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이 지는 것은 여물고자 함이니 복사꽃

[연재] 구름에 달 가리운 방금 전까지 인간이었다 1화 | 미야베 미유키 저/이규원 역

지방도시에 출장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이와사 쇼조는 서른둘의 젊은 나이였다. 외동딸 미쓰하의 새 신부 모습은커녕 란도셀초등학생용 책가방을 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운명은 쇼조에게 잔혹했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면서도 멋지게 성장하여 아키코를 만나 결혼하고 미쓰하도 태어나 마침내 행복해졌다 싶었는데, 음주운전 차량에 목숨을 빼앗긴 것이다. 당시 아키코는 쇼조가 너무나 불쌍해서 남편을 여읜 슬픔에 빠지기보다 내내 분노해 있었다.

두 사람은 결혼하고 반년 만에 미쓰하를 얻었다. 조금 성급했어, 아직 모아 놓은 돈이 얼마 안 돼─아키코는 초조했지만 쇼조는 크게 기뻐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이 진짜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만세 삼창을 하는 장면을 아키코는 처음 보았다.

“저는, 유 상이 아저씨라고 해도 변함없이 좋아했을 거예요.”

그 순간 아키코는 운명의 경보기 소리를 들었다. 딸의 연애를 막지 못한 어머니 귀에만 울려 퍼지는 날카로운 경고음을.

교제하고 2년 2개월 만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스물두 살 신부와 서른 살 신랑. 기념사진만 찍고 식은 올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어쩌면 진짜 합격할지도 몰라. 사악한 마법에 늘 따라다니는 주문이다.

복숭아꽃 가지에서 꽃잎 여러 장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세계의 한구석이 부서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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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최초의 생명이 대략 40억 년 전 원시 지구의 바다나 연못에서 태어났다고 알고 있다. 최초의 생물은 오늘날의단세포 생물만도 못한 것이었다. 단세포 생물은 고도로 정교한 형태를구비한 어엿한 생물이다. 생명의 첫 걸음은 이보다 훨씬 보잘것없는수준에서 시작했다. - P80

사람은 100조 개가량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니까 사람 한 명 한 명은 수많은 생활 공동체가 모여서 만들어진 또 하나의 거대한 군집인 셈이다. - P82

성性은 대략 20억 년 전부터 생긴 듯하다. 그 전에는 새로운 종의 출현이 무작위적 돌연변이의 축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유전 설계도의 글자를 한 글자씩 바꾸어 돌연변이를 만들고 그것을 또 시험해야 했으므로, 진화는 고통스러우리만큼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 P82

한때 지구상에 번성했던 동식물들 중에는 이렇게  완전히 사라진 예가 많이 있으며, 현재 지구에서 볼 수  있는 생물들이 물론 과거에 모두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오래된 암석과 화석 가운데 우리와 같은 동물들은 눈을 씻고봐도 찾을 수가 없다. 종들은 잠깐 나타나 그럭저럭 살다가 완전히 멸종하고는 한다. - P85

진화는 돌연변이와 자연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DNA 중합체효소가 복제 과정에서 실수를 범하면 돌연변이가 생긴다. - P91

인간 세포 하나에 들어 있는뉴클레오티드의 총수는 대략 100억개나 된다. 어마어마한 수인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100억 개 중의 단 하나가 그렇게 큰 차이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다른 뉴클레오티드들에서 생긴 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하다. - P92

더욱 중요한 점은 핵산 정보를단백질 정보로 바꾸는 데 나무와 사람이 동일한 설계도를 사용한다는사실이다. 이 점에 있어서 지상의 모든 생물들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생명 현상이 보여 주는 분자 수준에서의 동질성으로부터 우리는 지상의 모든 생물이 단 하나의 기원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 P93

나무, 사람, 아귀, 심지어 변형균과 짚신벌레 같은 지구의 모든 생물이 과거로올라가면 단 하나의 조상으로 수렴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생명의기원인 바로 그 물질은 지구 생성 초기에 과연 어떻게 만들어질수있었을까?

지금까지 그 누구도 원시지구의 기체와 물을 시험관에 함께 넣어각종 반응을 겪게 한 다음, 거기에서 무엇인가 꼬물거리는 것이 기어나오게 한 적은 한번도 없다. - P95

생물학은 물리학보다 역사학에 더 가깝다. 현재를 이해하려면 과거를 잘 알아야 하고, 그것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아야만 한다. 역사학에 예견론이 없는 것처럼 생물학에도 확립된 예견론이 없다. 이유는 양쪽 모두 같다. 연구 대상들이 너무 복잡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P103

그러나 생물학과 역사학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타자他者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 P103

외계 생명에 관한 단 하나의 예만 연구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하나가 아무리 미미한 수준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물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와 다른 생물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외계 생물에 대한 탐구가 중요하다고 누구나 말하지만, 우리는 외계 생명을 찾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현실적 어려움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계의 생명은 우리가 추구할 궁극의 목표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 P103

우리는 이제껏 지구라는 작은 세상이 들려주는 생명의 음악만 들어 왔다. 이것은 우주를 가득 채운 생명들이 연주하는 푸가의 한 성부만을 들어 온 셈이다. 자 이제 저 웅장한 우주 생명의 푸가의 남은 성부들에 귀를 기울여 보자.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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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어보는 긴 봄날의 소품, 짧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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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문 안에서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유리문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월동 준비를 해놓은 파초와 붉은 열매가 매달린 낙상홍 가지, 멋없이 치솟은 전신주가 곧바로 눈에 들어오고, 그 밖에 특별히 늘어놓을 만한 것은 없다. 서재에 있는 나의 시야는 지극히 단조롭고 아주 좁다.

마음이 편치 않아 독서도 별로 하지 않는다. 그저 앉았다 누웠다 하며 하루하루를 흘려보낼 뿐이다.

좁은 나와 넓은 세상을 가로막고 있는 유리문 안으로 가끔 사람이 들어온다. 어떤 때는 뜻밖의 인물이 들어와 내가 예상치 못한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나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런 사람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조차 있다.

유리문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나 같은 사람은 신문에 얼굴을 들이밀지도 못할 것 같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정치가나 군인, 실업가나 스모 팬을 밀어내고 쓰는 셈이다. 나 혼자서는 도무지 그럴 만한 담력이 생기지 않는다.

그는 음침하게 쓴웃음을 짓고 있는 내 사진을 보내주었지만, 그 사진을 싣는다던 잡지는 결국 보내지 않았다.

아이들은 내게 강아지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졸랐다. 나는 ‘헥토르’라는 대단한 이름을 아이들의 친구에게 지어주었다.

존은 함부로 사람을 무는 버릇 때문에 결국 맞아 죽고 말았다.

원목으로 된 작은 나무 묘비를 사오라고 해서 ‘가을바람이 들리지 않는 땅에 묻어주다.’라는 글귀를 적었다.

"산다는 것을 인간의 핵심이라 생각한다면 그대로 살아가도 지장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나 고귀함을 근본 의의로 놓고 인간을 평가한다면 문제가 달라질지도 모르지요."

숨 막힐 듯 괴로운 이야기를 들었던 나는 그날 밤 오히려 인간다운 흐뭇한 기분을 오랜만에 경험했다. 숭고한 문학작품을 읽은 후의 기분과 같은 느낌이었다. 유라쿠자 극장이나 제국 극장에 가서 뻐기고 앉아 있던 내 예전 모습이 공연히 한심하게 느껴졌다.

불쾌함으로 가득한 인생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나는 언젠가 한 번은 도착해야 할 죽음이라는 경지에 대해 늘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을 삶보다 편안한 것이라 믿고 있다. 때로는 그것을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지상 최고의 상태라고 생각할 때도 있다.
"죽음은 삶보다 고귀하다."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이라면 죽으면 되겠네요."
아무리 냉정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입에서도 이런 말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삶보다 죽음을 귀하다고 믿는 나의 희망과 조언은 결국 불쾌함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것을 초월할 수 없었다. 더구나 내게는 그것이 실천적인 면에서 나 자신이 평범한 자연주의자라는 것을 입증한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가만히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어지간히 점잔 빼고 앉았네."
그때 친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입에서 ‘응’이라는 대답이 새어나왔다. 어째서 나를 비꼬는 말을 스스로 긍정하는 대답이 그다지도 자연스럽고 간명하고 지체 없이 목구멍에서 술술 잘도 나온 걸까. 그때 나는 투명하고도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거 돋보기 아닌가? 먼 곳이 용케 보이나봐."
"뭐 그냥, 차부도(差不多)야."
나는 ‘차부도’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는 ‘별 차이가 없다’는 중국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날 밤 돌아오는 길에 전차에서 헤어진 친구는 다시 멀고 추운 일본 영토의 북쪽 끝자락으로 떠났다.
나는 친구를 떠올릴 때마다 다쓰진(達人. 학문이나 기예 등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그의 이름을 생각한다.

유리문 너머로 당장이라도 쓸쓸한 비가 내릴 것 같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여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나는 모든 인간은 날마다 창피를 당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조차 할 때가 있다. 그러니 이상하게 쓴 글자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정도의 일쯤은 굳이 하려 들면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렇게 보였어요. 내장의 위치까지 잘 정돈되어 있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어요."
"내장이 그렇게 잘 조절되고 있다면 몸이 이렇게 내내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몸이 아프지는 않아요."
그때 여자가 갑자기 자기 이야기를 했다.
"그건 당신이 나보다 훌륭하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이렇게 옛날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자주 떠올린다.

내가 시키(마사오카 시키. 시인이자 일본어 연구가)가 살아 있을 때 ‘경종과 나란히 선 높은 겨울나무여’라는 시구를 지은 것은 사실 그 경종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 인간의 수명은 정말 불가사의하다고 생각한다. 병치레가 잦은 나는 어째서 살아남은 걸까 생각해본다. 그 사람은 어떤 이유로 나보다 먼저 죽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럴 수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이 죽기 전까지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연고가 있는 이 마을 이름은 너무 익숙하게 들으며 자란 탓인지 나의 과거를 불러내는 그리운 울림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서재에 혼자 앉아 턱을 괸 채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 조각배처럼 마음을 자유롭게 놓아두면 이따금 내 연상이 ‘기쿠이초’라는 네 글자와 딱 마주하게 되고 그곳에서 한동안 배회하는 일도 생긴다.

구스오코 씨가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은 내가 위장병으로 병원에 입원 중일 무렵이었다. 전화로 부고에 내 이름을 넣어도 되겠냐는 문의가 왔던 것도 기억난다. 나는 병원에서 구스오코 씨를 위한 추도시를 지었다.
"국화란 국화는 모두 던져 넣으리, 그대 관 속에."

어리석은 나는 친부모를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믿고 얼마나 많은 세월을 보냈던가. 누가 물어본다 해도 도통 모르겠지만 어느 날 밤 이런 일이 있었다.

"저는 마치 독일이 연합군과 전쟁을 하는 것처럼 병과 전쟁을 하는 중입니다. 지금 당신과 마주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은 천하가 태평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참호에 들어가 병과 대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 몸은 난세입니다. 언제 어떤 변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로 내 태도를 정리하려 한다면 다시 일종의 고민이 생긴다. 나는 나쁜 사람을 믿고 싶지 않다. 또 착한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 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악인도 아니고 또한 모두 선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의 태도도 상대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돼야 할 것이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 안 하시지만 무서운 면이 있어."
나는 어머니를 평한 형의 이 말을 지금도 어둠침침한 기억 저편으로부터 밝은 곳으로 꺼내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기억은 물에 녹아 번지기 시작한 글씨를 급하게 원래 형태로 되돌린 것 같은 절박한 단편에 불과하다.

긴 봄날의 짧은 글
(永日小品)

한참 햇살이 비치는 곳을 바라보는데
눈 밑에 아지랑이가 낀 것처럼 봄의 단상이 넘쳐난다.

《영일소품》은 1909년 1월 <설날>이 《아사히신문》에 게재되고, 1월 14일부터 3월 14일까지 《오사카 아사히신문》에 24편이 게재되었다.
그중 14편은 《도쿄 아사히신문》에도 게재되었다.

주인아주머니로 말하자면 눈이 푹 패고 매부리코에 턱과 볼이 뾰족해 날카롭게 생긴 여자였는데 언뜻 보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여성성을 초월했다. 신경질과 비뚤어짐, 미련함, 의심 같은 온갖 약점들이 부드러운 생김새를 마구잡이로 농락한 결과 이런 비뚤어진 인상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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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생존과 번식, 기생에 특화된 식물이지요. 더스트시대의 정신을 집약해놓은 것 같다고 할까요. 악착같이살아남고, 죽은 것들을 양분 삼아 자라나고, 한번 머물렀던 땅은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한자리에서 오래 사는것이 아니라 최대한 멀리 뻗어 나가는 것이 삶의 목적인……… 그 자체로 더스트를 닮은 식물이지요."

"아영 씨의 추측이 맞아요. 모스바나는 결코 만병통치약이 아니었어요. 제대로 된 약조차 아니었고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약이라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어야 했어요. 당신이 추정한 것처럼 모스바나는 멸망의 시대와 긴밀한 관련이 있지요. 하지만 그건, 아영 씨가 예상한 방식대로는 아니랍니다."
나오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싱긋 웃었다.

무작정 여기 머물 수는 없다. 어떤 곳이든 열흘 이상 머무르지 않는 것이 믈라카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사람이지내다보면 반드시 그 티가 나고, 그러면 사냥꾼들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아마라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새벽마다 폐를 토해낼 것처럼 기침하는 아마라를볼 때마다 나는 랑카위의 연구원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기회가 있을 때 제대로 되갚아주고 나왔어야 했는데.

"저 사람들, 믿지 마. 어떻게 돌변할지 몰라."
나는 아마라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았다. 우리가여태까지 당한 일들을 떠올렸다. 이유 없는 친절은 없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도 없다. 그러니 호의를 최대한이용하고, 그들이 무언가를 바라기 시작할 때 도망쳐야했다.

그 망할 실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대신 다른것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더스트가 아닌, 그밖의 모든 것들이. 그래도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성종이 아닌 사람들, 그러면서도어리고 약한 사람들은 더 많이 죽었다. 그 모든 것이, 나는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현실이.

아마라의 마음을 알 것 같으면서도 외면하고 싶었다.
아마라는 이제 그런 소문에 매달릴 만큼 내몰려 있었다.
소문 속 마을이 한때 정말로 존재했더라도 오래가지 못하고 무너졌을 것이다. 돔 시티와 작은 마을들을 불문하고모든 공동체들이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안전한 곳, 희망이 있는 곳 따위는 없었다.

"어떠냐? 여기가 너희가 찾던 곳이다."

"우리는 프림 빌리지라고 부르지. 기대했던 것보다 조촐하지 않나. 그냥 작은 마을일 뿐이야."

"나도 저 밖에선 그랬었어."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왜 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른들은굳이 학교 같은 것을 만든걸까 생각해보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대체로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반면, 칠판앞에 선 어른들은 늘 의욕에 가득차 있었다. 나는 이것이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아휴, 넌 역시 겁이 많구나? 나무 아래에서 입만 벌리고 열매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면 굶어 죽는 거라고. 나TETRIE무를 타고 올라가 열매를 쟁취하는 사람만이 이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얼마 전부터 정찰 드론들이 자꾸 숲 경계에서 외부인을 발견한다는 거 알아? 나도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한데, 어른들은 우리한테 자세한 건 말 안 해주잖아. 대니도 자꾸 얼버무리기만 하고. 혹시 높은 데 올라가면 뭐 다른 게 보일까 그런 생각도 했었지."

"눈에 보이는 건 떠돌이들이 이미 건져가고 폐품만 남은 곳을 목적지로 삼지. 프림 빌리지에 대해 누군가 눈치채면 곤란하니까. 그런 폐허를 걷다보면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어, 타인의 무덤을 파헤쳐서 이곳의 삶을 쌓아올리고 있다는 생각. 더스트 폴 이후로 세상은 예전보다도더 모순으로 가득해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수 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과 삶이 한 장소에 공존하는 어떤 기묘함. 어쩌면 이곳 프림 빌리지도 그런 장소일 수 있었다. 더스트 폴 이전에 여기 살았던 이들의 흔적일지도모르는, 오래된 옷가지나 낡은 가재도구를 발견할 때면나는 그들이 어디로 갔을지, 지금 살아는 있을지 짐작해보곤 했다.

"하지만 난 무엇보다 네가 살아남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모든 건 결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니 네가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해야겠지. 그렇지만 사실 잘 모르겠어. 미어캣의 칼날이 닳아 있어서 넌 죽지 않았던 거야. 날카로웠다면 죽었겠지. 폭탄 로봇일 수도 있었어. 나오미, 다음에는 도망쳐야 해. 알겠지? 분명 네가 마을을 구한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공개적으로 알려줄 순 없지. 그랬다간 레이첼이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눈치를 챌 테니까. 연금술사들이 제자에게 비법을 조심스레 전하듯이 그렇게 알려줘야해. 지금여기가 바로 그 고대의 비법 전수실인 거지. 네가 첫 제자인 거고. 가능하다면 다음 제자들도 가르쳐야겠지만."

"제조에 필요한 재료와 무게, 과정을 정확히 기록하는것이 과학의 원칙이지. 하지만 이건 달라. 감추는 것이 널구할 테니까. 지금은 그런 시대야. 원칙이 네 약점이 되고, 편법이 네 무기가 되지. 이 비참한 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네 머릿속에 제조법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어야 해.
남이 볼 수 있는 기록은 절대 남기지 마. 아무리 신뢰할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숨기는 게 좋아."

"제 생각은 분명해요. 우린 프림 빌리지를 지켜야 해요. 이 마을 밖은 아주 끔찍해요. 전 돔 시티의 사람들이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 봤어요. 그들은 약한 사람들을위해 절대 자리를 내어주지 않아요. 인류를 구하겠다는생각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더스트에 버티는식물들을 가져가면, 그들은 횡재를 했거니 생각하며 뺏어가겠죠. 그러고는 우리를 죽일 거예요."

"돔 안의 사람들은 결코 인류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타인의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던사람들만이 돔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인류에게는 불행하게도, 오직 그런 이들이 최후의 인간으로 남았지. 우린정해진 멸종의 길을 걷고 있어. 설령 돔 안의 사람들이 끝까지 살아남더라도, 그런 인류가 만들 세계라곤 보지 않아도 뻔하지. 오래가진 못할 거야."

"그래도 우린 식물들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해."
"왜요?"
지수 씨가 짧은 침묵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거야."

푸르게 빛나는 먼지들이 공기중에 천천히 흩날렸다. 나는 숲을 푸른빛으로 물들이는 그 식물들을 보며 고통은늘 아름다움과 같이 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면 아름다움이 고통과 늘 함께 오는 것이거나. 이 마을에 삶과죽음을 동시에 가져다준 이 식물이 나에게 알려준 진실은그랬다. 어느 쪽이든, 나는 더이상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에 마냥 감탄할 수는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저에겐 여기 하나면 충분한데요. 또다른 프림빌리지를 만들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곳,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의미 없는걸요."

나는 온실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그 온실은 신전처럼보였다. 그러나 이제야 도달한 결론은, 신전을 지킬 사람들이 흩어지면 그 신전도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그곳의 모든 이야기들이 막을 내리던 날, 이별은 갑자기 찾아왔다. 그러나 나는 프림 빌리지에 있는 내내 그 마지막날을 상상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영은 나오미의 증언에 기반해, 그 온실 공동체가
‘프림(Forest Research Institute Malaysia, FRIM)‘이라는, 과거 쿠알라룸푸르 북서쪽의 국립공원 지역에 있었던 산림연구소 마을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우리가 결국만나게 된 이유도요. 저는 운명을 믿지는 않지만, 같은 것을 쫓는 사람들이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 믿거든요. 우리는 그 기이한 푸른빛에 이끌렸고, 또 같은 사람을 통해 연결되어 있네요. 그 사람의 생사를 알게 되면꼭 바로 알려주세요.‘

어떤 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바탕으로 결론을 내린다. 혹은 관측으로부터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확한 분석을 거쳐 귀납적으로 하나의 이론을이끌어낸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어떤 기묘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하고, 그현상의 근거를 끈질기게 쫓아가보는 것 역시 하나의 유효한 과학적 방법론일지 모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지 않으면발견하지 못할 놀라운 진실을 그 길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식물들은 아주 잘 짜인 기계같단다. 나도 예전에는 그걸 몰랐지. 나에게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걸 알려준 녀석이 있었거든.‘

더스트에 취약한 사람들은 진작 다 죽었으니 살아남은사람들은 약하게라도 내성이 있었고, 그러니 몇 년은 살아남을 법도 했는데, 그런 공동체는 대부분 반년을 채 가지 못했다. 대개는 내분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일이었다.

지수가 정말로 레이첼에게 멸망에 대한 책임을 기대한것은 아니었다. 그가 솔라리타 연구소 소속이었다고 해도, 이 사태가 연구원 한 명의 의지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솔라리타의 대책 없는 연구를 부추긴건 기후 위기를 간단한 솔루션 하나로 해결해보려는 데에얄팍한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 전부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인류를 구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건 지수도 마찬가지였다. 돔 시티 안팎을 돌아다니며 지수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은 유지되어야 할 가치 있는 종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합니다. 동물들의 개별성에 비해 식물들의 집단적 고유성을  폄하합니다.식물들의 삶에 가득한 경쟁과 분투를 보지 않습니다.문질러 지운 듯 흐릿한 식물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해 지는 저녁, 하나둘불을 밝히는 노란 창문과 우산처럼 드리운 식물들. 허공을 채우는 푸른빛의 먼지. 지구의끝도 우주의 끝도 아닌, 단지 어느 숲속의 유리 온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이 깊도록 유리벽 사이를 오갔을 어떤온기어린 이야기들을.

원예학을 전공한 아빠가 나에게 해준 대답은 "식물은 뭐든 될 수 있다"라는 거였다. 지구 곳곳에실존하는 기이한 식물들에 대한, 끝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는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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