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날 - 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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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라지는 것은 장터만이 아니었다

갈담장이든 웅천장이든 장터가 쇠퇴한 이유는 시장의 경쟁력이 약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터를 찾던 사람들이 먼저 고향을 떠났고,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장터의 활기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 집만 보더라도 형제들은 대전과 서울, 대천으로 흩어졌고, 사촌들 역시 모두 학업과 직장을 따라 도회지로 떠났다. 부모 세대도 이제 고향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 형제분들 가운데 셋째아버지 내외분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고, 넷째아버지 내외분과 어머니는 대천으로 옮겨 사신다. 지금 웅천 성동리에 남아 계신 분은 둘째아버지 내외분뿐이다. 자녀 세대가 떠난 뒤에도 고향을 지키던 부모 세대마저 하나둘 사라지거나 생활이 편리한 도시로 옮겨가면서, 마을은 두 세대에 걸쳐 비어 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 농촌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성동리는 1리, 2리, 3리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가 살던 성동1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같은 동네 동갑내기 친구가 나를 포함해 여덟 명이나 있었다. 그중 다섯 명은 어려서부터 함께 뛰놀던 불알친구였고, 나머지 세 명은 안불알 친구들이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만큼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다. 둘째집 사촌여동생은 성동1리의 마지막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 아이가 졸업한 뒤에는 마을에서 더 이상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한 아이의 졸업은 학생 한 명이 줄어든 일이 아니라, 마을의 다음 세대가 거기서 멈추었다는 뜻이었다.

인구가 줄어들면 학교가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면 아이들이 떠난다. 아이들이 떠나면 장터도, 가게도, 마을도 조금씩 활기를 잃는다. 빈집이 늘어나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오르지 않으며, 저녁 무렵 골목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어느새 기억 속으로만 남게 된다. 농촌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와 발자국, 집집마다 밝혀지던 불빛을 하나씩 잃어가며 아주 천천히 비어 간다.

과거의 인구와 장터의 활기를 다시 그대로 되돌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길을 걸어 장을 보러 다녔는지, 어떤 풍경 속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었는지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기록은 사라짐을 막지는 못하지만, 사라진 삶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잊히는 일은 막아준다.

이번 비교를 통해 확인한 것은 갈담장이 크냐, 웅천장이 크냐가 아니었다. 숫자로는 장세를 비교할 수 있었지만,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과 기억이 장터 안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갈담장과 웅천장을 돌아보는 일은 결국 장터의 크기를 따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장터를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이 떠난 뒤 조용해진 마을을 함께 돌아보는 일이다.

성동리 골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한때 여덟 명의 동갑내기가 함께 뛰놀았고, 여러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장날을 기다리며 살아갔다는 사실만은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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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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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농촌 인구감소의 원인과 지역사회의 변화

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ㅇ(인구유출) 갈담장과 웅천장 생활권의 인구감소는 단순한 출생아 감소가 아니라 학업, 취업, 결혼, 주거 등의 이유로 젊은 세대가 도시로 이동한 결과

ㅇ(가족사례) 웅천 성동리에서 함께 살던 가족들도 성장한 뒤 대전, 서울, 대천 등으로 이동하였으며, 고향에 남은 사람은 일부 부모 세대뿐인 상황

* 본인은 대전, 형은 서울, 여동생은 서울, 어머니와 막내는 대천으로 이동

* 셋째아버지 내외분은 모두 별세하였고, 그 집 사촌 세 명도 모두 도회지로 이동

* 둘째아버지 내외분만 웅천 성동리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집 사촌 네 자매는 모두 도회지로 이동

* 넷째아버지 내외분은 대천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집 사촌 두 명도 대천에서 생활

ㅇ(세대이동) 사촌들을 포함한 자녀 세대 대부분이 학업과 직장을 따라 고향을 떠나면서 성동리에 남은 사람은 부모 세대와 일부 고령층으로 축소

ㅇ(반복구조) 한 집안의 자녀들이 모두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 농촌의 여러 가정에서 반복되면서 마을 전체의 인구감소로 연결되는 구조


나. 농촌 인구감소의 주요 원인

ㅇ(교육) 상급학교 진학과 다양한 교육기회를 위해 청소년과 젊은 세대가 도시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여건

ㅇ(일자리) 농업 이외에 안정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부족하여 취업과 생계를 위해 도시로 이동하는 구조

ㅇ(생활여건) 의료, 문화, 쇼핑, 교통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설이 도시보다 부족하여 젊은 세대의 정착이 어려운 환경

ㅇ(고령화) 젊은 세대의 유출 이후 노년층만 남고 출생보다 사망이 많아지면서 자연감소가 더욱 빨라지는 악순환

ㅇ(중심지집중) 웅천에서 대천으로 이동한 사례처럼 농촌 내부에서도 더 큰 읍이나 도시로 인구가 이동하면서 작은 읍·면과 마을의 공동화 심화


다. 농촌 인구감소가 장터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ㅇ(장터쇠퇴) 장을 보러 오는 주민과 농산물을 내다 파는 농민이 함께 줄어들면서 오일장의 규모와 거래 품목 축소

ㅇ(상권축소) 인구감소로 읍내 점포, 음식점, 다방, 양복점, 전파사 등 과거 장터를 둘러싸고 형성되었던 생활상권의 소멸

ㅇ(학교감소) 아동 인구 감소로 마을의 초등학생이 사라지고 학교의 통폐합과 폐교로 이어지는 현상

ㅇ(공동체약화) 마을 주민과 친척들이 도시로 흩어지면서 서로의 농사일과 집안일을 돕던 공동체 관계의 약화

ㅇ(빈집증가) 부모 세대가 사망하거나 도시로 이동한 뒤 돌아와 살 사람이 없어 빈집과 폐가가 늘어나는 현상

ㅇ(기억단절) 장터와 학교, 마을길을 함께 기억하는 세대가 줄어들면서 지역의 생활사와 공동체 기억까지 사라질 우려


라. 해결 가능성에 대한 판단

ㅇ(한계) 이미 도시로 이동한 자녀 세대가 일자리와 교육 기반이 부족한 고향으로 모두 돌아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

ㅇ(방향) 과거 인구를 완전히 회복하는 목표보다 현재 남아 있는 주민이 불편 없이 생활하고 지역이 지나치게 빠르게 소멸하지 않도록 하는 정책 필요

ㅇ(생활기반) 의료, 교통, 돌봄, 장보기, 문화생활 등 고령 주민에게 필요한 기본생활 서비스 유지가 우선과제

ㅇ(일자리) 농업, 관광, 지역특산물, 소규모 제조업, 원격근무 등을 연계하여 젊은 세대가 일부라도 정착할 수 있는 생계기반 마련 필요

ㅇ(거점유지) 모든 마을에 동일한 시설을 유지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여 웅천과 강진 같은 읍·면 소재지의 의료, 상업, 교통 기능을 지역생활 거점으로 유지할 필요

ㅇ(관계인구) 완전한 귀향만을 요구하기보다 명절과 주말 방문, 빈집 관리, 지역행사 참여, 고향 농산물 구매 등 도시로 떠난 사람들이 고향과 계속 관계를 맺는 방식의 확대 필요


마. 종합 판단

ㅇ(개인과 구조) 가족과 친척들이 웅천을 떠난 것은 고향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학업과 직장, 자녀교육과 생활을 위해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동

ㅇ(농촌현실) 이러한 개인의 선택이 수십 년 동안 집집마다 반복되면서 웅천과 강진을 비롯한 농촌 전체의 인구감소와 장터 쇠퇴로 이어진 결과

ㅇ(해결과제) 농촌 인구감소를 완전히 되돌릴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지만, 남은 사람들의 삶을 지키고 떠난 사람들이 고향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은 여전히 필요한 상황

ㅇ(최종의미) 갈담장과 웅천장의 쇠퇴는 단순히 장터 하나가 작아지는 문제가 아니라 그 장터를 중심으로 살아왔던 가족과 마을, 생활문화와 공동체의 기억이 함께 사라져 가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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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2000년 이후 인구감소와 생활권 변화

가. 갈담장 생활권

ㅇ(인구변화) 2000년 약 10,171명에서 2026년 약 6,433명으로 감소

* 감소인원 약 3,738명, 감소율 약 36.8%

ㅇ(지역별 감소) 강진면의 감소율이 가장 높고 운암면의 감소율이 가장 낮은 것으로 분석

* 강진면 2,457명 → 1,375명, 1,082명 감소, 감소율 44.0%
* 운암면 2,141명 → 1,532명, 609명 감소, 감소율 28.4%
* 청웅면 약 1,908명 → 1,211명, 약 697명 감소, 감소율 약 36.5%
* 덕치면 약 1,785명 → 1,111명, 약 674명 감소, 감소율 약 37.8%
* 산내면 약 1,880명 → 1,204명, 약 676명 감소, 감소율 약 36.0%

ㅇ(중심지역) 강진면은 면 소재지와 갈담장, 국도 교통망을 갖추고 있음에도 생활권 내에서 가장 높은 인구감소율 기록

ㅇ(운암면) 운암면은 옥정호 주변의 관광 및 주거 여건 등의 영향으로 생활권 내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인구감소율 기록

ㅇ(생활권변화) 갈담장 생활권 전체 인구는 2000년 대비 약 36.8% 감소하였으나, 운암면의 상대적으로 낮은 감소율로 생활권 전체 감소폭은 제한된 수준


나. 웅천장 생활권

ㅇ(인구변화) 2000년 27,086명에서 2026년 6월 15,618명으로 감소

* 감소인원 11,468명, 감소율 42.3%

ㅇ(지역별 감소) 성주면의 감소율이 가장 높고 남포면의 감소율이 가장 낮은 것으로 분석

* 웅천읍 9,579명 → 5,366명, 4,213명 감소, 감소율 44.0%
* 남포면 7,051명 → 4,661명, 2,390명 감소, 감소율 33.9%
* 주산면 4,009명 → 2,132명, 1,877명 감소, 감소율 46.8%
* 성주면 3,846명 → 1,858명, 1,988명 감소, 감소율 51.7%
* 미산면 2,601명 → 1,601명, 1,000명 감소, 감소율 38.4%

ㅇ(중심지역) 웅천읍은 2000년 대비 4,213명이 감소하였으나 2026년 6월에도 생활권 내에서 가장 많은 인구 유지

ㅇ(성주면) 성주면은 2000년 대비 인구가 절반 이상 감소하여 웅천장 생활권에서 가장 높은 감소율 기록

ㅇ(주산면) 주산면은 46.8% 감소하여 중심지역인 웅천읍보다 높은 인구감소율 기록

ㅇ(미산면) 미산면은 38.4% 감소하여 웅천읍, 주산면, 성주면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감소율 기록

ㅇ(남포면) 남포면은 보령시의 중심인 옛 대천시 지역과 바로 인접하여 주거와 생활권을 공유하는 입지적 영향으로 생활권 내에서 가장 낮은 33.9%의 감소율 기록

ㅇ(생활권변화) 웅천장 생활권 전체 인구는 2000년 대비 42.3% 감소하였으며, 특히 성주면과 주산면의 높은 감소율이 생활권 축소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


다. 생활권별 비교

ㅇ(감소인원) 웅천장 생활권은 11,468명이 감소하여 갈담장 생활권 약 3,738명보다 약 3.1배 많은 인구 감소

ㅇ(감소율) 웅천장 생활권의 감소율은 42.3%로 갈담장 생활권 약 36.8%보다 약 5.5%포인트 높은 수준

ㅇ(격차변화) 웅천장 생활권은 2000년 갈담장 생활권의 약 2.7배였으나 2026년에는 약 2.4배 수준으로 격차 축소

ㅇ(중심지역) 웅천읍과 강진면의 감소율은 모두 44.0%로 동일한 수준

ㅇ(주변지역) 중심지역의 감소율은 동일하지만 주변 면 지역에서는 성주면과 주산면의 감소율이 높고, 운암면과 남포면의 감소율이 상대적으로 낮아 두 생활권의 전체 감소율에 차이 발생

ㅇ(입지영향) 남포면은 대천 도심과 인접한 반면 성주면, 주산면, 미산면은 농촌지역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여 지역별 인구감소 양상에도 차이 발생

ㅇ(현재규모) 2026년 기준 웅천장 생활권 인구는 갈담장 생활권보다 약 9,185명이 많고 약 2.4배 규모

ㅇ(종합판단) 웅천장 생활권은 2000년 이후 갈담장 생활권보다 큰 인구감소를 겪었으나, 2000년 당시 배후인구가 워낙 컸기 때문에 2026년에도 갈담장 생활권보다 두 배 이상 큰 시장 기반 유지


※ 갈담장 생활권의 청웅면, 덕치면, 산내면의 2000년 인구는 강진면과 운암면의 인구감소 비율을 적용한 추정값이며, 해당 지역 통계연보 원자료 확보 시 보정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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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4] 용택이 성을 찾아 천담리로 가던 날

아부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이번에는 훌쩍 자라 스물다섯 살이 된 내가 떠올랐다.

1998년 어느 날.

군대 휴가를 나온 한 청년은 서울에서 임실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관광을 가는 것도 아니고, 친척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책 두 권 때문이었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와 『그리운 것은 산 뒤에 있다』였다.

청년은 김용택 시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궁금해했다. 용택이 성은 어린 시절 일을 어쩌면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는지, 아무래도 기억에 문학적인 재구성이 조금은 보태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청년은 당최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하나의 기억을 붙잡고 더듬기 시작하니, 기억은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가 떠오르면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기억이 따라 나오고, 그것이 다시 오래 묻혀 있던 장면을 불러냈다.

책을 읽는 동안 청년은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워매, 우리 동네 야그그만.”

김용택 시인이 써 내려간 섬진강변의 냇물과 논밭, 장날과 시골 사람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웅천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청년은 김용택 시인을 마음속으로 ‘용택이 성’이라 불렀다. 유명한 시인이라기보다 우리 동네 어디쯤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정겨운 시골 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청년은 임실에서 다시 덕치행 버스를 타고 덕치 차부에 내렸다. 차부에 있던 어르신에게 물었다.

“천담리 가려면 어디로 가야혀요?”

어르신은 저쪽 고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짝 고개로 넘어가소.”

“아, 그려요. 고맙습니다.”

청년은 그 말 한마디만 믿고 고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금 같으면 휴대전화를 꺼내 지도를 확인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길이 맞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넘고 한참을 걸었지만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았다. 날은 점점 저물어 갔다.

그 무렵 길가에는 하림 닭고기 공장으로 기억되는 큰 시설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한 장소와 공장 이름은 이제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근처에서 더는 무작정 걸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히치하이킹을 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요즘 같으면 낯선 차를 얻어 타는 일은 꿈도 꾸기 어렵겠지만, 그때는 길가에서 손을 들고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마침 차를 멈춰 준 사람은 전주로 가던 치과의사였다.

그분은 아마 군인 한 명을 차에 태워 준 일을 오래전에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청년은 거의 삼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날의 길과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날을 다시 떠올려 보니, 용택이 성의 고향을 찾아 걸었던 기억과 어린 시절 웅천장의 풍경이 어느새 하나로 겹쳐져 있었다.

이제 기억은 천담리에서 다시 웅천으로 향한다.

용택이 성은 갈담장의 풍경을 글로 남겼지만, 청년이 떠올린 것은 웅천장이었다.

그 청년은 바로 젊은 날의 나였다.

어린 시절 웅천장날은 작은 축제와 같았다. 웅천장은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이었다. 장날이 되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읍내로 모여들었다. 웅천역에는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내렸고, 버스차부에도 인근 마을에서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웅천에는 기차역과 버스차부가 있었고, 농협과 의원, 지서도 있었다. 중국집과 라사도 있었으며, 금성전자와 대우전자 대리점 간판도 눈에 들어왔다. ‘라사’는 당시 양복점을 뜻하던 이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웅천은 갈담보다 훨씬 큰 읍내였고, 어린아이의 눈에는 제법 번듯한 도시처럼 보였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갖가지 물건과 사람들이 눈길을 붙들었다. 고무신과 옷가지, 농기구와 생활용품이 좌판에 늘어섰고, 어디선가 뻥튀기 기계가 굉음을 터뜨렸다.

“뻥!”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랐다가도 금세 퍼지는 고소한 냄새에 다시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어른들에게 장날은 필요한 물건을 사고파는 날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구경하는 날이었다.

장터 주변에는 중국집과 국밥집, 막걸릿집뿐 아니라 보신탕집도 있었다. 보령과 서천 쪽에서는 보신탕집이 낯선 풍경이 아니었고, 특히 서천 판교는 오래전부터 보신탕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런 지역의 식문화 속에서 웅천장 주변의 보신탕집도 자연스러운 읍내 풍경의 하나였다.

중국집 가운데에는 사천성도 있었다. 훗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도 소개된 집으로, 지금은 웅천장을 찾는 외지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설 대목의 웅천장은 평소 장날보다 더욱 붐볐다. 어느 해였는지는 또렷하지 않지만, 설을 앞두고 엄니를 따라 가래떡을 빼러 장에 갔던 기억이 난다.

불린 쌀을 빻아 만든 뜨거운 반죽이 기계 안으로 들어가면, 잠시 뒤 희고 긴 가래떡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뽑혀 나왔다. 기계 밖으로 길게 밀려 나오는 가래떡을 바라보는 일은 어린 내게 참 신기하고도 짜릿한 구경이었다.

갓 뽑은 가래떡을 그 자리에서 한입 베어 물면, 뜨겁고 말랑한 떡이 입안에 착 달라붙었다.

“카, 맛이 기가 멕히네.”

별다른 고물도 양념도 없었지만, 그때 먹었던 따끈한 가래떡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엄니와 함께했던 가래떡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이번에는 아부지와 함께 웅천 시내의 ‘백마루’라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날도 다시 생각났다.

예전에는 어디를 다녀오던 길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장날 풍경을 하나씩 더듬다 보니 문득 그날도 웅천장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장날에 아부지를 따라 읍내에 나갔다가 백마루에 들러 짜장면을 먹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백마루는 훗날 사라졌다. 그래도 그날 아부지와 함께 먹었던 짜장면 한 그릇만은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그 기억은 짜장면과 함께 오래전 웅천장날의 한때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장날은 물건을 사고파는 날만은 아니었다. 당시 시골 사람들은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도 아무 때나 읍내에 나가기 어려웠다. 장날이 되어야 장도 보고 다른 볼일도 한꺼번에 보면서 겨우 면사무소에 들르곤 했다.

내가 왜 실제보다 한 살 늦게 호적에 올랐는지도 훗날 엄니에게 들었다.

내가 태어난 때는 추석 무렵이었다. 그해 아부지는 벼를 베고 타작하며 추수를 마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한다. 당시에는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도 일부러 하루를 내어 가기 어려웠고, 장날이 되어야 겨우 읍내에 나가 면사무소에도 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농번기에는 그 장날마저도 나갈 수 없었다. 결국 농사일이 뜸해진 겨울에야 출생신고를 했고, 그 바람에 나는 실제보다 한 살 늦게 호적에 오르게 되었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출생신고가 늦어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른 아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내 친구들 가운데도 그런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실제 생일이 한 달쯤 늦은 사촌은 출생신고가 제대로 되어 있었다.

국민학교에서는 출석번호를 생일순으로 매겼는데, 그 녀석은 늘 내 앞번호였다. 분명 내가 먼저 태어났는데도 사촌이 언제나 앞에 있으니 어린 마음에는 그것이 영 이상했다.

‘작은아부지는 내 것도 좀 같이 해주시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웅천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장항선이 이설되면서 읍내에 있던 옛 웅천역은 문을 닫았고, 새 웅천역은 읍내 외곽으로 옮겨갔다. 장날이면 사람들을 싣고 와 읍내에 내려놓던 옛 역에는 이제 열차가 서지 않는다.

그래도 웅천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추석을 앞두고 작은아부지와 형제들이 모여서 함께 벌초를 한다. 벌초를 마치고 웅천장으로 가서 식사도 한다. 예전처럼 읍내 전체가 들썩일 만큼 붐비지는 않지만, 시장 안에는 채소와 나물, 고구마와 곡식을 펼쳐 놓은 좌판이 이어지고, 오래된 식당들도 여전히 손님을 맞는다.

신기한 것은 문다방 간판이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도 문다방은 분명히 있었다. 지금도 같은 이름의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그 앞을 수없이 오갔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아직도 장터 한쪽에 뻥튀기 기계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낡은 기계 주변에는 튀겨진 곡식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고, 그 옆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가 쫄랑거리며 돌아다닌다.

어린 시절 귀를 막게 했던 그 “뻥!” 소리가 지금도 웅천장 한쪽에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장터의 모습도,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지만, 문다방 간판과 뻥튀기 기계를 보고 있으면 옛 웅천장과 지금의 웅천장이 잠시 한자리에 겹쳐 보인다.

용택이 성의 갈담장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여겼던 내 기억 속에서도 웅천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기차역과 차부, 농협과 의원, 라사와 문다방, 금성전자와 대우전자 대리점, 뻥튀기 소리와 설 대목에 엄니와 함께 뽑았던 김 나는 가래떡, 중국집과 보신탕집, 아부지와 마주 앉아 먹었던 백마루의 짜장면, 장날에야 갈 수 있었던 면사무소까지.

흩어져 있던 기억들은 그렇게 하나의 웅천장으로 이어졌다.

용택이 성이 써 내려간 것은 갈담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시절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쯤 품고 있는, 자기 고향 장날의 풍경을 글로 남긴 것이었다.

나에게 그 장날은 갈담이 아니라 웅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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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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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갈담장의 실제 규모를 생각하면 다소 크게 묘사된 부분도 있고, 객관적인 장세와는 차이가 있는 대목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점과는 별개로 충분한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는 임실 강진장뿐만 아니라 임실장, 관촌장, 오수장, 운암장, 순창장, 쌍치장, 복흥장, 장수 장계장, 남원장, 인월장, 전주 남부시장, 전주 중앙시장, 정읍 샘고을시장, 김제 원평장, 고창장, 무장장, 해리장, 완주 삼례장, 무주 안성장, 부안 줄포장, 진안 마령장, 구례장, 화순장, 곡성장, 영광장, 영암장, 금산장, 부여장 등 충청과 호남의 수많은 장터들이 담겨 있다. 특히 대부분의 사진이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촬영되어 우리 시골 장터가 가장 활기를 띠던 마지막 시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사진 속에는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과 좌판, 장꾼들의 모습은 물론 당시의 거리 풍경과 시장 주변 건물까지 자연스럽게 기록되어 있다. 덕분에 단순한 수필집을 넘어,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버린 우리 시골 장터의 생활상과 지역문화를 고스란히 담아낸 생활사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많은 오일장이 명맥만 유지하거나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김용택의 추억을 담은 책이 아니라, 충청과 호남 곳곳의 장터가 가장 활기찼던 시절을 사진과 글로 남겨 놓은 귀중한 기록물이다. 앞으로 세월이 흐를수록 그 가치는 더욱 커질 것이며, 오래도록 간직할 만한 충분한 소장가치를 지닌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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