, 그 방엔 꿈이 없었다. 도무지 소녀다운 꿈이 없었다. 그녀의 악전고투는 차마 끔찍한 것이었다. 석규는 문옥자라는 이름의 그 여공을 역경을 딛고 분투하는 산업전사로 묘사할 수 없었다. 남의 집 쓰레기통을 뒤져 버린 생선 대가리를 주워 먹으면서까지 돈을 모았다는 어느 해의 여자 저축왕이고백한 소감 못지않게 그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사연이었다.
그녀의 입 가장자리에 퍼져 있는 마른버짐은 아마 비타민 부족 때문에 생긴 것이 틀림없으리라. 그러면서 그녀는 매일 하루 열두시간 노동을 해냈다. 실밥과 천조각에 파묻혀 불철주야 맥이 내려 틍퉁 부은 발로 미싱의 페달을 밟았다. - P195

그러나 이렇게 불철주야 작업에 혼신을 쏟는 옥자를 공장 새마을의 기수로, 산업전사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슬픈 일이었다. 그리고 두번에 걸쳐 산업훈장을 받은 바 있는 그녀의 고용주를 애국자로 묘사할 수 없는 것도 또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생산성을 높이고수출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그 고용주가 한 일이라곤 단지 옥자네를 싼 임금으로 고용해서 불철주야로 혹사시킨 것뿐이었다. - P195

석규도 전에 그런 공장데기 출신 작부를 독립문 근처 어떤 니나놋집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그 여자는 한사코 술을 거절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다른 작부가 그 이유를 귀띔해주었다. 그여자는 삼일 전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가 주인아줌마한테 들켜 실패했는데 그때 먹은 독한 약 때문에 위장이 크게 상해 술을 못든다는 것이었다. 그때 석규가 받은 느낌은 과연 정확히 어떤 것이었던가. 그 말을 듣자 대번에 기분이 언짢아져 주흥이 깨지고 만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연민의 정보다는 하필이면 이런 여자가 나에게 걸려들었나, 하는 재수없다는 생각이 앞섰다. 몸때가 되어 기저귀를 차고 나와 만져볼 수 없게 된 작부처럼. - P196

석규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들고 영등포구 영일동으로 김진숙을찾아갔다. 알고 보니 영일동은 세상이 다 아는 영등포 역전 적선지대였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고 불길한 생각을 억누르며 찾아갔으나 예감은 그대로 적중되고 말았다. 의상실에 나간다는 것은거짓말이었다. 진숙은 융파자마 바람으로 툇마루에 쪼그리고 앉아제 발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 P197

그녀가 석규로부터 바라는 것은 옥자의 소식이 아니라 오직 잠깐 놀러 온 낮거리 손님이었다. 그녀의 의심 품은 눈빛은 "난 내 손님 앞에선 조금도 부끄럽지 않아요. 그런데 내 손님이 아닌 당신은 도대체 누구세요?" 하는 것 같았다. 석규는 결국,
어느 오쟁이 친구의 소개로 찾아간 낮거리 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 안엔 손님들이 피우고 간식은 담배 냄새가 몹시 났다.
공장 새마을운동의 취재는 결국 옥자와 진숙이라는 여공의 이렇게 기구한 이야기를 곁들인 저임금 실태조사가 되어버렸다.
부장은 석규의 르뽀 기사를 두 손아귀에 꾸겨쥔 채 얼굴을 잔뜩붉히더니 심한 욕지거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야! 너 누굴 놀리는 거야 뭐야? 이따위 기사를 써내는 저의가뭐야, 도대체!" 다음 순간 닷새 밤을 새우며 써놓은 백매 가까운 분량의 원고는 부장의 손에 발기발기 찢겨 쓰레기통에 처넣어졌다 - P198

데스크와 일선 기자 사이의 평형관계는 그 사건으로 여지없이 깨어지고 대신 주종관계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부장은 걸핏하면 "나간 놈들 봐. 하나같이 별 볼 일 없이 빌빌거리는 꼴을, 자네, 그때내 말 듣고 기어들어오길 천번 잘했지" 하면서 노골적으로 은인 행세를 하려고 들었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네놈들이 지조를 꺾고투항한 주제에 밸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느냐고 아주 얕잡아보는것이었다. 그러나 석규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른 분노를 꿀꺽 삼켜버렸다. 그럴 수밖에, 득세한 이데올로기의 화신인 부장은 도무지 불가항력이었다. 그에게 대든다는 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자폭행위나 다름없었다. - P199

아내에게 죄스러운 생각도 없었다. 간염에서 온 진숙의 암담한수묵색 낯빛이 석규를 그런 감상에 빠뜨렸나보다. 썩어가는 그녀의 가슴을 건강한 자기 가슴팍으로 오래오래 눌러주고 싶었다. 그러나 진숙의 알몸에선 밤새도록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간염의말기 증상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후에 찾아갔을 때는 이미 그녀가 고향으로아주 떠나가버린 뒤였다. 진숙은 마지막 안간힘으로 붙잡고 있던끄나풀을 놓아버리고 경남 창원 고향땅의 따뜻한 흙 속에 검은 얼굴을 파묻으러 내려간 것이었다. - P200

아마 석규의 무력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나보다. 이념은 그소유자를 파괴하는 법, 이념을 품는다는 것은 가슴에 시한폭탄을품은 것과 같아서 언젠가는 그 이념에 의해 스스로 파괴되고 만다.
석규도 오래가지 않아 그후 석달 뒤 부장 책상을 부수고 스스로 자폭하고 만 것이었다. - P201

이런 아내를 내보내놓고 빈집을 지키는 석규는 하루 종일 마음이 언짢았다. 아내를 시장에 내놓고 방매하는 느낌이었다. 진철이놈이 제 엄마를 따라다니니까 망정이지 그렇지만 않았다면 의처증이라도 걸릴 판이다. 안된다. 아내를 도로 불러들여 집 안에 앉혀놓아야지. 멀쩡한 남편을 두고 여편네가 가장 노릇을 하려 들다니! - P202

석규가 물러난 자리는 이미충원되어 있었다. 그 자리를 채운 사람은 다름 아닌 보이콧 사태 때 성명서를 초안하고 앞장섰던 초강경파 김충식이었다. 단단한 무쇠가 오히려 잘 부러진다고 하던가, 김의 투항은 완혁네들에게 큰 물의를 빚었던 모양이었다. 완혁은 이러한 사실을 전화로 알려주면서 몹시 분개했다. (석규는 여태 고집을 피워 완혁을 만나지않고 있지만, 그럼에도 완혁은 종종 전화를 걸어오곤 했다. 그는 석규에게 전화 거는 유일한 사람이자 유일한 뉴스원이기도 했다.) - P202

처외삼촌은 충분한 시간 여유를 줄 테니 잘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언질은 육개월이 지난 지금도 유효했다. 그는 세월이 약이란 말을 믿는 느긋한 사람이었다. 다른 데도 알아봤으나, 꼬리표달린 전직 기자라는 걸 알고는 모두 한결같이 고개를 내두르는 것이었다.
이젠 더이상 버틸 수 없는 궁지에 몰린 것이다. 실직생활 막바지에 온 것이다. 이젠 별수 없이 처외삼촌 회사로 기어들어가게 되나보다 하는 각성이 폐부를 아프게 찔렀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지금 갑자기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고 결국 그렇게 낙착되고 말리라는 예상은 벌써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도 무력증의 원인이었다. - P204

"진철이 거기 있죠?"
석규의 돌발적인 기세에 장모는 주춤하는 눈치다.
"아니, 진철이 놈은 별안간 왜 찾나? 그놈은 나하고 같이 잘 놀고있는데......"
역시 짐작대로구나. 눈앞이 어지럽고 귓속이 앵앵거리는 소음으로 가득 찼다. 진땀이 솟았다.
"진철이 엄마 어디 간다는 말 없었어요?"
"어딜 가긴 어딜 가, 이 사람아. 그놈의 빌어먹을 보험인가 뭔가때문에 나갔지. 하여간 극성이여. 취직한 지 보름도 못되는 제 동생한테까지 보험 들라고 성화를 안 부리나, 원."
"아니, 보험이라뇨?"
"자네, 여태껏 그걸 몰랐나? 그애가 요사이 보험회사 외무사원으로 싸돌아댕기는거."
"예?"
"어이구, 무심도 해라. 제 여펜네가 뭣 하면서 돌아댕기는지도모르고, 쯧쯧, 벌써 열흘도 넘었네." - P206

문득 경대 위에 걸린 달력에 볼펜 글씨로 울긋불긋 메모된 것이눈에 띄었다. 날짜가 쓰이고 난 여백에 뭐라고 잔뜩 씌어 있다. 뭘까? 자세히 들여다보던 석규는 흠칫 놀랐다.
이건 모두 내 친구들 이름이 아닌가. 14일: 산은 오문중 대리, 15일: 이인규 교수, 16일: 문수일 과장, 17일: 한웅섭 사장, 18일: 박순철 기자... 이런 식으로 30일까지 차곡차곡 메워져 있었다. 이게무슨 수작인가, 내 친구들과 만날 약속을 하다니.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힌 석규는 허둥지둥 경대 서랍을 열고 뒤져보았다. 다행히 거기에서 아내가 생명보험회사 외무사원이라는 증거가 나왔다. - P207

엎으라져 있던 봉봉이 놀라서 후달짝 일어났다. 나무 위로 기어오른 그는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칼에 나무가찍히는 퍽퍽 소리와 흑흑 토해내는 숨소리가 동시에 일어났다.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하나둘 잘려 아래로 떨어졌다. 장독대에떨어져 쨍그렁거리기도 하고 빨랫줄에 걸쳐 데룽거리기도 했다.
칼이 완전히 먹히지 않은 큰 나뭇가지는 몸을 실어 체중으로 부러뜨렸다. 땀에 흠뻑 젖은 러닝셔츠에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손아귀에는 초록빛 수액이 끈적거렸다. 이봐, 자네 외삼촌 회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나서면 밥벌이할 곳은 있을 거야. 봉급이야 그만 못하겠지만, 참자. 이런 흉년의 시대에는 적게 먹고 가는 똥 싸는 법이야 이젠 돌아와! 인규 그 새끼 만나지 말고 그냥 와. 인규를 만날게 아니라 완혁이를 만나야 하겠어. 그놈처럼 살면 돼. 지금 당장전활 해야지. 전화하면 당장 우리 집으로 달려오겠지. 빌어먹을 자식, 얼마만이냐 삼년 만에 얼굴을 맞대는구나. 빌어먹을! 이놈의나무 질기긴 되게 질기군. 안되겠어. 완혁이한테 이따 저녁에 우리집올 때 톱 사오라고 부탁해야지. 숫제 밑동을 싹둑 잘라버려야겠어!
석규는 땀과 벌레로 뒤범벅이 된 러닝셔츠를 벗어던지고 나무위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놀란 봉봉이 제집 주위를 미친 듯 뛰어다니고 있었다. - P-1

복도 끝은 가파른 나무계단과 이어져 있다. 너는 잠깐 멈춰 서서계단을 굽어본다. 어서 바삐 이 병원을 떠나고 싶은 조바심 때문인지진한 콜타르 냄새를 흔들며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는 그 계단은 한층 위태로워 보인다. 금방 너의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뭔가속에서 휘딱 뒤집히는 듯 어지럼증이 심하게 일어난다. - P212

공장이 문을 닫은 지 벌써 석달. 공장장은 불황 때문에 당분간휴업하니 집에서 쉬고 있으면 연락하마고 했다. ‘당분간‘, 그리고
‘곧‘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벌써 석달이 되어버렸다. 석달. 벌써 그렇게 됐나 하고 너는 놀라지만, 어제저녁 이 병원 수술실에서 너의배를 만져보던 의사도 임신이 석달쯤 된 게 아니냐고 말하지 않았는가. - P213

그때 위에서 계단 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포가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그 의사였다. 그는 상체를 꾸부리고 계단을 밟고 내려왔다. 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빛에 둘러싸여 그의 몸 윤곽은 불붙고있는 듯하다. 의사는 너에게 무슨 용무가 있는 듯이 보인다. 뭘까?
응접실 금붕어를 죽인 사실을 눈치챈 걸까? 다시 수술실에 가두고벌거벗기려는 걸까? 너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 P214

창녀 단골 의사인 저 남자가 두려웠다. 창녀 환자들 가운데서처녀 한명을 적발해놓고 그는 능청을 떨었던 것이다. "남자의 동의가 있어야지, 곤란한데" 하면서 너의 자초지종을 추궁했다. 비밀을파헤치고 말리라. 너의 아랫배에 잉태한 죄를 긁어내기 전에 죄의내력을 듣고 말리라. 너는 수술대의 써늘한 비닐 커버 위에 누워바들바들 떨었다. - P215

야근까지 하고 나면 사생활이라곤 전혀 없었죠. 이년 동안 노상 바쁘고 피곤했어요. 그러다가 공장 문이 덜컥 닫히자 갑자기 허망해지고만 거죠. 망연자실해서 괜히 실없는 웃음이 샐샐 새어나오고, 결국 옆자리에서 재봉일 하던 준식이와 같이 자고 말았어요. 열흘 뒤엔 같이 자취하던 동숙이 몰래 도망쳐나와 준식이와 합쳤어요. - P215

"참 허망한 얘기구먼. 공장 문은 닫히고 놈팽이는 군대 가고 돈은 떨어져, 또 고향엔 무조건 가기 싫지. 그럼 다 된 얘기 아냐? 조심하라구, 조심해. 이 동네 우리 단골 아이들 중에도 공장 출신이더러 있대지, 아마. 자, 이젠 마취약 기운이 퍼질 때도 됐는데.....
아가씨, 내 말 들려? 안 들려?" - P216

몽롱한 의식을 파먹는 포르말린 냄새. 의사의 말소리가 점점 불확실하게 멀어져갔다. 금속기구 부딪는 소리마저 먹먹하게 코 막힌 소리를 내고 골목길 쪽에 벌겋게 부풀어 있던 창녀 두어명의 웃음소리도 어렴풋이 멀어지고 통증. 아랫도리가 벗겨졌구나. 박속같이 마구 헤집어 우벼내버린다. 빡빡 긁어내버린다. 화끈거리는부젓가락으로 들쑤셔버린다. 난자당한 피투성이. 금붕어는 뽀드득밸이 터져 죽었어. - P216

진창을 조심하며 한참 걸어가다가 너는 제풀에 깜짝놀라며 멈춰선다. 거기가 준식이의 셋방으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벌써 디피점 앞까지 와버린 것이다. 내가 어느새 이 길로 들어섰나? 동숙이의 자취방을 찾아가는 길이었는데・・・・・・ 너는 슬며시 맥이 빠져버린다. 그렇다. 석달 동안에 이 골목길은 너의 무의식 속에 아주 찰거머리같이 달라붙어버린 것이다. 습관, 그 지겨운습관에 이제 너는 넌덜머리 난다. 어떻게 할까? 그 셋방은 오늘 판사람이 세 들었을 텐데.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주인집에 맡겨둔 옷가방을 찾아 나올까? 동숙이를 만나보고 모레쯤 찾아갈 생각이었는데…………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가방을 들 힘이 있을지 몰라.  - P220

우린 석달 동안 방에 갇혀 맨날 그짓만 했단다. 정말 지겨웠어. 너한테로 얼마나 돌아가고 싶었다고. 이 골목에서 도망치고 싶었어. 그러나 그게 안되더라. 나중엔 될 대로 되라, 아주 자포자기였지. - P221

여중생 교복을 한 너의 얼굴은 사진관 주인에게 빼앗기고 그 진열장이 자리 잡은 시외버스 정류장앞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빼앗기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그 얼굴은 수많은 시선에 뒤얽혀서 더러운 모욕을 받고 있었다. - P221

‘모친위독급히귀향바람부친‘. 전보 내용이 너무 엉뚱해서너는 믿지 않았지만 부친이 당장이라도 상경하여 들이닥치면 어쩌나 하고 노상 근심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사방에서 쑤군거리며 몰래 불러가는 너의 아랫배를 손가락질했다. 동숙이도 한패가 되어너를 비웃는 것 같았다. 너는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고 싶었다. 준식이의 자취방에서, 이 골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 P222

그것은 밤마다 세번씩 준식이의 자취방을 뒤흔들던 소리였다.
아무리 그짓에 몰두해도, 한밤중 잠에 취해 있어도 허사였다. 벽에걸린 옷가지들은 유령처럼 춤을 추고, 턱은 덜덜 떨리고, 육중한 기차바퀴가 거침없이 굴러와서 허연 강철빛의 모서리로 너의 벌거벗은 가슴을 가르고 질주하는 것이었다. - P223

동숙이의 자취방으로 가는 길은 넓은 공터 가운데로 뚫려 있다.알싸한 쓰레기 냄새. 어둠속에서 연탄재들이 발에 툭툭 차인다. 동숙이를 만나면 먼저 무슨 말을 할까? 뭐라고 거짓말을 둘러대지?사실대로 말할까봐. 너무 피곤해. 거짓말할 힘도 없어. 따뜻한 아랫목에 동숙이랑 나란히 누워 언 등허리를 녹이고 싶어. 따뜻한 눈물을 흘리고 싶어. 동숙아, 나 많이 다쳤나봐 나 좀 만져줘. 이 겁먹은응어리를 으깨뜨려줘. 난 금붕어를 죽여버리고 말았어. - P224

"거기서 뭘 하지?" 주인아저씨였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오랜만이구먼, 인숙이."
"동숙일 찾아왔는데요."
"아니, 몰랐나? 이사 간 지 두달도 넘었는데." - P224

"혹시 시골 내려간다고 안 그랬어요?"
"그런 말은 없었는데…………… 아마 서울 어디에 눌러 있겠지."
너는 인사하고 돌아선다.
"공장도 쉬는데 시골이나 내려가지 않고...... 쯧쯧, 몸조심들 해야지."
뒤에서 주인아저씨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뜻에서몸조심하라는 말이리라. 몰래 눈물이 흘러내린다. 벌써 결딴나고말았어요. 몸이 결딴났어요. - P225

누군가 몸에 손을 댄다. 순간적으로 손바닥 감촉에 저항하며 전신이 뻣뻣해진다. 좀 옆으로 비켜선다. 그래도 손은 따라온다. 넓게편 손바닥이 바들바들 떨면서 꾸준히 움직인다. 손은 허리에서 허벅다리에 이르는 만곡한 선을 정확하게 더듬어 드러내고 있다. 부르르 경련이 일어난다. 다시 몸을 옆으로 움직인다. 그래도 손바닥은 따라왔다. 너는 지겨운 듯 축 늘어져버린다. 동숙아, 동숙아.
그러다가 너는 더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몸을 흔들어댄다.
남자 손이 떠났다. 그 흉측스럽고 뻔뻔한 얼굴을 찾으려고 고개를돌린다. 그러나 주위에는 모두 하나같이 무표정한 얼굴뿐. 그 엉큼한 손은 어디로 사라졌나? 승객들은 허공의 우연한 한점 혹은 앞사람의 뒤통수에 눈을 둔 채 멍청하게 굳어져 있다. - P227

"아가씨" 옆에서 귓전을 할퀴는 낮은 목소리. 조바심이 일어났다. 꿈결엔 듯 밀려온 이 목소리에 누군가 딴 사람이 대답해주기를기다린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선택한 건 역시 너다.
"핸드백이 열렸네요." 원통형의 털모자를 쓴 젊은 여자다. 정말 핸드백은 붉은 속을 내보이며 입을 아, 하고 벌리고 있다. 죽은 금붕어를 싼 흰 손수건! 얼른 스냅을 잠갔다. 딱, 하는 울림 소리. 누가 핸드백을 열어보았구나. 아까 그 사내다. 아까 몸을 만지던 그사내는 단순한 치한이 아니었구나.
"뭐 잃어버린 거 없어요?" 여자는 더 참견하려고 든다. - P228

동숙아, 난 금붕어를 죽이고 말았어. 젖꼭지는 까맣게 타버리고. 아기가 죽었어. 아랫배에 찬바람이 가득 찬 휑한 공동, 우벼낸 박속같이 텅 비어버렸어. 동숙아, 허전해 죽겠네. 이젠 버스를 내려야겠어. 어디 산으로 가서 이금붕어를 깨끗한 흙으로 묻어주고 올래. 그러나 몸은 점점 무거워졌다. 머릿속은 백열된 뇌수, 뇌수가 두개골 벽에 아프게 부딪치는소음으로 가득 차 있다. - P229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빛을 받아 아까 본 푸줏간같이 시뻘겋다. 실컷두들겨 부숴버렸구나. 아주 작살내버렸어. 도살칼로 마구 난도질한 거야. 흰 가운에 튄 핏방울이 또 활활 타오른다. 아랫배에 출혈로 새하얘진 공동, 그 죽어버린 폐허에 다시 깊은 통증이 왔다. 폐허다. 폐허다. 이 봄에 저 집터에 풀씨가 눈뜨기 전에 사람들은 피치로 봉해버릴 거다. 물샐틈없이 치밀한 아스팔트로 포장되리라.
거기엔 생명이라곤 눈곱만큼도 없게 되리라. 고무타이어와 피치가맨몸으로 부대끼는 곳, 세우지 못할 미친 속력만이 난무할 거다. 그건 또, 죽음이야. 젖꼭지는 거떻게 죽어버리고・・・・・・ 동숙아, 아기가죽었어...... - P231

"아가씨, 제발 저것 좀 집어줘. 내 목발......" 너는 무서워서 손을 힘껏 뿌리친다. 막 후닥닥 뛰어 달아나려는데 이게 웬일인가. 사내는 시멘트 벽에 등을 모질게 쏠리면서 허재비같이 모로 픽 쓰러진다. 텅 빈 바짓가랑이 한쪽이 허공에 펄럭거린다.
외발이었구나. 오금이 바싹 오그라든다. 발이 얼어붙은 듯 뗄 수 없다. 그때 굴다리 안으로 두어사람이 들어서는 기척이 났다. -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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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규는 혼자서 빈집을 지키며 외출한 아내를 기다렸다. 마루 쪽문지방을 베고 누워 바라보니까 마당 풍경은 마루 안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보였다. 밖은 오동나무의 넓적넓적한 잎사귀들이빼곡 들어차 있어서 햇빛은 좀처럼 새어들지 않는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잎사귀들이 서걱거리며 술렁일 때만 잎 틈새로 찢어진햇빛이 섬광처럼 번쩍번쩍 파열했다가 사라질 뿐이다. 햇빛을 받은 잎사귀들은 얼핏 보면 5월의 신록처럼 반투명의 엷은 초록색으로 변하고 그물처럼 뻗어 있는 엽맥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 P168

보나 마나 창틀에는 이 벌레들이 싼 똥이 석탄가루같이 까맣게떨어져 있으리라. 어제 아내는 드디어 비명을 질렀다.
"이젠 당신이 좀 어떻게 해봐요. 벌레를 잡든지 나뭇가지를 치든지 벌레들이 온 데다 기어다녀요. 방 안에도 들어오고…………"
그러나 석규는 제 방에 틀어박힌 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P169

잎사귀를 따내려고 무용수처럼 뒤꿈치를 들고 팡팡한 궁둥이를 얄기죽거리는 모양을 창 너머로 바라볼 때마다 석규는 가슴이조마조마해지는 것이었다. 가슴에 안으면 뼈마디가 아프게 느껴질정도로 깡마르던 몸이 어느새 저렇게 살이 붙었나? 허리에, 허벅지에 살집이 투덕투덕 붙어 핫팬츠 밖으로 탱탱해진 아내의 몸매에석규는 적이 놀라는 것이었다. 눈부시게 희디흰 허벅지의 살빛은여차하면 당장 불타오를 휘발유처럼 위태위태해 보일 지경이었다. - P170

석규가 늪에 빠진 듯 이러한 무력감에 사로잡혀 옴짝달싹 못한지가 벌써 한달이 넘어 된다. 처음엔 일시적인 심적 현상이겠거니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시간이 가도 도무지 호전될 기미가없었다. 한밤중에 그 몇번이나 아내 앞에서 수치스러운 꼴을 당했던가. 아무리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애썼지만 도무지 일을 치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구슬리고 달래고 꼬집어도 그놈은 껍질 속에서 통 기어나오지 않았다. 노상 오뉴월의 가래엿처럼 휘늘어져 있을뿐이었다. - P170

이렇게 징그러운 수컷같이 생겨먹은 나무에 핫팬츠 바람으로 매달려 있는 아내를 바라보는 일은 결코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아내는 이 이상한 동물과 썩 죽이 맞는 써커스단의 발랄한 조련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아내의 흰허벅지가 굵은 나무줄기에 칭칭 감겨 있는 환각에 사로잡힐 때도있었다. - P171


이제 와서 벌레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그건 나무를밑동에서 싹둑 베어내버리는 것뿐이었다.
저 나무는 사년 전, 오랜 전세생활 끝에 이 두칸짜리 집을 사서이사 올 때 몸소 사다 심은 것이었다. 밑동이 종아리 굵기만 한 게다른 나무에 비해 퍽 실팍하고 값도 싸 보여서 사다 심었는데 그게알고 보니 개오동이었다. 단지 오동나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나중에 놀러 왔던 장모가 그렇게 일러주었다. 그러면서 개오동은 집안에 심는 것이 아니니 어서 뽑아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규는 미신이 많은 장모의 말을 믿지 않았다. - P172

그러니까 결국 나무 베기를 차일피일 미뤄온 것도 말하자면그의 무력감 때문이었다. 아내의 핫팬츠에 손이 가닿지 않은 것처럼 그의 손아귀엔 톱을 쥘 매가리가 없었다. 그건 또 뭐랄까, 셋방살이할 적 언젠가 당했던 연탄가스 중독처럼, 의식은 또렷하여 어서 방문을 열고 공기 맑은 밖으로 나가야지 나가야지 하고 애를 바득바득 쓰면서도 몸이 달싹하지 않는 무력감과 같은 것이었다. - P173

하기는 신학 저술 번역 외에도 다른 번역 일을 하고 있기는 했다. 그건 마르쿠제를 번역하는 일이었다. 청탁받아서 하는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중에 출판해볼 포부로 시작한 일도 아니었다. 그건 단지 석규 나름대로 생각해낸 독서 방법일 따름이었다. 처음 신문사를 그만둘 때 생각이 실직 기간이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지만.
그동안 독서나 열심히 해두자는 것이었다. 바쁜 기자생활이라 독서할 짬을 통낼 수 없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던지! 술 마시며 허송할 시간은 있어도 막상 독서할 시간은 없는 게 기자생활이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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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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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현대 공공조직 관점에서 본 「해룡 이야기」의 생존 투쟁과 피해자 명예 회복의 책무

1. 검토 개요

가. 검토 배경
ㅇ(검토배경) 「해룡 이야기」는 제주 4·3 이후 자식을 살리기 위해 가해자 측 권력에 속한 서북군과 살림을 차려야 했던 어머니의 비극과, 이를 수치로 여기며 고향을 부정한 아들 문중호의 내면을 다룬 작품임.
ㅇ(조직관점) 이 작품은 국가의 보호 체계가 무너진 극한의 위기 속에서 약자가 감당해야 했던 처절한 생존 투쟁을 보여주며, 그 생존의 대가를 개인의 도덕적 흠으로 전가해 버린 사회와 공공의 무책임을 드러냄.
ㅇ(핵심내용) 재난과 국가폭력 이후 공공조직이 피해자의 불가피한 희생을 외면하면, 생존의 무게는 피해자의 수치와 가족 내부의 낙인으로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줌.

나. 검토 방향
ㅇ(분석방향) 본 특별기고는 「해룡 이야기」를 현대 공공행정의 취약계층 보호 실패, 보호 체계 붕괴에 따른 생존의 사사화, 피해자 명예 회복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데 목적이 있음.
ㅇ(중점사항) 주요 검토 대상은 안전망 부재가 낳은 비극적 선택, 이용당하고 버려진 약자의 현실, 피해자 책임 전가와 2차 가해, 공공행정의 명예 회복 책무임.
ㅇ(핵심의미) 공공조직은 사태의 물리적 수습에 그쳐서는 안 됨. 약자가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했던 희생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는 일까지 책임행정의 영역으로 보아야 함.

2. 공공 안전망의 부재와 생존의 사사화

가. 극단적 생존의 벼랑 끝
ㅇ(생존상황) 남편을 잃고 굶주림과 성분조사의 공포 속에 남겨진 어머니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서북군과 1년 남짓 살림을 차린 것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방편이자 처절한 몸부림이었음.
ㅇ(안전망부재) 국가가 제공해야 할 최소한의 생명 보호와 구호 체계가 사라진 상황에서, 힘없는 개인은 생존을 위해 자신의 몸과 삶까지 내놓아야 했음.
ㅇ(핵심내용) 공공의 보호막이 사라진 재난 상황에서는 권력과 자원이 없는 사회적 약자가 가장 먼저 비참한 선택의 벼랑 끝으로 내몰림.

나. 공공조직의 약자 보호 역할
ㅇ(취약계층보호) 공공조직은 위기 상황 발생 시 평균적인 주민이 아니라 여성, 아동, 노약자 등 취약계층이 인간적 존엄을 잃지 않고 생존할 수 있도록 보호 대책을 먼저 작동시켜야 함.
ㅇ(행정책임) 생존을 위한 행정 구호는 단순한 식량 배급에 그쳐서는 안 됨. 피해자가 가해자나 외부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도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함.
ㅇ(핵심의미) 「해룡 이야기」는 사회적 보호망이 무너질 때, 생존의 책임이 가장 약한 사람의 몸과 삶에 전가될 수 있음을 보여줌.

3. 2차 가해와 피해자 책임 전가

가. 이용당하고 버려진 피해자
ㅇ(피해의실체) 어머니는 서북군의 보호 아래 편안한 삶을 누린 것이 아님. 그녀는 생존을 위해 그와 살림을 차렸지만, 부대가 육지로 이동할 때 버림받았고, 이후 평생 자격지심과 수치심 속에서 살아야 했음.
ㅇ(책임전가) 구조적 폭력과 가난이 만들어 낸 참상의 책임을 사회가 제대로 묻지 않을 때, 그 책임은 생존자인 어머니 개인의 도덕적 결함처럼 전가됨.
ㅇ(핵심내용) 가해자의 책임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고 공공의 개입이 부재한 사회에서는, 폭력의 결과가 피해자의 몫과 억울한 낙인으로 변질됨.

나. 공공행정의 성찰
ㅇ(면피행정경계) 현대 공공조직은 위기 대응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를 개인의 처신, 무능, 도덕성 문제로 축소하려는 행정 편의주의를 경계해야 함.
ㅇ(진상규명) 책임 있는 행정은 사건의 인과관계와 가해 구조를 투명하게 밝히고, 피해자가 부당한 사회적 비난과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도록 제도적 방어막을 마련하는 데 있음.
ㅇ(핵심의미)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 행정이 다시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릴 때, 피해는 한 번 더 반복됨.

4. 피해자 명예 회복과 인식 전환의 책무

가. 낙인의 내면화와 연대의 파괴
ㅇ(수치의대물림) 아들인 중호마저 어머니의 희생을 부끄러워하며 본적을 옮기고 고향을 부정하는 모습은, 억울하게 씌워진 사회적 낙인이 혈연과 공동체의 유대까지 훼손하는 과정을 보여줌.
ㅇ(기억의왜곡) 피해자가 자신의 생존 투쟁을 떳떳하게 말하지 못하고 평생 숨겨야 하는 상황은, 공공의 책임을 외면한 시대가 만들어 낸 사회적 상처임.
ㅇ(핵심내용) 물리적 복구가 끝났다고 해서 행정의 역할이 종료되는 것은 아님. 피해자를 향한 차별적 시선과 왜곡된 기억을 바로잡지 못하면 진정한 사회적 통합은 이루어지기 어려움.

나. 공공행정의 명예 회복 책무
ㅇ(사회적복권) 공공조직은 재난과 국가폭력의 피해자가 생존을 위해 치른 대가를 도덕적 수치로 남겨 두어서는 안 됨. 이들의 불가피한 희생을 공적으로 이해하고, 훼손된 명예를 회복시키는 작업에 나서야 함.
ㅇ(인식의전환) 희생자에 대한 편견을 지워내는 사회적 공론화와 올바른 역사적 진실 규명은 물질적 보상을 넘어선 현대 공공행정의 중요한 역할임.
ㅇ(핵심의미) 행정의 진정한 마무리는 사건의 수습이 아니라, 억울하게 낙인찍힌 피해자가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존엄을 회복해 주는 데 있음.

5. 종합 평가

가. 현대적 의미
ㅇ(공공책임) 「해룡 이야기」는 공공 시스템의 붕괴가 약자에게 얼마나 가혹한 생존의 대가를 요구하는지, 그리고 그 대가가 어떻게 피해자의 수치심으로 바뀌는지를 묻는 작품임.
ㅇ(조직교훈) 공공조직의 실패는 재난이나 폭력의 발생에만 있지 않음. 그 참상을 온몸으로 감당한 약자들을 외면하고, 그들에게 도덕적 굴레와 책임을 떠넘기는 순간 피해는 또 다른 방식으로 계속됨.
ㅇ(핵심의미) 공공조직은 위기 발생 시 취약계층의 생존을 보호해야 하며, 위기 이후에는 피해자의 명예와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까지 책임을 이어가야 함.

나. 최종 평가
ㅇ(종합평가) 「해룡 이야기」는 위기 앞에서의 보호망 공백, 가해자 측 권력의 이용과 방치,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어떻게 한 개인과 가족의 내면을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임.
ㅇ(최종정리) 현대 공공조직은 위기 상황에서 취약한 국민이 생존을 위해 인간의 존엄까지 내놓는 자리로 내몰리지 않도록 보호해야 함.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 이상 부끄러움 속에 숨지 않도록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이라는 국가의 마지막 책무를 다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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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삼촌 ㅣ 현기영 중단편전집 1
현기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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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보고] 현기영 중단편전집 1 『순이 삼촌』 중 「해룡 이야기」
: 생존의 대가를 어머니의 수치로 떠넘긴 시대와 아들의 뒤늦은 죄책감

1. 작품 개요

가. 작품의 기본 성격
ㅇ(작품성격) 「해룡 이야기」는 제주 4·3 이후의 상처가 한 개인의 고향 인식, 가족관계, 어머니에 대한 기억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다룬 작품임.
ㅇ(발표의미) 197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사건 당시의 학살 장면보다,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생존자들이 감당해야 했던 가난, 수치심, 가족 내부의 죄책감을 문학적으로 드러낸 작품임.
ㅇ(주요사건) 서울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문중호는 어머니의 상경 소식을 기다리다가, 고향 사람들과의 만남과 술자리 속에서 삼십 년 전 제주에서 겪은 기억과 어머니의 삶을 다시 떠올림.
ㅇ(핵심내용) 작품은 4·3의 폭력과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과 삶까지 내몰린 어머니, 그리고 그 어머니와 고향을 부끄러워했던 아들의 뒤늦은 죄책감을 보여줌.

나. 제목의 의미
ㅇ(해룡의상징) 해룡은 단순한 전설 속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 맞설 수 없는 거대한 폭력과 공포의 상징임.
ㅇ(폭력의은유) 해룡에게 먹히는 사람을 팔자소관으로 여기는 태도는, 실제 사람의 손으로 저질러진 역사적 폭력까지 어쩔 수 없는 운명처럼 받아들이게 만드는 방식과 닮아 있음.
ㅇ(핵심의미) 「해룡 이야기」라는 제목은 제주 4·3과 전후의 폭력이 해룡처럼 사람을 집어삼켰고, 그 피해의 흔적이 오래도록 가족과 고향의 기억 속에 남았음을 암시함.

2. 문중호의 현재와 고향 부정

가. 어머니의 상경과 불안
ㅇ(상경소식) 문중호는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전화에 신경을 쓰며 불안해함.
ㅇ(불안의성격) 어머니에 대한 걱정은 단순한 가족 걱정이 아님. 어머니가 올라온다는 사실은 중호가 애써 묻어 두었던 고향, 4·3의 기억, 어머니의 과거를 함께 불러냄.
ㅇ(핵심의미) 어머니의 상경은 중호에게 현재의 평온을 흔드는 사건이며, 잊고 싶었던 과거가 다시 찾아오는 계기임.

나. 서울 사람이 되려 한 중호
ㅇ(현재의중호) 중호는 서울에서 직장을 얻고 승진하며 도시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임. 그는 고향과 거리를 두고, 서울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함.
ㅇ(본적이전) 중호는 고향을 행정적으로도 끊어내려 했고, 실제로 본적을 아내 쪽으로 옮김. 이는 단순한 서류 정리가 아니라, 고향의 흔적을 자기 삶에서 지우려는 행위임.
ㅇ(고향혐오) 중호에게 고향은 그리운 장소가 아니라 가난, 소까이, 성분조사, 토벌군의 공포, 촌스러움과 수치심이 뒤엉킨 장소임.
ㅇ(핵심의미) 중호가 고향을 부정한 것은 단순한 출세욕 때문만이 아님. 그는 고향에 남은 폭력의 기억과 어머니의 상처까지 함께 외면하고 싶었던 것임.

3. 어머니의 생존과 수치

가. 어머니의 자격지심
ㅇ(자격지심) 어머니는 중호에게 늘 미안해하고 어려워하는 태도를 보임. 중호는 그것이 삼십 년 전 서북군과 살림을 차렸던 일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음.
ㅇ(상처의성격) 어머니의 자격지심은 단순한 성격이나 체면의 문제가 아님. 남편을 잃고 아이들을 살려야 했던 상황에서 서북군과 1년 몇 달 동안 살림을 차릴 수밖에 없었고, 그 일이 어머니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수치처럼 남은 것임.
ㅇ(핵심의미) 어머니가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수치로 만들고 그 수치를 피해자에게 떠넘긴 시대가 문제임.

나. 서북군과의 살림, 생존의 마지막 수단
ㅇ(생존상황) 어머니는 4·3의 폭력 속에서 남편을 잃고 아이들을 살려야 했던 사람임. 고향은 불타고, 성분의 공포는 남아 있고, 먹고살 길은 막혀 있었음.
ㅇ(살림의의미) 어머니가 서북군과 살림을 차린 것은 도덕적 타락으로 볼 일이 아님. 그것은 죽음과 굶주림을 피하고 자식을 살리기 위해 몸과 삶까지 생존의 마지막 수단으로 내몰린 결과였음.
ㅇ(버림받은처지) 그러나 서북군은 부대가 육지로 옮겨갈 때 어머니를 버리고 떠남. 어머니는 그 뒤 수치심 때문에 시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친정으로 향함. 이는 어머니가 가해자가 아니라, 이용당하고 버려진 피해자였음을 보여줌.
ㅇ(생존의의미) 작품은 어머니의 삶을 도덕적 흠으로 재단하지 않고, 폭력과 가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감당해야 했던 생존의 대가로 읽게 함.

다. 아들의 죄책감
ㅇ(아들의수치심) 중호는 어머니의 과거와 고향의 흔적을 부끄러워했고, 그 기억을 자신의 삶에서 지우려 함.
ㅇ(뒤늦은자각) 그러나 그는 점차 어머니의 삶이 부끄러운 가족사가 아니라, 자신과 가족을 살리기 위한 처절한 생존의 결과였음을 깨닫게 됨.
ㅇ(핵심의미) 중호의 죄책감은 어머니가 부끄러운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머니의 생존을 수치로 받아들이고 그 수치를 어머니에게 되돌려 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됨.

4. 제주 4·3과 고향의 상처

가. 소까이와 폐허가 된 고향
ㅇ(소까이기억) 중호의 고향은 군 소개작전에 따라 소각되고 폐허가 된 공간으로 제시됨.
ㅇ(폐허의이미지) 불탄 마을, 사람이 살지 않는 집터, 썩은 양식,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흔적은 고향을 그리움의 장소가 아니라 상처의 장소로 만듦.
ㅇ(핵심의미) 작품 속 고향은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국가폭력과 전후 혼란이 한 개인의 내면에 남긴 깊은 흉터임.

나. 성분조사와 몸에 남은 공포
ㅇ(성분조사) 작품에는 소개민들을 모아 성분을 조사하는 장면이 나타남. 사람들은 어떤 쪽으로 분류될지 모른 채 공포 속에 놓임.
ㅇ(공포의기억) 중호가 떠올리는 것은 분노보다 겁에 가까움. 피 묻은 흰 저고리, 시푸른 군복, 토벌군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몸의 감각으로 되살아남.
ㅇ(핵심내용) 4·3의 상처는 머리로 정리된 과거가 아니라, 몸이 먼저 기억하는 공포로 남아 있음.

다. 아버지의 죽음과 흔한 죽음
ㅇ(아버지의죽음) 중호의 아버지는 4·3의 폭력 속에서 죽음을 맞은 인물로 제시됨.
ㅇ(죽음의보편성) 중호는 그 죽음이 아버지에게만 닥친 특별한 죽음이 아니라, 당시 흔하게 널려 있던 젊은 죽음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함.
ㅇ(핵심의미) 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죽어갔다는 시대의 참혹함을 드러냄.

5. 종합 평가

가. 작품의 의의
ㅇ(작품의의) 「해룡 이야기」는 제주 4·3 이후의 상처를 직접 학살 장면보다, 고향을 부정한 아들과 살아남기 위해 몸과 삶을 내몰린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는 작품임.
ㅇ(문학적의미) 작품은 폭력의 피해가 사건 당시의 죽음에만 머물지 않고, 삼십 년 뒤의 가족관계, 고향 인식, 수치심과 죄책감 속에서도 계속 이어짐을 드러냄.
ㅇ(핵심의미) 이 작품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덧씌워진 수치와, 그 수치를 부끄러워한 자식의 죄책감을 통해 4·3 이후 삶의 깊은 내상을 보여줌.

나. 최종 평가
ㅇ(종합평가) 「해룡 이야기」의 핵심은 어머니의 과거를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데 있지 않음. 더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왜 그런 자리까지 내몰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아들이 왜 그 어머니를 부끄러워하게 되었는지를 묻는 데 있음.
ㅇ(핵심의미) 살기 위해 서북군과 살림까지 차린 어머니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작품은 이 질문을 통해 가난과 국가폭력, 성분의 공포와 생존의 무게를 어머니 한 사람의 도덕적 흠으로 돌릴 수 없음을 말함.
ㅇ(최종정리) 「해룡 이야기」는 고향을 버리고 서울 사람이 되려 한 중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가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어머니의 이야기임. 작품은 중호의 뒤늦은 죄책감을 통해, 피해자를 부끄러워한 것은 자식의 잘못이기 전에 피해자에게 수치를 떠넘긴 시대의 잘못이었음을 드러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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