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빈센트는 한 살 연상의 그녀를 사모하게 되었다. 그는 짝사랑을 하다가 마침내 정식으로 구애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유지니는 이미 약혼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처음 맛본 강렬한 애정은 성사되지 못하고 끝내 불화로 끝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빈센트는 정신적인 충격을 강하게 받았던 것 같다. 성격이 돌변하여 사람들을 거칠게 대하고 자주 화를 냈으며, 고객들과 불화하는 경우도 잦아졌다. 유지니와의 일은 그의 인생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길고 긴 우울증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빈센트는 크나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남은 그들의 비극적인 가족사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고 이 가족에게서 새로운 소속감을 느꼈다.

런던 시절의 하숙집
10대 시절 구필화랑 덴하흐 지점에서 4년간 화상으로 일한 반 고흐는 스무 살이 되면서 런던 지점으로 발령을 받았다. 런던 시절 그는 브릭스턴에 있는 과부 어설라로이어의 집에서 하숙했는데, 이때 로이어 부인의 딸인 유지니에게 강렬한 사랑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청혼까지 했다가 결국 거절당했다. 강렬했던 첫사랑의 실패는 반 고흐에게 기나긴 우울의 시작이 되었다.

이 불꽃에 손을 넣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 보게 해 주십시오1881년, 스물여덟 살의 빈센트는 다시 사랑에 빠졌다. 이번에는 이모의 딸로 자기보다 일곱 살 많은 코르넬리아 보스스트릭커(케이 보스라고도 불림)였다.

덴하흐에서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닉이라는 창녀를 알게 되었다. 빈센트보다 세 살 많은 그녀를 사람들은 시엔이라고 불렀다. 재봉사를 하다가 창녀로 전락한 그녀는미혼이었지만 다섯 살 난 딸을 두고 있었고, 그전에도 두 명의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죽었다.

그들은 빈센트의 집요함에 넌더리를 내며 힐난했다. 그러자 빈센트는 식탁 위에서 타고 있는 등불 속에 손을 넣으며 "내가 이 불꽃에 손을 넣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애걸했다. 그러자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이모부는 미친 짓이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를 밖으로 내쫓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었던 빈센트는 미슐레의 책에서 본 것처럼 여성의 거절은 "남성의 정열로 녹일 수 있는 얼음의 혼"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케이 보스는 빈센트를 피해 몸을 숨겼다.

빈센트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재혼할 의사도 없었던 케이 보스는 그의 청혼을 받자마자 너무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암스테르담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반 고흐의 두 번째 사랑인 케이 보스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아들과 남게 된 사촌 케이 보스의 모습은 미슐레가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제시한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의 여성‘ 그 자체로 반 고흐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케이 보스의 동반자라고 굳게 믿고 그녀에게 열광적으로 빠져들었지만 단호하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유지니와의 일 이후 그는 다시 한 번 참담한 마음으로 방황했다.

이때부터 그는 아내와 아이들이 난로를 둘러싸고 있는 바닷가 오두막집이라는 따뜻한 가족의 이미지를 포기했다.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사건은 친인척들 사이에 그가괴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미쳤다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무릎 위에 아이를 안고 있는 시엔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비천한 여성에게 누구보다 깊은 동정심을 느낀 반 고흐는 덴하흐에서 알게 된 창녀 시엔과 그녀의 아이들도 진심으로 사랑했고, 그들과따뜻한 가정을 꾸리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그는 결국 시엔과 아이들에게서 떠났다. 그 선택이 쉽지만은 않았는지 이후 그는 마음이 "고통으로시들어 간다"라고 표현했다. 종이에 분필, 35.5×53.8센티미터, 1883,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알코올중독에다 성병까지 앓고 있었다. 천연두 자국이 있었던 얼굴은 몹시 창백하고 야위었고 표정은 무감각했는데, 그래서인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러나 빈센트는 흉터가 있는 야윈 얼굴 속에서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처럼 슬픔에 잠긴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시엔의 불행 그 자체가 빈센트의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시엔은 다시 창녀로 되돌아갔다. 빈센트가 시엔을 포기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작업이 내 의무이고, 그 여자보다 당면한 문제다. 그러니 여자 때문에 작업이 어려워져서는 안 돼." 빈센트는 말했다. "우리가 함께 지내는 것은 불가능해요. 우리는 서로를 불행하게 해." 자신이 두 가지 모두를 해낼 수 없는 이상, 그리고 돈을 보내 주는 이도 테오였으므로 그녀를 포기하는 것이 답이었다. 1881년 1월말부터 1881년 8월까지 7개월간 이어진 둘의 만남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아기는 쉴 새 없이 울어 댔고, 다섯 살 난 딸은 부랑아처럼 집 안을 배회했다. 불면증이 있던 빈센트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언제부터인지 시엔은 포즈를 취할 때도 보수를 원했고, 허드렛일은 모두 빈센트에게 맡기는 등 점점 더 비협조적으로 변해 갔다. 게다가 난폭한 남동생은 마치 기둥서방처럼 돈 문제로 빈센트에게 폭행을 가하기까지 했다. 이제 더 이상 테오가 보내 주는 적은 돈으로는 시엔의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없었다.

이처럼 빈센트는 시엔은 위험에 빠진 여주인공이고 자신은 그녀를 구해 주러 온 구세주인 양 행동했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타락한 것일수록 해방에 관한 환상은점점 더 강력해졌다.

<공공급식소의 수프 배급 >시엔의 가족은 너무나 가난하여 공공 급식소를 자주 이용했다. 종이에 분필, 44.4×56.5센티미터, 883,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모멸감을 느낀 빈센트는 테오에게 "여자를 버리는 것과, 버려진 여자를 돌보는 것 중 어느 쪽이 품위 있고 섬세하며 남자다운 태도냐?"라고 반문했다. 병들고 굶주린데다 임신한 한 여자가 한겨울에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느냐고 항변했다. 자기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런 존재를 보면 살려야 한다고 설득했다.

빈센트는 시엔과 살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행복은 머지않아 깨져 버렸다. 빈센트는 시엔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동안 매독에 걸려 버렸다. 그녀에게서 성병이 옮아 심한 고통을 겪으며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시엔은 그다지 가정적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게으르고 더럽고 제멋대로였다. 게다가 오랜 음주와흡연, 영양실조, 임신과 유산, 빈혈과 폐결핵에 시달렸다. 고질병인 목의 통증 때문에 목소리는 이상하고 거칠었다. 오랜 세월 매춘을 하면서 모욕과 냉대에 익숙해진탓인지 툭하면 불같이 화를 냈고 험한 욕을 해댔다. 그렇게 타인을 불쾌하게 만드는 특이한 성격은 빈센트의 환상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결국 그녀의 웃음기 없고 상스러운 태도와 성질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는 피해자의 징후라고 감쌌지만, 이제는 그녀의 편협함과 미술에 대한 무지를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빈센트는 시엔과 이별한 뒤 네덜란드 동부의 드렌터 지방으로 떠났다. 그는 자연과 홀로 대결하며 황야의 농부와 오두막집 등의 풍경을 그리며 슬픈 마음을 다잡으려했다. 언제나처럼 자연은 위대한 치유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이 닥치면서 다시 뉘넌에 있는 아버지의 사택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가족들은 빈센트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서른 살이나 되었지만 자립할 능력이라고는 없어 보이고, 독특한 복장과 행동으로 당황하게 하는 그를 미친 사람처럼 취급하고는 했다.

뉘넌 시절 반 고흐의 작업실반 고흐는 시엔과 헤어진 뒤 북부의 춥고 어둡고 황량한 땅을 방황하다가 그 사이 부모님이 새로 이사해서 살고 있던 뉘넌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부모님과 무능해 보이는 서른 살 된 아들의 관계는 날마다 긴장의 연속이었다. 부모님은 목사관 뒤편에 있는 부속 건물을 비우고 아들이 화실로 쓸 수 있게 해 주었다.

몽마르트르에 있는 탱부랭카페의 마담으로서 마흔여섯 살이던 세가토리는 모델 일을 계속하기에는 늙었지만 모델이 너무나 아쉬웠던 빈센트의 처지에서는 그럭저럭 적당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두 사람은 무고한 육체적 관계도 즐기며 연인 사이 비슷하게 지냈을 것이다. 마치 카페 여주인이 많은 남자들의 무의지적 애인이듯이말이다.

약을 삼킨 것이다. 소설 속 보바리 부인이 삼켰던 스트리크닌! 만약 빈센트가 그녀를 토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치사량이 아니어서 급히 의사에게서 해독제 처방을 받았다. 베헤만 가문은 즉시 이 사건을 덮었고, 추문을 피하기 위해 그녀를 멀리 떠나보냈다고 했다.

<뉘넌의 포플러나무 길 >반 고흐는 1883년 말부터 1885년 11월까지 2년간 뉘넌에서 머물며 약 280점의 소묘, 수채화와 비슷한 수의 유화를 그렸다. 야외에 나가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그는 목사관 인근을 오랫동안 산책하며 평화로운 전원 속에서 그림의 주제를 찾았다. 캔버스에 유채, 98×78센티미터, 1885, 보이만스반뵈닝언미술관, 로테르담.

그의 외로운 처지와 진지한 성격을 본 그녀는 마침내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발견했다. 빈센트는 그녀의 관심을 싫어하지 않았다. 빈센트의 가족은 빈센트가 그녀와가까이 지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테오만은 형이 즐거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눈치챘다. 두 사람 모두 대책 회의에 불려 나갔다. 혼기를 넘긴 두 언니를 비롯한 가족은 마르호트가 무분별하게 행동한다고 맹비난하며 그녀의 사랑을 비웃었다. 이때 빈센트는 오기가 생겨 탁자를 내리치며 "그녀와 결혼하겠습니다. 그러고 싶어요. 그래야 합니다"라고 했다. 진심이 아닌 성난 최후통첩이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조폭의 애인이던 여자에게 그는 육욕에 가까운 애정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다른 사내와 사랑에 빠져 있던 그녀는 거절했다. 빈센트는 자기 식대로판단했다. 그녀가 주위의 위험한 사내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말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향을 무드셀라증후군이라 부르는데, 즉 나쁜 일은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기억하려는 편형성을 가리킨다.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려는 일종의 현실도피 심리라 할 수 있다.

<탱부랭카페에 앉아 있는 아고스티나 세가토리 >파리 시절, 탱부랭카페의 주인인 세가토리는 종종 반 고흐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파리로 건너온 그녀는 모델 일과 매춘의 경계에서 산전수전 겪은 여인으로 늙어 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 대해 반 고흐는 시엔에게 그랬듯이 깊은 연정을 느꼈다. 그녀 역시 반 고흐를 가엾게 여기고 그의 작품을 카페에걸게 해 주는 등 둘은 비밀스러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반 고흐의 도를 넘는 구애에 둘의 관계는 결국 틀어지고 말았다. 캔버스에 유채, 46.5×55.5센티미터,
1887~1888,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빈센트는 아고스티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 카페에 드나들었다. 결국 그녀의 남자와 주먹다짐이 벌어졌고, 빈센트는 피를 흘리고 현장에서 도망쳤다.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빈센트는 그녀를 시엔처럼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로 묘사했다.

빈센트가 죽은 뒤에도, 뒤늦게 명성이 높아졌을 때도 어머니는 자기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고, 아들의 미술 세계가 어리석다는 견해를 결코 바꾸지 않았다.

어머니가 보기에 아들은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아들의 종교적이고 예술적인 포부를 장래성 없는 방황으로 간주했고, 그저가족 한 명이 죽고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치부했다. 또한 빈센트가 의도적으로 부모에게 고통을 준다고 비난했다. 아들이 집에 남겨 놓은 그림들을 쓰레기 버리듯처분했고, 이후에 받은 작품들도 거의 무관심하게 다루었다.

통상 유아기에 받아야 할 사랑이 충분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즉 타인의 입장을 잘 이해하고 싶어 하는데, 특히 우울하거나 불행을 겪는 사람에게 크게 공감한다. 이런 의존과 공감은 투사와도 관련된다. 빈센트가 남편을 잃은 사촌 누이 케이 보스와 창녀 시엔, 결혼 적령기를 넘긴 히스테릭한 마르호트 같은상처 입고 소외된 여인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된 것도 동일시의 투사에 해당한다.

훗날 그는 모든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이 눈시울을 붉히게 하고 가슴을 녹인다고 고백했다. 모성애를 환기하는 모든 이미지는 빈센트를 사로잡았다. 꽃꽂이, 바느질, 요람 흔들기, 불가에 앉아 있기 등. 그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어린아이가 원할 법한 모성애와 그 상징에 집착했다. 어머니는 그를 버렸지만, 그의 내면은 지극한 모성을 찾는 일을 단 한순간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예술이 사랑의 자리를 대신하다빈센트의 사랑이 실패를 거듭하자 예술이 사랑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랑의 실패는 예술에 더 몰입하게 해 주었다.

특히 빈센트가 포기한 것은 성행위였다. 창녀와 살 때 매독에도 감염되어 그 후유증으로 고생했지만, 그것이 지나친 성행위의 결과는 아니었다. 그는 성교를 지나치게 많이 하면 작업할 에너지가 소진된다고 하면서 예술을 위해서는 정력을 희생해야만 한다고 테오는 물론 동료 화가에게 충고하기도 했다. 그는 베르나르에게 보낸편지에서 "그림과 성교는 양립할 수 없지. 성교는 뇌를 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은 정말 엄청난 일이지"라고 했다.

빈센트는 정력적인 동시에 금욕적이었던 선배 예술가들을 들먹였다. 먼저 들라크루아가 작품에 정진하기 위해 성행위를 삼가고 깊은 연애를 포기했음을 밝혔다. 드가는 여자들을 사랑하고 성교를 자주 하면 뻔하디 뻔한 재미없는 화가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했다. 또한 세잔의 작품에 남성적 힘이 넘치는 것은 그가 결혼 생활의 재미에 깊이 빠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에턴 정원에 대한 추억 >여성들에 대한 반 고흐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어머니에게서 기인한 바가 컸다.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그는 늘 모성 결핍에 시달렸고, 그래서 어머니 같은 여성을 보면 무섭게 빠져들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아를 시절 어머니를 추억하며 그린것이다. 왼쪽 인물은 여동생 빌레미나를, 오른쪽 인물은 어머니를 모델로 한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92.5×73.5센티미터, 1888, 스테이트헤르미티지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특히 탐서가이던 그가 읽어 치운 책들, 특히 매춘의 연대기로 유명한 졸라의 나나와 공쿠르의 창녀 엘리자는 그를 성적인 자유와 방종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채웠다. 또한 자신을 스스로 "정육점 고기 같은 창녀 앞에 선 야수"로 묘사하기도 했다.

빈센트는 창녀를 "그토록 저주받고 비난받고 경멸당하는 여자들"로 묘사하면서 그녀들에 대해 애착을 느낀다고 고백했다. 창녀를 자비로운 누이들로 치부하면서 그미덕을 찬양했고, 집요하게 그들과 우정을 맺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를 정당화했다.

<슬픔>. 창녀인 시엔을 모델로 그린 것으로, 아무런 보호막 없이 얼굴을 깊이 파묻고 슬픔에 잠겨 있는 모습을 통해 그녀가 짊어진 생의 무거움을 고스란히 표현했다.
종이에 연필, 27×44센티미터, 1882, 뉴아트미술관, 월솔.

창녀에 대해 보이는 데카당스 예술가들의 이해심은 감정과 운명의 이러한 공통성에서 생겨났다고 보아야 한다. 빈센트 역시 창녀를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이라고 보았으며, 자신의 누이이자 친구라고 생각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바로 자신과 같은 운명 공동체라는 것이다.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초록의 밀밭>평생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반 고흐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들판과 숲과 황야를 쏘다니며 그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 자연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떠받쳐 주는버팀목이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서 머물 때 그린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92.5×73센티미터, 1889, 국립프라하미술관, 프라하.

빈센트는 호기심 천국형 취향을 가진 사람이다. 걷기, 독서, 관찰, 소묘, 수집 등 관심사가 너무나 다양했다. 특히 자연에 대한 관심은 그의 삶과 예술에서 정서적 뿌리가 되어 주었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에 따르면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고 한다.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길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도록 하렴. 그것이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연을 보는 방법을 우리에게가르쳐 준단다.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사이프러스나무가 있는 초록의 밀밭>평생 세상과 잘 어울리지 못한 반 고흐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들판과 숲과 황야를 쏘다니며 그 속에서 위안을 얻었다. 자연은 그의 삶과 예술 세계를 떠받쳐 주는버팀목이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생레미의 생폴드모졸요양원에서 머물 때 그린 것이다. 캔버스에 유채, 92.5×73센티미터, 1889, 국립프라하미술관, 프라하.

빈센트가 가족으로부터 탈출하고자 시도한 첫 번째 방법은 바로 하염없이 걷기였다. 그는 목사관에서 느껴지는 밀실공포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변 들판과 황야를쏘다녔다. 특히 황야에서 위로를 받았다. 바람 부는 황야는 모든 관찰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꽃을 피워 올리는 야생화, 알을 낳는 곤충, 둥지를 짓는 새등. 그는 덤불의 생물을 관찰하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고, 모랫둑에 앉아 수생 곤충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데 몰두했다.

부모, 누이, 친구, 심지어 테오와도 점점 소원해지면서 더욱더 자연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는 기운을 되찾고 원기를 회복하러 자연으로 갈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빈센트는 엄청난 독서가였다. 다른 이들이 카드놀이를 하는 동안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빈센트의 모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는 그가 친구들과 소통하기보다는 홀로 시간을 많이 보냈다는 사실과도 연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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