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사이에서 고통당하고 소외감을 느낄 때마다 그는 무작정 걷거나 독서의 세계로 깊이 침잠했다.

<한 켤레의 구두>반 고흐는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의 낡은 구두 그림들을 보면 가난한 방랑자가 짊어진 삶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캔버스에 유채, 41.5×37.5센티미터, 1887, 개인 소장.

북유럽의 습기와 혹한 속에서 수십 킬로미터의 황무지를 몇 시간씩 걷는 것이 몸에 밴 빈센트에게 걷기는 훗날에도 현실을 잊게 하는 동시에 살게 하는 수행법이 되었다. 언제나 부랑아 같은 남루한 옷차림과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 찬 얼굴로 걷고 또 걷는 고행을 거듭하는 일이 평생 지속되었으니 말이다.

인생을 목적지 없는 산책 혹은 여행에 비유했던 빈센트는 남프랑스에 와서도 밤마다 산책길에 나섰다. 하늘을 응시하면서 멀리 있는 행성들과 보이지 않는 세상에 관한 상상으로 그 시절을 견뎠다. 지상에서는 창조할 수 없을 것 같은 천국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졸라는 빈센트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졸라의 추종자인 모파상, 알퐁스 도데, 장 리슈팽, 조리 카를 위스망스, 플로베르, 공쿠르 형제의작품들도 읽었다. 특히 도데의 쾌활한 타르타랭같은 희극 작품은 자신과 테오와 여동생 빌레미나의 우울증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어쨌거나 빈센트를 만든 것의 8할이 독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맹렬한 탐서가였다. 상당히 폭넓은 독서를 했던 그는 누구와도 폭넓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논쟁과 토론에 능했던 것도 바로 오랜 기간 습득해 온 독서력 덕분이었다. 더군다나 글솜씨 또한 탁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읽기는 쓰기의 80퍼센트라고 하지 않는가!

무엇보다도 빈센트의 사회사상, 즉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19세기의 수많은 예술가, 저술가, 철학자 들이 공유한 낭만적 반자본주의의 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
특히 낭만주의 저술가인 토머스 칼라일, 디킨스, 미슐레가 자본주의 이전의 문화적 가치라는 관점에서 19세기 정치, 경제, 사회질서를 비판했다는 점에 빈센트는 크게 공감했고, 그것이 그의 사회사상을 형성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톨스토이는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크리스마스 캐럴, 엘리엇의 『애덤 비드』, 도스토옙스키의 『지하 생활자의 수기』등을 참된 예술 작품으로 인정했다. 빈센트가 아를 시절에 그린 마담 지누의 초상화에도 『톰 아저씨의 오두막』과 『크리스마스 캐럴이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빈센트가 재정적인 불안감으로 고통을 받는 와중에도 결코 지출을 아낄 수 없었던 부분이 책이었다. 단행본뿐만 아니라 잡지도 구독했다.

<프랑스 소설과 장미가 있는 정물 >
탁자 위의 책들은 에밀 졸라, 기 드 모파상, 공쿠르 형제 등 당대 자연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반 고흐는 당대의 삶을 담은 소설은 성서 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캔버스에 유채, 93×73센티미터, 1887, 개인.

<낮잠 >
잘 감동할 줄 알았던 반 고흐에게는 좋아하는 화가들이 많았다. 그는 특히 밀레에 깊이 매료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생레미 시절에 밀레의 소묘 작품인 <한낮>을유화로 모사한 것이다. 말년의 반 고흐는 발작에서 벗어날 때면 이렇듯 자신의 예술 행보가 시작된 밀레로 돌아갔다. 캔버스에 유채, 91×73센티미터, 1890, 오르세미술관, 파리.

빈센트는 특별히 매료된 화가는 밀레였다. 밀레의 작품은 노동의 신성함을 찬미한 당시의 소박한 농촌 그림과는 달리 과격한 정치적 주장을 내포한 것처럼 보였다.
주지하듯 빈센트가 본 그림은 원화가 아니라 흑백의 동판화였기에 그런 느낌은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색과 빛이 더해진 원화는 성스러운 제단화 같기는 하지만 정치적 선전성은 약하다. 빈센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뒤 가장 처음으로 몰입한 그림 중 하나도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의 이미지였다.

반에이크와 한스 멤링 같은 위대한 플랑드르의 화가들의 작품을 보기 위해 브뤼셀까지 갔고,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을 보기 위해 안트베르펜까지 가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 걸작이라고 판단한 작품 한 점을 보기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갈 준비 태세가 되어 있었다.

아를에 와서는 빈센트의 그림 그리는 방식이 달라졌는데, 인상주의 화가들보다 낭만주의 화가였던 들라크루아의 영향이 컸다. 즉 눈앞에 있는 것을 정확히 묘사하려고 노력하는 대신, 들라크루아적 감각에 따라 느낌을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더욱더 자유롭게 구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빈센트는 일찌감치 일본 목판화인 우키요에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일본 그림을 보고 몸살을 앓았다. 당대 유럽에서는 ‘일본주의‘ 혹은 ‘일본 취향‘을 일컫는자포니슴이 예술가와 지식인 사이에서 대유행이었다. 화가들 중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이 더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마치 희랍인 조르바가 모든 만물을 처음 보듯 감탄했던 것처럼. 그래서 "되도록 많이 감탄하려무나. 많은 사람들은 충분히 감탄하지를 않아"라고 테오에게 보낸 조언은 비단 테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하고자 하는 존재 모두에게, 아니 그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우키요에는 잡지나 전단지처럼 가볍게 취급되었고, 유럽으로 수출하는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구겨진 우키요에를 펼쳐 보던 화가겸 판화가 펠릭스 브라크몽은 그 새로운 미감에 충격을 받았고, 친구인 마네와 드가 같은 인상파 화가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라. 한낱 포장재에불과하던 우키요에가 희귀하고 신비로운 보물로 격상되는 순간이 아닌가!

우키요에는 에도시대에 유행한 풍속화로, 주로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우키요에라는 말은 ‘덧없는 세상‘을 뜻하는 ‘우키요浮世‘와 ‘그림‘을 뜻하는 ‘에絵‘가 결합한 것이다. 본래 전국시대 계속되는 내전으로 혼란을 겪으면서 이승에서의 덧없는 삶을 의미하는 말이었으나, 에도시대로 접어들면서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자 대중의 일상과 쾌락적 삶의 방식을 나타내는 그림을 가리키게 되었다.

자포니슴은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 예술 전반에서 일본의 영향이 나타나는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다. 즉 유럽의 작가들이 일본 미술의 조형적 특질을 자기 작품 안에창조적으로 살리는 태도를 말한다. 1854년, 일본이 유럽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일본 미술의 영향이 서구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1862년의 런던만국박람회와 1867년의 파리만국박람회를 통해 일본의 도자기와 차 문화, 부채, 우키요에 판화 등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일본의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도 열렬해졌다.

빈센트는 일본 미술을 연구하면 너무나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철학을 만나게 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적인 감각과 묘법을 배우려고 노력했다.

파리에 오기 전 빈센트는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같은 암울한 작품을 그렸지만,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그의 그림은 차츰 밝아지고 화사해지고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원색의 색채, 대담한 형태와 같은 표현법은 우키요에를 벤치마킹한 덕분이었다.

빈센트가 우키요에에 이끌린 것은 그 독특한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향이 네덜란드라는 사실과 관련된다. 네덜란드는 일본이 쇄국정책을 유지할 때도 유럽 국가중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한 나라다. 빈센트는 어렸을 때부터 일본에서 온 도자기, 공예품, 우끼요에 등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런던에 살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은 1886년에 파리로 간 뒤 본격적으로 깊어지기 시작했다.

일본은 멋진 것, 훌륭한 것, 이상적인 것과 동일시되는 가장 완벽한 대상이었다. 그러니 실제 일본과는 상관없는 것이다. 일본은 그저 빈센트가 추구하고 싶은 가장먼 곳이자 미지의 세계였던 셈이다. 그리고 모든 것에 끝이 있듯이 일본과 우키요에에 대한 그의 사랑도 짧은 연애처럼 막을 내렸다.

우키요에 전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빈센트였다. 그는 우타가와 히로시게 같은 유명 판화가의 우키요에를 모사했다. 파격적인 각도의 히로시게의 다리 그림은 빈센트의 아스니에르 철교 그림에서 재현되었다. 빈센트 역시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처럼 우키요에의 가장 혁신적인 방법론을 인용하고 실험했다. 즉 원색을 사용한 단순하고 선명한 색조와 윤곽선과 평면적인 구성 기법은 그의 그림을 명쾌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귀에 붕대를 두른 자화상>
아를시절,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자르고 난 뒤 처음으로 그린 자화상을 보면 배경에 사토 토라키요의 우키요에인 <게이샤가 있는 풍경>이 걸려 있다. 일본에 대한반 고흐의 관심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캔버스에 유채, 49×60센티미터, 1888, 코톨드미술관, 런던.

그가 찬양하던 일본으로 착각한 아를, 그곳에서 고갱과의 동거가 파국으로 끝나고 공동체의 이상이 결렬되자 비센트는 더 이상 일본도 우키요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비가 쏟아지는 다리 >
런던만국박람회와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 미술과 문화가 서양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면서 유럽의 예술가들이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반 고흐 역시 우키요에의독특한 구도와 색채와 질감에 매료되어 직접 모사하기까지 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모사한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54×73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화가들은 우키요에 덕분에 원근법이라는 서양미술의 오랜 규범을 파괴하게 되었다. 특히 인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이 그림을 그리는 데 너무나 원칙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우키요에는 서양미술의 원칙, 즉 화면의 중심에 꼭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명암 구분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생각, 그림의 중심이 되는 대상을 그릴 때 그 전체를 담아야 한다는 생각 등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서유럽에서 자포니슴의 바람은 1910~1920년 사이에 사라져 갔다. 이는 자포니슴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와 들라크루아의 동방 취미처럼 그저 동양에 대한취향의 하나로 일시적인 유행에 그쳤음을 말해 준다. 자포니슴의 소멸은 그 역할이 끝났음을 의미하는데, 서구 세계에서 미지의 세계를 대변하는 신비로운 타자이던일본이 이웃 나라를 무참히 짓밟는 나라라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다. 더 이상 일본은 신비한 유토피아로서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일본 여인>.
클로드 모네가 1876년에 열린 제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그림 속 모델은 모네의 첫 번째 아내인 카미유다. 캔버스에 유채,
142.3×231.8센티미터, 1876, 순수미술박물관, 보스턴.

화가 공동체라는 이상을 찾아서빈센트는 1886년에 남프랑스로 가겠다고 말했지만 그가 아를에 도착한 것은 1888년 2월 20일로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이후 그는 1889년 5월 3일까지 1년 하고도 두 달 반 동안 아를에서 살면서 200점 이상의 유화와 100점 이상의 이상의 수채와 소묘를 그렸다.

329년,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이후 아를은 로마제국 제3의 도시로 불릴 만큼 번성했다. 735년부터 4년간 아랍인의 지배를 받았으며, 855년부터 사실상 독립 왕국인 아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하지만 9세기에 바이킹과 사라센 해적의 침공을 받으며 쇠퇴했고, 이로써 프로방스의 중심지는 마르세유로 옮겨졌다.

아를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주에 위치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역사적 도시다. 지리적으로는 론강 하류를 끼고 있으며, 삼각주를 형성하는 카마르그 평원에 위치해 있다. 로마인들은 이곳을 아렐라테Arelate라고 이름 지었는데, ‘늪지 속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빈센트라는 유명 화가가 아를을 이상향으로 낙점한 것처럼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남프랑스의 여러 도시로 향하는 낭만적인 여행을 상상하고는 한다. 이렇듯 욕망은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해 매개되기 마련이다.

‘갈리아의 로마‘라고 불릴 만큼 고대 로마의 번성한 도시였던 아를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를 도와 마르세유를 침략한 뒤 점령한 기원전 49년부터 발전하기시작했다.

다시 말해 원시적이거나 동양적이거나 환상적인 파라다이스를 추구하는 화가들의 꿈이 공동체의 형식으로 빛을 발하던 시기였다. 빈센트는 화가 공동체의 꿈을 실현하고자 베르나르, 로트레크 등 여러 동료 화가들에게 아를로 올 것을 제안했다. 화가의 천국을 프로방스에 세우겠다는 꿈을 함께 실현해 보지 않겠느냐고 호소했다.

당대 화가들 사이에서는 파리를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들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그림 같은 장소를 여행했다. 클로드 모네는 앙티브로, 베르나르와 폴 시냐크와 카미유 피사로는 노르망디나 브르타뉴로 갔다. 고갱도 브르타뉴, 파나마,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타히티로 떠났다. 게다가 프로방스에는 빈센트가 좋아하는 화가인 몽티셀리와 세잔이 머물고 있었다.

빈센트가 파리를 떠날 즈음 사실 그는 알코올에 빠져 있었다. 거의 알코올중독자 수준이었으며, 매춘의 쾌락과 매독의 위험에도 빠져 있었다. 테오도 이전처럼 형을말리기는커녕 전위적인 유행을 퍼트리는 트렌드 세터로서의 새 역할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대 로마 시대에 번성했던 아를에는 지금도 그 유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1888년 2월, 화가들의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꿈을 품고 밝은 빛과 아름다운 자연이있는 이곳에 도착한 반 고흐는 고대 원형 극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을 빌렸다. 3개월 뒤에는 라마르틴광장에 있는 작고 노란 집을 빌려 이사했다. 그리고 동료 화가들에게 그 꿈의 실현에 동참할 것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빈센트는 자신이 아를로 떠난 이유를 보다 드높은 예술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늘 추구해 오던 화가 공동체라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북쪽 출신의 사람답게 빛과 태양을 찾아서, 파리의 추위와 소음을 피하기 위해, 파리 사람들의 냉정함과 동료 화가들의 끝없는 경쟁과 당파성이 싫어서, 신경쇠약과우울증 때문에 휴식이 필요해서, 돈 걱정을 덜해도 되는 건강한 시골 생활을 위해, 그림 구매자가 원하는 주제를 찾기 위한 사업적 모험을 위해, 새로운 예술적 탐색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빈센트의 전략적인 행동과 테오의 연줄로도 단 한 작품도 판매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모든 상황이 빈센트를 남프랑스로 향하게 했다.

아를과 일본의 유사성은 전혀 없었다. 완전한 착각이었다. 사실 아를은 해안 지역도 아니고 특별히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대 사람들은 아를을천박하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주목받았던 이유는 아주 잠시 동안 로마제국의 수도로서 전성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남프랑스에서 ‘완벽한 일본‘을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고갱과 베르나르에게 바로 눈앞에 일본이 있다고, 그저 자기 앞에 있는 것을 그리기만 하면 된다고 과장했다.

몽마주르수도원에서 내려다본 아를 전경반 고흐는 아를 인근에 있는 몽마주르수도원의 유적지를 적어도 50번은 다녀왔다고 했다. 10세기에 세워진 이 수도원은 한때 성지순례지로 유명했지만, 반 고흐 당시에는 많이 쇠락해 있었다. 화가는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순례하듯이 그곳을 자주 찾았다. 그는 수도원이 자리한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아를 전경에 깊이 심취했고,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먼저 아를은 남쪽 도시들 중 네덜란드와 가장 흡사하다고 생각했던 것. 아를 주변의 평원은 개척지여서 네덜란드의 풍경화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외지인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상인이나 포주와 싸웠고, 물감과 캔버스를 대 주던 장사꾼과도 싸웠으며, 파리로 보내는 소포와 운임 때문에 우체국 직원과도 싸웠다. 예민한 위장을 위한 음식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식당 주인과 싸웠고, 여지없이 그를 조롱하는 10대 아이들과도 싸웠다. 호텔 주인과는 난방과 관리비 문제, 불량한 화장실 상태, 포도주 맛 같은 사소한 이유로 싸움질을 해 댔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는 그들을 따분한 사람, 놈팽이, 건달, 비열한 욕심쟁이라고비난과 불평을 쏟아 냈다.

빈센트는 자포니슴에 홀딱 빠져 있던 베르나르에게 일본 판화에서 볼 수 있는 이상적인 풍경을 아를에서 볼 수 있다면서 함께 살자고 부추겼다. 베르나르가 거절하자빈센트는 로트레크를 비롯해 별로 친하지도 않은 동료 화가들에게까지 편지를 써 가며 화가 공동체를 결성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고갱만이 가능성을 비추는 답변을 해 왔다.

그는 아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마르세유 같은 프로방스의 다른 지역으로 떠날까 하고 생각했다.

<아를의 정원>
아를의 화사한 봄은 반 고흐를 진정으로 매료시켰다. 파리 시절부터 시도한 그의 인상주의적 색채는 아를에 와서 완연히 무르익었다. 캔버스에 유채, 91×72센티미터, 1888, 덴하흐미술관, 덴하흐.

빈센트가 아를에 가장 초대하고 싶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 고갱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동생 테오였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구필화랑을 그만두고 자기와 함께아를에서 살자고 했다. 그럴 수 없다면 최소 1년 동안만이라도 휴가를 내라고 요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분석보고] 자유와 집착의 경계: 조르바와 반 고흐

1. 비교의 전제

가. 인물의 성격

ㅇ(조르바) 실제 인물 요르고스 조르바스를 바탕으로 창조된 문학적 인물.

ㅇ(반 고흐) 편지·작품·행적이 기록으로 남은 실존 인물.

ㅇ(비교 기준) 자유로운 인간의 전형과 모순된 현실 인간의 대비.

2. 비교 개념의 정리

가. 자유의 의미

ㅇ(자기결정성) 타인의 강제 없이 스스로 삶의 방식을 선택함.

ㅇ(경험의 개방성) 계산보다 행동을 앞세우며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임.

ㅇ(타인 존중) 자신의 욕망을 따르되 타인의 선택은 침해하지 않음.

ㅇ(조르바의 자유) 사회 규범에서 벗어나 자기 삶을 해방함.

나. 집착의 의미

ㅇ(통제 욕망) 자신의 감정과 기대에 맞게 상대를 움직이려 함.

ㅇ(경계 침해) 상대의 거절과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접근을 지속함.

ㅇ(현실 왜곡) 상대의 의사보다 자신의 해석과 감정을 우선함.

ㅇ(관념의 절대화) 자신의 이상과 환상을 현실보다 우선함.

ㅇ(인식의 강요) 자기 해석을 타인도 동일하게 받아들이도록 요구함.

ㅇ(반 고흐의 집착) 타인의 삶과 현실 인식까지 자기 환상에 맞추려 함.

3. 두 인물의 공통점

가. 일반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인간

ㅇ(사회적 부조화) 기존 질서와 규범에 쉽게 순응하지 않음.

ㅇ(강한 몰입) 감정과 욕망을 숨기지 않고 대상에 극단적으로 몰입함.

ㅇ(경이로운 시선) 일상의 자연과 삶을 처음 보는 것처럼 받아들임.

ㅇ(행동성) 생각과 감정을 실제 행동으로 옮김.

4. 조르바의 자유

가. 자기 삶을 향한 광기

ㅇ(행동의 자유) 두려움과 체면 때문에 남들이 못 하는 일을 실행함.

ㅇ(삶의 감탄) 순간을 분석하기보다 온몸으로 경험함.

ㅇ(규범의 탈피) 사회적 시선보다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따름.

ㅇ(타인 존중) 자기 방식대로 살되 타인의 선택은 침해하지 않음.

→ 조르바의 광기는 자기 삶을 해방하는 자유에 가까움.

5. 반 고흐의 집착

가. 타인을 향한 광기

ㅇ(거절의 부정) 상대의 명확한 거절을 최종 의사로 인정하지 않음.

ㅇ(자의적 해석) 상대의 말보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우선함.

ㅇ(지속적 접근) 진심을 보이면 상대가 마음을 바꿀 것으로 확신함.

ㅇ(현실 판단의 왜곡) 거절마저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으로 해석함.

ㅇ(타인 경계 침해) 자신의 감정과 환상을 상대에게까지 적용함.

나. 관념을 향한 집착

ㅇ(관념의 투영) 실제 아를과 무관하게 남프랑스를 ‘완벽한 일본’으로 규정함.

ㅇ(현실의 재구성) 눈앞의 장소보다 자신이 꿈꾼 일본의 이미지를 우선함.

ㅇ(타인 설득) 고갱과 베르나르에게도 아를을 일본처럼 보도록 요구함.

ㅇ(반복 패턴) 사람·장소·예술을 자기 이상에 맞게 재해석함.

→ 반 고흐의 광기는 타인의 삶과 현실 인식까지 자기 환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집착에 가까움.

6. 자유와 집착을 가르는 차이

가. 광기의 방향

ㅇ(조르바)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겠다.”

ㅇ(반 고흐) “당신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나. 타인에 대한 태도

ㅇ(조르바) 자기 삶의 자유를 추구하되 타인의 선택은 존중함.

ㅇ(반 고흐) 자신의 감정과 해석을 상대의 의사보다 우선함.

다. 현실에 대한 태도

ㅇ(조르바)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직접 경험함.

ㅇ(반 고흐) 현실을 자기 이상과 환상에 맞게 재해석함.

라. 행동의 결과

ㅇ(조르바) 삶의 자유와 생명력을 확장함.

ㅇ(반 고흐) 인간관계의 갈등과 상대의 고통을 초래함.

마. 핵심 차이

ㅇ(자기 삶과 타인의 삶) 조르바의 광기는 자기 삶에 머물렀고, 반 고흐의 광기는 타인의 삶과 인식까지 침범함.

7. 사회적 맥락에서 본 두 인물

가. 조르바의 사회적 수용

ㅇ(시대적 배경)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변화가 충돌하던 그리스 사회.

ㅇ(문학적 의미) 억압된 규범을 깨뜨리는 자유로운 인간의 전형.

ㅇ(독자의 반응) 현실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자유에 대한 대리적 해방감 제공.

ㅇ(긍정적 평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아 해방의 상징으로 수용됨.

나. 반 고흐의 사회적 수용

ㅇ(시대적 배경)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일탈이 비정상으로 취급되던 19세기 유럽.

ㅇ(예술적 평가)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사후 천재로 재평가됨.

ㅇ(인간적 평가) 정신적 발작과 충동적 행동으로 광인의 이미지가 형성됨.

ㅇ(현대적 평가) 여성의 거절을 무시한 행동은 집착과 경계 침해로 읽힘.

ㅇ(관념적 평가) 자기 해석을 타인에게까지 요구한 태도는 현실 왜곡과 인식 강요로 볼 수 있음.

다. 사회적 수용의 차이

ㅇ(조르바의 광기) 사회적 억압을 깨뜨리는 자유로 수용됨.

ㅇ(반 고흐의 광기) 예술에서는 천재성, 인간관계에서는 집착으로 평가됨.

ㅇ(비교 결과) 광기의 평가는 행동의 방향과 타인 침해 여부에 따라 달라짐.

8. 종합 평가

ㅇ(공통점) 두 인물 모두 남들과 다르게 살며 삶에 강렬하게 몰입함.

ㅇ(인물의 차이) 조르바는 자유의 전형으로 재창조된 가공인물이고, 반 고흐는 모순까지 기록된 실존 인물임.

ㅇ(결정적 차이) 조르바는 자기 삶을 자기 방식으로 살았고, 반 고흐는 타인의 감정과 현실 인식까지 자기 환상에 맞추려 함.

ㅇ(최종 결론) 조르바의 광기는 자유가 되었고, 반 고흐의 광기는 집착이 되었음.

“조르바는 자기 삶만 자기 방식으로 살았고, 반 고흐는 타인의 감정과 현실 인식까지 자기 환상에 맞추려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럼에도 빈센트는 한 살 연상의 그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는 짝사랑을 하다가 마침내 정식으로 구애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유지니는 이미 약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처음 맛본 강렬한 애정은 성사되지 못하고 끝내 불화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빈센트는 정신적인 충격을 강하게 받았던 것 같다. 성격이 돌변하여 사람들을 거칠게 대하고 자주 화를 냈으며, 고객들과 불화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유지니와의 일은 그의 인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길고 긴 우울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빈센트는 크나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이 가족에게서 새로운 소속감을 느꼈다.

런던 시절의 하숙집
10대 시절 구필화랑 덴하흐 지점에서 4년간 화상으로 일한 반 고흐는 스무 살이 되면서 런던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런던 시절 그는 브릭스턴에 있는 과부 어설라로이어의 집에서 하숙했는데, 이때 로이어 부인의 딸인 유지니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청혼까지 했다가 결국 거절당했다. 강렬했던 첫사랑의 실패는 반 고흐에게 기나긴 우울의 시작이 되었다.

이 불꽃에 손을 넣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 보게 해 주십시오1881년, 스물여덟 살의 빈센트는 다시 사랑에 빠졌다. 이번에는 이모의 딸로 자기보다 일곱 살 많은 코르넬리아 보스스트릭커(케이 보스라고도 불림)였다.

덴하흐에서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닉이라는 창녀를 알게 되었다. 빈센트보다 세 살 많은 그녀를 사람들은 시엔이라고 불렀다. 재봉사를 하다가 창녀로 전락한 그녀는미혼이었지만 다섯 살 난 딸을 두고 있었고, 그전에도 두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죽었다.

그들은 빈센트의 집요함에 넌더리를 내며 힐난했다. 그러자 빈센트는 식탁 위에서 타고 있는 등불 속에 손을 넣으며 "내가 이 불꽃에 손을 넣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애걸했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모부는 미친 짓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밖으로 내쫓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던 빈센트는 미슐레의 책에서 본 것처럼 여성의 거절은 "남성의 정열로 녹일 수 있는 얼음의 혼"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케이 보스는 빈센트를 피해 몸을 숨겼다.

빈센트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재혼할 의사도 없었던 케이 보스는 그의 청혼을 받자마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반 고흐의 두 번째 사랑인 케이 보스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아들과 남게 된 사촌 케이 보스의 모습은 미슐레가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제시한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의 여성‘ 그 자체로 반 고흐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케이 보스의 동반자라고 굳게 믿고 그녀에게 열광적으로 빠져들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유지니와의 일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참담한 마음으로 방황했다.

이때부터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난로를 둘러싸고 있는 바닷가 오두막집이라는 따뜻한 가족의 이미지를 포기했다.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은 친인척들 사이에 그가괴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쳤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무릎 위에 아이를 안고 있는 시엔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비천한 여성에게 누구보다 깊은 동정심을 느낀 반 고흐는 덴하흐에서 알게 된 창녀 시엔과 그녀의 아이들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들과따뜻한 가정을 꾸리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그는 결국 시엔과 아이들에게서 떠났다. 그 선택이 쉽지만은 않았는지 이후 그는 마음이 "고통으로시들어 간다"라고 표현했다. 종이에 분필, 35.5×53.8센티미터, 1883,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알코올중독에다 성병까지 앓고 있었다. 천연두 자국이 있었던 얼굴은 몹시 창백하고 야위었고 표정은 무감각했는데, 그래서인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러나 빈센트는 흉터가 있는 야윈 얼굴 속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처럼 슬픔에 잠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시엔의 불행 그 자체가 빈센트의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시엔은 다시 창녀로 되돌아갔다. 빈센트가 시엔을 포기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작업이 내 의무이고, 그 여자보다 당면한 문제다. 그러니 여자 때문에 작업이 어려워져서는 안 돼." 빈센트는 말했다. "우리가 함께 지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우리는 서로를 불행하게 해." 자신이 두 가지 모두를 해낼 수 없는 이상, 그리고 돈을 보내 주는 이도 테오였으므로 그녀를 포기하는 것이 답이었다. 1881년 1월말부터 1881년 8월까지 7개월간 이어진 둘의 만남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아기는 쉴 새 없이 울어 댔고, 다섯 살 난 딸은 부랑아처럼 집 안을 배회했다. 불면증이 있던 빈센트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언제부터인지 시엔은 포즈를 취할 때도 보수를 원했고, 허드렛일은 모두 빈센트에게 맡기는 등 점점 더 비협조적으로 변해 갔다. 게다가 난폭한 남동생은 마치 기둥서방처럼 돈 문제로 빈센트에게 폭행을 가하기까지 했다. 이제 더 이상 테오가 보내 주는 적은 돈으로는 시엔의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이처럼 빈센트는 시엔은 위험에 빠진 여주인공이고 자신은 그녀를 구해 주러 온 구세주인 양 행동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타락한 것일수록 해방에 관한 환상은점점 더 강력해졌다.

<공공급식소의 수프 배급 >시엔의 가족은 너무나 가난하여 공공 급식소를 자주 이용했다. 종이에 분필, 44.4×56.5센티미터, 883,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모멸감을 느낀 빈센트는 테오에게 "여자를 버리는 것과, 버려진 여자를 돌보는 것 중 어느 쪽이 품위 있고 섬세하며 남자다운 태도냐?"라고 반문했다. 병들고 굶주린데다 임신한 한 여자가 한겨울에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했다. 자기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런 존재를 보면 살려야 한다고 설득했다.

빈센트는 시엔과 살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행복은 머지않아 깨져 버렸다. 빈센트는 시엔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동안 매독에 걸려 버렸다. 그녀에게서 성병이 옮아 심한 고통을 겪으며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시엔은 그다지 가정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게으르고 더럽고 제멋대로였다. 게다가 오랜 음주와흡연, 영양실조, 임신과 유산, 빈혈과 폐결핵에 시달렸다. 고질병인 목의 통증 때문에 목소리는 이상하고 거칠었다. 오랜 세월 매춘을 하면서 모욕과 냉대에 익숙해진탓인지 툭하면 불같이 화를 냈고 험한 욕을 해댔다. 그렇게 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특이한 성격은 빈센트의 환상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녀의 웃음기 없고 상스러운 태도와 성질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는 피해자의 징후라고 감쌌지만, 이제는 그녀의 편협함과 미술에 대한 무지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빈센트는 시엔과 이별한 뒤 네덜란드 동부의 드렌터 지방으로 떠났다. 그는 자연과 홀로 대결하며 황야의 농부와 오두막집 등의 풍경을 그리며 슬픈 마음을 다잡으려했다. 언제나처럼 자연은 위대한 치유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이 닥치면서 다시 뉘넌에 있는 아버지의 사택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가족들은 빈센트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서른 살이나 되었지만 자립할 능력이라고는 없어 보이고, 독특한 복장과 행동으로 당황하게 하는 그를 미친 사람처럼 취급하고는 했다.

뉘넌 시절 반 고흐의 작업실반 고흐는 시엔과 헤어진 뒤 북부의 춥고 어둡고 황량한 땅을 방황하다가 그 사이 부모님이 새로 이사해서 살고 있던 뉘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모님과 무능해 보이는 서른 살 된 아들의 관계는 날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은 목사관 뒤편에 있는 부속 건물을 비우고 아들이 화실로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몽마르트르에 있는 탱부랭카페의 마담으로서 마흔여섯 살이던 세가토리는 모델 일을 계속하기에는 늙었지만 모델이 너무나 아쉬웠던 빈센트의 처지에서는 그럭저럭 적당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무고한 육체적 관계도 즐기며 연인 사이 비슷하게 지냈을 것이다. 마치 카페 여주인이 많은 남자들의 무의지적 애인이듯이말이다.

약을 삼킨 것이다. 소설 속 보바리 부인이 삼켰던 스트리크닌! 만약 빈센트가 그녀를 토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치사량이 아니어서 급히 의사에게서 해독제 처방을 받았다. 베헤만 가문은 즉시 이 사건을 덮었고, 추문을 피하기 위해 그녀를 멀리 떠나보냈다고 했다.

<뉘넌의 포플러나무 길 >반 고흐는 1883년 말부터 1885년 11월까지 2년간 뉘넌에서 머물며 약 280점의 소묘, 수채화와 비슷한 수의 유화를 그렸다. 야외에 나가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목사관 인근을 오랫동안 산책하며 평화로운 전원 속에서 그림의 주제를 찾았다. 캔버스에 유채, 98×78센티미터, 1885, 보이만스반뵈닝언미술관, 로테르담.

그의 외로운 처지와 진지한 성격을 본 그녀는 마침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다. 빈센트는 그녀의 관심을 싫어하지 않았다. 빈센트의 가족은 빈센트가 그녀와가까이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테오만은 형이 즐거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눈치챘다. 두 사람 모두 대책 회의에 불려 나갔다. 혼기를 넘긴 두 언니를 비롯한 가족은 마르호트가 무분별하게 행동한다고 맹비난하며 그녀의 사랑을 비웃었다. 이때 빈센트는 오기가 생겨 탁자를 내리치며 "그녀와 결혼하겠습니다. 그러고 싶어요. 그래야 합니다"라고 했다. 진심이 아닌 성난 최후통첩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조폭의 애인이던 여자에게 그는 육욕에 가까운 애정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다른 사내와 사랑에 빠져 있던 그녀는 거절했다. 빈센트는 자기 식대로판단했다. 그녀가 주위의 위험한 사내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향을 무드셀라증후군이라 부르는데, 즉 나쁜 일은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편형성을 가리킨다.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일종의 현실도피 심리라 할 수 있다.

<탱부랭카페에 앉아 있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파리 시절, 탱부랭카페의 주인인 세가토리는 종종 반 고흐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파리로 건너온 그녀는 모델 일과 매춘의 경계에서 산전수전 겪은 여인으로 늙어 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 대해 반 고흐는 시엔에게 그랬듯이 깊은 연정을 느꼈다. 그녀 역시 반 고흐를 가엾게 여기고 그의 작품을 카페에걸게 해 주는 등 둘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반 고흐의 도를 넘는 구애에 둘의 관계는 결국 틀어지고 말았다. 캔버스에 유채, 46.5×55.5센티미터,
1887~1888,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빈센트는 아고스티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카페에 드나들었다. 결국 그녀의 남자와 주먹다짐이 벌어졌고, 빈센트는 피를 흘리고 현장에서 도망쳤다.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그녀를 시엔처럼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로 묘사했다.

빈센트가 죽은 뒤에도, 뒤늦게 명성이 높아졌을 때도 어머니는 자기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고, 아들의 미술 세계가 어리석다는 견해를 결코 바꾸지 않았다.

어머니가 보기에 아들은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들의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포부를 장래성 없는 방황으로 간주했고, 그저가족 한 명이 죽고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치부했다. 또한 빈센트가 의도적으로 부모에게 고통을 준다고 비난했다. 아들이 집에 남겨 놓은 그림들을 쓰레기 버리듯처분했고, 이후에 받은 작품들도 거의 무관심하게 다루었다.

통상 유아기에 받아야 할 사랑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즉 타인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싶어 하는데, 특히 우울하거나 불행을 겪는 사람에게 크게 공감한다. 이런 의존과 공감은 투사와도 관련된다. 빈센트가 남편을 잃은 사촌 누이 케이 보스와 창녀 시엔, 결혼 적령기를 넘긴 히스테릭한 마르호트 같은상처 입고 소외된 여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된 것도 동일시의 투사에 해당한다.

훗날 그는 모든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이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가슴을 녹인다고 고백했다. 모성애를 환기하는 모든 이미지는 빈센트를 사로잡았다. 꽃꽂이, 바느질, 요람 흔들기, 불가에 앉아 있기 등.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어린아이가 원할 법한 모성애와 그 상징에 집착했다. 어머니는 그를 버렸지만, 그의 내면은 지극한 모성을 찾는 일을 단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예술이 사랑의 자리를 대신하다빈센트의 사랑이 실패를 거듭하자 예술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랑의 실패는 예술에 더 몰입하게 해 주었다.

특히 빈센트가 포기한 것은 성행위였다. 창녀와 살 때 매독에도 감염되어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지만, 그것이 지나친 성행위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는 성교를 지나치게 많이 하면 작업할 에너지가 소진된다고 하면서 예술을 위해서는 정력을 희생해야만 한다고 테오는 물론 동료 화가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그는 베르나르에게 보낸편지에서 "그림과 성교는 양립할 수 없지. 성교는 뇌를 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지"라고 했다.

빈센트는 정력적인 동시에 금욕적이었던 선배 예술가들을 들먹였다. 먼저 들라크루아가 작품에 정진하기 위해 성행위를 삼가고 깊은 연애를 포기했음을 밝혔다. 드가는 여자들을 사랑하고 성교를 자주 하면 뻔하디 뻔한 재미없는 화가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세잔의 작품에 남성적 힘이 넘치는 것은 그가 결혼 생활의 재미에 깊이 빠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에턴 정원에 대한 추억 >여성들에 대한 반 고흐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어머니에게서 기인한 바가 컸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는 늘 모성 결핍에 시달렸고, 그래서 어머니 같은 여성을 보면 무섭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아를 시절 어머니를 추억하며 그린것이다. 왼쪽 인물은 여동생 빌레미나를, 오른쪽 인물은 어머니를 모델로 한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92.5×73.5센티미터, 1888, 스테이트헤르미티지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특히 탐서가이던 그가 읽어 치운 책들, 특히 매춘의 연대기로 유명한 졸라의 나나와 공쿠르의 창녀 엘리자는 그를 성적인 자유와 방종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채웠다. 또한 자신을 스스로 "정육점 고기 같은 창녀 앞에 선 야수"로 묘사하기도 했다.

빈센트는 창녀를 "그토록 저주받고 비난받고 경멸당하는 여자들"로 묘사하면서 그녀들에 대해 애착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창녀를 자비로운 누이들로 치부하면서 그미덕을 찬양했고, 집요하게 그들과 우정을 맺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정당화했다.

<슬픔>. 창녀인 시엔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아무런 보호막 없이 얼굴을 깊이 파묻고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통해 그녀가 짊어진 생의 무거움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종이에 연필, 27×44센티미터, 1882, 뉴아트미술관, 월솔.

창녀에 대해 보이는 데카당스 예술가들의 이해심은 감정과 운명의 이러한 공통성에서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빈센트 역시 창녀를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이라고 보았으며, 자신의 누이이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바로 자신과 같은 운명 공동체라는 것이다.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초록의 밀밭>평생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반 고흐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들판과 숲과 황야를 쏘다니며 그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 자연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떠받쳐 주는버팀목이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서 머물 때 그린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92.5×73센티미터, 1889, 국립프라하미술관, 프라하.

빈센트는 호기심 천국형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걷기, 독서, 관찰, 소묘, 수집 등 관심사가 너무나 다양했다. 특히 자연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과 예술에서 정서적 뿌리가 되어 주었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에 따르면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도록 하렴. 그것이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연을 보는 방법을 우리에게가르쳐 준단다.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초록의 밀밭>평생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반 고흐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들판과 숲과 황야를 쏘다니며 그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 자연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떠받쳐 주는버팀목이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서 머물 때 그린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92.5×73센티미터, 1889, 국립프라하미술관, 프라하.

빈센트가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한 첫 번째 방법은 바로 하염없이 걷기였다. 그는 목사관에서 느껴지는 밀실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 들판과 황야를쏘다녔다. 특히 황야에서 위로를 받았다. 바람 부는 황야는 모든 관찰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꽃을 피워 올리는 야생화, 알을 낳는 곤충, 둥지를 짓는 새등. 그는 덤불의 생물을 관찰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고, 모랫둑에 앉아 수생 곤충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데 몰두했다.

부모, 누이, 친구, 심지어 테오와도 점점 소원해지면서 더욱더 자연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는 기운을 되찾고 원기를 회복하러 자연으로 갈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빈센트는 엄청난 독서가였다. 다른 이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동안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빈센트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그가 친구들과 소통하기보다는 홀로 시간을 많이 보냈다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윤동주 - 문학지도, 걸어가야겠다 ㅣ 클래식 클라우드 36
김응교 지음 / arte(아르테)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찰] 윤동주의 삶과 시: 식민지조선 청년의 양심과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1.윤동주의 삶과 민족의 궤적: 어둠 속을 걸었던 발자취

윤동주의 삶은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상실과 고난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생애는 북간도 명동마을에서 시작되어 평양, 경성, 도쿄, 교토를 거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끝났다. 이 이동 경로는 한 개인의 성장 과정이면서, 나라를 잃은 조선 청년이 식민지 현실 속에서 겪어야 했던 시대의 길이기도 하다.

가.명동마을과 명동학교 시절: 민족의 뿌리가 자란 공간

윤동주는 1917년 북간도 명동마을에서 태어났다. 명동마을은 일제의 수탈과 억압을 피해 이주한 조선인들이 형성한 공동체였고, 민족교육과 기독교 신앙, 독립의식이 함께 자리 잡은 공간이었다. 윤동주는 조선 땅 안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조선인의 말과 정신을 지키려는 공동체 속에서 성장했다.

명동학교 시절은 윤동주의 정신 형성에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민족교육의 분위기와 기독교적 세계관, 공동체의 감각을 함께 익혔다. 훗날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하늘, 별, 바람, 고향, 아이의 이미지는 이러한 성장 배경과 연결된다. 명동마을은 윤동주에게 단순한 출생지가 아니라, 그의 시와 양심이 자라난 정신적 고향이었다.

나.평양 숭실중학 시절: 신앙과 양심의 압박

윤동주는 이후 평양 숭실중학에서 공부했다. 그러나 당시 학교와 종교의 영역까지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고 있었고, 신사참배 강요는 조선인 학생과 기독교계 학교에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 윤동주가 숭실중학에서 오래 머물지 못한 배경에는 이러한 식민지 교육 현실이 놓여 있었다.

이 시기는 조선인이 단순히 정치적으로 지배받던 시기가 아니었다. 학교, 종교, 언어, 이름, 사상까지 일제의 통제 아래 놓이던 때였다. 윤동주의 청소년기는 바로 이러한 압박 속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그의 시에 나타나는 자기성찰은 개인적 고민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 청년이 자기 정체성과 양심을 지키려 한 내면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

다.경성 연희전문 시절: 암흑기 속의 성찰

윤동주는 1938년 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연희전문 시절은 그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깊어진 시기였다. 그는 이 시기에 많은 시를 썼고, 졸업 무렵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묶으려 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의 검열과 탄압 속에서 시집은 생전에 출간되지 못했다.

이 시기의 윤동주는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공부하고 글을 쓰는 청년이었지만, 동시에 조선어와 조선인의 삶이 억압받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 모순이 그의 시 속에서 부끄러움과 참회의 정서로 나타난다. 윤동주에게 부끄러움은 나약함이 아니라, 시대 앞에서 스스로를 엄격하게 돌아보는 양심의 감각이었다.

라.도쿄·교토 유학과 구속: 제국의 중심에서 겪은 모멸

1942년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교토 도시샤대학으로 옮겼다. 일본 유학은 더 넓은 학문을 접하는 기회였지만, 동시에 제국의 중심부에서 식민지 조선 청년으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감시 대상이었고, 전시체제가 강화될수록 사상 통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윤동주는 일본 유학 과정에서 ‘히라누마 도주’라는 이름을 제출했다. 이는 식민지 제도, 가족 호적, 일본 유학, 총독부의 압박이 얽힌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이 경험은 「참회록」의 부끄러움과도 연결된다. 윤동주는 완벽한 영웅이라기보다, 모멸의 시대를 통과하며 자기 양심을 끝까지 붙들려 했던 한 조선 청년이었다.

윤동주는 1943년 7월 귀향을 앞두고 교토에서 체포되었다. 송몽규도 함께 붙잡혔고, 윤동주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조선 청년의 생각과 언어, 미래까지 통제하려 했던 일제의 폭력성을 보여준다.

마.후쿠오카 형무소와 죽음: 광복을 앞둔 비극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광복을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이었고, 만 27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의 죽음은 한 시인의 비극이면서, 식민지 조선 청년이 겪어야 했던 가장 처절한 결말 가운데 하나였다.

윤동주의 사망 과정과 관련해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와 생체실험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다만 그 구체적 실체가 완전히 확인된 것은 아니므로, 이를 단정하기보다는 일제 말기 형무소 안에서 그의 죽음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과 비극을 남겼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분명한 것은 윤동주가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제국의 감옥에서 생을 마쳤다는 사실이다.

2.윤동주의 시와 민족의 처지: 부끄러움의 미학

윤동주의 시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정서는 부끄러움이다. 그의 부끄러움은 단순한 수치심이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 현실 속에서 인간으로서 떳떳하게 살고 있는가를 묻는 윤리적 감각이다.

윤동주는 총칼을 들고 싸운 무장투쟁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 누구보다 엄격한 질문을 던졌다. 「쉽게 씌어진 시」에서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쓴 것은, 고통스러운 시대에 글을 쓰는 사람의 책임을 묻는 태도였다.

이 부끄러움은 나약함이 아니었다. 일제가 타협과 순응을 강요하던 시대에, 윤동주는 자기 내면을 속이지 않으려 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란 「서시」의 태도는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양심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선언이었다.

「별 헤는 밤」에서 윤동주는 별을 통해 어머니, 친구, 고향, 이름 없는 존재들을 불러낸다. 이는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 아래 사라져가던 조선인의 말과 기억을 붙드는 행위이다. 별을 헤는 일은 잃어버린 이름들을 다시 부르는 일이며, 고향과 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참회록」은 식민지 청년이 역사 앞에서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시이다. 윤동주는 자기 이름조차 온전히 지키기 어려운 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그의 참회는 개인적 잘못의 고백을 넘어, 한 인간이 자기 존재를 빼앗기는 시대 앞에서 느낀 깊은 부끄러움과 연결된다.

윤동주의 시가 지닌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분노를 큰소리로 외치기보다, 자기 내면의 부끄러움을 통해 시대의 어둠을 견디고자 했다. 그의 시는 가장 조용한 언어로 쓰였지만, 그 안에는 식민지조선 청년의 양심과 민족의 존엄이 담겨 있다.

3.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

윤동주의 삶과 시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질문은 분명하다. 총칼의 시대는 끝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혐오와 분열, 역사 왜곡과 망각의 문제 속에 살고 있다. 윤동주의 시를 오늘 읽는 일은 과거의 비극을 추모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를 묻는 일이어야 한다.

첫째, 부끄러움을 아는 양심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목적을 위해 편법과 반칙을 능력처럼 포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는 우리에게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한다.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았는지,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는지 묻는 태도가 필요하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만이 자기 삶을 바로잡을 수 있고,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만이 건강해질 수 있다.

둘째, 약한 사람과 ‘죽어가는 것들’을 향한 연대가 필요하다. 윤동주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다짐했다. 오늘의 사회에서 죽어가는 것들은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 지역의 소외된 사람들, 이름 없이 사라지는 생명들일 수 있다. 각자도생의 방식만으로는 공동체가 지속될 수 없다. 약한 존재들을 기억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시선이 필요하다.

셋째, 역사적 기억에 근거한 성숙한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 윤동주의 삶은 일제강점기의 폭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조선어 억압, 창씨개명, 사상 통제, 조선인 유학생 감시, 투옥과 죽음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다. 그러나 그 기억은 단순한 증오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실을 정확히 알고, 왜곡을 경계하며,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넷째, 자기 말과 문화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윤동주는 한국어가 억압받던 시대에 한국어로 시를 썼다. 말은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라 한 민족의 기억과 감정, 삶의 방식을 담는 그릇이다. 오늘 우리는 우리말을 자유롭게 쓰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말의 품격과 공공언어의 책임, 지역의 말과 생활의 언어를 가볍게 여기는 문제를 돌아보아야 한다.

윤동주의 삶은 나라 잃은 시대에 자기 말과 양심을 끝까지 지키려 한 길이었다. 그의 시는 식민지조선 청년이 느낀 부끄러움과 고통을 민족의 존엄으로 바꾸어낸 기록이다. 오늘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역사를 정확히 기억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양심을 회복하며, 약한 사람과 함께 가는 공동체를 세우고, 자기 말과 문화를 소중히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윤동주의 삶과 시가 오늘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들판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죽기 전 빈센트는 불안한 하늘 아래 펼쳐진 거대한 밑밭을 보면서 명료한 정신으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시골 생활을 통해 건강과 원기도 되찾았다고 전했다.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그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누구보다도 분투한 건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여기 돌아와서 다시 일을 시작했어. 그러나 붓이 손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아. 그래도 자신이 바라는 바를 잘 알기 때문에 다시 세 점의 큰 캔버스를 그렸어. 불안한하늘 아래 펼쳐진 거대한 밀밭이야. 나는 명료한 정신으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어. 곧 볼 수 있을 거야.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고립된 소년빈센트는 반 고흐 가문에서 가장 불쾌한 아이로 낙인찍혔다. 태생부터 남달랐기 때문일까? 형의 대체아로 태어난 것 말이다.

반 고흐의 아버지가 몸담았던 교회반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신교 교회 목사였다. 교회 묘지에는 반 고흐보다 먼저 태어나 죽은 형의 묘비가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반고흐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를 동일시하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면모를 가진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상냥하고 부드럽게 다가가는 면모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반 고흐는 아버지의 그런 두 얼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때부터 정확히 만 1년 뒤 빈센트가 태어났다. 죽은 형의 생일과 같은 날에 태어난 아이는 이름마저 형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물론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당시 네덜란드에서 먼저 죽은 아이의 이름을 이어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죽은 형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빈센트의 삶을 더욱 미스터리하게 했을까?

그런 어머니는 마치 장남의 죽음이 빈센트의 탓인 듯 그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먼저 죽은 형의 이름을 빈센트에게 그대로 붙임으로써 평생을 형에 대한 애도와 죄의식 속에서 살게 한 것이다.

정작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우울하고 고집스럽고 어딘지 심통이 나 있는 빈센트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신의 은총이 아들에게는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과부가 된 사촌 누이에게 청혼하고, 창녀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하고, 학교를 중퇴하거나 퇴학당하고, 목사의 길도 실패하고, 돈도 못벌고 제멋대로 물의만 일으키는 아들을 아버지로서는 비난하고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는 빈센트를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치부했다.

성서 앞에 놓인 삶의 기쁨
아버지 테오도뤼스는 발음이 나쁘고, 단어를 까먹거나 혼동하는 등 좋은 설교자는 못 되었다. 가족조차 그가 대중적인 연설자로는 재능이 없음을 인정했다. 아버지는목회 활동이 끝나면 가족들과 거리를 둔 채 다락방 서재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파이프 담배와 시가를 즐겨 피웠고, 술은 조금씩 즐겼다. 병치레가 잦았던그는 아플 때면 더욱 침울하게 홀로 침잠했다.

아버지의 신앙과 신념으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장 2절에는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라고 적혀 있다. 이는 빈센트를 향한 아버지의 일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기독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졸라와 자연주의에 심취했다고 혐오했다. 성서 앞에 졸라의 책을 그린 것은 아버지의 완전무결하고 격식을 차린 삶과 신앙에 대한 빈센트의 도전이었다.

본명이 빈센트와 똑같은 큰아버지 센트는 빈센트의 인생에서 테오 다음으로 특별한 의미를 차지한다. 1840년대 말에 센트는 ‘반 고흐 국제 미술상‘이라는 이름으로덴하흐에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의 이름은 네덜란드와 전 유럽에 걸쳐 미술품 거래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

<성서가 있는 정물화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하는 불 꺼진 촛대와 구약의 이사야 편이 펼쳐져 있는 성서 앞에는 빈센트가 좋아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 있다. 캔버스에 유채,
78.5×65.7센티미터, 1885,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소장.

그는 런던의 분위기에 대해 "사람들은 무정하고, 무미건조하며, 섬세하기보다 무감각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목사가 되기에 당시로서는 빈센트의 나이가 너무 많은 데다, 수학과 고전은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엄청난 수업료도 필요했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15개월 동안 기를 쓰고 공부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전도사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와 존스 목사의 소개로 플랑드르 전도사 양성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수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그는 런던의 분위기에 대해 "사람들은 무정하고, 무미건조하며, 섬세하기보다 무감각했다"라고 회상했다.

보리나주의 옛 탄광의 모습화상 일을 그만둔 반 고흐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국경 지대에 있는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떠났다. 매우 위험하고 열악하기로악명 높았던 이곳에서 그는 평신도 전도사로서 광부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위해 초인적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교단 측에서는 설교 능력이 수준 이하라는 이유로그를 해임하고 말았다.

빈센트가 가난한 자의 편에 서게 된 데는 한 설교의 영향이 컸다. 즉 산업혁명은 큰아버지인 센트 같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빈곤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가 진정한 실존자들이자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끈기 있고 의연하고 학대에 가까운 노동을 참아 낸다는 사실과,
전혀 희망이 없는데도 신앙을 고수한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탄광주들은 광부의 처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광부들에게도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빈센트의 반감은 강해져만 갔고, 가난한 광부들과 완전히 일체화되고자 했다.

이때부터 빈센트는 농민화가의 수호성인 같은 밀레의 작품들을 자신만의 상상력의 신전에 모셨다.

목회자가 꿈이었던 반 고흐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반 고흐를 처음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남다른 종교적 열정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가는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사진은 보리나주 시절에 실직한 뒤 떠돌던 무렵, 퀴에메에서 잠시 머물렀던 방이다.

종교적 믿음이 미술에 대한 믿음과 뒤섞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위대한 화가들의 걸작에서 신을 발견했고, 그림 그리기를 숭고한 선교 행위라고 믿게 되었다. 둘다 모두 화해와 구원의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였다.
2026.07.11 오후 21시 22분21%목사를 등에 업은 화가빈센트는 보리나주에서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의 초기 습작은 몇 점 안 되지만, 그야말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보아도 손색없다.

보리나주에서 실직하고 무일푼이 된 그는 브뤼셀까지 걸어가 과거에 자기를 도와 보리나주로 보내 준 목사를 만나 복직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보리나주의 실태를 그린 그림을 목사에게 보여 주었다. 세상에서 최초로 빈센트의 그림을 보게 된 목사는 그에게 종교보다 예술이 더 중요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당장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그 순간 빈센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물일곱 살, 당시로서는 그림을 시작하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림 그리기는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우정에 굶주려 있는 그에게 조용히 타인을 관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과 손을 바쁘게 움직여 몰두할수 있는 일이며, 자기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과 다시 연결해 주는 매개체였다.

1879년 7월, 빈센트는 결국 전도사에서 해임되었다.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에는 파면의 이유가 ‘수준 이하의 설교‘라고만 적혀 있지만, 진짜 이유는 타협과 굴복 없는빈센트의 저항적인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리의 이방인1885년 11월 말, 빈센트는 조국 네덜란드를 영원히 떠났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으로 간 빈센트는 왕립순수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지만 아카데믹한 교육에 회의를느끼고 얼마 있지 않아 학업을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이듬해 2월에 파리로 갔다.

어머니를 쏙 빼닮아 의지가 강한 누이동생 아나는 오빠가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고 비난했다. 빈센트는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상처 입은 마음으로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얼마 되지 않는 유산에 대한 권리도 포기했다.

파리 시절, 테오와 함께 살았던 레픽가1886년, 서른세 살의 반 고흐는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스무 살 무렵 구필화랑 본점에서 일할 때도 살았던 도시다. 그는 테오와 함께 파리 외곽 몽마르트르에 있는 아파트를 구해 2년간 살았다. 탁 트인 하늘과 파리 시내를 내다볼 수 있었던 그곳은 사진에서 오르막길이 있는 오른쪽 구석에 있다.

당시 동료들은 빈센트가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파리인의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북쪽 사람이라며 은근히 조소했다. 그리고 ‘돌았지만 해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판단했고, 애써 괴롭힐 정도로 흥미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무시해 버렸다.

빈센트는 파리에서 2년 가까이 동생에게 의탁했다. 테오는 형 때문에 힘들어했다. 누이에게 "형은 지저분하고, 늘 불만으로 가득하고, 사람을 업신여기고, 심지어 자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야"라고 썼다.

인상파의 색채를 받아들이던 낯선 파리 생활에서 고달픈 이방인 작가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회의에 직면해야만 했던 상황도 자화상에 몰입하게 했을지도모른다.

파리 시절 빈센트는 "모델이 없어서 나 자신이라도 그리려고 꽤 괜찮은 거울을 하나 샀지", "다른 모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자화상을 두 점 그리고 있다"라고 테오에게 넋두리를 한 적이 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파리에 온 반 고흐는 처음에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을 드나들었다. 아카데미에 비해 엄격하지 않고 모델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낀 반 고흐는 약 3개월 만에 화실 출입을 그만두었다. 이 그림은 화실에서 만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카페에 앉아 있는 반 고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판지에 파스텔, 45×54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그의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묘사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색과 성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고뇌와 연민, 고립과 소외, 충동과 공격성, 외로움과 고독 등을 극복하고 살아남고자 한 존재의 필사적인 투쟁의 역사를 보여 준다.

<꽃핀 밤나무>1874년, 클로드 모네를 필두로 한 젊은 예술가들이 파리에서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를 개최한 이래 인상주의는 당대 미술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반 고흐 역시파리에서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기법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전의 어둡고 짙은 색조가 밝고 화사한 색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유채, 46.5×56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빈센트는 파리 시절과,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말기에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렸다. 화가들은 고단하고 암울한 시기에 가장 많은 자화상을 그린다. 빈센트역시 약 2년간의 파리 시절에 스물일곱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나체로 서는 것은 더더욱 꺼렸다. 그래서 빈센트가 택한 방법은 창녀를 구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아닌 타인을 그리면서 사람과 접촉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어 주지도, 관심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

1860년대에 등장한 인상주의 미술은 빈센트에게 생소하지만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한 양식이었다. 그러나 막 인상주의 그림과 그 화가들을 접하게 된 빈센트는 그들이 서로 비난하고 반목하는 데 여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씁쓸함을 느꼈다.

폴 세잔은 빈센트가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보고 미치광이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그렇게 자극받은 빈센트의 그림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즉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파리코뮌의 멤버이던 탕기는 새로운 미술이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상주의 화가들은 지배 체제 이데올로기에서 배제된 민중화가였다. 그러기에 그들을 어떻게든 도와야 했다. 특히 자신과 신념을 공유한 세잔을 지지했다.

탕기화방이 있던 몽마르트르 클로젤가파리 시절 반 고흐는 쥘리앵 탕기가 운영하는 화방을 자주 드나들며 미술 재료를 샀다. 파리코뮌에 참여했고 사회주의를 지향한 탕기는 가난한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해서 팔아 주는가 하면, 재료비 대신 그림을 받거나 외상으로 내어 주기도 했다. 당시 파리의 화가들은 이런 그를 ‘탕기 영감‘이라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랐다.

<탕기 영감의 초상 >반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을 세 점 남겼는데, 마지막에 그린 이 그림이 가장 대표적이다. 부처처럼 묘사된 인물, 우키요에가 잔뜩 걸려 있는 배경, 대담하고 강렬한선과 색채, 화가 특유의 짧은 붓 터치 등이 어우러져 초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캔버스에 유채, 75×92센티미터, 1887, 로댕미술관, 파리.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일본 판화는 빈센트가 얼마나 자포니슴*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여 준다. 우키요에에 매혹되었던 빈센트는 <탕기 영감의 초상>에서 평면적이고 대담한 선과 원색의 색채 표현 등으로 대담하게 인물을 묘사했고, 모델의 영혼을 그리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었다.

빈센트는 남프랑스가 따뜻한 태양과 다채로운 색채, 값싼 생활비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다른 화가들을 초청하여 공동체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빈센트가 남프랑스로 가겠다고 했을 때, 테오는 내심 동의하며 이사 비용을 대 주면서 결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빈센트는 행선지를 고대로마제국의 잔해가 남아 있는 아를로 정했다.

파리는 자유로웠지만 사람들은 냉담했고 빈센트는 고독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치열한 생존경쟁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나름의예술을 추구할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떠올린 곳은 남프랑스였다.

빈센트의 여성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프랑스 사학자 쥘 미슐레가 쓴 『사랑』과 『여성이다.
미슐레는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문필가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만큼 유럽의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자신이 사랑하면 상대방도 동시에 사랑에 빠져 신비롭게 결합되는 자연 발생적인 현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런던의 하숙집 딸, 사촌 누이, 창녀, 카페 여주인에게 무모하게 구애했던 것도 자기가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방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상복 입은 여인>반 고흐의 여성관은 프랑스 사학자 쥘 미슐레가 쓴 『사랑』과 『여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슐레는 여성이란 본질적으로 섬세하고 사랑을 위해 신이 고안한 존재이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성은 동정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반 고흐는 특히 외롭고 무력하고 슬프고 천대받는 여성에게 마음이 깊이 움직였다. 캔버스에 유채, 33×45.5센티미터, 1885,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