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르쉬르우아즈의 들판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죽기 전 빈센트는 불안한 하늘 아래 펼쳐진 거대한 밑밭을 보면서 명료한 정신으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시골 생활을 통해 건강과 원기도 되찾았다고 전했다.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그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날마다 누구보다도 분투한 건강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여기 돌아와서 다시 일을 시작했어. 그러나 붓이 손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아. 그래도 자신이 바라는 바를 잘 알기 때문에 다시 세 점의 큰 캔버스를 그렸어. 불안한하늘 아래 펼쳐진 거대한 밀밭이야. 나는 명료한 정신으로 극도의 슬픔과 고독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어. 곧 볼 수 있을 거야. - 빈센트 반 고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중
고립된 소년빈센트는 반 고흐 가문에서 가장 불쾌한 아이로 낙인찍혔다. 태생부터 남달랐기 때문일까? 형의 대체아로 태어난 것 말이다.
반 고흐의 아버지가 몸담았던 교회반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네덜란드 개신교 교회 목사였다. 교회 묘지에는 반 고흐보다 먼저 태어나 죽은 형의 묘비가 있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반고흐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의 권위와 자신의 권위를 동일시하는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면모를 가진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상냥하고 부드럽게 다가가는 면모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반 고흐는 아버지의 그런 두 얼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그때부터 정확히 만 1년 뒤 빈센트가 태어났다. 죽은 형의 생일과 같은 날에 태어난 아이는 이름마저 형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물론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당시 네덜란드에서 먼저 죽은 아이의 이름을 이어받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죽은 형과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빈센트의 삶을 더욱 미스터리하게 했을까?
그런 어머니는 마치 장남의 죽음이 빈센트의 탓인 듯 그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먼저 죽은 형의 이름을 빈센트에게 그대로 붙임으로써 평생을 형에 대한 애도와 죄의식 속에서 살게 한 것이다.
정작 아버지는 아들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우울하고 고집스럽고 어딘지 심통이 나 있는 빈센트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신의 은총이 아들에게는전혀 미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과부가 된 사촌 누이에게 청혼하고, 창녀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하고, 학교를 중퇴하거나 퇴학당하고, 목사의 길도 실패하고, 돈도 못벌고 제멋대로 물의만 일으키는 아들을 아버지로서는 비난하고 심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아버지는 빈센트를 자기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로 치부했다.
성서 앞에 놓인 삶의 기쁨 아버지 테오도뤼스는 발음이 나쁘고, 단어를 까먹거나 혼동하는 등 좋은 설교자는 못 되었다. 가족조차 그가 대중적인 연설자로는 재능이 없음을 인정했다. 아버지는목회 활동이 끝나면 가족들과 거리를 둔 채 다락방 서재에서 쓸쓸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파이프 담배와 시가를 즐겨 피웠고, 술은 조금씩 즐겼다. 병치레가 잦았던그는 아플 때면 더욱 침울하게 홀로 침잠했다.
아버지의 신앙과 신념으로부터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장 2절에는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자식이라 기르고 키웠더니 도리어 나에게 반항하는구나"라고 적혀 있다. 이는 빈센트를 향한 아버지의 일갈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기독교에서 완전히 벗어나 졸라와 자연주의에 심취했다고 혐오했다. 성서 앞에 졸라의 책을 그린 것은 아버지의 완전무결하고 격식을 차린 삶과 신앙에 대한 빈센트의 도전이었다.
본명이 빈센트와 똑같은 큰아버지 센트는 빈센트의 인생에서 테오 다음으로 특별한 의미를 차지한다. 1840년대 말에 센트는 ‘반 고흐 국제 미술상‘이라는 이름으로덴하흐에서 성공한 사람이었다. 당시 그의 이름은 네덜란드와 전 유럽에 걸쳐 미술품 거래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다.
<성서가 있는 정물화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하는 불 꺼진 촛대와 구약의 이사야 편이 펼쳐져 있는 성서 앞에는 빈센트가 좋아한 에밀 졸라의 삶의 기쁨이 놓여 있다. 캔버스에 유채, 78.5×65.7센티미터, 1885, 암스테르담 반고흐미술관 소장.
그는 런던의 분위기에 대해 "사람들은 무정하고, 무미건조하며, 섬세하기보다 무감각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목사가 되기에 당시로서는 빈센트의 나이가 너무 많은 데다, 수학과 고전은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했고, 엄청난 수업료도 필요했다. 그럼에도 빈센트는 15개월 동안 기를 쓰고 공부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전도사가 되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아버지와 존스 목사의 소개로 플랑드르 전도사 양성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수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그는 런던의 분위기에 대해 "사람들은 무정하고, 무미건조하며, 섬세하기보다 무감각했다"라고 회상했다.
보리나주의 옛 탄광의 모습화상 일을 그만둔 반 고흐는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국경 지대에 있는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떠났다. 매우 위험하고 열악하기로악명 높았던 이곳에서 그는 평신도 전도사로서 광부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들을 위해 초인적으로 헌신했다. 그러나 교단 측에서는 설교 능력이 수준 이하라는 이유로그를 해임하고 말았다.
빈센트가 가난한 자의 편에 서게 된 데는 한 설교의 영향이 컸다. 즉 산업혁명은 큰아버지인 센트 같은 일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빈곤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가 진정한 실존자들이자 본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끈기 있고 의연하고 학대에 가까운 노동을 참아 낸다는 사실과, 전혀 희망이 없는데도 신앙을 고수한다는 사실에 감동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탄광주들은 광부의 처지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광부들에게도 비참한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르주아에 대한 빈센트의 반감은 강해져만 갔고, 가난한 광부들과 완전히 일체화되고자 했다.
이때부터 빈센트는 농민화가의 수호성인 같은 밀레의 작품들을 자신만의 상상력의 신전에 모셨다.
목회자가 꿈이었던 반 고흐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반 고흐를 처음에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그러나 남다른 종교적 열정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 길로 가는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사진은 보리나주 시절에 실직한 뒤 떠돌던 무렵, 퀴에메에서 잠시 머물렀던 방이다.
종교적 믿음이 미술에 대한 믿음과 뒤섞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위대한 화가들의 걸작에서 신을 발견했고, 그림 그리기를 숭고한 선교 행위라고 믿게 되었다. 둘다 모두 화해와 구원의 이미지를 제공한다는 의미에서였다. 2026.07.11 오후 21시 22분21%목사를 등에 업은 화가빈센트는 보리나주에서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그림‘이었다.
그의 초기 습작은 몇 점 안 되지만, 그야말로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품으로 보아도 손색없다.
보리나주에서 실직하고 무일푼이 된 그는 브뤼셀까지 걸어가 과거에 자기를 도와 보리나주로 보내 준 목사를 만나 복직을 부탁했다. 그러면서 보리나주의 실태를 그린 그림을 목사에게 보여 주었다. 세상에서 최초로 빈센트의 그림을 보게 된 목사는 그에게 종교보다 예술이 더 중요할 것 같다는 판단을 내렸고, 당장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그 순간 빈센트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물일곱 살, 당시로서는 그림을 시작하기에는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림 그리기는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우정에 굶주려 있는 그에게 조용히 타인을 관찰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과 손을 바쁘게 움직여 몰두할수 있는 일이며, 자기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과 다시 연결해 주는 매개체였다.
1879년 7월, 빈센트는 결국 전도사에서 해임되었다.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에는 파면의 이유가 ‘수준 이하의 설교‘라고만 적혀 있지만, 진짜 이유는 타협과 굴복 없는빈센트의 저항적인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파리의 이방인1885년 11월 말, 빈센트는 조국 네덜란드를 영원히 떠났다.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으로 간 빈센트는 왕립순수미술아카데미에 들어갔지만 아카데믹한 교육에 회의를느끼고 얼마 있지 않아 학업을 그만두었다. 그러고는 이듬해 2월에 파리로 갔다.
어머니를 쏙 빼닮아 의지가 강한 누이동생 아나는 오빠가 아버지를 죽인 것처럼 어머니를 죽이려 한다고 비난했다. 빈센트는 마침내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상처 입은 마음으로 짐을 꾸려 집을 떠났다. 얼마 되지 않는 유산에 대한 권리도 포기했다.
파리 시절, 테오와 함께 살았던 레픽가1886년, 서른세 살의 반 고흐는 파리행 기차에 올랐다. 스무 살 무렵 구필화랑 본점에서 일할 때도 살았던 도시다. 그는 테오와 함께 파리 외곽 몽마르트르에 있는 아파트를 구해 2년간 살았다. 탁 트인 하늘과 파리 시내를 내다볼 수 있었던 그곳은 사진에서 오르막길이 있는 오른쪽 구석에 있다.
당시 동료들은 빈센트가 타고난 재능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뿐만 아니라, 파리인의 영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북쪽 사람이라며 은근히 조소했다. 그리고 ‘돌았지만 해롭지 않은 사람‘이라고 판단했고, 애써 괴롭힐 정도로 흥미 있는 사람도 아니라고 무시해 버렸다.
빈센트는 파리에서 2년 가까이 동생에게 의탁했다. 테오는 형 때문에 힘들어했다. 누이에게 "형은 지저분하고, 늘 불만으로 가득하고, 사람을 업신여기고, 심지어 자신을 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야"라고 썼다.
인상파의 색채를 받아들이던 낯선 파리 생활에서 고달픈 이방인 작가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집요한 회의에 직면해야만 했던 상황도 자화상에 몰입하게 했을지도모른다.
파리 시절 빈센트는 "모델이 없어서 나 자신이라도 그리려고 꽤 괜찮은 거울을 하나 샀지", "다른 모델을 구할 수가 없어서 자화상을 두 점 그리고 있다"라고 테오에게 넋두리를 한 적이 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 >파리에 온 반 고흐는 처음에 페르낭 코르몽의 화실을 드나들었다. 아카데미에 비해 엄격하지 않고 모델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도움이 안 된다고 느낀 반 고흐는 약 3개월 만에 화실 출입을 그만두었다. 이 그림은 화실에서 만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가 카페에 앉아 있는 반 고흐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판지에 파스텔, 45×54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그의 자화상은 단순한 자기 묘사가 아니라 끊임없는 자기 탐색과 성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고뇌와 연민, 고립과 소외, 충동과 공격성, 외로움과 고독 등을 극복하고 살아남고자 한 존재의 필사적인 투쟁의 역사를 보여 준다.
<꽃핀 밤나무>1874년, 클로드 모네를 필두로 한 젊은 예술가들이 파리에서 첫 번째 인상주의 전시를 개최한 이래 인상주의는 당대 미술계의 뜨거운 화두로 떠올랐다. 반 고흐 역시파리에서 인상주의 미술을 접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기법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전의 어둡고 짙은 색조가 밝고 화사한 색조로 변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유채, 46.5×56센티미터, 1887,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빈센트는 파리 시절과, 정신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말기에 자화상을 가장 많이 그렸다. 화가들은 고단하고 암울한 시기에 가장 많은 자화상을 그린다. 빈센트역시 약 2년간의 파리 시절에 스물일곱 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나체로 서는 것은 더더욱 꺼렸다. 그래서 빈센트가 택한 방법은 창녀를 구하는 것이었다.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던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이 아닌 타인을 그리면서 사람과 접촉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어 주지도, 관심을 보여 주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자화상을 많이 그리게 되었다.
1860년대에 등장한 인상주의 미술은 빈센트에게 생소하지만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한 양식이었다. 그러나 막 인상주의 그림과 그 화가들을 접하게 된 빈센트는 그들이 서로 비난하고 반목하는 데 여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씁쓸함을 느꼈다.
폴 세잔은 빈센트가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보고 미치광이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그렇게 자극받은 빈센트의 그림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즉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파리코뮌의 멤버이던 탕기는 새로운 미술이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주의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인상주의 화가들은 지배 체제 이데올로기에서 배제된 민중화가였다. 그러기에 그들을 어떻게든 도와야 했다. 특히 자신과 신념을 공유한 세잔을 지지했다.
탕기화방이 있던 몽마르트르 클로젤가파리 시절 반 고흐는 쥘리앵 탕기가 운영하는 화방을 자주 드나들며 미술 재료를 샀다. 파리코뮌에 참여했고 사회주의를 지향한 탕기는 가난한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해서 팔아 주는가 하면, 재료비 대신 그림을 받거나 외상으로 내어 주기도 했다. 당시 파리의 화가들은 이런 그를 ‘탕기 영감‘이라 부르며 아버지처럼 따랐다.
<탕기 영감의 초상 >반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을 세 점 남겼는데, 마지막에 그린 이 그림이 가장 대표적이다. 부처처럼 묘사된 인물, 우키요에가 잔뜩 걸려 있는 배경, 대담하고 강렬한선과 색채, 화가 특유의 짧은 붓 터치 등이 어우러져 초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캔버스에 유채, 75×92센티미터, 1887, 로댕미술관, 파리.
그림의 배경을 이루는 일본 판화는 빈센트가 얼마나 자포니슴*의 영향을 받았는지를 보여 준다. 우키요에에 매혹되었던 빈센트는 <탕기 영감의 초상>에서 평면적이고 대담한 선과 원색의 색채 표현 등으로 대담하게 인물을 묘사했고, 모델의 영혼을 그리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었다.
빈센트는 남프랑스가 따뜻한 태양과 다채로운 색채, 값싼 생활비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다른 화가들을 초청하여 공동체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빈센트가 남프랑스로 가겠다고 했을 때, 테오는 내심 동의하며 이사 비용을 대 주면서 결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빈센트는 행선지를 고대로마제국의 잔해가 남아 있는 아를로 정했다.
파리는 자유로웠지만 사람들은 냉담했고 빈센트는 고독했다. 그는 파리를 떠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치열한 생존경쟁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는 나름의예술을 추구할 새로운 공간과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하여 떠올린 곳은 남프랑스였다.
빈센트의 여성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프랑스 사학자 쥘 미슐레가 쓴 『사랑』과 『여성이다. 미슐레는 프랑스의 역사가이자 문필가로, ‘르네상스‘라는 용어를 만들었을 만큼 유럽의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자신이 사랑하면 상대방도 동시에 사랑에 빠져 신비롭게 결합되는 자연 발생적인 현상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가 런던의 하숙집 딸, 사촌 누이, 창녀, 카페 여주인에게 무모하게 구애했던 것도 자기가 열심히 사랑하기만 하면 상대방도 자연히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상복 입은 여인>반 고흐의 여성관은 프랑스 사학자 쥘 미슐레가 쓴 『사랑』과 『여성』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슐레는 여성이란 본질적으로 섬세하고 사랑을 위해 신이 고안한 존재이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성은 동정의 대상이라고 보았다. 그의 영향을 받은 반 고흐는 특히 외롭고 무력하고 슬프고 천대받는 여성에게 마음이 깊이 움직였다. 캔버스에 유채, 33×45.5센티미터, 1885, 반고흐미술관, 암스테르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