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딱딱. 마치 과거에서 찾아온 갈 길 바쁜 전령이 발뒤축을 동동거리는 소리 같다.

어서 문을 열어. 기억해 내. 쭉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그 발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죽이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다. 젊은 여자다. 나보다 훨씬 어리다.

그녀 때문에 죽은 사람은 나의 약혼자였다.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일방통행 표지를 무시한 채 내달린 그녀의 차에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하지만 문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좌우로 뻗은 복도의 나무 바닥 위를 시월 말의 가느다란 햇빛만이 비추고 있을 뿐. 교정에서는 아이들이 피구라도 하는지 간간히 환성이 들려올 뿐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오질 않았다.
그리고 발소리는 멈추었다. 바로 양호실 앞에서.

문을 조금 더 열고 복도 쪽으로 머리를 내밀어 살펴보았다. 아이는 없었다. 틀림없이 발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멈추었는데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 마크 말인데요……. 그게 이 학교 마크랍니다."

"지금 마크와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실은 피해자의 남편인 이마자키 씨가, 이 마크는 이십 년 정도 전에 자신들이 이 학교에서 근무할 때 썼던 거라더군요. 이마자키 씨가 전근가기 직전, 그러니까 약 십삼 년 전에 학군 개편이 있었는데 그때 지금의 디자인으로 바뀌었답니다. 당시의 사진도 보여 주시더군요."

"오늘 시체로 발견된 이마자키 아키코는 옛날 제4초등학교에서 제 담임 선생이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이토 아키코였습니다만. 그녀의 남편인 이마자키 유키오는 당시 학년주임이었죠."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은 합니다만 웃지 말아 주십시오. 선생님이 몽타주에 그리신 아이는 이십 년 전의 접니다."

사람은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 간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자신은 정말로 사라지는 걸까? 육체 같은 건 어쩌면 의미가 없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것은 감정, 사념, 그리고 영혼.

그것들은 남겨진다. 우리가 그것들을 절실하게 품었던 그 장소에 홀로 남겨져 외로이 기다리고 있다. 그 사념의 주인이, 혹은 그것과 공명할 수 있는 영혼을 지닌 이가 찾아와 자신을 깨워 주기를, 자신을 불러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곳저곳을 계속 걸을 것이다. 그녀를 찾아 해맬 것이다.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 어느 어두운 밤거리에서, 아련한 기억이 남아 있는 길모퉁이에서 어느샌가 나와 함께 걸어가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리라. 내 손안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작고 차가운 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날이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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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발소리만 들렸다.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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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일지매 이야기의 원조로 꼽는 것은 중국 명나라의 소설가 능몽초凌濛初가 쓴 소설집 『이각박안경기二刻拍案驚奇』에 나오는 도둑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속 난룡嬾龍이라는 도적은 뛰어난 솜씨로 성공한 절도를 자랑하듯 자신이 머물다 간 자리의 벽에 매화 한 가지를 그려놓았다고 한다. 이 소설이 조선으로 흘러들어 유행하면서 일지매 이야기가 실화처럼 자리 잡았던 듯싶다.

조선 후기 과학자로 잘 알려진 홍대용洪大容은 1766년 북경을 방문하고 쓴 『연기燕記』에서 각루의 지붕이 신비한 금속으로 만들어졌다고 기록했다. 홍대용은 그 금속의 이름을 ‘풍마동風磨銅’이라고 전했다.

마곡사는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가 탈옥 후 은신했던 곳이라는 점으로도 유명하다. 그중 풍마동 전설과 관계있는 것은 사찰 내 탑이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티베트 양식의 탑이 충청남도에 와 있는 이유는 고려시대 몽골을 통한 문화 교류가 성행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몽골은 13세기 무렵 티베트를 점령했는데, 그 후 오히려 몽골인들이 티베트 불교 문화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 몽골에서 간섭을 받으며 긴밀한 교류를 유지했던 고려 땅에도 티베트 문화가 건너온 게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고려의 충선왕은 몽골 임금에게 밉보여 티베트로 유배를 가야 했고, 고려를 대표하는 학자로 이름이 높은 이제현李齊賢은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직접 티베트까지 찾아간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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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1월 9일 기사에 따르면, 무슨 까닭인지 모기장도 있었다고 한다. 모기장을 높은 값에 밀매하는 국제범죄 조직이 있을 리는 없으므로, 그 물건이 모기장이라는 데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즉, 이 배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148톤이 정성스럽게 포장된 채 여러 인물의 관심을 받으면서 아주 중요한 거래를 하는 것마냥 운반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는 수출 주도의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정부가 수출 기업에 대해 여러 혜택과 정책적 지원을 보장하고 있었다. ‘수출 보국輸出報國’, 즉 국산 제품 수출이야말로 나라에 대한 충성의 길이라는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수출을 강조하던 때였다.

1950년대 후반, 도시의 사회적 약자였던 17세 여성이 죽음을 맞기 전까지 그 주변에 나타났던 위협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갖가지 방향에서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 상황이 몇 날, 몇 달간 이어지는 와중에도 치안 당국이 결국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은 사건 수사 과정에서 보인 미흡함보다도 더욱 부끄러워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사건이 일어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 그날의 사건 현장은 완전히 변해 서울의 여느 다른 지역처럼 아스팔트 도로와 아파트 단지가 가득한 곳이 되어 있다. 보육원도 소나무밭도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적어도 그 모습이 바뀐 만큼은 사회의 문화도 같이 바뀌었기를 바란다.

작업은 그날 밤 11시까지 계속되었지만, 보물을 찾을 수는 없었다. 깨진 그릇 조각 몇 개가 더 나올 뿐이었다고 한다. 그때까지 땅을 파고 들어간 깊이는 3미터 60센티미터였다. 『경향신문』 9월 27일 기사에서는 강씨가 작업 포기를 결심한 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런 망신이 어디 있죠?"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지난 7년 동안의 궁금증은 사라지게 되어 후련하다고도 했다.

60여 년의 세월이 다시금 흐른 지금, 보물찾기 일행이 흙을 파냈던 자리에는 근사한 옷 가게가 입점한 큼지막한 건물이 들어섰다. 보물이 있든 없든 60여 년 동안 명동의 땅값은 무섭게 상승해 지금은 1제곱미터 넓이의 가격이 무려 1억 원을 훌쩍 넘게 되었다. 그 때문에 그 자리에 들어선 건물의 가격은 이미 100억 원을 초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고작 20억 원 가치의 보물을 위해 건물을 포기하고 그 지하를 파 내려갈 사람은 당분간 다시 나타나지 않을 듯하다.

‘폴터가이스트poltergeist’라는 독일어 단어는 ‘시끄럽게 하다poltern’와 ‘혼령geist’의 합성어로, 보통은 집 안에서 접시나 장난감 따위가 이유 없이 떨어지거나 의자나 가구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은 이상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집에 귀신이 들려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따라붙기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폴터가이스트>(1982년)라는 할리우드 영화 때문에 이 단어에 익숙한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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