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 본격추리!
지금 밝혀지는 ‘미로관 살인사건‘의 충격적인 진상!

이 작품을 이렇게 ‘소설‘로 발표하기가 아직 조금은 망설여진다. ‘미로관의 살인‘이라는 제목을 보고 이미 눈치챈 독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이 작품은 실제로 일어났던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은 글이기 때문이다.
그 살인사건은 이 소설 속에서 밝힌 대로 1987년 4월에 일어났다. 유명 작가가 사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난 괴사건으로, 당시 일부 매스컴이 상당히 센세이셔널하게 보도하려고 했다.

미로관의 살인시시야 가도미표지 하단에는 짙은 녹색 띠지가 둘러져 있다. ‘기단샤稀譚社 노블스 이달의 신간‘이라는 글 아래 하얀색 고딕체로 인쇄된 광고 문구.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 쓴 책이라면 당연히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것도 지은이가 직접 보내온 증정본이다. 읽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책 내용이 그 유명한 미로관 살인사건이라면.......

앞표지 중앙에 네모난 연보라색 슬라이드필름용 프레임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로 놓여 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사진 한 장. 피바다를 떠오르게 만드는 새빨간 배경에서 불쑥 솟아오른 물소 머리....... 프레임 오른쪽 위의 연보라색 바탕에 책 제목이 돋을새김으로 박혀 있다. 프레임 왼쪽에는 역시 돋을새김으로 지은이 이름이있다.

1988년 9월 2일 금요일.
여름감기에 걸려 집에서 누워 있던 시마다 앞으로 책 한 권이 도착했다.

복잡한 미로를 품고 있는 지하 저택 미로관迷路館. 이곳에 모인 추리작가 네 명이 미로관을 무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순간 참극의 막이 오른다. 밀실로 변한 저택안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 과연 진범은 누구인가. (......) 전율할 엄청난 트릭! 경악할 결말! 비교할 수 없는 추리의 매혹!

시마다는 그 사건 내용을 상세하게 아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매우 심상치 않은 상황에서 발생한 그 사건이 결국 어떤 해결‘을 맞이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실제 일어났던 사건의 추리소설적 재현이라.......

소설에 등장하는 인명 지명 등의 고유명사는 이런저런 사정에 비추어 거의 가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시치미 뚝 떼고 소설 속에등장하지만 나 역시 ‘시시야 가도미‘라는 필명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그들‘ 중 몇 명은 분명히 추리소설이라는 기형적인 문학을 각별히 사랑하고 추리문학에 열정을 바친 사람들이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그 사건을 소재로 이렇게추리소설적 재현을 시도하는 일이 죽은 이들에게 애도의 뜻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건의 전말을 이런 식으로 발표하겠다고 마음먹은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편집자인 모씨가 적극 권유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그 사건으로 죽어간 ‘그들‘에 대한 추모의 뜻이라고나 할까.

고백하겠다.
나는 실제로 그 사건을 목격하고 온 사람이다. 나 시시야 가도미는 1987년 4월에 미로관에서 일어난 그 연쇄살인사건의 관계자 가운데 한 명이다.

주요 등장
인물괄호 안 숫자는 1987년 4월에 만으로 셈한 나이
미야가키요타로(60) 일본 추리소설계의 원로 대가, 미로관 주인기요무라 준이치(30) ㅡ 추리작가
스자키 쇼스케(41) ㅡ추리작가후
나오카 마도카(30) ㅡ 추리작가
하야시 히로야(27) ㅡ 추리작가
사메지마 도모오(38) 평론가
우탸야마 히데유키(40) 편집자
우타야마 게이코(33) 우타야마 히데유키의 아내
이노 미쓰오(36) 미야가키의 비서
가도마쓰 후미에(63) 가사 도우미
시마다 기요시(37) 추리소설 마니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우타야마 히데유키는 그가 권한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아, 정말 건강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입니다."

우타야마가 마주하고 있는 그는 작년 봄에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별다를 바 없는 노신사, 미야가키 요타로宮垣葉太郞다.
하지만, 그렇다. 분명히 안색이 좋지 않다. 얼굴이 전보다 더 야윈 것도 같고, 움푹 팬 두 눈은 예전의 날카로운 빛이 완전히 사라져버린 듯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미야가키를 따라 웃음으로 얼버무려보았지만 우타야마는 이때 살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건강에 관해 이야기하는 미야가키의 말투가 왠지 전보다 더 자조 섞인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 이야기는 빼고 오래간만에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마침 설날에 고향에 들를 예정이기도 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자네 고향이 미야즈였던가?"
우타야마의 본가는 교토 부 미야즈 시. 명승지인 아마노하시다테 근처에서 여관을 운영한다.

미야가키 요타로.
대형 출판사인 기단샤 문예편집부에 근무하는 우타야마가 담당 편집자로서, 그리고 작품의 열렬한 독자로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탐정소설 작가다.

추리 문단 ‘배후의 대가‘라고나 불러야 할 존재!
우타야마는 늘 그렇게 생각했다.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한, 이른바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러나 시대의 유행을 넘어서 미야가키만큼 열렬한 ‘신봉자‘를 거느린 추리작가도 드물지 않을까.

"끈덕지군, 자네도. 난 원래 마음이 아주 약한 사람일세. 예를 들면 말이야, 내겐 소년 시절부터 간절히 바라던 소망이 하나 있었지. 한번 내 손으로 사람을 죽여보고싶다는 소망이. 하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네. 몇 십 년씩 살인 이야기만 써온 건 말하자면 그 보상 행위겠지."

‘미로관迷路館‘이라고 불리는 그 저택은 미야가키 요타로가 십여 년 전에 별장으로 지은 집이다. 원래 목적에 걸맞게 여름 한철을 지내는 데 쓰던 시절에는 우타야마도 몇 차례 초대받은 적이 있다. 그 이름대로 집 안 복도가 복잡한 미로 모양을 한 기상천외한 건물이라 처음 방문했을 때는 상당히 당황했다. 미야가키는 장난꾸러기아이 같은 얼굴로, 놀라는 방문객들의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곤 했다.

"날 과대평가하는군. 그 유명한 밴 다인 씨가 한 말이 옳아. 한 작가가 뛰어난 탐정소설을 여섯 편 이상은 쓸 수 없다는. 내가 사십 년 가까이 대체 몇 작품이나 썼는지아나? 장편만 해도 그 한계치를 곱절이나 넘어섰네."

"연말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규슈에 있는 무슨 절집 셋째아들이라고....... 아, 만나면 알 걸세. 자네도 분명히 관심을 갖게 될 거네."

염려하던 미야가키의 컨디션이 ‘건강한 건지 어떤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미야가키가 아직도 내심 창작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있었다. 그것만 해도 오늘 먼 걸음을 한 수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물론 이때 우타야마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설마 이것이 살아 있는 미야가키 요타로와 이야기를 나눈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은.

"조만간 초대장을 보낼 테니 시간 내서 들러주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미야가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의 안색을 살피며 우타야마가 물었다.
"저 외에는 어떤 분들을 부르실 예정이신가요?"

젊은 시절 미야가키는 눈길을 끌 만한 미남이었다고 한다. 중년을 넘기고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섹스 상대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요 몇 해동안은 그런 소문도 돌지 않았다.

부인과 함께 오라는 권유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내는 미야가키가 도쿄에 살 때 인사를 시켜 서로 아는 사이였고, 임신 경과도 순조롭고 안전한 시기이기도했다.

조수석에 앉은 게이코가 말했다. 아내의 밝고 소녀 같은 말투에 우타야마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우타야마보다 일곱 살 아래다. 그래도 올해로 벌써 서른세살이 된다.

고독한 노인. 아무리 생각해도 미야가키의 지금 모습에는 그런 표현이 걸맞다. 도쿄에서 지낼 때 본 미야가키한테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이미지였다.

미야가키 요타로의 비서 이노 미쓰오가 보낸 편지를 받은 것이 딱 2주 전이다. 환갑 기념 파티를 한다는 안내장이었다.

스자키 쇼스케. 기요무라 준이치. 하야시 히로야. 후나오카 마도카. 사메지마 도모오. 아까 우타야마가 입에 올린 이 이름들은 모두 그들 다섯 사람의 본명이다. 다섯사람은 모두 미야가키가 발행하는 잡지 『기상의 신인상 출신자인데 집필 활동을 할 때는 다들 본명이 아닌 필명을 쓰고 있다.

그런 까닭에 미야가키 요타로의 ‘제자‘들은 모두 ‘스승‘ 앞에서는 결코 필명으로 부르지 않는다. 담당 편집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하나의 암묵적인 약속이었다.

"저어,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우타야마는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좀 문제가 생겨서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시마다 기요시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어느 절엔가 계시는 스님이시죠?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군요."
우타야마가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어 슬쩍 농담을 던졌다.

나카무라 세이지.
우타야마도 신문이나 주간지에서 본 기억이 난다. 이미 세상을 떠난 괴상한 건축가. 그가 지은 기묘한 건물들.

폭은 대략 4미터에 1층 높이. 높이가 3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바위로 지은 자그마한 사당 같은 모습이다. 양쪽으로 이어지는 야트막한 돌담 너머는 조금 떨어진위치에서 보면 살풍경한 평지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여서 게이코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게 현관이야? 왠지 무서워. 으스스한 느낌이 드네."
"선생님이 무척 좋아하는 분위기잖아."
"음, 그런데 생각보다 작네. 저 안에 미로가 있어?"
분명히 얼핏 보기에는 작은 건물이다.

"원래 제가 미야가키 요타로의 팬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작년에 선생님을 알게 된 건...... 뭐랄까, 그렇군요, 건물이 맺어준 인연이라고나 할까요?"
"건물이? 미로관 말입니까?"

격자 바로 앞 오른쪽에는 어른 가슴 높이까지 오는 대리석상이 놓여 있었다. 하반신은 네 발 달린 짐승, 상반신은 사람 모습을 하고 있다. 우두인신牛頭人身이 아니라우신인두牛身人頭다. 이것 또한 미노타우로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그 괴물의 형상을 단테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잘못 해석한 결과 이런 기형의 기형이 생겨났다고한다.

"저 건물은 말이야, 여기서는 현관 부분만 보이는 거야."

나이가 들어 보이지만 어쩌면 할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많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통통하고 키가 작았다. 게이코도 체격이 꽤 작은 편인데 할머니는 더 작았다. 그런 몸으로 아장아장 지하 건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큰 실례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우타야마는 노트르담의 꼽추를 떠올렸다.

할머니가 무뚝뚝하고 쉰 목소리로 세 사람을 맞아들였다.

나온 사람은 세 달 전에 방문했을 때도 보았던 가사 도우미 할머니였다.

"그러니까, 미로관 본체는 저 아래, 지하에 있다는 이야기지."

거무스름한 얼굴을 찡그리고 쓰러져 있는 남자, 기요무라 준이치가 다시 신음소리를 냈다.

사메지마 도모오.
후나오카 마도카.
스자키 쇼스케.
나머지 한 사람, 하야시 히로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때만 해도 우타야마는 그런 사실을 깨달을 여유조차 없었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가 손을 댔다는 기묘한 건물들의 이름. ‘십각관‘ 그리고 ‘수차관이었던가? 그리고 그런 저택에서 일어났다는 사건들.......
나나

미야가키 요타로.
대형 출판사인 기단샤 문예편집부에 근무하는 우타야마가 담당 편집자로서, 그리고 작품의 열렬한 독자로서 오랜 세월 함께 해온 탐정소설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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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ㅣ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3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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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도쿄 여행기 - 특별기고]

우에노공원에서 만난 百濟人(백제인) 王仁(왕인)
― 왕인박사비에 새겨진 기록을 따라


1.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백제의 이름

우에노공원을 걷다가 뜻밖의 이름을 만났다.

왕인(王仁).

도쿄 한복판, 우에노온시공원(上野恩賜公園) 안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학자로 전해지는 왕인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단순한 작은 표석 하나가 아니었다.

지붕 모양의 갓돌을 얹은 커다란 비석,
그 옆의 또 다른 석비,
왕인의 모습을 새긴 청동 부조,
그리고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된 설명판까지 갖춰져 있었다.

일본을 여행하며 우리 역사와 연결되는 흔적을 만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특히 왕인은
고대 백제와 일본 사이의 문화교류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2. 현지 안내판에 적힌 왕인박사

안내판의 제목은

博士王仁碑
박사 왕인비.

일본어 설명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古事記」などによると、王仁博士は古墳時代前半に百済国から渡来し、
「論語」・「千字文」を伝えた学者であり、後に帰化したとされる。
また、その子孫は文筆をもって朝廷に仕えたといわれる。

この「博士王仁碑」二基は、王仁博士顕彰会により、
昭和十五(一九四〇)年及び昭和十六(一九四一)年に建立された。

平成二十五年三月
台東区教育委員会

우리말로 옮기면 이렇다.

『고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면,
왕인박사는 고분시대 전반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학자이며,
뒤에 일본에 귀화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그의 후손들은 문필을 통해
일본 조정에 봉사했다고 한다.

이 두 기의 왕인박사비는
왕인박사현창회에 의해
1940년과 1941년에 각각 건립되었다.

2013년 3월
다이토구 교육위원회

실제로 현지 설명판도 왕인을
백제에서 건너온 학자로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다.


3. 안내판에 적힌 한글

더 반가웠던 것은
안내판 아래쪽에 한국어 설명이 별도로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왕인박사비

『고사기』 등 사서에 의하면 왕인박사는 백제에서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해 한자문화 정착에 기여한 왕인박사를 기리기 위해 왕인박사현창회가 1940년과 1941년에 건립하였다.

도쿄 우에노공원 한복판에서
한글로 적힌 ‘백제’와 ‘왕인박사’라는 글자를 읽고 있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4. 왕인은 언제 일본으로 건너갔는가

왕인의 일본 도래 시기는 일본의 고대 사서에서는 오진천황(応神天皇) 때로 전한다.

한국에서는 통상 백제 아신왕(阿莘王, 재위 392~405) 무렵의 인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백제에서 학자가 건너왔다는 전승이 실려 있고,
그 인물로 왕인의 이름이 등장한다.

왕인이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했다는 이야기도
오랫동안 널리 알려져 왔다.

다만 여기에는 주의할 점이 있다.

특히 『천자문』은 일반적으로 6세기 중국 양나라에서 성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왕인이 4~5세기 무렵 일본에 건너갔다는 전승과는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왕인이 실제로 『천자문』을 전했다는 부분은
오늘날 그대로 확정된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왕인이라는 인물에 관한 기록 자체도
후대에 편찬된 일본 고대 사서를 통해 전해지기 때문에
그의 생애 전체를 오늘날의 전기처럼 정확하게 복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 기록에서
백제에서 건너온 학자가 일본 왕실에 학문을 전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왕인은 바로 그 고대 한일 문화교류를 상징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다.


5. ‘博士王仁碑’

가장 눈에 띄는 비석에는

博士王仁碑

라고 새겨져 있다.

그대로 풀이하면

‘박사 왕인비’.

왕인을 학문을 전한 학자로 기리는 비석이다.

비석 본문에는 한문으로 긴 글이 새겨져 있다.

왕인의 백제 출신과 일본 도래, 학문 전래,
후대에 남긴 문화적 공적을 기리는 내용이 중심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 글자의 마모가 있고,
햇빛과 그림자가 겹친 부분도 있어
모든 글자를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다.

확인하지 못한 글자를 억지로 추정해 옮기기보다는
읽을 수 있는 것만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맞겠다.


6. ‘流芳萬古’

옆의 또 다른 큰 비석 상단에는

流芳萬古

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유방만고’.

직역하면

‘향기로운 이름이 만고에 흐른다.’

조금 자연스럽게 풀면

‘그 아름다운 이름과 공덕이 영원히 후세에 전해진다.’

라는 뜻이다.

중국 고전에서 이어져 온 표현으로, 훌륭한 사람의 명성과 업적이 오래도록 후세에 남는다는 의미다.

왕인을 기리는 비석의 제목으로 상당히 어울리는 글귀였다.


7. 1940년과 1941년에 세워진 두 비석

현지 안내판에는 왕인박사비 두 기가 각각

1940년, 1941년

왕인박사현창회에 의해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오늘 우리가 우에노공원에서 보고 있는 왕인박사비는 고대에 세워진 유적은 아니다.

20세기 일본에서 왕인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현창비다.

이 점도 분명하게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비석 자체의 연대와 비석이 기리는 왕인의 시대는
약 1,500년 이상 떨어져 있다.

하지만 20세기 일본 사람들이
백제 출신 학자인 왕인을 따로 기념하고
도쿄 한복판에 이런 비석을 세웠다는 사실 역시
또 하나의 역사다.


8. 청동 부조로 다시 만난 왕인

두 석비 옆에는
왕인이 앉아 있는 모습을 새긴 청동 부조도 있었다.

도포를 입고 관을 쓴 모습으로 표현된 왕인이
두 손을 모으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실제 왕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적 초상이라기보다는
후대 사람들이 상상하고 형상화한 왕인의 모습으로 봐야 한다.

그럼에도 문자로만 읽던 이름이
사람의 모습으로 눈앞에 나타나니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9. 일본에서 만난 백제

이번 여행의 전날에는 에도성을 걸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일본 근세사를 생각했다.

그리고 하루 뒤인 오늘,
우에노공원에서는 시간을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백제와 일본의 교류를 생각하게 되었다.

왕인에 관한 기록 가운데에는
후대의 전승이 섞여 있고
역사적으로 검토가 필요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전승을 사실처럼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일본 고대 사서에 백제에서 건너온 학자의 존재가 기록되어 있고,
도쿄 한복판에 그를 기리는 비석 두 기와 안내판이 서 있다는 사실까지 가볍게 볼 이유도 없다.

고대 일본 문화의 형성과정에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과 기술,
문자와 학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큰 흐름 속에서
왕인의 이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10. ‘流芳萬古’

왕인박사비를 떠나기 전
다시 한번 네 글자를 바라보았다.

流芳萬古.

아름다운 이름이 만고에 흐른다.

왕인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승 가운데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인지는 여전히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약 1,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백제 사람 왕인의 이름이 일본 도쿄 우에노공원 한복판에 남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이름을 내가 직접 찾아와
비석 앞에서 읽고 있었다.

‘流芳萬古’.

그 네 글자가 이날따라 조금 다르게 보였다.

Translated by ChatG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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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박물관 산책 -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와 함께하는
이희수 지음 / 푸른숲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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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보고4] 성 소피아 성당 및 블루 모스크의 역사적 배경과 건축 구조

1. 시대적·역사적 배경 및 건립 의의
가.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ㅇ (건립 시기 및 주체) 서기 537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532~537년 건설, 537년 봉헌) 완공되었으며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황제의 권위를 상징함.
ㅇ (역사적 변천) 537~1453년 기간을 중심으로 정교회 세계의 핵심 성당으로 기능했으나 (1204~1261년 라틴 제국 시기에는 가톨릭 성당으로 전환된 기간이 존재)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으며 현재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 중임.
나. 블루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ㅇ (건립 시기 및 주체)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아흐메트 1세가 **1609년 착공하여 1616~1617년 무렵 완공(자료에 따라 표기 차)**한 제국 사원임.
ㅇ (역사적 성격) 오스만 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고 이슬람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기 위해 성 소피아 성당 바로 맞은편에 건설된 제국 사원으로서, 입지·상징성 측면에서 성 소피아의 위상과 ‘경쟁/대응’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기도 함.

2. 건축 구조 및 공학적 지지 체계 비교
가. 성 소피아 성당
ㅇ (펜던티브 공법) 사각형의 하부 구조 위에 원형 돔을 올리기 위해 곡면 삼각형 벽체인 펜던티브를 대규모로 적용하여 돔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공간감을 구현함.
ㅇ (사후 구조 보강) 초기 설계의 하중 분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외부에 거대한 부벽을 설치하였으며 오스만 제국 시기(16세기 등)에 시난 등 당대 기술 체계 속에서 외부 지지 구조가 추가·강화되며 안정성이 증대된 것으로 정리됨.
나. 블루 모스크
ㅇ (필 파예 지지 구조) 중앙 돔의 하중을 직접 지지하기 위해 직경 약 5m 내외의 거대 원통형 기둥인 필 파예 4개를 핵심 축으로 설계함.
ㅇ (계단식 돔 분산) 중앙 돔을 중심으로 4개의 반원형 돔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여 필 파예–아치–반돔의 단계적 체계로 하중을 분산·전달함.

3. 사진촬영 명당 가이드 및 현장 답사
가. 사진 촬영 명당 (Hotspots)
ㅇ (술탄아흐메트 광장 중앙 분수대) 두 건물의 외관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있는 대표 촬영 구역(분수 전경 포함)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몰 후 블루 아워 시간대의 촬영을 권장함.-실제 촬영 어려움
ㅇ (세븐 힐즈 루프탑) 구시가지의 고도 제한을 활용하여 두 건물의 돔과 미나레트를 수평적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는 대표적 조망 포인트로 운영·안내되는 장소임.-실제 가보지는 못했음
나. 답사
ㅇ (오전) 오전에 블루 모스크에 입장하여 내부 청색 타일의 채광 효과와 거대 지지 기둥의 규모를 확인하고 히포드롬 광장의 유적을 답사함.(여성은 귀를 가릴수 있는 머플러 착용, 신발을 벗고 입장(모든 관람객))
ㅇ (오전) 톱카프궁전, 이스탄불고고학 박물관 답사 및 오찬 후 성 소피아 성당으로 이동하여 내부의 비잔틴 양식과 오스만 양식의 공존을 답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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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박물관 산책 -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와 함께하는
이희수 지음 / 푸른숲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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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보고3] 톱카프 및 돌마바흐체 궁전의 역사적 배경 및 토목·건축 비교
​1. 시대적·역사적 배경 및 건립 의의
​가. 톱카프 궁전 (Topkapi Palace)
ㅇ (건립 시기 및 주체)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정복 이후 메흐메트 2세가 1460년대부터 건설을 시작하여 약 4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함.
ㅇ (역사적 성격) 제국의 전성기를 상징하며 이슬람 전통의 엄격함과 제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실무 중심의 궁전으로 설계됨.
나. 돌마바흐체 궁전 (Dolmabahçe Palace)
ㅇ (건립 시기 및 주체)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쇠퇴기인 1843년부터 1856년 사이에 압뒬메지트 1세가 서구화 정책의 일환으로 건립함.
ㅇ (역사적 성격) 전통적인 오스만 양식에서 벗어나 유럽의 화려한 바로크 및 로코코 양식을 도입함으로써 제국의 근대화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려 함.
​2. 궁전별 건축 양식 및 토목·구조적 특징 분석
​가. 톱카프 궁전
ㅇ (분산형 파빌리온 구조) 중앙 집중형 대형 건물이 아닌 여러 개의 파빌리온이 네 개의 중정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배치된 전통적인 오스만 양식을 취함.
ㅇ (조적 공법 및 방어 기능) 석조와 벽돌을 혼용한 전통적인 조적조 공법을 사용하며 성벽과 요새화된 문을 통해 방어 공학적 측면을 강조함.
나. 돌마바흐체 궁전
ㅇ (유럽 융합형 대칭 구조) 내부의 완전 대칭 구조를 통해 근대적 미학을 구현하였으며 14톤의 금과 40톤의 은을 사용하여 내부 장식의 화려함을 극대화함.
ㅇ (해안 매립 및 하중 지지 공학) 보스포루스 해안의 얕은 바다를 매립하여 기초를 형성하였으며 중앙 홀의 거대 샹들리에 하중을 견디기 위한 천장 보강 기술이 적용됨.
​3. 현장 답사 동선 및 사진 촬영 명당 가이드
​가. 사진 촬영 명당 (Hotspots)
ㅇ (톱카프 제4정원 테라스) 보스포루스 해협과 골든혼 및 마르마라해가 만나는 지점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최적의 조망 지점임.
ㅇ (돌마바흐체 바다의 문) 해안가 정원에 위치한 화려한 대리석 문으로 바다와 궁전 외관을 배경으로 한 입체적인 촬영이 가능함.
나. 추천 답사: 많은 답사객으로 인해 그래도 한산한 개장 직후 답사를 권장함
ㅇ (오전) 오전 9시 개장 직후 돌마바흐체 궁전에 입장하여 해안가 매립 지반의 상태와 화려한 외벽 조각의 보존 상태를 답사함.
ㅇ (오후) 톱카프 궁전, 제1정원부터 제4정원까지 이동하며 시대별로 증축된 파빌리온들의 기초 구조와 지형 활용 방식을 답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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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박물관 산책 -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와 함께하는
이희수 지음 / 푸른숲 / 2015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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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보고2] 성 소피아 성당 및 블루 모스크의 건축 구조 비교 분석
1. 평면 구성 및 공간 체계
가. 성 소피아 성당 (Hagia Sophia)
ㅇ (평면 형식) 전통적인 바실리카 양식과 중앙 집중식 돔 구조가 결합된 직사각형(장방형) 평면을 가짐.
ㅇ (축선 방향) 동서 방향의 주축이 강조되어 내부 공간이 종방향으로 길게 느껴지는 특성을 보임.
나. 블루 모스크 (Sultan Ahmed Mosque)
ㅇ (평면 형식) 중앙 돔을 중심으로 사방이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정사각형 평면을 채택함.
ㅇ (대칭성) 오스만 건축의 정점인 ‘완전 대칭‘을 구현하여 공간의 균형미와 안정감을 극대화함.
2. 돔 지지 구조 및 하중 분산 메커니즘
가. 성 소피아 성당의 지지 방식
ㅇ (펜던티브 구조) 4개의 거대한 기둥(Pier) 위에 펜던티브를 설치하여 돔의 하중을 전달함.
ㅇ (보조 구조) 남북 방향으로는 거대한 부벽(Buttress)을 외부로 돌출시켜 돔이 밖으로 벌어지려는 횡압력을 억제함.
나. 블루 모스크의 지지 방식
ㅇ (코끼리 다리 기둥) ‘필 파예(Fil Paye)‘라 불리는 직경 5m 이상의 거대한 원통형 기둥 4개가 중앙 돔을 직접 지지함.
ㅇ (계단식 돔 배열) 중앙 돔 주위로 4개의 반원형 돔과 4개의 작은 돔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여 하중을 단계적으로 지면까지 분산시키는 입체적 구조를 가짐.
3. 채광 및 개구부 설계
가. 성 소피아 성당의 채광
ㅇ (돔 하단부) 돔 하부 테두리에 40개의 창문을 촘촘히 배치하여 빛이 들어올 때 돔이 공중에 떠 있는 듯한 신비로운 효과를 연출함.
나. 블루 모스크의 채광
ㅇ (스테인드글라스) 내부 벽면과 돔 주변에 260개 이상의 창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통해 유입되는 빛이 내부의 청색 타일(Iznik Tile)과 반사되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함.
4. 토목·구조적 총평
ㅇ (기술의 계승) 블루 모스크는 성 소피아 성당의 돔 구조를 벤치마킹하되, 외부 부벽 없이 내부 구조물만으로 자체적인 구조 안정성을 확보한 진일보한 설계임.
ㅇ (공학적 안정성) 토목 전문가의 시각에서 볼 때, 성 소피아 성당이 보수 보강을 통한 ‘생존의 미‘라면, 블루 모스크는 초기 설계부터 하중 흐름을 완벽히 계산한 ‘계획의 미‘라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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