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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평점 :
[나의 이야기 4] 용택이 성을 찾아 천담리로 가던 날
아부지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이번에는 훌쩍 자라 스물다섯 살이 된 내가 떠올랐다.
1998년 어느 날.
군대 휴가를 나온 한 청년은 서울에서 임실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관광을 가는 것도 아니고, 친척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책 두 권 때문이었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와 『그리운 것은 산 뒤에 있다』였다.
청년은 김용택 시인의 글을 읽을 때마다 궁금해했다. 용택이 성은 어린 시절 일을 어쩌면 그렇게 세세하게 기억하는지, 아무래도 기억에 문학적인 재구성이 조금은 보태진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청년은 당최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하나의 기억을 붙잡고 더듬기 시작하니, 기억은 혼자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가 떠오르면 그 옆에 있던 또 다른 기억이 따라 나오고, 그것이 다시 오래 묻혀 있던 장면을 불러냈다.
책을 읽는 동안 청년은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워매, 우리 동네 야그그만.”
김용택 시인이 써 내려간 섬진강변의 냇물과 논밭, 장날과 시골 사람들의 모습은 어린 시절 자신이 살았던 웅천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청년은 김용택 시인을 마음속으로 ‘용택이 성’이라 불렀다. 유명한 시인이라기보다 우리 동네 어디쯤에 살고 있을 것 같은 정겨운 시골 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청년은 임실에서 다시 덕치행 버스를 타고 덕치 차부에 내렸다. 차부에 있던 어르신에게 물었다.
“천담리 가려면 어디로 가야혀요?”
어르신은 저쪽 고개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짝 고개로 넘어가소.”
“아, 그려요. 고맙습니다.”
청년은 그 말 한마디만 믿고 고개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지금 같으면 휴대전화를 꺼내 지도를 확인했겠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길이 맞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넘고 한참을 걸었지만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았다. 날은 점점 저물어 갔다.
그 무렵 길가에는 하림 닭고기 공장으로 기억되는 큰 시설이 하나 있었던 것 같다. 정확한 장소와 공장 이름은 이제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 근처에서 더는 무작정 걸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히치하이킹을 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요즘 같으면 낯선 차를 얻어 타는 일은 꿈도 꾸기 어렵겠지만, 그때는 길가에서 손을 들고 지나가는 차를 세웠다. 마침 차를 멈춰 준 사람은 전주로 가던 치과의사였다.
그분은 아마 군인 한 명을 차에 태워 준 일을 오래전에 잊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청년은 거의 삼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날의 길과 그 사람을 잊지 못하고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날을 다시 떠올려 보니, 용택이 성의 고향을 찾아 걸었던 기억과 어린 시절 웅천장의 풍경이 어느새 하나로 겹쳐져 있었다.
이제 기억은 천담리에서 다시 웅천으로 향한다.
용택이 성은 갈담장의 풍경을 글로 남겼지만, 청년이 떠올린 것은 웅천장이었다.
그 청년은 바로 젊은 날의 나였다.
어린 시절 웅천장날은 작은 축제와 같았다. 웅천장은 2일과 7일에 서는 오일장이었다. 장날이 되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읍내로 모여들었다. 웅천역에는 기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내렸고, 버스차부에도 인근 마을에서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웅천에는 기차역과 버스차부가 있었고, 농협과 의원, 지서도 있었다. 중국집과 라사도 있었으며, 금성전자와 대우전자 대리점 간판도 눈에 들어왔다. ‘라사’는 당시 양복점을 뜻하던 이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웅천은 갈담보다 훨씬 큰 읍내였고, 어린아이의 눈에는 제법 번듯한 도시처럼 보였다.
시장 안으로 들어서면 갖가지 물건과 사람들이 눈길을 붙들었다. 고무신과 옷가지, 농기구와 생활용품이 좌판에 늘어섰고, 어디선가 뻥튀기 기계가 굉음을 터뜨렸다.
“뻥!”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랐다가도 금세 퍼지는 고소한 냄새에 다시 그쪽으로 눈길이 갔다. 어른들에게 장날은 필요한 물건을 사고파는 날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구경하는 날이었다.
장터 주변에는 중국집과 국밥집, 막걸릿집뿐 아니라 보신탕집도 있었다. 보령과 서천 쪽에서는 보신탕집이 낯선 풍경이 아니었고, 특히 서천 판교는 오래전부터 보신탕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런 지역의 식문화 속에서 웅천장 주변의 보신탕집도 자연스러운 읍내 풍경의 하나였다.
중국집 가운데에는 사천성도 있었다. 훗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에도 소개된 집으로, 지금은 웅천장을 찾는 외지 사람들에게도 알려져 있다.
설 대목의 웅천장은 평소 장날보다 더욱 붐볐다. 어느 해였는지는 또렷하지 않지만, 설을 앞두고 엄니를 따라 가래떡을 빼러 장에 갔던 기억이 난다.
불린 쌀을 빻아 만든 뜨거운 반죽이 기계 안으로 들어가면, 잠시 뒤 희고 긴 가래떡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뽑혀 나왔다. 기계 밖으로 길게 밀려 나오는 가래떡을 바라보는 일은 어린 내게 참 신기하고도 짜릿한 구경이었다.
갓 뽑은 가래떡을 그 자리에서 한입 베어 물면, 뜨겁고 말랑한 떡이 입안에 착 달라붙었다.
“카, 맛이 기가 멕히네.”
별다른 고물도 양념도 없었지만, 그때 먹었던 따끈한 가래떡 맛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엄니와 함께했던 가래떡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이번에는 아부지와 함께 웅천 시내의 ‘백마루’라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었던 날도 다시 생각났다.
예전에는 어디를 다녀오던 길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만 여겼다. 그런데 장날 풍경을 하나씩 더듬다 보니 문득 그날도 웅천장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장날에 아부지를 따라 읍내에 나갔다가 백마루에 들러 짜장면을 먹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백마루는 훗날 사라졌다. 그래도 그날 아부지와 함께 먹었던 짜장면 한 그릇만은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그 기억은 짜장면과 함께 오래전 웅천장날의 한때를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장날은 물건을 사고파는 날만은 아니었다. 당시 시골 사람들은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도 아무 때나 읍내에 나가기 어려웠다. 장날이 되어야 장도 보고 다른 볼일도 한꺼번에 보면서 겨우 면사무소에 들르곤 했다.
내가 왜 실제보다 한 살 늦게 호적에 올랐는지도 훗날 엄니에게 들었다.
내가 태어난 때는 추석 무렵이었다. 그해 아부지는 벼를 베고 타작하며 추수를 마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고 한다. 당시에는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도 일부러 하루를 내어 가기 어려웠고, 장날이 되어야 겨우 읍내에 나가 면사무소에도 들를 수 있었다.
그런데 농번기에는 그 장날마저도 나갈 수 없었다. 결국 농사일이 뜸해진 겨울에야 출생신고를 했고, 그 바람에 나는 실제보다 한 살 늦게 호적에 오르게 되었다.
그 시절 시골에서는 출생신고가 늦어 실제 나이와 호적 나이가 다른 아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내 친구들 가운데도 그런 경우가 제법 있었다.
그런데 나보다 실제 생일이 한 달쯤 늦은 사촌은 출생신고가 제대로 되어 있었다.
국민학교에서는 출석번호를 생일순으로 매겼는데, 그 녀석은 늘 내 앞번호였다. 분명 내가 먼저 태어났는데도 사촌이 언제나 앞에 있으니 어린 마음에는 그것이 영 이상했다.
‘작은아부지는 내 것도 좀 같이 해주시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웅천의 모습도 많이 달라졌다. 장항선이 이설되면서 읍내에 있던 옛 웅천역은 문을 닫았고, 새 웅천역은 읍내 외곽으로 옮겨갔다. 장날이면 사람들을 싣고 와 읍내에 내려놓던 옛 역에는 이제 열차가 서지 않는다.
그래도 웅천장은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도 추석을 앞두고 작은아부지와 형제들이 모여서 함께 벌초를 한다. 벌초를 마치고 웅천장으로 가서 식사도 한다. 예전처럼 읍내 전체가 들썩일 만큼 붐비지는 않지만, 시장 안에는 채소와 나물, 고구마와 곡식을 펼쳐 놓은 좌판이 이어지고, 오래된 식당들도 여전히 손님을 맞는다.
신기한 것은 문다방 간판이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도 문다방은 분명히 있었다. 지금도 같은 이름의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그 앞을 수없이 오갔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아직도 장터 한쪽에 뻥튀기 기계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낡은 기계 주변에는 튀겨진 곡식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고, 그 옆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가 쫄랑거리며 돌아다닌다.
어린 시절 귀를 막게 했던 그 “뻥!” 소리가 지금도 웅천장 한쪽에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장터의 모습도,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지만, 문다방 간판과 뻥튀기 기계를 보고 있으면 옛 웅천장과 지금의 웅천장이 잠시 한자리에 겹쳐 보인다.
용택이 성의 갈담장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생각나는 것이 거의 없다고 여겼던 내 기억 속에서도 웅천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기차역과 차부, 농협과 의원, 라사와 문다방, 금성전자와 대우전자 대리점, 뻥튀기 소리와 설 대목에 엄니와 함께 뽑았던 김 나는 가래떡, 중국집과 보신탕집, 아부지와 마주 앉아 먹었던 백마루의 짜장면, 장날에야 갈 수 있었던 면사무소까지.
흩어져 있던 기억들은 그렇게 하나의 웅천장으로 이어졌다.
용택이 성이 써 내려간 것은 갈담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시절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쯤 품고 있는, 자기 고향 장날의 풍경을 글로 남긴 것이었다.
나에게 그 장날은 갈담이 아니라 웅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