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산로드 7000km - 의열단 100년, 약산 김원봉 추적기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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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로드 7000km』로 살펴본 약산 김원봉과 무장독립투쟁 대장정
― 密陽(밀양)에서 重慶(충칭)까지, 독립운동기 1919~1945

1. 정리 범위 및 전체 흐름

가. 정리 범위

ㅇ(책의구성) 『약산로드 7000km』는 서울에서 출발하여 密陽(밀양), 吉林(지린),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南京(난징), 廣州(광저우), 武漢(우한), 桂林(구이린), 重慶(충칭)을 거쳐 平壤(평양)까지 김원봉과 그 동지들의 흔적을 따라가는 답사기임.

ㅇ(정리범위) 본 정리는 책 전체 가운데 약산 김원봉의 항일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이 집중된 1919~1945년을 중심으로 하며, 密陽(밀양)은 독립운동의 출발 배경으로 포함하고 광복 이후 서울과 平壤(평양)의 행적은 본문에서 제외함.

ㅇ(주의사항) 김원봉은 정부기관처럼 한 방향으로 순차 이전한 것이 아니고 여러 도시를 오가며 활동하였으므로, 아래 경로는 정확한 일회성 이동경로가 아니라 주요 활동거점을 역사적 시간순으로 배열한 것임.

나. 주요 활동거점의 역사적 흐름

ㅇ(주요거점) 密陽(밀양) → 吉林(지린) →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 廣州(광저우) → 南京(난징) → 武漢(우한), 漢口(한커우) → 桂林(구이린) → 綦江(치장), 重慶(충칭)

다. 독립운동 노선의 변화

ㅇ(의열투쟁)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암살, 폭파 중심의 의열투쟁을 전개함.

ㅇ(혁명이론) 1923년 신채호가 작성한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통해 의열단의 투쟁목표와 민중 직접혁명 노선을 이론적으로 정립함.

ㅇ(군사교육) 1926년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에서 근대 군사교육을 받은 뒤 소수 인원의 개별 의거를 넘어 조직적인 군사운동과 간부양성으로 활동영역을 확대함.

ㅇ(간부양성) 1932년 이후 南京(난징)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운영하여 장기적인 무장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를 양성함.

ㅇ(통일전선) 1935년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1937년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해 여러 독립운동세력을 묶는 통일전선운동을 추진함.

ㅇ(무장부대) 1938년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중국군과 연계한 항일선전, 적군와해, 정보수집 등 조직적인 전선활동을 전개함.

ㅇ(임정참여) 1942년 이후 重慶(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 세력이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김원봉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함.

2. 주요 거점별 활동 및 역사적 의의

가. 제1기 ― 의열단 창단과 의열투쟁의 확립(1919~1925)

1) 密陽(밀양) 【출발점】

ㅇ(독립운동배경) 약산 김원봉의 고향으로 김원봉뿐 아니라 윤세주 등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한 여러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임.

ㅇ(주요사적) 현재 김원봉과 의열단의 활동을 기리는 의열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으며 김원봉이 다닌 밀양보통학교, 동화중학교 관련 흔적과 독립운동가 박차정 묘 등이 남아 있음.

ㅇ(역사적의의) 김원봉의 성장과 항일의식 형성뿐 아니라 훗날 의열단에서 함께 활동한 동지들과의 인적 기반이 형성된 출발점이라는 의미를 가짐.

2) 吉林(지린) 【의열단 창립지】

ㅇ(의열단창단) 1919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청년 독립운동가들이 吉林省(지린성) 吉林市(지린시)에서 의열단을 결성함.

ㅇ(창립목표)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기관 파괴와 일제 고관, 군부 수뇌, 친일세력 등에 대한 직접투쟁을 주요 행동방식으로 설정함.

ㅇ(단체명) 의열단이라는 명칭에는 “천하의 정의의 사를 맹렬히 실행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었음.

ㅇ(주요사적) 『약산로드 7000km』에서는 吉林市(지린시) 光華路(광화로) 57호 일대를 의열단 창립 관련 장소로 답사함. 당시 기록에는 吉林(지린) 巴虎門(파호문) 밖 중국인 집에서 결성한 것으로 전하는 자료도 있음.

ㅇ(자료차이) 의열단 창립단원 수는 자료와 연구에 따라 13명 또는 10명으로 다르게 정리됨. 전통적으로는 13명설이 널리 알려졌으나 최근 연구와 밀양 의열기념관에서는 10명으로 정리하기도 함.

ㅇ(역사적의의) 1920년대 국내외에서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한 대표적인 의열투쟁 조직이 탄생한 곳임.

3)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 【의열단 활동의 중심】

가) 北京(베이징)

ㅇ(본부활동) 의열단은 吉林(지린)을 떠난 뒤 北京(베이징)을 주요 활동근거지로 삼았으며, 1922년 말 일본 측 정보자료에는 外交部大街(외교부대가)에 의열단 통신처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됨.

ㅇ(신채호교류) 김원봉은 류자명 등의 연결을 통해 신채호와 교류하였으며,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투쟁방향을 체계화할 선언문 작성을 요청함.

ㅇ(혁명선언) 신채호는 1922년 말부터 집필하여 1923년 1월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완성함.

ㅇ(선언내용)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은 외교론과 준비론만으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민중이 직접 폭력혁명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의열단의 혁명이론을 제시함.

나) 上海(상하이)

ㅇ(활동거점) 上海(상하이)는 北京(베이징)과 함께 의열단의 연락, 자금과 무기 조달, 거사 준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국제도시였음.

ㅇ(황포탄의거) 1922년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등이 上海(상하이) 黃浦灘(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함.

ㅇ(국제적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중국 혁명세력이 활동하던 上海(상하이)는 의열단이 국제적 연락망과 활동공간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음.

다) 의열단의 대표 의거

ㅇ(부산의거) 1920년 박재혁이 釜山(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

ㅇ(밀양의거) 1920년 최수봉이 密陽(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함.

ㅇ(총독부의거) 1921년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함.

ㅇ(황포탄의거) 1922년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上海(상하이) 黃浦灘(황포탄)에서 다나카 기이치 암살을 시도함.

ㅇ(종로의거) 1923년 김상옥이 鍾路(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일본 경찰과 시가전을 벌임.

ㅇ(니주바시의거) 1924년 김지섭이 일본 東京(도쿄) 二重橋(니주바시)에 폭탄을 투척함.

ㅇ(동척의거) 1926년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을 공격함.

ㅇ(역사적의의) 의열단은 일제 식민통치의 핵심기관과 인물을 직접 공격함으로써 국내외에 지속적인 무장저항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음.

나. 제2기 ― 군사교육과 통일전선으로의 확대(1926~1937)

1) 廣州(광저우) 【군사노선 전환의 출발점】

ㅇ(황포군관학교) 김원봉은 1926년 3월 동지들과 함께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제4기에 입교하여 같은 해 10월 졸업함.

ㅇ(군사교육)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는 당시 중국 국민혁명의 핵심 군사교육기관으로, 김원봉은 이곳에서 정규 군사교육과 정치교육을 받음.

ㅇ(노선확대) 황포군관학교 입교는 소수 정예 의열단원의 개별 의거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대규모 조직과 군사간부를 양성하여 장기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는 방향으로 활동노선을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됨.

ㅇ(주요사적)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옛터는 김원봉의 군사노선 전환을 보여주는 핵심 사적이며, 廣州起義烈士陵園(광저우기의열사능원)에는 1927년 광저우기의와 관련하여 희생된 한국인 혁명가들의 흔적도 남아 있음.

ㅇ(역사적의의) 廣州(광저우)는 1938년 이후 조선의용대 활동지가 되기 이전부터 김원봉이 근대 군사교육을 받고 조직적인 무장투쟁을 구상하게 된 핵심 거점임.

2) 南京(난징) 【군사간부 양성과 통일전선의 중심】

가) 조선혁명간부학교

ㅇ(학교설립) 김원봉과 의열단은 중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2년 南京(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 양성에 착수함.

ㅇ(제1기) 1932년 10월부터 湯山(탕산) 동쪽 善祠廟(선사묘) 일대에서 교육을 실시하여 26명을 배출함. 시인 이육사가 제1기생으로 참여함.

ㅇ(제2기) 江寧鎭(강녕진) 曾祖寺(증조사) 일대에서 교육하여 55명을 배출함.

ㅇ(제3기) 上方鎭(상방진) 天寧寺(천녕사)에서 교육하여 44명을 배출함.

ㅇ(교육성과) 1935년까지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군사, 정치간부를 배출함.

ㅇ(역사적의의) 개인 의거 중심의 투쟁을 넘어 장래 독립전쟁에 필요한 인적 기반을 직접 양성했다는 점에서 김원봉의 독립운동 노선이 크게 확대된 시기임.

나)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결성

ㅇ(정당통합) 1935년 7월 5일 南京(난징)에서 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인독립당 등 5개 독립운동단체가 참여하여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을 결성함.

ㅇ(김원봉역할) 김원봉과 의열단 계열은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의 핵심 세력을 이루며 의열투쟁과 군사교육을 넘어 정치적 통일전선 구축을 시도함.

ㅇ(주요사적) 胡家花園(호가화원)은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본부가 자리하고 김원봉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활동했던 주요 장소임.

다)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

ㅇ(연맹결성)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에서 일부 세력이 이탈한 뒤 김원봉 계열은 1937년 南京(난징)에서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함.

ㅇ(통일전선) 여러 좌파계열 독립운동단체를 결집시켜 중국의 항일전쟁과 연계한 한중 공동항전을 준비함.

ㅇ(역사적의의) 南京(난징) 시기는 김원봉의 활동이 의열단이라는 비밀결사에서 군사교육기관, 정당, 통일전선조직으로 단계적으로 확대된 시기임.

다. 제3기 ―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중연합 항전(1938~1942)

1) 武漢(우한), 漢口(한커우) 【조선의용대 창설지】

ㅇ(조선의용대창설) 1938년 10월 10일 漢口(한커우) 中華基督敎靑年會(중화기독교청년회)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됨.

ㅇ(조직성격)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부대로,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지휘와 지원 아래 활동함.

ㅇ(표현주의) 조선의용대를 독립된 국가의 정규군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으며, 중국군과 협력하여 활동한 조직적인 한인 항일무장부대로 보는 것이 타당함.

ㅇ(주요임무) 일본군 포로 심문,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항일, 반전 선전, 중국 민중 대상 항일선전, 정보수집, 전선지원 등을 수행함.

ㅇ(주요사적) 당시 결성식이 열린 中華基督敎靑年會(중화기독교청년회) 건물은 현재 남아 있지 않으며, 현재의 漢口(한커우) 中山大道(중산대도), 黎黃陂路(리황피로) 교차지역 일대가 관련 장소로 파악됨.

ㅇ(역사적의의) 김원봉의 투쟁이 소규모 의열활동과 군사간부 양성 단계를 넘어 실제 전선에서 중국군과 함께 활동하는 조직적 무장투쟁으로 발전한 전환점임.

2) 桂林(구이린) 【조선의용대 본부와 항일선전활동】

ㅇ(본부이동) 1938년 武漢(우한) 함락 이후 조선의용대 본부는 桂林(구이린)으로 이동하여 활동을 계속함.

ㅇ(선전활동) 조선의용대는 일본군과 조선인 병사들을 대상으로 한 항일, 반전 선전활동, 중국 민중을 대상으로 한 항전선전, 정보수집과 전선지원 등을 전개함.

ㅇ(활동거점) 七星公園(칠성공원) 일대 등에는 조선의용대 활동과 관련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약산로드 7000km』에서도 桂林(구이린)을 주요 답사거점으로 다룸.

ㅇ(역사적의의) 조선의용대는 단순한 전투부대가 아니라 언어능력과 선전역량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전투의지를 약화시키고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원한 특수한 성격의 무장조직이었음.

3) 綦江(치장) 【독립운동세력 통합 시도】

ㅇ(공개통신)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은 공동명의로 「동지, 동포 제군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발표하여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촉구함.

ㅇ(7당통일회의) 1939년 8월 綦江(치장)에서 김구, 김원봉 계열을 포함한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들이 7당통일회의를 열어 단일정당 결성을 논의함.

ㅇ(통합실패) 통합논의는 이념과 조직노선의 차이로 최종적인 단일정당 결성에는 이르지 못함.

ㅇ(역사적의의) 김구와 김원봉이 서로 다른 정치노선에도 불구하고 항일전선 통합을 위해 직접 협력한 중요한 과정으로, 이후 重慶(충칭)에서 이루어질 임시정부 참여와 광복군 합류의 전단계라는 의미를 가짐.

4) 重慶(충칭) 【조선의용대의 분화】

ㅇ(본부이동) 조선의용대 본부는 桂林(구이린)을 거쳐 1940년 重慶(충칭)으로 이동함.

ㅇ(북상이동) 조선의용대 내부에서는 일본군과 직접 싸우기 위해 華北(화북)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고, 1940년 말부터 1941년 사이 다수의 대원들이 黃河(황허)를 넘어 太行山(타이항산) 일대로 이동함.

ㅇ(화북지대) 華北(화북)으로 이동한 주력은 1941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으며 중국공산당계 팔로군과 연계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임.

ㅇ(조선의용군) 화북의 조선의용대 세력은 1942년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어 重慶(충칭)의 김원봉 계열과는 별도의 무장투쟁 노선을 이어감.

ㅇ(구분필요) 따라서 “1942년 조선의용대 전체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음. 화북으로 이동한 주력은 조선의용군으로 이어졌으며, 重慶(충칭)에 남아 있던 김원봉 계열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됨.

라. 제4기 ― 임시정부 참여와 한국광복군 합류(1942~1945)

1) 重慶(충칭) 【독립운동세력 연합의 최종 거점】

가) 한국광복군 편입

ㅇ(편입결정)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정부의 협의를 거쳐 重慶(충칭)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됨.

ㅇ(제1지대) 조선의용대 잔류세력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되었으며 김원봉이 제1지대장을 맡음.

ㅇ(부사령관) 김원봉은 1942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임시정부 계열 무장세력과 함께 대일항전을 준비함.

ㅇ(역사적의의) 이는 조선의용대 전체의 통합이 아니라 重慶(충칭)에 남은 김원봉 계열 무장세력이 한국광복군에 합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함.

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ㅇ(정치참여) 김원봉과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은 1942년을 전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참여하면서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세력의 협력범위를 넓힘.

ㅇ(군무부장) 김원봉은 194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군사업무를 담당함.

ㅇ(직책구분) 따라서 김원봉이 1942년부터 곧바로 군무부장을 맡았다고 서술하면 부정확하며, 한국광복군 부사령관은 1942년, 임시정부 군무부장은 1944년으로 구분해야 함.

다) 박차정과 重慶(충칭)

ㅇ(동지이자배우자) 박차정은 김원봉의 배우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활동에 참여함.

ㅇ(순국) 박차정은 오랜 독립운동과 병고 끝에 1944년 重慶(충칭)에서 생을 마침.

ㅇ(주요사적) 『약산로드 7000km』에서는 박차정의 순국지이자 김원봉의 重慶(충칭) 거주 관련 장소를 중요한 답사대상으로 다룸.

라) 광복까지의 활동

ㅇ(연합투쟁)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체제 안에서 광복군의 확대와 대일항전을 위한 활동을 계속함.

ㅇ(광복)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26년에 걸친 중국 대륙에서의 김원봉의 항일독립운동은 일단락됨.

ㅇ(역사적의의) 重慶(충칭)은 의열단 창단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독립운동세력이 완전한 정치적 일치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일본의 패망이라는 공동목표를 위해 협력한 김원봉 독립운동의 마지막 중국 거점임.

3. 『약산로드 7000km』에서 함께 보아야 할 주요 인물

가. 윤세주

ㅇ(평생동지) 김원봉과 같은 密陽(밀양) 출신으로 의열단 창립에 참여하고 조선의용대와 화북지역 항일투쟁까지 함께한 핵심 동지임.

ㅇ(최후) 華北(화북)으로 이동하여 太行山(타이항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1942년 전사함.

나. 신채호

ㅇ(혁명이론) 김원봉의 요청을 받아 1923년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여 의열단의 무장혁명노선을 사상적으로 정립함.

다. 류자명

ㅇ(연결자) 의열단의 핵심 이론가이자 활동가로 김원봉과 신채호를 연결하고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 작성과 의열단의 사상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함.

라. 이육사

ㅇ(독립운동가)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의열단계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32년 南京(난징) 조선혁명간부학교 제1기생으로 군사교육을 받음.

마. 박차정

ㅇ(무장독립운동) 김원봉의 배우자라는 위치에 한정되지 않고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에서 직접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여성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인물임.

4. 약산 김원봉의 독립운동 노선 변화

가. 제1단계 ― 의열투쟁

ㅇ(의열단활동) 吉林(지린)에서 의열단을 창단하고 일제 식민통치기관과 주요 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암살, 폭파투쟁을 전개함.

나. 제2단계 ― 혁명이론 정립

ㅇ(혁명선언) 北京(베이징)에서 신채호와 연계하여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마련하고 의열투쟁을 민중혁명론으로 이론화함.

다. 제3단계 ― 군사교육과 간부양성

ㅇ(군사간부) 廣州(광저우)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南京(난징) 조선혁명간부학교를 통해 독립전쟁을 담당할 군사, 정치간부를 직접 양성함.

라. 제4단계 ― 정치조직과 통일전선

ㅇ(통일전선)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해 여러 독립운동세력을 하나의 정치, 군사전선으로 묶으려 함.

마. 제5단계 ― 조직적 무장항전

ㅇ(조선의용대) 武漢(우한)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중국의 항일전쟁과 연계하여 선전전, 정보활동, 전선지원 등 조직적인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함.

바. 제6단계 ― 임시정부와 광복군 참여

ㅇ(임정광복군) 重慶(충칭)에 남은 조선의용대 세력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시키고 자신도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으로 활동함.

5. 약산로드 7000km 대장정 종합

가. 전체 흐름

ㅇ(대장정) 密陽(밀양)에서 형성된 항일의식은 吉林(지린)의 의열단 창단으로 구체화되었고, 北京(베이징), 上海(상하이)의 의열투쟁과 혁명이론 정립, 廣州(광저우)의 근대 군사교육, 南京(난징)의 군사간부 양성과 통일전선운동, 武漢(우한), 桂林(구이린)의 조선의용대 활동을 거쳐 重慶(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참여로 이어짐.

나. 핵심 변화

ㅇ(노선변화) 의열단 창단 → 암살, 폭파 의열투쟁 → 「朝鮮革命宣言(조선혁명선언)」을 통한 혁명이론 정립 →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군사교육 → 조선혁명간부학교 군사간부 양성 → 民族革命黨(민족혁명당), 朝鮮民族戰線聯盟(조선민족전선연맹)을 통한 통일전선 추진 → 조선의용대 창설 → 조선의용대 분화 → 한국광복군 참여 →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다. 역사적의의

ㅇ(투쟁방식확대) 김원봉의 독립운동은 단순히 의열단의 암살, 폭파투쟁에 머무르지 않고 군사교육, 간부양성, 정당운동, 통일전선, 한중연합 항전, 임시정부와 광복군 참여로 끊임없이 활동방식을 확대해 간 과정이었음.

ㅇ(무장투쟁연속성)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김원봉의 활동은 조직의 명칭과 형태는 계속 변했지만 무장력을 갖춘 독립운동을 통해 일제 식민지배를 타도해야 한다는 기본방향에서는 일관성을 유지함.

ㅇ(통일전선한계) 김원봉은 여러 차례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추진하였으나 이념과 정치노선의 차이를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으며, 조선의용대 역시 화북세력과 중경세력으로 분화됨. 따라서 그의 독립운동을 하나의 조직이 단계적으로 그대로 발전한 과정으로 단순화하기보다는 분열과 재편, 연합이 반복된 중국 관내 독립운동사의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함.

ㅇ(종합평가) 약산 김원봉의 1919~1945년 독립운동은 비밀결사 의열단에서 출발하여 군사교육과 정치조직, 통일전선,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의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모색한 과정으로, 한국 무장독립운동사의 중요한 한 축을 형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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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드 4000km - 대한민국 100년, 상하이에서 충칭까지 임시정부 투어가이드
김종훈 외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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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드 4000km』로 살펴본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 대장정
― 上海(상하이)에서 重慶(충칭)까지, 1919~1945

1. 전체 이동 흐름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식 이동경로

ㅇ(공식이동) 上海(상하이) → 杭州(항저우) → 鎭江(전장) → 長沙(창사) → 廣州(광저우) → 柳州(류저우) → 綦江(치장) → 重慶(충칭)

ㅇ 1919년 上海(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과 중일전쟁의 전화를 피해 중국 대륙을 이동하였으며, 1940년 重慶(충칭)에 최종 정착한 뒤 1945년 광복까지 독립운동을 계속함.

나. 『임정로드 4000km』 주요 관련거점

ㅇ(관련거점) 嘉興(자싱), 海鹽(하이옌), 南京(난징), 桂林(구이린) 등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이전도시는 아니지만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과 독립운동 세력의 활동, 조선의용대 활동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요 답사거점임.

2. 도시별 이동경로 및 주요 사적지

가. 제1기 ― 上海(상하이) 시대(1919~1932)

1) 上海(상하이) 【공식 이전도시, 임정로드 거점】

ㅇ(임시정부수립)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약 13년간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출발점으로, 정치, 외교, 언론활동과 의열투쟁의 기반을 마련함.

ㅇ(주요사적)

* 瑞金二路(서금이로) 일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 활동지
* 馬當路(마당로) : 上海(상하이) 시기 마지막 임시정부 청사
* 永慶坊(영경방) : 김구와 가족 거주 관련 사적
* 元昌里(원창리) : 윤봉길 의거 직전 김구와 윤봉길의 마지막 만남 관련 사적
* 虹口公園(홍커우공원) :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현장
* 萬國公墓(만국공묘) : 독립운동가 관련 묘역

ㅇ(역사적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부조직과 독립운동체제를 확립하고 국제사회에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기 시작한 최초의 거점임.

나. 제2기 ― 피난과 고난의 장정(1932~1940)

1) 嘉興(자싱), 海鹽(하이옌) 【관련거점】

ㅇ(요인피난)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들이 은신한 핵심 피난지역임.

ㅇ(주요사적)

* 日暉橋(일휘교) 일대 : 이동녕, 이시영, 엄항섭 등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의 피난 거주지
* 梅灣街(매만가) : 김구 피난처
* 南湖(남호) : 김구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배를 이용하여 이동했던 피난공간
* 海鹽(하이옌) 南北湖(남북호)
* 載靑別墅(재청별서) : 김구 은신 관련 사적

ㅇ(역사적의의) 임시정부 청사는 杭州(항저우)에 두면서도 주요 요인 상당수가 嘉興(자싱)·海鹽(하이옌) 일대에 분산 피신하여 독립운동의 명맥을 이어감.

2) 杭州(항저우) 【공식 이전도시·임정로드 거점】

ㅇ(피난정부) 上海(상하이)를 떠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처음 청사를 옮긴 도시로, 윤봉길 의거 이후 본격적인 이동시대가 시작됨.

ㅇ(주요사적)

* 淸泰第二旅舍(청태제2여사) : 上海(상하이) 탈출 직후 임시정부가 사용한 초기 사무공간
* 湖邊村(호변촌) : 대표적인 杭州(항저우) 임시정부 청사
* 西湖(서호) 일대 : 임시정부 요인들의 활동공간
* 한국독립당 관련 사적

ㅇ(역사적의의) 上海(상하이)라는 안정된 근거지를 상실한 뒤에도 정부조직을 유지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속한 피난정부 시대의 첫 거점임.

3) 鎭江(전장) 【공식 이전도시】

ㅇ(정부이동) 193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杭州(항저우)를 떠나 이동한 공식 이전지임.

ㅇ(조직유지) 임시정부 기관과 요인들이 분산된 상황에서도 정부조직을 유지하며 독립운동세력 재정비를 계속함.

ㅇ(역사적의의) 체류기간이나 남아 있는 사적의 규모는 다른 도시보다 크지 않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식 이동사에서 빠질 수 없는 거점임.

※ 『임정로드 4000km』에서는 독립된 장으로 비중 있게 다뤄지지 않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이동경로에는 포함됨.

4. 南京(난징) 【관련거점】

ㅇ(독립운동재편) 김구, 김원봉 등 여러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군사간부 양성이 이루어진 핵심지역임.

ㅇ(주요사적)

* 中央飯店(중앙반점) : 김구의 중국 국민정부 관계자 접촉 관련 사적
* 淮淸橋(회청교) 일대 : 김구 피난 관련 사적
* 金陵大學(금릉대학) : 독립운동가 활동 관련 사적
* 天寧寺(천녕사) :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관련 사적
* 南京(난징) 일대 김원봉·의열단 계열 활동지

ㅇ(역사적의의) 임시정부의 공식 이전도시는 아니지만 김구계열과 김원봉계열 독립운동의 흔적이 함께 남아 있는 중국 관내 독립운동사의 중요 거점임.

5) 長沙(창사) 【공식 이전도시·임정로드 거점】

ㅇ(정부이전) 1937년 중일전쟁 확대와 南京(난징) 함락에 따른 위협을 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長沙(창사)로 이동함.

ㅇ(남목청사건) 1938년 5월 6일 楠木廳(남목청) 6호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통합을 논의하던 중 이운환(李雲煥)이 권총을 발사함.

ㅇ 현익철이 사망하고 김구·유동열이 중상을 입었으며 지청천도 부상을 입음. 김구는 湘雅醫院(상아의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생명을 건짐.

ㅇ(주요사적)

* 楠木廳(남목청) 6호 : 남목청 사건 현장
* 湘雅醫院(상아의원) : 김구 총상 치료지
* 長沙(창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관련 사적

ㅇ(역사적의의) 독립운동세력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내부의 심각한 갈등과 희생까지 겪었던 임시정부 이동기의 대표적인 시련의 현장임.

※ 남목청 사건의 발생일과 총격자의 이름은 자료에 따라 다르게 기록됨. 본문에서는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등에 기록된 1938년 5월 6일, 이운환(李雲煥)을 사용하였으나, 일부 자료에서는 사건일을 1938년 5월 7일, 총격자를 이운한(李雲漢)으로 기록하기도 함.

6) 廣州(광저우) 【공식 이전도시, 임정로드 거점】

ㅇ(전시피난) 일본군의 진격과 공습을 피해 長沙(창사)에서 廣州(광저우)로 이동하여 단기간 활동함.

ㅇ(주요사적)

* 東山柏園(동산백원) : 대한민국 임시정부 廣州(광저우) 청사
* 黃埔軍官學校(황포군관학교) : 김원봉을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군사교육 관련 핵심 사적
* 東較場(동교장) : 중국 혁명운동 및 한국 독립운동 관련 역사공간

ㅇ(역사적의의) 전쟁확대로 중국 동부지역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임시정부가 華南(화남)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이동한 거점임.

7) 柳州(류저우) 【공식 이전도시, 임정로드 거점】

ㅇ(항일선전) 임시정부의 정치활동과 함께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선전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임.

ㅇ(주요사적)

* 樂群社(낙군사) : 임시정부 요인 숙소 및 활동 관련 사적
* 柳侯公園(유후공원) : 독립운동 관련 활동이 이루어진 장소

ㅇ(청년공작) 柳州(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활동하며 연극·합창·벽보 등을 활용한 대중 항일선전활동을 전개함.

ㅇ(역사적의의) 정부의 정치활동과 함께 청년·문화예술을 활용한 대중적 항일선전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거점임.

8) 桂林(구이린) 【관련거점】

ㅇ(조선의용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이전지는 아니지만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활동을 살펴보기 위해 중요한 독립운동 거점임.

ㅇ(주요사적)

* 七星公園(칠성공원) 일대 : 조선의용대 본부 및 활동 관련 사적

ㅇ(역사적의의) 『임정로드 4000km』에서 별도 장으로 다루고 있으며,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계열뿐 아니라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계열의 독립운동까지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지역임.

※ 桂林(구이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이전도시는 아님.

9) 綦江(치장) 【공식 이전도시】

ㅇ(조직재정비) 重慶(충칭) 최종 정착을 앞두고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세력이 조직을 재정비하고 통합을 추진한 중요 거점임.

ㅇ(주요사적)

* 上升街(상승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관련 사적
* 沱灣(타만) 일대 : 김구·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거주 관련 지역
* 瀛山賓館(영산빈관) : 독립운동진영 통합회의 관련 사적

ㅇ(세력통합) 독립운동 정당 및 단체의 통합노력이 계속되었으며, 이후 1940년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통합 한국독립당 결성으로 이어짐.

ㅇ(이동녕서거) 임시정부를 오랫동안 이끌어온 이동녕이 1940년 3월 綦江(치장)에서 서거함.

ㅇ(역사적의의) 장기간의 피난과 이동생활을 정리하면서 정부·정당·군사조직을 재정비해 重慶(충칭) 시대를 준비한 전환점임.

다. 제3기 ― 重慶(충칭) 시대(1940~1945)

1) 重慶(충칭) 【공식 이전도시·임정로드 최종거점】

ㅇ(최종정착)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착한 마지막 도시로, 1932년 이후 계속된 장기간의 이동생활을 끝내고 정부·정당·군사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함.

가) 임시정부 청사

ㅇ(청사이동) 重慶(충칭) 정착 후에도 일본군 공습과 정부조직 확대 등에 따라 청사를 여러 차례 옮김.

楊柳街(양류가) → 石版街(석판가) → 吳師爺巷(오사야항) → 蓮花池(연화지)

ㅇ 蓮花池(연화지) 청사는 광복을 맞고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할 때까지 사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임.

나) 한국광복군 창설

ㅇ(광복군창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직접 지휘하는 군사조직을 갖춤.

ㅇ(주요사적)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관련 사적
* 嘉陵賓館(가릉빈관) :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개최 관련 장소

다) 독립국가 건설준비

ㅇ(건국강령) 1941년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여 광복 이후 수립할 국가의 정치·경제·교육제도와 三均主義(삼균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가건설 방향을 제시함.

ㅇ(대일선전) 1941년 12월 10일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을 공식 선언함.

ㅇ(군사통합) 1942년 조선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면서 중국 관내 무장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이 확대됨.

ㅇ(정부체제) 1944년 임시헌장 개정을 통해 주석·부주석 중심의 지도체제를 정비함.

라) 국내진공작전 준비

ㅇ(국내진공) 1945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첩보기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 합작하여 국내 침투를 위한 훈련을 실시함.

ㅇ 광복군 요원들은 정보·무전·침투·파괴활동 등에 필요한 훈련을 받고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였으나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실제 작전은 실행되지 못함.

마) 한인공동체

ㅇ(土橋한인촌) 土橋(토교) 일대에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 등 많은 한국인이 집단 거주하며 피난지 속 한인공동체를 형성함.

ㅇ(역사적의의) 重慶(충칭)은 단순한 피난지가 아니라 정부·정당·군대를 정비하고 광복 후 국가건설계획과 국내진공작전까지 준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 역사의 최종거점임.

3. 대한민국 임시정부 26년 대장정 종합

가. 공식 이동경로

ㅇ 上海(상하이)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및 독립운동 기반 구축

ㅇ 杭州(항저우) : 윤봉길 의거 이후 피난정부 시대 시작

ㅇ 鎭江(전장) : 정부조직 유지 및 이동기 독립운동 지속

ㅇ 長沙(창사) : 독립운동세력 통합 추진과 楠木廳(남목청) 사건

ㅇ 廣州(광저우) : 중일전쟁 확대에 따른 華南(화남)지역 이동

ㅇ 柳州(류저우) : 항일선전 및 청년공작활동 전개

ㅇ 綦江(치장) : 독립운동세력 통합과 정부조직 재정비

ㅇ 重慶(충칭) : 한국광복군 창설, 건국강령 발표, 대일선전 및 국내진공작전 준비

나. 주요 관련거점

ㅇ 嘉興(자싱)·海鹽(하이옌) : 김구 및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난·은신

ㅇ 南京(난징) : 독립운동세력 활동과 군사간부 양성

ㅇ 桂林(구이린) :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활동

다. 역사적의의

ㅇ(대장정의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국 대륙 이동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일제의 추격과 중일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도 정부의 법통과 조직을 유지하고, 독립운동세력을 통합하며, 무장독립전쟁과 광복 후 국가건설을 준비한 26년간의 독립국가 건설과정이었음.

ㅇ(핵심흐름) 정부수립 → 피난과 생존 → 조직재정비 → 세력통합 → 무장투쟁 → 건국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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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로드 2000㎞ - 광복 80주년, 일본에서 다시 만난 독립투사들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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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2일차, 2026.05.23.(토요일)[오전편]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길을 찾아


1.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길을 찾아

아침 6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윤봉길 의사님이 순국하신 곳, 순국기념비, 일제가 의사님의 유해를 몰래 묻었던 노다야마 암장지, 그리고 그 암장지를 평생 지키고 보존하는 데 힘쓴 박인조 선생님의 묘소까지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전날 인천공항에서 사 온 ‘처음처럼’ 한국소주 한 병도 챙겼다.

오늘은 이 술을 윤 의사님께 올릴 날이었다.

마님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2. 아침 커피를 들고 9번 승강장으로

가나자와역에 도착해서는 먼저 스타벅스에 들렀다.

일본에 오면 이상하게 스타벅스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아침부터 먼 길을 움직여야 하니 커피 한 잔을 사 들었다.

전날 저녁 미리 사전정찰을 해두었던 가나자와역 동쪽 출구 9번 승강장으로 향했다.

승강장 전광판에는 오전 7시 19분 출발, 21번 北陸学院大学(호쿠리쿠가쿠인대학)행 버스가 표시되어 있었다.

어제 미리 승강장 위치까지 확인해둔 덕분에 아침에는 헤맬 일이 없었다.

오전 7시 19분.

마님과 함께 21번 버스에 올랐다.

한 손에는 스타벅스 커피가 들려 있었다.


3. 자위대 주둔지를 지나 윤 의사님의 순국지로

버스는 가나자와 시내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육상자위대 관련 시설들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金沢駐屯地(가나자와주둔지) 표지판이 보였고, 철책 너머로 자위대 시설과 군용차량, 자위대원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가나자와는 과거 일본군 제9사단이 주둔했던 도시다.

전날 윤봉길 의사님이 수감되었던 가나자와성 위수구금소의 흔적을 찾아다녔고, 오늘 다시 자위대 시설들을 지나고 있으니 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군사도시의 흔적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버스 안 전광판에는 다음 정류장으로 金大附属学校自衛隊前(금대부속학교자위대앞)이 표시되었다.

우리는 野田(노다)를 지나 윤 의사님이 순국하신 三小牛山演習場(삼소우산연습장)으로 향했다.


4. 三小牛山演習場(삼소우산연습장), 굳게 닫힌 문 앞에서

三小牛(미스코우지) 정류소에서 내려 마님과 함께 걸었다.

곧 ‘陸上自衛隊 三小牛山演習場(육상자위대 삼소우산연습장)’이라고 적힌 표지판이 나타났다.

바로 이곳이었다.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 의사님이 총살형으로 순국하신 곳이다.

지금은 일본 육상자위대의 연습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철책 곳곳에는 ‘立入禁止(출입금지)’, ‘KEEP OUT’이라는 붉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고, 쓰레기와 오물 투기, 불 사용, 대나무, 나무, 토사 채취 등을 금지한다는 표지판도 보였다.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철문 너머로 안쪽을 바라보았다.

저 안 어딘가에서 스물다섯의 젊은 독립운동가가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고 생각하니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님과 함께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한동안 묵념을 올렸다.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울고 싶었다.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

그분이 마지막 숨을 거둔 바로 그 땅 앞에 내가 서 있었다.


5. 순국지를 떠나 노다야마로

삼소우산연습장을 뒤로하고 노다야마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걸어서 이동한다. 그렇게 먼거리는 아니었다.

거리는 대략 2km, 시간은, 숲길이라 30분정도 소요되었다.

아침공기는 신선하고 선선했다.

숲속은 상쾌했다.

길가에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이어졌고, 곧게 뻗은 삼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햇빛은 숲 사이로 드문드문 들어왔고 길 주변에는 푸른 이끼와 양치식물들이 가득했다.

걷기에는 참 좋은 길이었다.

조금 덥기는 했지만 한적한 숲길을 마님과 함께 천천히 걷는 기분이 좋았다.

가는 길에 大乗寺山動物霊園(대승사산동물영원)도 지나갔다.

산속에 마련된 화장실도 눈에 들어왔다.

일본은 이런 외진 산속의 작은 공중화장실도 건물을 단정하게 만들어놓고 내부를 깨끗하게 관리한다. 비데까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보며 다시 한 번 감탄했다.


6. 슬픈 역사를 찾아가는 행복한 길

숲은 깊고 조용했다.

마님과 나는 나란히 걸으며 사진도 많이 남겼다.

커피를 손에 들고 숲속에서도 함께 사진을 찍었고, 길이 열리며 시야가 탁 트이는 곳에서는 멀리 가나자와 시내를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오늘 찾아가는 장소가 지닌 역사는 너무나 무거웠다.

그런데 그곳을 향해 마님과 함께 걷는 지금의 나는 행복했다.

그 순간 문득 생각했다.

우리가 이렇게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하고, 숲길을 걷고,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은 그냥 주어진 일이 아니다.

윤봉길 의사님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그 생각을 하니 지금 누리고 있는 평범한 행복이 새삼 고마워졌다.


7. 노다야마에서 만난 두 갈래의 길

노다야마 공동묘지 일대로 들어서자 가나자와 시내가 아래로 시원하게 내려다보였다.

마님과 함께 그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도 남겼다.

조금 더 걸어가자 마침내 익숙한 한자가 적힌 안내판이 나타났다.

尹義士殉國碑(윤의사 순국비) 60m →

← 尹義士遺詩碑・暗葬跡碑(윤의사 유시비·암장적비) 70m

한쪽은 순국기념비로, 다른 쪽은 암장지로 이어지는 갈림길이었다.

우선 순국기념비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8. 尹奉吉義士殉國紀念碑(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

숲속 계단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자 검은색의 커다란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尹奉吉義士殉國紀念碑(윤봉길의사 순국기념비).

비석 앞에는 태극기와 꽃들이 놓여 있었고, 거북 모양의 받침 위로 검은 비신이 높이 서 있었다.

주변은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멀리 일본 가나자와의 산속에 우리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이렇게 크게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니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9. 윤 의사님의 순국기념비터를 쓸다

기념비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닥에 나뭇가지와 솔잎 같은 것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침 주변에 빗자루가 놓여 있었다.

빗자루를 들었다.

처음에는 눈에 띄는 것만 조금 치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번 쓸기 시작하니 자꾸 욕심이 났다.

“이왕 하는 거 깨끗하게 해드리자.”

비석 앞부터 주변 바닥, 난간 틈까지 계속 쓸었다.

한쪽에는 싸리빗자루가 있었고 다른 빗자루도 있어 번갈아 사용했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면서 땀이 뻘뻘 났다.

마님은 옆에서 내가 청소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사진도 찍어주었다.

한참을 쓸고 나니 기념비 주변이 한결 깨끗해졌다.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다만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예라도 올리고 싶었다.


10. 기념비 앞에서 올린 묵념

청소를 마친 뒤 마님과 함께 순국기념비 앞에 섰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윤봉길 의사님을 생각하며 묵념을 올렸다.

기념비 옆에는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는 방명록이 마련되어 있었다.

안내판에는 우리말로도 방문객들에게 방명록에 성함을 적어달라는 안내가 적혀 있었다.

마님과 나도 방명록을 펼쳤다.

한국에서 찾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글이 여러 줄 적혀 있었다.

우리도 이름과 감사의 마음을 남겼다.

먼 타국까지 윤 의사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지금도 계속 있다는 흔적이었다.


11. 뜻밖에 만난 대구에서 온 참배객

순국기념비 주변을 깨끗이 쓸고 마님과 함께 묵념을 올린 뒤 잠시 쉬고 있는데, 한 사람이 올라왔다.

이곳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니 반가웠다.

말을 나눠보니 대구에서 혼자 여행을 온 분이었다. 나보다 대여섯 살쯤 어려 보였고, 이미 윤 의사님의 암장지를 먼저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분도 우리를 무척 반가워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온 분을 만나니 반갑네요.”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다.

관광지를 찾아온 것도 아니고, 일본 가나자와의 노다야마 깊숙한 곳까지 윤봉길 의사님을 찾아온 사람이었다. 서로 어디에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윤 의사님을 기억하고 그분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반가웠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디선가 본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침에 우리가 타고 온 21번 버스에서 봤던 분이었다.

노다야마 공동묘지 부근에서 그분이 허겁지겁 버스에서 내렸는데, 버스기사님이 다시 불러 세웠다. 그분은 다시 버스에 올라왔다가 잠시 뒤 내려갔다. 왜 다시 불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시에는 요금 문제 때문인가 싶었다.

무슨 이유로 버스기사님이 불러 세웠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었다.

아침 버스에서 우연히 보았던 사람을 윤봉길 의사님의 순국기념비에서 다시 만난 것이다.

멀리 대구에서 온 그분이나 마님과 함께 이곳을 찾아온 나나 마음은 같았다.

나라를 위해 스물다섯의 젊은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님을 잊지 않고, 머나먼 일본 땅의 순국지와 암장지까지 직접 찾아와 인사를 드리고 싶었던 마음.

그 마음이 같았기에 처음 만난 사람인데도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반가웠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숲길 안쪽에 자리한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로 가기 위해 먼저 순국기념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나자와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우리는 그분을 다시 만나게 된다.


12. 암장지로 향하는 숲길

순국기념비를 나와 이제 윤 의사님의 암장지로 향했다.

숲 사이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걸었다.

바닥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고 양쪽으로 나무와 숲이 빽빽했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조금씩 들어왔다.

순국기념비에서 암장지까지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순국지를 찾았고, 순국기념비 앞에서 묵념도 올렸다.

이제 일제가 윤 의사님의 유해를 몰래 묻었던 바로 그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13. 尹奉吉義士暗葬地跡(윤봉길의사 암장지적)

숲길 끝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웅장한 묘소도 아니고 화려한 시설도 아니었다.

나무와 풀로 둘러싸인 산속 한쪽에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정면에는 커다란 자연석이 놓여 있었고 그 돌에는

尹奉吉義士
暗葬之跡

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옆에는 윤 의사님의 흉상이 있었고, ‘丈夫出家生不還(장부출가생불환)’이라 새긴 돌기둥도 서 있었다.

“장부가 집을 나서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주변에는 설명판과 資料庫(자료고), 찬조금함, 여러 개의 향로와 참배용 물품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梅軒(매헌)’이라 적힌 표지도 쇠사슬과 함께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국어와 일본어로 윤 의사님의 유해가 이곳에 암장되었던 과정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서 있었다.

이곳이 바로 일제가 윤 의사님의 유해를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린 자리였다.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그 자리.

더 가슴 아픈 것은 암장된 위치였다.

이 자리는 당시에도 사람들이 공중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오르내리던 길목이었다. 지금도 암장지 옆길을 따라 올라가면 공중화장실이 있다.

일제는 윤 의사님의 유해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도록 숨긴 것도 모자라, 일반인들이 그 사실도 모른 채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니도록 이런 자리에 암장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발밑에 윤봉길 의사님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화장실을 오가기 위해 이 길을 밟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 사실을 생각하니 참담했다.

순국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조차 없었다.

죽은 뒤에도 모욕하려 했던 일제의 만행이었다.

해방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 유해가 발굴되고 이곳이 암장지였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 뒤에야 비로소 지금의 표석과 안내시설이 마련되었다.

지금이야 태극기도 있고, 윤 의사님의 흉상도 있고, 한국에서 찾아오는 참배객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분의 이름을 알려주는 표식 하나 없었다.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밟고 지나가는 길 아래에 스물다섯 살 윤봉길 의사님이 누워 계셨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를 바라봤다.

“여기였구나.”

책에서 읽고 사진으로 보던 장소와 실제 그 자리에 서는 것은 전혀 달랐다.


14. 늦게 찾아온 후손의 술 한 잔

가방에서 아침부터 들고 온 ‘처음처럼’을 꺼냈다.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술이었다.

예로부터 술은 제례에서 단순한 마실거리가 아니라, 정성과 공경을 담아 올리는 제물이었다.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후손으로서 윤 의사님께 술 한 잔이라도 직접 올리고 싶었다.

오늘 이 술을 가지고 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병뚜껑을 열었다.

윤 의사님께 먼저 술을 올렸다.

술을 올린 뒤 큰절을 했다.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엎드렸다.

절을 마친 뒤 술을 조금씩 암장지 주변에도 뿌렸다.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외롭게 누워 계셨을 의사님을 생각했다.

마님도 내 뒤를 이어 윤 의사님께 큰절을 올렸다.

“의사님, 늦게 찾아왔습니다.”

속으로 그렇게 말씀드렸다.

여행객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후손으로 찾아와 인사를 올리는 마음이었다.

참배를 마친 뒤에는 이곳에도 마련되어 있는 방명록을 펼쳐 마님과 함께 이름과 글을 남겼다.


15. 암장지를 지켜온 사람들의 흔적

암장지에는 윤 의사님만 계신 것이 아니었다.

이곳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애쓴 사람들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특히 박인조 선생님의 흔적이 컸다.

우리에게 윤봉길 의사님은 잘 알려져 있지만, 먼 일본 땅에서 그 흔적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보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가 이 자리에 와서 윤 의사님의 흔적을 직접 보고 절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암장지에는 박현택이라는 이름과 연락처가 적힌 안내판도 있었다.

설명이 필요한 방문객은 연락하면 오겠다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한번 드려볼까 생각했지만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대신 이곳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찬조금함에 20만 원을 넣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돈이었다.

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곳을 지키는 데 좋은 일로 쓰일 것이라 생각했다.

암장지를 돌아보면서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곳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는 한국 사람들의 노력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가나자와와 이시카와 지역에서도 윤봉길 의사님을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그분의 마지막과 암장지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또 일본인들 가운데에도 이 암장지를 보존하고 그 역사를 알리는 데 힘을 보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제의 만행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지만, 일본에도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는 양식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다.

윤 의사님의 흔적을 함께 지키고 있는 그런 일본 사람들의 존재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게 윤 의사님의 암장지에서 절을 올리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찬조금까지 넣으며 이곳에서의 참배 일정을 모두 마쳤다.

하지만 아직 찾아뵐 분이 한 분 더 계셨다.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를 평생 지키고 보존하는 데 힘쓴 박인조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묘소는 암장지 바로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다시 5분 정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16. 윤봉길 의사의 곁을 평생 지킨 박인조 선생님을 찾아

윤 의사님의 암장지 일정을 모두 마친 뒤 박인조 선생님의 묘소를 찾아갔다.

암장지에서 5분 정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선생님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박인조 선생님은 경상북도 영천 출신으로, 일본 가나자와에서 생활하며 살아생전 윤 의사님의 암장지를 지키고 보존하는 데 평생을 바친 분이었다.

월진회 일본본부 초대 회장을 맡아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한국과 일본 사회에 알리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윤 의사님의 유해가 발굴된 뒤에도 이곳을 잊지 않고 오랫동안 돌보고 지켜왔으며,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늘날 이 암장지가 온전히 보존되어 후손들이 찾아올 수 있게 된 데에는 박인조 선생님 같은 분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은 생전에 돌아가신 뒤에도 윤 의사님 곁에 있고 싶다는 뜻을 남겼다고 한다.

“나는 죽어서도 윤봉길 의사를 곁에서 모셔야겠다.”

그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졌다.

박인조 선생님은 생전에 평생 지켜온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있는 노다야마에 묻혀, 돌아가신 뒤에도 윤 의사님의 곁을 지키고 계셨다.

묘비에는

密陽(밀양) 朴仁祚之墓(박인조지묘)

라고 새겨져 있었다.

나는 묘소 앞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윤 의사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흔적을 끝까지 지킨 사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묘소 주변에는 박인조 선생님과 관련된 비석도 있었고, 충남 예산군에서 세운 감사비도 자리하고 있었다.

박인조 선생님의 사진과 함께 세워진 감사비 앞에 서서 나는 그 글을 천천히 읽었다.

감사비에는 월진회 일본본부 초대회장 박인조 선생님이 평생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를 지키고 관리해 온 분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박인조 선생님께서 평생 윤봉길 의사님의 암장지를 지킨 데 대한 감사의 뜻과 함께,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지닌 중요성을 한국과 일본 사회에 알리고 이곳을 보존하기 위해 평생 애쓴 선생님의 삶을 기리는 글이 담겨 있었다.

충남 예산군에서 세운 이 감사비에는 선생님이 생전에 남긴, 돌아가신 뒤에도 윤 의사님 곁에서 모시고 싶다는 뜻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 글을 읽고 있으니 윤 의사님의 암장지가 단순히 세월의 흐름 속에서 저절로 남아 오늘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더욱 실감났다.

누군가는 이곳을 기억했고, 누군가는 찾아왔으며, 누군가는 평생을 바쳐 지켰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박인조 선생님이었다.

묘소 한쪽에는 개 한 마리를 형상화한 석상이 놓여 있었다.

박인조 선생님의 곁을 지켰던 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했다.

평생 윤 의사님의 암장지를 지킨 박인조 선생님과, 그 선생님 곁을 지켰던 개.

작은 개 석상 하나까지도 이곳에서 이어져 온 긴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윤봉길 의사님의 마지막 흔적을 지켜온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곁을 지켜온 작은 생명까지.

노다야마에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역사를 이어온 기억들이 함께 남아 있었다.


17. 자위대의 흔적을 보며 가나자와역으로

이제 가나자와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발걸음을 조금 서둘렀다.

아침부터 계속 걸어다닌 데다 날씨도 제법 더워져 땀이 많이 났다.

野田(노다) 정류장에 도착한 뒤에는 10분에서 15분 정도 버스를 기다렸다.

마님은 정류장 옆에서 남아 있던 커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잠시 뒤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버스에 올라타니 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아까 순국기념비에서 만났던 대구에서 온 참배객이었다.

아침 버스에서 처음 보고, 순국기념비에서 다시 만나고, 이번에는 돌아오는 버스에서 또 만난 것이다.

하루 동안 세 번이나 만났다.

서로 얼굴을 보고 웃었다.

윤 의사님을 찾아 가나자와까지 온 두 사람이 같은 날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산길을 걷고, 다시 같은 버스로 돌아가고 있었다.

참 묘한 인연이었다.

가나자와로 돌아오는 길에도 자위대의 흔적은 계속 눈에 들어왔다.

자전거를 타고 순찰하는 자위대원들도 보였다.

전날 가나자와성에서 일본군 제9사단의 흔적을 보았고, 오늘은 가나자와주둔지와 삼소우산연습장, 자위대원들을 연이어 마주쳤다.

가나자와를 여행하며 내가 받은 인상은 분명했다.

“가나자와는 참 자위대의 흔적이 많은 도시구나.”

버스는 犀川(사이천)을 가로지르는 오래된 철제 트러스교도 지나갔다.

푸른빛 철골 사이로 강과 가나자와 시내가 보였다.

아침부터 산속을 걸으며 이어졌던 참배길이 다시 도시의 풍경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18. 참배길을 마치고, 이제 도야마로

가나자와역에 도착했다.

아침 6시에 숙소를 나서 윤봉길 의사님의 순국지와 순국기념비, 암장지를 찾아 걷고, 마지막으로 박인조 선생님께까지 인사를 드리고 돌아온 참배길도 이제 끝이 났다.

오전 내내 마음속에는 윤 의사님이 계셨다.

슬프기도 했고, 먹먹하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다. 먼 타국 땅에서 그 마지막 흔적을 하나씩 찾아 직접 걷고 절을 올리고 나니, 오래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던 숙제 하나를 마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 잠시 숨을 돌리고 짐을 챙겨 가나자와를 떠날 시간이다.

오후에는 北陸新幹線(호쿠리쿠신칸센)을 타고 富山(도야마)으로 넘어간다.

아침에는 한 영웅의 마지막 길을 따라 걸었고, 오후부터는 다시 여행자의 길로 돌아간다.

가나자와에서의 마지막 오전.

그렇게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님을 찾아 나선 나와 마님은 참배길을 마쳤다.

그리고 다음 여행지, 도야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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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례(祭禮) 시 주류(酒類)를 제물로 활용하는 사유

1. 검토배경

ㅇ(검토목적) 현대적 관점에서 기호식품인 주류가 전통 제례에서 주요 제물로 사용되어 온 역사적·문화적 배경과 제의적 의미를 검토

2. 주요내용

ㅇ(공경표상) 전통 농경사회에서 곡식은 생존과 직결되는 중요한 자원이었으며, 곡식을 원료로 별도의 제조·발효과정을 거쳐 만든 술을 조상에게 올리는 행위는 후손의 정성과 공경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짐

ㅇ(강신매개) 제례의 강신(降神) 절차에서 향을 피우고 모사(茅沙)에 술을 붓는 것은 조상의 신령을 제례 공간으로 모시는 의례로, 술은 인간과 조상의 신령을 연결하는 제의적 매개물로 활용됨

ㅇ(정성상징) 제례에 사용하는 술은 단순한 음용 목적이 아니라 정성껏 마련하여 올리는 제물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맑고 정갈하게 마련한 술은 제례를 준비하는 후손의 정성과 공경을 나타냄

ㅇ(헌작의례) 제례에서는 신위 앞에 술을 올리는 헌작(獻爵)을 주요 절차로 시행하며, 초헌·아헌·종헌 등 반복적인 헌작을 통해 조상에 대한 예와 공경을 표현함

ㅇ(음복절차) 제례 종료 후 제물과 술을 참석자가 함께 나누는 음복(飮福)은 조상이 흠향(歆饗)한 제물을 통해 복을 함께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며, 가족·문중 구성원 간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기능을 수행함

3. 종합검토

ㅇ(제의적의미) 제례에서 술은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조상에 대한 공경과 정성을 표현하고, 강신·헌작·음복 등 제례의 주요 절차를 연결하는 핵심적인 제의물로 기능

ㅇ(종합판단) 주류를 제물로 사용하는 전통은 술 자체의 음용가치보다는 곡식을 가공하여 정성껏 마련한 제물을 조상에게 바치고 이를 후손이 함께 나누는 과정에 의미가 있으며, 전통사회의 조상숭배와 공동체적 가치가 반영된 제례문화로 보는 것이 타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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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로드 2000㎞ - 광복 80주년, 일본에서 다시 만난 독립투사들
김종훈 지음 / 필로소픽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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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하는 일본 알펜루트 여행기

여행 1일차, 2026.05.22.(금요일)


1. 항일로드 2000km의 시작

이번 여행을 계획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의 『임정로드 4000km』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책에는 중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책을 읽으며 언젠가는 그 길을 직접 찾아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임정로드와 약산로드의 대부분은 중국 땅에 있어 마음먹은 대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비교적 자주 여행하면서도 정작 우리 독립운동사의 현장을 제대로 찾아본 적이 없었다.

도쿄, 교토, 오사카, 히로시마, 시모노세키, 미야기, 나가사키, 후쿠오카….

그동안 여러 차례 일본을 다녔으면서도 그 도시 어딘가에 남아 있는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지나쳐버린 곳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앞으로 일본을 여행할 때마다 가능하면 그곳에 남아 있는 독립운동의 흔적을 하나씩이라도 찾아가 보자고.

그 첫 번째가 가나자와였다.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후 체포된 매헌 윤봉길 의사가 생의 마지막 밤을 보냈고, 결국 순국한 곳이 바로 가나자와였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의 후반부에는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에게 여행의 첫 목적지는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발자취였다.

5월 22일.

사랑하는 마님과 함께 그 첫발을 내디뎠다.


2. 자정에 집을 나서 인천공항으로

집을 나선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한밤중 고속도로를 달려 새벽 3시경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출발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 안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잠에서 깬 뒤 터미널로 들어가 출국수속을 시작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공항은 크게 붐비지 않았고 수속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진행됐다.

이번 여행에는 카메라도 단단히 챙겼다.

가나자와와 도야마의 거리, 구로베 협곡, 그리고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다테야마 구로베 알펜루트까지 제대로 담아오고 싶었다.

그리고 한 가지를 더 준비했다.

인천공항에서 소주 ‘처음처럼’ 한 병을 샀다.

윤봉길 의사님을 찾아뵐 때 빈손으로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타국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께 한국에서 가져온 술 한잔이라도 올리고 싶었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대한항공 KE2189편.

고마쓰공항으로 가는 오전 7시 30분 출발편이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3. 활주로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비행기

예정대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탑승구를 떠나 이륙을 위해 활주로 쪽으로 이동했다.

이제 곧 뜨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엔진 이상이었다.

이륙하기 위해 활주로까지 나갔던 비행기가 결국 다시 돌아가야 했다. 잠시 뒤 견인차가 와서 비행기를 끌고 갔다.

“아이고, 첫날부터 일정 뻐그러졌네.”

원래 오전 7시 30분이었던 출발 시각은 오전 10시 20분으로 밀렸다.

거의 세 시간 지연이었다.

가나자와에서 보내야 할 귀중한 오전 시간이 인천공항에서 사라져버렸다.

처음부터 계획이 틀어졌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여행이라는 것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그렇게 기다림 끝에 다시 비행기에 올랐고, 이번에는 무사히 일본을 향해 날아올랐다.

기내식도 먹고 창밖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구름 아래로 일본의 해안과 들판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비로소 멈췄던 여행이 다시 움직이는 것 같았다.


4. 자위대 전투기와 공룡이 반겨준 고마쓰공항

우여곡절 끝에 낮 12시 30분경 고마쓰공항에 도착했다.

착륙한 뒤 창밖을 바라보니 민간공항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활주로 건너편에 일본 항공자위대 군용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고마쓰공항은 민간항공과 일본 항공자위대가 함께 사용하는 비행장이다. 그래서 민항기를 타고 도착하면서도 바로 옆 고마쓰기지의 군용기와 시설을 볼 수 있었다.

첫날부터 비행기 엔진 이상으로 세 시간 가까이 지연된 뒤 도착한 곳에서 전투기부터 마주하니 일반적인 관광공항에 도착한 것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런데 공항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전혀 다른 녀석이 우리를 맞았다.

공룡이었다.

벽을 뚫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다란 공룡 한 마리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첫날부터 비행기 엔진 이상으로 세 시간 가까이 발이 묶여 지쳐 있던 우리를 보고

“인자 왔냐?”

하고 묻는 것 같았다.

뜻밖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고 자연스럽게 카메라부터 들었다.


5. 오후 1시 20분, 가나자와로

고마쓰공항 밖으로 나와 가나자와행 리무진버스를 탔다.

승차권은 1인 1,300엔.

오후 1시 20분경 고마쓰공항을 출발했다.

버스가 공항을 벗어나자 창밖으로 초여름의 호쿠리쿠 지방 풍경이 이어졌다.

물을 가득 댄 논에는 어린 모가 반듯하게 줄을 맞추고 있었고 낮은 집들과 농경지가 연이어 나타났다.

중간에는 바다를 바로 옆에 둔 대규모 공사현장도 지나갔다.

비행기가 늦어지면서 첫날 계획은 이미 크게 틀어졌지만, 이렇게 버스 창밖으로 일본의 논과 마을을 보고 있으니 그제야 일본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약 50분을 달려 오후 2시 10분경 가나자와역에 도착했다.


6. 하얏트 센트릭 가나자와에 짐을 풀다

가나자와역에 도착하자 우선 숙소부터 찾았다.

이날 묵을 곳은 하얏트 센트릭 가나자와(Hyatt Centric Kanazawa).

가나자와역에서 아주 가까웠다.

장거리 이동을 끝내고 캐리어를 끌고 한참 걸어야 하는 숙소가 아니라는 것부터 마음에 들었다.

객실 문을 열자 첫인상도 좋았다.

트윈베드와 소파,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도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방이 넓었다. 전체적으로 깔끔했고 시설도 쾌적했다.

자정에 집을 나와 새벽 3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고, 비행기 고장으로 세 시간을 기다린 뒤에야 일본에 들어왔으니 이 넓고 쾌적한 방이 더욱 반가웠다.

하지만 아직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짐을 내려놓고 잠시 숨을 돌린 뒤 다시 밖으로 나섰다.

이미 오전 일정은 날아갔지만 남은 시간이라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7. 가나자와역, 츠즈미몬과 매잡이 부녀

호텔을 나와 다시 가나자와역으로 향했다.

역 밖으로 나오자 가나자와를 상징하는 거대한 츠즈미몬이 눈앞에 나타났다.

굵은 목재가 서로 비틀리듯 솟아올라 커다란 지붕을 받치고 있었고 뒤편으로는 유리와 철골로 된 모테나시 돔이 이어졌다.

역 앞에는 물줄기로 숫자와 글자를 만들어내는 재미있는 분수도 있었다.

시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물줄기가 모여 ‘ようこそ金沢へ’, ‘가나자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자를 만들어냈다.

안내석을 읽어보니 단순한 분수도 아니었다.

이곳에는 에도시대부터 가나자와 시내를 흘러온 다쓰미 용수의 물을 끌어다 사용하고 있었다.

가나자와에는 사이가와와 아사노가와 두 하천 외에도 총연장 약 150km에 이르는 55개의 용수가 도시를 그물처럼 흐른다고 한다.

그저 역 앞의 현대적인 분수인 줄 알았는데 그 물줄기 속에도 오래된 가나자와의 역사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역 앞에서 또 재미있는 광경을 만났다.

매를 데리고 나온 아저씨가 딸과 함께 사람들에게 매를 보여주고 있었다.

두꺼운 장갑 위에 올라앉은 매가 날개를 활짝 펼치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섰다.

고마쓰공항에서는 공룡이 우리를 맞더니 가나자와에 오자 이번에는 매다.

여행 첫날부터 동물들과의 인연이 제법 많았다.


8. 오미초시장을 지나 오야마신사로

가나자와역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보도에는 오미초시장까지 370m라는 안내표시가 붙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나자와의 대표적인 재래시장인 오미초시장이 나타났다.

당초 계획에는 이곳도 제대로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전에 비행기가 세 시간이나 지연되면서 여유가 없었다.

가나자와성과 겐로쿠엔까지 돌아봐야 했기 때문에 시장 안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할 시간이 없었다.

결국 오미초시장은 그냥 지나갔다.

조금 아쉬웠지만 여행은 때로 버릴 것을 버려야 한다.

오미초시장을 지나 계속 걷다가 예정에는 없던 오야마신사에 들렀다.

가나자와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으니 그냥 지나치기 아까웠다.


9. 오야마신사, 그리고 연잎 위의 개구락지들

오야마신사는 가가번의 초대 번주 마에다 도시이에를 모신 신사다.

입구부터 평범한 일본 신사와는 조금 달랐다.

특히 독특한 모습의 신문은 일본 전통양식에 중국과 서양 건축의 요소가 섞인 독특한 건축물이었다.

경내에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기마상도 있었고, 울창한 나무와 연못, 작은 다리 등이 어우러져 있었다.

신사라기보다 작은 정원에 들어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런데 내 눈길을 가장 끈 것은 따로 있었다.

커다란 연잎 모양의 수반 위에 개구락지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한 녀석은 몸을 앞으로 잔뜩 내밀고 있고, 가운데 녀석은 입을 쩍 벌리고 금방이라도

“개굴!”

하고 울어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옆 녀석도 연잎 가장자리에 매달려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근엄한 신사 안에 이런 익살스러운 개구락지들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마님과 한참 들여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유명한 문화재와 거창한 건축물만 여행의 기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정에도 없던 신사에 들어갔다가 만난 개구락지 세 마리가 오히려 오래 기억에 남는다.


10. 가나자와성, 아름다운 성곽 뒤에 숨은 일본군 제9사단

오야마신사를 나와 가나자와성으로 향했다.

지금의 가나자와성은 잘 복원된 성곽과 넓은 잔디밭, 정원으로 관광객을 맞는다.

그러나 이곳에는 또 하나의 역사가 겹쳐 있다.

메이지유신 이후 가나자와성은 일본 육군의 군사시설로 사용됐고 제9사단의 거점이 됐다. 성 안에는 제9사단 사령부가 자리하고 있었다.

제9사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한반도에도 주둔하며 우리 민족을 짓밟았다. 1932년 제1차 상하이사변 때에는 상하이에 투입됐다.

당시 제9사단을 지휘했던 사람이 우에다 겐키치 중장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윤봉길 의사의 역사와 이어진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은 일본군 수뇌부가 모여 있던 단상을 뒤흔들었다.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은 중상을 입고 이후 사망했고,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역시 크게 다쳤다.

그리고 의거 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윤 의사가 그해 12월 마지막으로 이송되어 온 곳 역시 제9사단의 본거지였던 가나자와였다.

이 기막힌 연결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윤 의사를 굳이 제9사단의 본거지인 가나자와까지 옮긴 데에는 복수의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것은 내가 이곳을 걸으며 떠올린 생각이다. 현재 확인되는 사료에는 가나자와 이송의 이유를 ‘우에다 중장에 대한 복수’라고 명시하고 있지는 않다.


11. 윤봉길 의사가 마지막 밤을 보낸 곳

가나자와성을 걸으며 내가 가장 찾아보고 싶었던 곳에 도착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감됐던 가나자와 위수구금소 터였다.

1932년 12월 18일 윤 의사는 오사카에서 가나자와로 이송돼 제9사단 위수구금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 날인 12월 19일 아침, 윤 의사는 이곳을 떠나 당시 이시카와현 우치카와무라 미쓰코지 일대의 육군 작업장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순국 후 유해는 노다야마 묘지 일대에 암장됐다.

해방 뒤인 1946년에야 유해가 발굴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윤 의사가 마지막 밤을 보냈던 위수구금소 터를 찾아가 보니 지금은 화장실이 들어서 있었다.

참….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관광객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화장실을 드나들고 있었고, 주변은 너무나 평온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스물다섯 살의 청년이 다음 날이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밤을 보냈다.

사진을 찍으면서도 마음이 참 묘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인천공항에서 사온 ‘처음처럼’ 한 병이 문득 생각났다.

아직 윤 의사님께 술을 올릴 곳은 남아 있었다.

가나자와성은 여행지였지만 내게는 이날부터 다른 의미의 장소가 됐다.

드디어 윤 의사님 참배길의 일부가 시작된 것이다.


12. 이시카와몬을 나서 겐로쿠엔으로

위수구금소 터를 마지막으로 가나자와성을 나왔다.

이시카와몬을 통과해 밖으로 나오자 바로 맞은편에 겐로쿠엔이 있었다.

참 기막힌 위치였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윤 의사가 마지막 밤을 보낸 일본군 주둔지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일본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정원 가운데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윤 의사의 마지막 밤을 생각하며 마음이 먹먹했는데 몇 걸음 옮기자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윤 의사님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뒤로하고 겐로쿠엔으로 향했다.


13. 일본 3대 정원, 겐로쿠엔

입구의 나무 간판에는 ‘특별명승 겐로쿠엔(兼六園)’이라고 적혀 있었다.

겐로쿠엔은 가나자와성과 나란히 자리한 다이묘 정원으로, 일본 3대 정원의 하나로 꼽힌다. 가가번을 다스린 마에다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조성하고 가꾼 정원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정원을 참 기가 막히게 꾸며놓았다.

연못과 물길, 오래된 소나무와 고목, 작은 다리와 석등, 이끼 낀 땅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분명 사람이 오랜 세월 손질한 곳인데도 억지로 꾸민 느낌이 거의 없었다.

나무 한 그루와 돌 하나까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풍경 속에 녹아 있었다.

철쭉도 한창이었다.

둥글게 다듬어진 철쭉나무에는 분홍빛 꽃이 빼곡하게 피어 있었고, 짙은 녹색의 소나무와 연못 사이에서 유난히 선명했다.

굵은 소나무 가지들은 물 위로 길게 뻗어 있었다.

세월을 이기지 못한 가지마다 나무 지지대를 받쳐놓았는데, 그 모습조차 정원의 한 부분처럼 느껴졌다.

연못 건너편으로 오래된 건물들이 비치고, 물가를 따라 걷다 보면 작은 다리와 숲길이 다시 나타났다.

조금 걸으면 또 다른 풍경이 나왔다.

정원이 한눈에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걷는 방향과 위치에 따라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마님과 나도 연못 앞에서 사진을 남겼다.

높은 곳에서는 가나자와 시내도 내려다보였다.

조금 전까지 윤봉길 의사의 마지막 흔적을 따라 무거운 마음으로 걸었던 것이 사실인데, 눈앞의 정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 대비가 오히려 마음을 더 복잡하게 했다.

한쪽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과 침략의 역사가 있었고, 그 바로 옆에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가꾸었다.

아름답다는 생각과 씁쓸하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그래도 정원 자체만 놓고 보면 역시 이름값을 했다.

일본 3대 정원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14. 일본에 오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스타벅스

겐로쿠엔을 충분히 둘러본 뒤 가나자와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역에 도착하자 그냥 숙소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스타벅스가 눈에 들어왔다.

일본에 오면 이상하게 스타벅스를 그냥 지나치기가 어렵다.

한국에서도 볼 수 있는 익숙한 초록색 로고인데, 일본 여행 중에 만나면 괜히 한 번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어진다.

결국 가나자와역 스타벅스에 들어가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자정부터 시작된 긴 하루였다. 비행기 고장으로 인천공항에서 세 시간을 허비했고, 일본에 도착해서는 가나자와 시내를 쉬지 않고 걸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으니 긴장이 조금 풀렸다.

마님도 이제는 완전히 지친 표정이었다.

이날 마님과 함께 가나자와성과 겐로쿠엔 등을 돌아본 기록은 총 9.8km였다.

이동시간은 2시간 49분 39초, 평균속도는 3.9km/h였고, 최고점은 170m, 누적 상승고도는 283m였다.


15. 가나자와역 도시락으로 때운 저녁

스타벅스를 나와 가나자와역에서 저녁으로 먹을 도시락 두 개를 샀다.

다시 밖으로 나가 식당을 찾아다닐 기운도 없었다.

도시락을 들고 하얏트 센트릭 가나자와로 돌아왔다.

객실에 들어와 마님과 마주 앉아 도시락으로 저녁을 때웠다.

거창한 저녁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정에 집을 나선 뒤 비행기 지연에, 고마쓰공항에서 가나자와까지 이동하고, 오미초시장과 오야마신사, 가나자와성, 겐로쿠엔까지 돌아다닌 뒤 먹는 저녁이었다.

마님은 이미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오늘 하루 얼마나 고단했는지 그대로 드러났다.

이제 마님에게는 오늘 일정이 끝났다.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 곳이 남아 있었다.


16. 다시 혼자 길을 나서다 ― 윤봉길 의사 유해안치소 터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은 뒤 나는 혼자 다시 숙소를 나섰다.

마님은 방에서 쉬게 하고, 윤봉길 의사님의 유해가 한때 안치되었던 장소를 찾아가 보기 위해서였다.

낮에 가나자와성의 위수구금소 터를 찾아가 윤 의사님이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자리를 확인했다.

그것만 보고 하루를 끝내기에는 마음 한구석에 허전함이 남아 있었다.

윤 의사님이 순국하신 뒤 그 육신이 거쳐간 자리 역시 직접 찾아보고 싶었다.

유해안치소로 향하기에 앞서 가나자와역에 먼저 들렀다.

다음 날 아침 찾아갈 곳은 윤 의사님이 순국하신 미쓰코지의 옛 육군 연습장이었다. 처음 가보는 곳인 데다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미리 승강장을 확인해두는 편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역 앞 버스승강장을 하나씩 확인했다.

미쓰코지 방면으로 가는 21번 버스.

타는 곳은 9번 승강장이었다.

“오케이. 내일은 여기서 타믄 되겄네.”

9번 승강장의 위치를 눈에 확실히 익혀두었다.

낯선 여행지에서 다음 날 아침부터 버스 타는 곳을 찾아 우왕좌왕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사전정찰이었다.

내일 윤 의사님의 순국지를 찾아가는 첫 동선까지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그제야 가나자와역을 떠나 유해안치소 터를 향해 걸었다.

낯선 가나자와의 저녁거리를 혼자 걸었다.

낮에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도시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차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윤 의사님의 유해안치소가 있었던 곳에 도착했다.

하지만 옛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은 병원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자동차가 드나드는 평범한 주차장.

이곳이 윤봉길 의사님의 유해가 한때 안치되었던 자리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낮에 찾아간 위수구금소 터가 지금은 화장실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도 마음이 무거웠는데, 이번에는 유해안치소 터가 병원 주차장으로 남아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건물이 없어지고 도시의 모습은 바뀌었지만, 그곳에서 있었던 역사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자리에 직접 서보니 이런 장소를 찾아보고 기록하는 일이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다.

한동안 그 자리를 바라보다가 숙소를 향해 돌아섰다.


17. 천하영웅 윤봉길 의사를 찾아가는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숙소에서 유해안치소 터를 찾아갔다 돌아오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이날 저녁 혼자 이동한 거리는 6.3km.

이동시간은 1시간 49분 54초, 평균속도는 4.2km/h였고, 최고점은 132m, 누적 상승고도는 213m였다.

낮에 마님과 함께 가나자와성과 겐로쿠엔 등을 돌아본 9.8km의 기록과는 별개의 거리였다.

하루 종일 걸어 이미 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 이 길만큼은 그냥 걸어야 할 것 같았다.

윤 의사님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내일의 일정을 생각했다.

버스를 탈 가나자와역 9번 승강장도 이미 확인해두었다.

내일은 그곳에서 21번 버스를 타고 윤봉길 의사님께서 순국하신 미쓰코지의 옛 육군 연습장으로 향한다.

그리고 일제가 의사님의 유해를 몰래 묻었던 노다야마 암장지도 찾아갈 예정이다.

인천공항에서부터 챙겨온 ‘처음처럼’ 한 병도 그때 비로소 꺼내게 될 것이다.

윤 의사님께 직접 술 한 잔 올리러 간다.

항일로드 2000km의 시작.

가나자와에서의 첫날이 그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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