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물론 더 나갔다면 아마도……. 무선전신에서 그렇게 알려 왔지만, 하지만 계기판 램프가 너무 희미해 제 손조차 보이지 않았는걸요. 날개라도 보려고 현등을 켜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질 않더군요. 마치 빠져나오기도 힘든 커다란 구멍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것 같았어요. 그때 엔진이 진동하기 시작했죠." - P-1

‘내 부하 중 가장 용감한 친구야, 그는. 그날 밤 그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비행을 잘했기 때문이야. 정말 훌륭했어. 하지만……. 나는 그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어야 해.’ - P-1

‘사랑받으려면,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결코 동정하지 않는다. 아니면 이를 숨기거나. 하지만 나 역시 인간으로서의 온정이나 우정 같은 것에 둘러싸여 살고 싶다. 의사는 간혹 온정이나 우정이 발휘될 수 있는 직업이다. 하지만 나는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내가 저들을 잘 훈련시켜야 어떤 상황에 처하든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저녁때, 여기 내 사무실에 항공지도를 펴놓고, 혼자 앉아서 비행 보고서를 읽고 있으면, 이 막연한 법칙이 느껴진다. 내가 긴장을 풀고, 또 잘 조율된 일들이 그저 흐름에 따라가도록 내버려두면, 신기하게도 꼭 사건이 터지고 만다. 항공기가 운항 중에 부서지거나 혹은 가고 있는 우편기가 폭풍으로 인해 지연되거나 하는 것이 오로지 내 의지 하나에 달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가끔은 내가 가진 힘에 나 스스로도 놀랄 때가 있다.’ - P-1

‘나는 그를 두려움에서 구해준 거다. 나는 그를 공격했던 게 아니었다. 그를 통해, 미지의 세계 앞에서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 방해요소를 공격한 것이었다. 내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고, 그에게 동정심을 보여줬다면, 그리고 그가 겪은 일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줬다면, 아마도 그는 자신이 미지의 세계에서 돌아온 것이라고 여길 것이고, 사람들은 오직 이 미지의 세계만을 두려워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어두컴컴한 우물 속으로 내려가 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위로 올라와 자신은 아무것도 마주친 게 없었다고 얘기해야 한다. 이 친구는 어둠이 짙게 깔린 밤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야 하며, 손이나 날개만을 비추어줄 광부용 소형 램프 하나 없이도 딱 벌어진 어깨로 미지의 세계를 헤치고 나와야 한다.’ - P-1

"코모도로 알림. 귀항 불가능함. 폭풍."
그는 안데스 산맥의 코르디예라 산계에서 바다 쪽으로 별안간 방향을 바꾸었던 이 범상치 않은 폭풍의 공세를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태풍은 그가 닿기도 전에 마을 전체를 완전히 휩쓸어버릴 것이다. - P-1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렇게 보고하게. ‘사방이 꽉 막혔음. 1,000km 앞에서 폭풍 전진, 가시( ╉ )거리 제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려주기 바람.’" - P-1

지도 상에는 연락이 두절된 지역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소도시들에는 이미 태풍이 불어 닥친 상태였고, 모든 문이 닫혔으며 거리마다 각각의 집들은 불빛 하나 없이 세상과 동떨어진 채 밤바다에서 길을 잃은 선박 신세였다. 이들을 해방시켜 줄 건 오로지 새벽뿐이었다. - P-1

2,000km 내의 모든 무선국에, 혹 비행기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무전이 잡히면, 30초 안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통보하라고 지시해둔 상태였다. 그러면 파비앵에게 대피할 만한 곳의 위치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P-1

별들은 여전히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환하게 비춰주고 있지만 이는 한순간의 오아시스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그 오아시스는 파비앵이 아무리 손을 뻗쳐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악의를 품은 바람이 건드려서 더럽히는 위협적인 밤이었다. 정복하기 힘든 밤이었다. - P-1

언젠가 교량 건설 현장 부근에서 엔지니어 하나가 리비에르에게 이런 말을 건넸었다.
"이 다리가 한 사람의 으깨진 얼굴만큼의 값어치가 있는 겁니까?"
이 길을 이용하는 농부들 중에는, 다음 다리로 돌아가는 수고를 덜기 위해 다른 사람의 얼굴을 이처럼 끔찍하게 만들어도 좋다고 생각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리를 건축하고 있다. 엔지니어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공익이라는 건 개개인의 이익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정당화해주지 못합니다." - P-1

"하지만 인간의 삶이 그 값을 따질 수가 없을 만큼 값어치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인간의 생명보다 더 값진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던가. 그게 뭐란 말인가?" - P-1

파비앵은 운명에 맡기기로 결심했다. 충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아무 데나 착륙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최소한 야산과의 충돌만은 피하기 위해 그는 하나밖에 없는 조명탄을 쏘았다. 조명탄은 불꽃을 터뜨리고 뱅뱅 돈 뒤 어느 평원을 비추고는 꺼졌다. 그곳은 바다였다. - P-1

그 순간 그는 생각했다. ‘다 틀렸다. 40도나 오차를 잡아놓고 비행했는데도 편류하고 말았어. 이건 태풍이다. 육지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 P-1

별이 보여주는 지표 덕분에 파비앵은 소용돌이를 보다 잘 견제하며 올라갈 수 있었다. 희미한 별빛은 그를 자석처럼 끌어당겼다. 빛을 찾으려고 너무도 오랫동안 고생을 한 터라 이제는 아무리 희미한 빛이라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희미한 여관 불빛 하나로도 풍족했던 그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했던 이 빛의 신호 주위를 죽을 때까지 뱅글뱅글 돌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는 빛의 영역을 향해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다.

구름 사이로 솟아오름과 동시에 비행기는 단번에 놀라울 정도의 평정 상태를 되찾았다. 기체(機體)를 출렁이게 하는 그 어떤 파동도 없었다. 둑을 지나는 거룻배처럼 그는 저수지로 들어갔다. 파비앵은 축복 받은 섬들의 만처럼 하늘 어딘가에 숨어 있는 미지의 영역으로 들어간 셈이었다. 비행기 아래에서는 돌풍과 폭우, 번개를 동반한 폭풍이 두께 3,000m의 다른 세상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사나운 폭풍도 별들이 있는 쪽에서는 수정처럼 맑고 백설같이 빛나는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폭풍권의 3,800m 상공에 갇힘. 바다 위쪽에서 표류하다가 내륙을 향해 정서(正西)로 비행 중. 아래쪽은 완전히 봉쇄되었음. 지금도 바다 위인지 확실치 않음. 폭풍권이 내륙까지 확장되었는지 통보 바람."

"제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저는 아직 받아들일 수가 없네요. 정말 힘들게 하는 건 아주 사소한 것들이에요. 우연히 눈에 띄는 아이의 옷가지며, 한밤중에 잠이 깨었을 때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아이에 대한 애정 같은 거요. 아이에게 더 이상 물릴 수가 없어 쓸모가 없어진 제 젖처럼, 아이에 대한 애정 또한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이에요……."

‘우리는 영원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이런저런 행동들이, 누군가와의 추억이 서려 있는 이런저런 것들이, 갑자기 그 의미를 잃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빈 공간이 모습을 드러내고 마니까…….’
리비에르의 시선이 다시 전보를 향했다.
‘지금 우리에게서는 여기 이 전보를 통해 죽음이 스며드는 것이겠지. 이 전보들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어져 버렸으니까…….’

삶이 굴러가는 속도가 느려졌다. 리비에르는 생각했다. ‘죽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가 일궈놓은 세계는 이제 한 대의 고장 난 범선처럼 느껴졌다. 바람 한 점 없는 바다 위에서 고장이 난 범선 같았다.

로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본부장님…… 그 부부는 결혼한 지 6주밖에 안 됐습니다."
"일이나 계속하게."

‘아마 목적은 아무것도 정당화해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행위는 죽음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가 있었던 덕에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전보 하나하나에 의미가 가득 담기고, 야근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걱정거리를 던져주며 조종사에게 비장한 목표를 부여해줄 때, 리비에르 역시 죽음과 맞서 싸워나갈 것이다. 바람이 바다에서 선박 하나에 다시 힘을 실어주듯 그 자신이 일궈가는 이 세계에서 삶이 다시 소생하게 된다면, 리비에르는 다시 죽음과 맞서 싸워나갈 것이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리비에르는 오직 엄청난 재앙이 있고 난 후에만, 그렇게 운명의 덫이 이제 사람을 풀어놓아 주었을 때에나 느껴지는 이완의 느낌을 맛보았다. 그는 전 지역 경찰서에 신고를 해놓았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죽은 자의 집에서도 질서는 유지되어야 하는 법이다. 리비에느는 로비노에게 손짓을 했다.
"북부 지역 기항지들에 통보하게. ‘파타고니아 노선 우편기가 상당히 연착될 것으로 예상됨. 유럽행 우편물이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파타고니아 우편물을 다음 편 유럽행 우편기 편으로 보내겠음.’이라고 말이네."

"파타고니아 우편기는 도착했나?"
"기다리지 않기로 했네. 실종됐어. 날씨는 좋은가?"
"날씨는 매우 좋다네. 그럼 파비앵이 사라졌다는 건가?"
그들은 파비앵에 대해 많은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깊은 동지애는 말이 필요 없는 것이었다.

"조심하게! 밤이니까 말이야……."
그에게 동료의 충고가 들릴 리 없었다.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구름과 산들, 강물과 바다를 향해 웃기 시작했다. 조용한 웃음이었지만, 그의 얼굴에 퍼지는 희미한 웃음은 마치 산들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짜릿함을 느꼈다. 희미한 웃음이었지만 구름과 산들, 강물과 바다보다도 훨씬 더 강한 웃음이었다.
"왜 그러나?"
"그 바보 같은 리비에르가 글쎄…… 내가 겁먹은 줄 알고 있더라니까!"

승리, 패배……. 이런 단어들은 죄다 부질없는 것이다. 삶은 이런 이미지들을 초월하여 이미 다른 새로운 이미지들을 준비하고 있다. 승리는 한 나라를 나약하게 만들지만 패배는 그 나라를 새로 태어나게 만든다. 리비에르가 맛본 패배는 진정한 승리를 위해 한 번쯤 겪어야 하는 예정된 절차였는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오직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5분 후에 무선사는 기항지들에 경보를 발할 것이다. 그리고 15,000km에 걸쳐 힘차게 약동하는 삶의 맥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이미 비행기라는 오르간 선율이 하늘 속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완강한 시선으로 직원들을 굽어보며 그 사이를 지나 천천히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리비에르는 위대했다. 그는 승리라는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승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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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로비노 자네를 자네의 위치에 바로 놓아주겠네. 만약 자네가 지쳐 있을 때, 자네의 기운을 북돋워줄 사람은 그 부하직원들이 아닐세. 자네는 상사야. 자네의 나약함은 웃음거리밖에 안 되네. 자 쓰게나……." - P-1

"쓰게나. ‘감독관 로비노는 펠르랭 조종사에게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상의 처벌을 부과한다…….’ 그에 해당하는 이유와 처벌을 찾는 건 자네 몫이네."
"본부장님!"
"내 말대로 하게, 로비노. 부하 직원들을 아껴주게. 하지만 내색을 하진 말게." - P-1

하지만 일단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면, 리비에르에게 밤은 여전히 감동적이고 아름다웠다. 밤은 그 은밀한 곳에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고, 리비에르는 그 생명을 지키는 수호자였다.
"날씨가 어떤가?"
그는 무선사로 하여금 승무원에게 묻도록 했다. 10초 후 답신이 왔다. - P-1

그러나 무선사는 그 얼굴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조종사가 폭풍우를 헤쳐 나가기 위해 결집시킨 그 모든 감정들, 꽉 다문 입술, 결단력, 노여움 등, 이 창백한 얼굴과 번쩍번쩍하는 짧은 섬광 사이에서 본질로써 주고받는 모든 것들을 무선사는 꿰뚫어볼 수가 없었다. - P-1

무선사는 어쨌거나 비행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은 조종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선사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말의 엉덩이에 걸터앉아 이 시커먼 형체가 저기, 자신의 앞에서 물질적으로, 부담스럽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을 음미하고 있었다. - P-1

두대의 우편기가 비행 중인 상황에서, 전화 한 통화가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아는가? 리비에르는 언젠가 저녁불빛 아래서 전보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에 휩싸인 가족들의 생각이 떠올랐다 - P-1

리비에르는 밤의 무게를 함께 지고 있는 이 남자에게서 깊은 우애를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전우 같은 친구군. 이렇게 함께 새는 이 밤이 우리 둘을 얼마나 하나로 긴밀히 엮어주고 있는지 저 친구는 아마 모르겠지.’ - P-1

‘고작 이러려고 그동안 그렇게 일을 해댄 건 아니었잖아. 이제 내 나이 쉰인데. 오십 년이란 세월을 나는 꽉꽉 채우며 살아왔다. 나 스스로를 단련하고, 세상과 사투를 벌여오며 일의 흐름을 바꿔놓기도 했었지. 이제 와서 이 따위 통증에 신경을 쓰면서 더 중요한 것들을 하찮게 여기려 하다니……. 정말 우습군!’ - P-1

‘나의 처사는 공정한가, 부당한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호되게 밀어붙이면 고장은 분명 줄어든다. 모든 사람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코 우리 손이 닿을 수 없는 미지의 힘 같은 게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만일 내가 너무 공정하게 대했다면, 야간 비행은 번번이 목숨을 건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 P-1

‘지금 내가 매몰차게 해고시킨 것은 이 노인이 아니다. 그에게는 책임이 없지만 그를 통해 나타나는 골칫거리를 베어버린 거야. 사람은 일을 지휘하고 일은 순순히 그 지휘에 응해오며, 또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는 법이지. 사람은 또한 완벽하지 못한 존재라서 그릇된 일도 만들어내기 마련이야. 불행이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 일어날 때에는 그 사람들을 멀리 배척해야 하는 거야.’ - P-1

‘나도 이 나이 먹은 친구의 얼굴을 좋아했는데…….’
그러자 그의 늙은 손이 다시 눈앞에 보였다. 그는 합장을 할 채비를 하고 있던 두 손의 미약한 움직임을 생각했다. ‘좋아, 됐네. 남게.’ 이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는 나이 먹은 이 친구의 늙어버린 손 위로 흘러내릴 눈물을 상상했다. 그리고 리비에르는 얼굴이 아닌 바로 이 늙은 두 손이 보여주게 될 그 기쁨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이 공문을 찢어버릴까?’ 집에 가면 그는 조심스럽게 위신을 세울 것이다. - P-1

‘무슨 일에서든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즉시 뿌리 뽑지 않는다면 여기저기서 잇달아 고장이 나겠지. 잘못이 저질러진 원인을 발견하고도 그것을 눈감아 준다는 것은 범죄행위야. 역시 로블레는 내보내야 해.’

‘이런저런 일들이 점차 우위를 점하며 흐름을 장악한다는 게 참으로 신기하다. 처녀림을 뒤흔들어 놓고, 점점 이를 키워 강해지게 만든 뒤 도처에 엄청나게 큰 힘을 솟아나게 하는, 무언가 미지의 강력한 힘이 숨겨져 있는 것 같다.’
리비에르는 큰 성당을 무너뜨리는 것이, 벽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담쟁이 덩굴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나는 이 사람들을 모두 사랑한다. 내가 싸우는 대상은 이들이 아니다. 나는 다만 이들 배후에 있는 악과 싸우는 것이다.’

‘삶은 모순이다. 무척이나 심한…….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헤쳐 나가야 한다. 하지만 견뎌야 한다. 창조해내야 한다. 자신의 덧없는 육신을 통째로 맞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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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노, 자네 이 지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리비에르는 가끔 명상에서 깨어나며 밑도 끝도 없는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이 지도는 본부장님……."

‘이 항공로는 아름답지만 가혹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그것도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갔던가. 지금이야 이 항공로가 그간 일궈낸 성과로 말미암아 위용을 뽐내고 있지만, 문제도 정말 많았지.’

"몸이 약해 잠을 못 잔다면 대신 일을 하면 되겠군 그래."
이 정도는 약과였다. 리비에르는 언제나 한 번 더 확인사살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불면증이 어떤 음악가에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게 한다면, 그 불면증은 아름다운 것이지."

르루가 갖고 있는 고결한 매력은 그의 타고난 못생긴 얼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얼굴이 일생을 오로지 일에만 전념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리비에르는 매일 밤 하늘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해이한 정신 상태로 있다가는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이고, 지금부터 새벽까지 엄청난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자네는 자네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네."

"사람들의 목숨이 거의 자네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네. 자네보다 더 값어치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자네에게 달려 있다는 얘기야……."

"만약 그들이 우정 때문에 자네에게 복종한다면, 자넨 그들을 기만하는 것일세. 자네 자신은 개인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어떤 권리도 없지."
"그야…… 물론이죠."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자네와의 우정을 믿고 어떤 허드렛일을 면하게 되려니 생각한다면, 그 또한 자네가 그들을 기만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그들은 복종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 자, 거기 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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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회사에게 있어서는 다른 운송수단과 속도 경쟁을 한다는 게 관건이었다. 이 책에서 경탄할 만한 인물로 그려지는 항공사 본부장 리비에르가 주안점을 두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야간 정기 운항이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차츰 허용이 되었고, 일단 초기의 시험 비행을 거친 후부터는 하나의관행이 되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쓰인 그 당시에는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의 나약함과 포기, 타락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고, 이 시대의 문학은 그런 것들을 비난하는 데에만 과도하게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보여주었어야 하는 것은 바로 끈질긴 의지의 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기 초월이다.

그러나 항공분야에서도 처음에는 미지의 땅에 대한 탐험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웅시대가 있었다.

"사랑받고 싶다면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결코 동정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를 어디에 감추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나 스스로의 힘에 나도 놀랄 때가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 보자면, 비행사보다도 그의 상사 리비에르가 내게는 더 놀라워 보인다.

리비에르를 지배하고 있는 건 의무감이다. "의무라는 것의 막연한 느낌, 그건 사랑의 느낌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얼핏 보아선 그의 엄격함이 비인간적이며 과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리비에르가 단련시키고자 하는 건 사람의 불완전함이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다.

"네 부하들을 사랑하라.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를 말하지 말라."

즉, 인간의 행복은 자유가 아닌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내게 있어 이는 심리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띠는 진리이다.

이 위험한 업무의 수행에 온몸을 바치면서 이 일을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아늑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리비에르가 결코 무정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도 엿보인다. (실종된 조종사의 아내가 그를 찾아 왔을 때보다 더 감동적인 건 없었다.)

또한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서의 리비에르가 이를 시행해야 하는 조종사보다 용기가 덜 필요하다고도 보기 힘들다.

"우리는 마치 뭔가 인간의 생명보다 더 값진 것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이는 내 ‘프로메테우스‘에게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집어삼키는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째서 용기를 덕목들 중 최하위에 놓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용기는 그다지 좋은 감정이랄 수 없는 것이지요. 그저 약간의 광기와 허세, 완강한 고집, 천한 스포츠적 유희가 뒤섞인 것 같습니다.

특히 물리적 힘에 열광하기도 하지요.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슴팍까지 셔츠를 풀어헤치고 팔짱을 낀 채배에 힘을 주지요. 그것이 어느 정도 기분 좋은 효과를 얻게도 합니다만, 만약 그런 짓을 밤에 한다고 칩시다. 너무도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겠지요. 이제 나는 가진 거라곤 오로지 용기 하나밖에 없는 사람을 다시는 우러러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자기의 선행을 숨기듯 용감한 사람은 자신의 용감한 행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들은 이를 위장하거나 다른 핑곗거리를 댄다."

캥통이 철학자의 말에 내가 무조건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의 책에서 발췌한 격언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기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감춘다."

내가 문학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하는 이 책은 사실성이라는 가치 또한 갖고 있다. <야간 비행>이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바로이런 두 가지 측면, 즉 문학적 가치와 사실적 가치를 보기 드물게 잘 결합시켰다는 이유 때문이다.

비행기 아래 언덕들은 벌써 황금빛 황혼 속에 여기저기 그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지구 최남단의 땅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하여 파타고니아 노선 우편기를 조종하고 있는 파비앵은 어떤 항구에 비치는 물 같은 신호만 봐도 곧 밤이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늘은 수족관처럼 고요했고, 그들이 향하는 모든 기항지 비행장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날씨 맑음, 바람 없음.‘이라고 통보해 오고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그대로 계속 가세."

때로는 바다보다 더 인적이 드문 초원지대를 100km나 지난 뒤에 외딴 농가 한 채를 만나기도 했다. 농가는 대초원의 출렁이는 파도에 휩쓸려 그 안의 사람들이 통째로 쓸려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그는 그 배처럼 보이는 농가를 향해 인사라도 하듯 비행기 양 날개를 살짝 흔들었다.

마젤란 해협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2,500km 이상의 항공로에는 고만고만한 기항지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그러나 이산 훌리안 기항지는 밤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어, 흡사 아프리카에서 마지막으로 정복당한 부락이 낯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마지못해 문을 열어 주는 것 같았다.

사람이란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창밖의 변함없는 풍경을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부터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선택하고 난 뒤에는 스스로의 운명에 만족하고, 이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무선사는 과일 속에 벌레가 들어 있듯이 뇌우가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은 아름답지만 어딘가가 썩어 있었다.

"계기판이 보이지 않는다. 불을 켜야겠어."
그는 살짝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켜진 조종실의 빨간 램프는 몹시 희미했기 때문에 지침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철골을 만져보고, 그 금속 덩어리 안에 생명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금속은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었다.

"칠레발 우편기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불빛이 보인다는 전신입니다."
"좋아."

파타고니아, 칠레, 파라과이에서 출발한 우편기 3대가, 남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자정 무렵 유럽행 우편기를 출발시키기 위해서 이 3대의 우편기들이 실어오고 있는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긴장된 어깨로 오랜 기간 지탱해 온 너무나도 무거운 짐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휴식도, 희망도 없는 노력이라는 짐이었다.
‘내가 나이를 먹은 모양이군.‘

잠시 후에는 나머지 두 대도 내어줄 것이다. 그러면 그날의 일과는 끝이 난다. 그런 후 피곤에 지친 승무원들은 숙소로 향하고, 새교대조가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리비에르에게 휴식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유럽행 우편기가 그를 불안하게 했기때문이다. 언제나처럼 늘 그런 식으로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평온함은 없다. 어쩌면 승리도 없을 것이다. 모든 우편기들의 최종 도착이란 것도 없지 않던가.

"르루,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나?"
"사랑이라뇨, 본부장님!"
"하긴 자네도 나처럼 그럴 시간이 없었겠군."
"그렇죠, 뭐......."

마침내 비행기가 격납고 앞에 멈췄을 때, 정비사와 일꾼들이 분주히 우편물을 내려놓고 있었지만, 조종사인 펠르랭은 꼼짝도 하지않았다.

아득하게 들리던 엔진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소리는 무르익어갔다. 사방으로 불이 환하게 켜졌다.

"술이나 한잔 사주시오."
펠르랭은 안데스 산맥의 코르디예라 산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겨울에 내린 눈은 평화로운 분위기로 산 전체를 뒤덮었다.

"오늘 비행이 어땠는지 당신들이 알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가죽 비행복을 갈아입으러 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계속 달려가면서 잇따라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난기류(亂氣流)와 함께, 그를 둘러싼 산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폭풍우 속에서의 한 판 승부, 그건 적어도 현실적이었으며 솔직했다.

이어 먼지 한 줌이 대기 중에 섞여 마치 한 대의 범선처럼 눈길을 따라 부드럽게 유영하여 위로 올라왔다. 그는 필요할 경우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힐끗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의 뒤에 있는 산맥 전체가 부글부글 술렁이고 있었다.

그건 투풍가토(Tupungato) 산의 정상 부근이었다.
너비 200km의 산맥에는 사람 하나, 생명체의 숨결 하나, 그 어떤 기력 하나 없었다. 오직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해발 6,000m 수직으로 솟아오른 산등성이,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암벽, 무시무시한 정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분노가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고, 눈 속에서 솟아 나온다는 것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사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뭔가가 불편한 듯한 느낌이 들 뿐이었다. 혼자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갖게 되는 거북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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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ㅣ 세계문학그림책
조은교 그림, 정아원 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원작 / 고래의숲 / 202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안나 카레니나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는가 —

레프 톨스토이 원작 『안나 카레니나』 그림책을 읽고

세계문학의 걸작이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안나 카레니나』를 그림책으로 만났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이자 인간의 사랑과 삶을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익히 들어왔기에 나름의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책을 덮은 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감동이나 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혹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일까.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위해 가정을 떠나며, 결국 자신의 삶마저 비극으로 끝내는 이야기. 나는 안나의 선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래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위대한 작품이라고 칭송하는데, 정작 책을 읽는 나는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위대한 작품이라고 해서 그 안의 인물에게 반드시 공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의문을 안고 안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1.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남편 카레닌과 아들을 둔 귀족 여성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환경이다. 물론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가정이라고 해서 그 안에 사는 사람까지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다. 안나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느꼈을 답답함과 외로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녀 앞에 젊은 장교 브론스키가 나타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고, 결국 안나는 그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이성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안나에게는 남편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다.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선택한다면 그 선택으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나는 브론스키를 향해 나아간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선택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부터 안나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몰라도, 그 사랑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누구에게 상처를 줄 것인지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2.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가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하기 위해 기존의 삶을 떠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동안 쌓아온 관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편 카레닌에게는 아내와의 관계가 무너지는 일이었고, 아들에게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통이 따랐다. 안나 자신도 아들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묻고 싶었다.

그토록 소중한 아들이 있었다면, 브론스키라는 남자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을까.

그렇다고 이 모든 책임을 안나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브론스키 역시 그녀에게 남편과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선택한 사랑이었다면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도 두 사람이 함께 져야 한다. 사랑은 함께 시작했는데 그 대가가 한 사람에게만 돌아간다면, 그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

사람마다 사랑의 크기와 방식이 다르니 내 기준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그 선택으로 상처받는 가족의 존재까지 지울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지켜야 할 것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 있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으며, 자신의 선택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방법을 찾아 타협하기도 한다. 그것이 특별히 고결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안나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무조건 참고 견뎌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었다면 다른 선택과 방법을 고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랑이 자신의 삶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무너뜨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점이다.

행복을 추구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세워질 때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3. 안나의 비극,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안나의 삶은 브론스키와 함께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사회적 비난과 고립이 깊어지고, 브론스키의 사랑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커진다. 자신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마저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가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도덕적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도 외면할 수 없다. 남성의 잘못에는 비교적 관대하면서 여성에게는 엄격했던 사회의 위선은 안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런 점에서 안나는 비난받아야 할 행동을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불공평한 사회적 관습으로 고통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마지막 선택만큼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안나는 결국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장면에서 안나의 절망과 비극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열차를 운전하던 기관사는 무슨 죄인가.

갑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사고를 마주해야 했던 기관사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사고를 수습해야 했던 철도 관계자들은 또 어떠했을까.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도 그날은 평범한 하루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안나가 그러한 피해를 의도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극심한 절망 속에 있던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까지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 선택으로 영향을 받았을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서도 안 된다.

나는 안나가 얼마나 절망했을지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녀의 죽음을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한 사람의 비극을 이해하려는 마음과 그 비극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안나의 고통이 깊었다고 해서 그로 인해 발생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4. 감정과 원칙 사이에서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원하는 것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도로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현장에서는 공사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과 안전을 위해 작업을 멈춰야 한다는 판단이 충돌할 때가 있다. 공사를 진행하면 당장의 일정은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서두르다 사고가 발생하면 그 피해는 작업자와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그렇기에 현장에서는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지 판단할 원칙이 필요하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든 일이든 자신의 감정과 욕망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 다른 사람의 삶을 흔들 수 있다면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당장의 만족보다 오래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인문정신의 중요한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인문정신이란 어려운 철학책을 많이 읽거나 거창한 사상을 논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선택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피며,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제 생활에서 지켜가는 태도이기도 하다.

물론 안나에게 그런 기준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녀 역시 자신의 사랑이 진실하다고 믿었을 것이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감수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치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면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안나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가족에 대한 책임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함께 지킬 수 있었을지 묻고 싶다.

삶의 원칙은 평온할 때 말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무엇을 지킬 것인지 선택하는 데서 드러난다.

5. 그런데 왜 이 작품은 걸작이라고 불리는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처음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의 이야기가 어째서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이라는 것과 그 작품 속 주인공의 삶이 위대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톨스토이는 안나의 행동을 모두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을 무조건 찬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사회적 관습, 가족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독자가 안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의 행동에 분노하는 것 역시 작품을 읽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오래전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도 떠올랐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에 빠져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며 달려든다. 독자인 나는 그의 터무니없는 행동을 보며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 보면 『돈키호테』가 단순히 어리석은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험만을 그린 작품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안나 카레니나』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안나의 행동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작품 전체의 가치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인간의 욕망과 책임, 삶의 의미를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읽은 것은 방대한 원작 소설을 그림으로 압축한 책이다. 원작의 복잡한 인물 관계와 사상적 깊이가 그림책에 모두 담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독서에서 느낀 당혹감을 톨스토이의 원작 전체에 대한 최종 평가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독자가 반드시 감동해야 할 의무는 없다.

6. 내가 더 공감한 사람은 레빈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안나와 대조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 있다. 바로 레빈이다.

레빈은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서 사랑과 욕망을 좇는 인물이 아니다. 농촌에서 땅을 일구고, 농민들과 함께 일하며, 결혼과 가족, 노동과 신앙의 의미를 고민한다. 물론 레빈의 삶도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 앞에서 망설이고, 결혼생활에서 갈등하며, 자신의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나 그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곳은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다. 나는 오히려 레빈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과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일을 시작하고, 맡은 일을 책임지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으며, 때로는 다투고 화해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이다. 그 삶에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처럼 극적인 장면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삶의 가치가 작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오랫동안 맡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 하루의 일을 무사히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특별한 성취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평범함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해 보일지 모르는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이다.

레빈의 이야기는 그런 삶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안나가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행복을 새로운 사랑에서 찾으려 했다면, 레빈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과 의미를 발견하려 했다. 나는 후자의 삶에 더 마음이 갔다.

7.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안나의 사랑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이 그녀와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젊은 날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느끼는 설렘이 사랑인지, 보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사랑인지 선뜻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 인생에서 여자는 아내 한 사람뿐이었다. 손목을 잡아본 여자도 아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고결하거나 남다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을 만나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나 가슴이 뛰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생각이 다를 때는 양보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견디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것도 사랑이다.

나는 안나처럼 모든 것을 내던질 만큼 격정적인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아내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감정의 크기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어려운 순간에도 서로를 지키며,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 역시 사랑의 중요한 모습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지 못해도, 한 사람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8. 책을 덮으며 —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도 나는 여전히 안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가 브론스키에게 느꼈던 사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을 위해 가족과 기존의 삶을 무너뜨린 선택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생을 끝낸 일도 안타깝지만, 그로 인해 상처받았을 다른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무겁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작품을 읽은 시간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나에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과 책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레빈의 삶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문학의 가치는 독자를 반드시 감동시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만나고, 그 행동에 반감을 느끼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따져 묻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평소 **사와생보(死臥生步)**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간다.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있으니 걸어라.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그 말에 한 가지 생각을 더하고 싶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안나는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향해 달려갔지만, 결국 삶을 지탱하던 많은 것들을 잃었다. 반면 레빈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갔다. 나는 어느 쪽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안나의 격정적인 사랑보다 레빈의 평범한 삶을 선택하고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이 있겠지만, 내가 선택한 사랑은 한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젊은 날 처음 손을 잡았던 그 사람과 세월을 함께 보내고, 서로의 주름이 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동안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분명히 안다.

내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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