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 트라이앵글’ 중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미술관(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ia)이 남았다. 줄여서 ‘소피아’라고 하겠다. 소피아는 다음날 똘레도 소풍을 마치고 오후 늦게 돌아와 서둘러 관람했다. <게르니카>를 직접 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소피아는 프라도보다 규모가 작다. 회화·판화·조각·사진·공예 등 여러 분야의 왕실 수집품과 정부 소유 예술품의 극히 일부인 300여 점만 전시한다. 피카소·달리·미로를 비롯한 현대 작가뿐만 아니라 조르주 브라크·르네 마그리트·로이 리히텐슈타인·프랜시스 베이컨 등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다른 나라 화가의 작품도 있다. 소피아는 프라도나 TB와 달리 사진 촬영을 허락하기에 <게르니카>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좀처럼 하지 않는 짓인데 거기서는 하고 싶었다.

게르니카는 바스끄 지역에 있는 작은 도시다. 1937년 4월 26일 독일 공군이 프랑코를 지원하려고 공화파 병력이 집결해 있던 그곳을 폭격했다. 정밀 타격 기술이 없던 때여서 폭탄은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고 민간인을 수백 명 죽였다. 파리 세계박람회 스페인관의 벽화 제작 의뢰를 받았던 피카소는 그 사건 직후 가로 776.6 센티미터 세로 349.3 센티미터 대작을 그렸다.

<게르니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반전(反戰) 회화 작품이다. 독일 공군이 프랑코 군대와 함께 그보다 더한 만행을 숱하게 저질렀지만, 이 그림 때문에 게르니카 폭격이 스페인 내전의 가장 참혹한 사건인 것처럼 알려졌다. <게르니카> 앞에서 고야를 생각했다. 고야처럼 피카소도 단지 프랑코와 히틀러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의 비인간성을 고발했다. 1951년 작품 <한국의 학살>도 같은 맥락이었다.

믿음으로 충만한 인생을 살았다. 두 살 때 콜레라에 부모를 잃고 이모 부부의 보살핌을 받았던 그는 열일곱 살에 만난 여인과 혼인해 자녀 셋을 낳았다. 화가로 성공해 세계를 여행하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가족을 그렸다. 주로 풍경화와 정물화를 그렸지만 당대의 사회 현실을 드러내는 작품도 남긴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영감과 열정을 주는 ‘뮤즈’였다.

소로야가 밝고 따뜻한 그림만 그렸던 건 아니다. 젊은 시절에는 잔혹했던 ‘정글 자본주의’ 시대의 사회 현실과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두었던 ‘사회적 사실주의’를 추구했다. 그런 작품 하나가 0층의 잘 보이는 공간에 걸려 있었다.

열차 3등 객실 같은 좁은 공간, 긴 나무의자, 쓰러져 잠든 젊은 여인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앉아 내려다보는 늙은 여자, 낡은 가방, 물건을 싼 보자기, 슬픔과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그림이었다. 제목은 <인신매매(Trata de blancas)>, 흑인 노예가 아니라 백인 여자들이라 ‘흰(blanca)’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 것이다. 소로야는 왜 젊은 시절 그렸던 그 작품을 끝까지 보관했을까? 사려는 이가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 작품을 거실에 걸고 남한테 자랑할 부자가 있었겠는가

소로야는 대중이 이해하고 좋아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 행복했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했다. 집도 그랬다. 적절히 놓아둔 탁자와 소파, 광택이 없는 나무 장식장,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법한 조각품, 벽장식, 집안의 나무 계단, 모든 것이 품격 있고 안온한 예술가의 일상을 보여주었다.

나는 행복한 남자와 사랑 넘치는 가족을 보았다. 덧없는 우리의 삶에서 그보다 더 귀한 것이 있겠는가.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기력을 탕진한 여행자에게 소로야 미술관을 권한다. ‘잠시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갈하게 가꾼 정원 벤치에 앉아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드리드는 권력의 힘으로 외부 자원을 끌어다 쓴다. 이베리아반도는 바다 가까운 곳일수록 기후가 순하고 식생이 다양하며 토질도 양호해서 인구밀도가 높다. 마드리드는 내륙 한가운데여서 산업이 발전하기 어려웠다.

로마 군대의 요새, 서고트 왕국의 수도, 이슬람 왕국의 군사기지, 레콩키스타 시대 까스띠야 왕국의 행정수도였던 똘레도에는 마드리드에 없는 모든 것이 있었다.

고대부터 철강업이 발달해 최고 품질의 칼과 갑옷을 생산했고, 기독교·이슬람·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오래된 성벽과 유대 예배당과 대성당이 있는 똘레도는 스페인 내전 시기 공화파의 거점이었던 탓에 집중 폭격을 당했고, 프랑코 정권이 날림 복구공사를 한 탓에 오래된 건축물들은 문화적 가치를 잃었다.

무엇보다 좌측 예배실 벽의 나무 장식이 대단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장면에 말이 아닌 소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가우디가 만든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탄생의 문 파사드 역시 그랬다. 화가들의 ‘예수탄생’ 그림에도 말과 소가 함께 나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말과 소를 한 우리에서 키웠던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좌측 예배실 벽의 나무 장식이 대단했다. 그런데 예수 탄생 장면에 말이 아닌 소가 있었다. 나중에 보니 가우디가 만든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탄생의 문 파사드 역시 그랬다. 화가들의 ‘예수탄생’ 그림에도 말과 소가 함께 나왔다. 중세 유럽에서는 말과 소를 한 우리에서 키웠던 게 아닌가 싶다.

엘 그레꼬는 ‘그리스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기나긴 본명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그는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한테 그림을 배웠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 펠리페 2세의 궁중 화가가 되어 주로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렸고 유럽 미술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엘 그레꼬는 말 그대로 ‘똘레도의 화가’였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버금간다고 하는 그 벽화를 보려고 가톨릭 순례자들은 긴 줄을 선다. 하지만 무신론자가 보기에는 크기만 할 뿐 특별할 건 없었다. 엘 그레꼬가 살았던 집 근처의 저택을 개조해 만든 박물관이 있었지만, 작품은 없다고 해서 들어가지 않았다.

공예품을 만드는 공방과 매장이 불을 밝히고 있어서 유대인지구라기보다는 무슬림 골목이라 하는 게 맞을 듯했다. 은실로 감싼 장식용 칼과 금속 세공품은 중동의 아부다비나 두바이 기념품 상점에서 본 것과 같았다.

왜 70킬로미터 떨어진 마드리드로 천도했는지 이해했다. 똘레도는 세 방향에 타호강의 급류가 흐르고 북쪽은 가파른 비탈이다. 외부의 공격을 막기에는 유리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강을 건너 도시를 확장할 수 없었다. I가 남서쪽의 제일 오래된 다리를 건너 맞은편 비탈의 호텔 레스토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똘레도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왕의 심정은 이랬을 것이다. ‘무슬림 세력을 완전 제압했고 왕권을 확고히 세웠으니 외부 침략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급류와 비탈에 둘러싸인 똘레도는 너무 답답해. 강이 흐르고 농사가 잘되고 넓은 평지가 있는 마드리드로 가자.’

경복궁·창덕궁·종묘가 없고 서촌·북촌·한양도성이 없는 서울을 상상해 보라. 마드리드는 그런 곳이다.

가끔 가는 우리 동네 스페인 식당의 음식값과 비교해 보니 확신이 들었다. ‘유럽 여행을 할 때는 역시 현지 음식이 답이군!’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마드리드의 ‘밤 생활’을 마음껏 즐기지는 못했지만, 플라멩코(flamenco) 공연과 재즈 카페는 예약을 해둔 터라 포기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는 플라멩코 공연을 하는 극장과 공연장이 여럿 있었다. 낮에는 미술관에 가야 해서 밤에 그랑비아 거리 뒤편 주택가의 상설 공연장에서 하는 정통 플라멩코 공연을 보았다. 마드리드 치안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있지만 시내 주택가의 밤거리는 조용했고 골목 식당들은 젊은이로 붐볐다.

공연 막바지에 흥에 취한 손님들이 춤을 추었다. 밴드 멤버들이 화답하면서 재즈 바는 놀이터가 되었다. 공연이 끝난 뒤 밴드 멤버들은 손님들과 와인 잔을 부딪치면서 사진 촬영에 응해 주었다. 런던에서도 뉴욕에서도 서울에서도 그런 재즈클럽은 본 적이 없다. ‘스페인 사람들이 한국 사람보다 더 잘 노나?’ 한 군데만 보고서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혹시 마드리드에 다시 간다면 다른 재즈 바에 가서 확인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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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도시에는 ‘관광 맛집’과 ‘현지 맛집’이 있다. E가 소개한 ‘현지 맛집’은 기본 반찬으로 염장 올리브와 볶은 치스또라(chistorra)를 내주었다. 치스또라는 바스끄 지역의 전통 소시지로 크기는 손가락만 한데 돼지고기·마늘·파프리카·파슬리 따위로 속을 채운 것이라 육향이 세고 짭짤해서 맥주 안주로 딱 좋다. - P-1

샐러드와 쇠고기 따빠(tapa)를 전식으로 맛보고 마드리드 대표 음식 꼬시도(cocido)에 적포도주를 곁들였다. 유대 음식에서 기원했다는 꼬시도는 ‘모둠 고기찜’이다. - P-1

한국 갈비찜과 닭백숙을 부대찌개에 넣어 졸이면 비슷한 맛이 날 것 같았다. 꼬시도는 한 번 맛보면 충분하다. 스페인에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다채로운 음식이 있는데 겨우 열흘 여행하면서 뭐 하러 같은 것을 자꾸 먹겠는가. - P-1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밥을 늦게 먹는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모두 밤 열 시에도 식당이 붐볐다. 마드리드 도착한 날 밤에 갔던 그랑비아 거리의 이름난 따빠 전문 식당에서는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한참 기다려 자리를 받았다 - P-1

점심을 먹으면서 스페인 사람들의 문화와 취향에 관해 물어보았더니 E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해외여행보다는 국내여행을 즐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가우디·미로·피카소도 좋아하지만 주로 나라 안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고야와 벨라스케스를 더 좋아한다.’ ‘지역마다 언어와 역사와 문화가 다른 것을 스페인의 장점으로 여긴다.’ 그런 점이 내 마음에 들었다. 남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가치 판단의 무게 중심을 자신의 내면에 두고 사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스페인 여행이 재미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P-1

왕들은 광장에서 결혼식이나 투우 행사를 열었고 죄 없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목매달고 불태우는 방식으로 민중을 지배하고 통제했다.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다. 한가운데 세운 왕의 기마상 말고는 광장이 권력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게 없다. 오늘의 마요르 광장은 먹고, 마시고,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민중의 생활공간이다. 얼마나 멋진 변화인가. - P-1

5세(Felipe V, 1683~1746)가 새 궁전을 지었다. 방이 2,800개 넘는 유럽 최대 궁전이라지만 베르사유와 달리 넓은 수로나 정원이나 숲이 없다. - P-1

합스부르크제국과 전쟁을 벌인 끝에 왕권을 지켜낸 이야기는 바르셀로나 편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짚어둔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펠리페 5세를 학살자로 여긴다. - P-1

벽과 천장 모두 중국풍 그림으로 장식한 흡연실이다. 왕실의 남자들도 담배를 피울 때만큼은 공식적 예술형식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거기서 담배를 피우면 맛이 두 배일 것 같았다. 여러 해 피우지 않았던 담배의 맛과 향이 떠올랐다. 사람은 기억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1

무슬림이 쳐들어왔을 때 성벽에 숨겼다가 수백 년이 지나 마드리드를 탈환한 후 다시 찾아냈다는 성모상이다. 이 ‘부활 서사’의 진위는 종교 설화가 다 그렇듯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어도 괜찮다. 종교는 논리가 아니라 믿음이다. 신심 깊은 신도들이 다 좋아하는데 뭐 하러 굳이 진위를 밝히려 애쓴다는 말인가. - P-1

고야가 궁정화가 자리를 얻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그 혁명은 극단적 공포정치를 거쳐 나폴레옹의 제정으로 흘렀고, 나폴레옹은 영국과 무역을 한 포르투갈을 응징하겠다며 스페인에 군대를 보냈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리스본이 아니라 마드리드를 점령해 왕과 왕세자를 감금했고 나폴레옹은 변호사인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 호세 보나빠르떼(José Bonaparte)로 세웠다. - P-1

스페인 왕과 가족이 프랑스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마드리드를 떠나 파리로 끌려간 1808년 5월 2일 스페인 민중이 들고일어났다.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무장 항쟁이 다른 도시로 퍼졌고 전국적 게릴라전으로 번져나갔다. - P-1

1813년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까지 이어졌던 그 싸움을 ‘스페인 독립전쟁’이라고 한다. 호세 왕은 종교재판을 폐지하고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는 등 사회개혁을 추진했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동생이 권력을 잃자 함께 몰락했다. - P-1

낮에는 ‘골든 트라이앵글’ 미술관을 보고, 점심과 저녁에는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고, 밤에는 플라멩코 공연장이나 재즈 바에서 놀면 된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만 마드리드를 여행할 수 있다면 MAN과 마드리드 역사 박물관 가운데 하나를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왕궁이나 대성당을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 P-1

14세기 종교화부터 20세기 팝아트까지 서양미술 전체를 아우르는데,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만 보여주어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았다. 지루하지 않다는 말이다. - P-1

티센(Thyssen)은 19세기에 큰 철강회사를 세운 독일 기업인의 이름이다. 정확하게 발음하면 ‘튀센’이지만 다들 티센이라고 하니 받아들인다. 철강기업 티센은 엔지니어링 회사 크룹(Krupp)과 합병해 ‘티센-크룹’이 되었다. 보르네미사(Bornemisza)는 헝가리 귀족 가문 이름이다. 창업자 아우구스트 티센의 아들 하인리히가 1906년 보르네미사 남작의 딸 마르기트와 혼인하자 아들이 없었던 남작이 사위를 양자로 삼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제프 황제는 귀족 작위를 주었다. 하인리히와 마르기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둘은 이혼했지만, 하인리히의 티센-보르네미사 남작 작위는 남았다. - P-1

미술관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해야 힘이 덜 든다. TB는 오래된 작품을 높은 층에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대순으로 감상하게 된다. 중세 종교화 일색인 2층 전시장을 최대한 빠르게 통과했는데 9번 방의 마테우스 슈바르츠 초상화들이 눈에 띄었다.

16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산을 관리했던 유럽 최강 금융업자의 회계사였다. 슈바르츠는 패션을 취미로 삼고 살았던 덕분에 의상 디자인의 선구자, 세계 최초의 패션 북 제작자, 아날로그 시대의 ‘파워 인플루언서’라는 평가를 얻었다.

TB는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허락하지 않는다. 프라도도 마찬가지다. 미술관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직접 찍은 사진을 책에 싣곤 했는데, 두 미술관은 어쩔 수 없이 온라인에서 구한 사진을 썼다. 관심 있는 독자는 홈페이지에 접속해 슈바르츠의 패션 초상화를 모두 감상하시기 바란다.

32번 전시실의 인물화도 기억에 남았다. 특히 사전트(J. S. Sargent, 1856~1925)의 그림 ‘베네치아의 양파 파는 여인(Vendedora veneciana de cebollas)’에서 아련한 슬픔을 느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사전트는 세계 주요 도시를 떠돌면서 주로 상류층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는데 거리에서 본 보통 사람을 그린 작품이 나는 더 좋았다.

마드리드 ‘예술의 정원’은 산책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학생이나 외교관이나 회사 주재원이라면 모를까, 단기 여행자는 행군하듯 걸어야 한다. 오전에는 TB에서 오후에는 프라도에서 걷다 서기를 반복했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거쳐 허리까지 고단함이 차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2백 년 역사를 가진 프라도는 보유한 예술품의 극히 일부인 1,700점만 전시하는데 공예품과 조각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화 작품이다. 기념사진은 허락하는 구역에서만 찍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작품을 육안으로 감상해야 한다.

‘피레네 서쪽은 아프리카’라는 말이 틀렸다고 해도 스페인의 산업과 정치가 서유럽에 뒤졌다는 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사는 형편이 나쁘면 문화와 예술도 뒤진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서유럽의 미술관 운영자들은 스페인 예술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프라도에서는 고야·벨라스케스·엘 그레꼬 같은 스페인 화가들을 눈여겨보았다. 스페인 예술이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나라 예술가의 작품을 빼고 살펴보라. 런던 내셔널 갤러리나 파리 루브르 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프라도를 능가한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원래는 제목이 없었지만,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아남아 <시녀들>이라는 이름을 얻은 작품에 벨라스케스는 공주·시녀·집사·광대·개와 자기 자신을 그렸다. 펠리페 4세 왕과 왕비는 화가 뒤편의 벽거울에 작고 희미하게 비칠 뿐이다. 천장이 높고 벽에 그림이 빼곡하게 걸린 것으로 보면 방은 화가의 작업실인 듯하다.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서 고야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살폈다. 고야는 아라곤의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라고사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보기 드문 재능을 드러냈고 마흔세 살에 왕의 부름을 받아 궁정으로 들어갔다. 일찍이 계몽사상을 학습해 프랑스대혁명의 이상에 공감했던 그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부제를 달아 성직자의 부패와 교회의 범죄를 비판하는 판화 작품집을 만들었다.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의 주권을 짓밟고 민중을 학살했다. 고야는 스페인 독립전쟁의 중요한 사건과 전투 장면을 그렸고 전쟁의 야만성과 민중의 고통을 알리는 판화를 제작했다. 영국과 손잡고 6년 동안 싸운 끝에 스페인은 프랑스 군대를 내쫓고 주권을 되찾았지만 고야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어둠의 그림들’을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판화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였다. 인간 본성에 대한 절망과 세상에 대한 환멸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극소수 권력자들이 종교의 권위로 인간을 억압하고 세속의 권력으로 민중을 착취하며 국가의 대의를 앞세워 대학살을 저지른 시대였다.

괴물이 깨어난 시대를 살았던 그는 괴물을 다시 잠재우려면 잠들어버린 인간의 이성이 눈을 떠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을 담은 그림으로 타인의 이성을 깨우려 했다. ‘어둠의 그림들’을 보면서 예술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예술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이라 하든, 괴물이 인간을 잡아먹었던 그 시대에 고야 같은 예술가 한 사람도 없었다면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궁정화가 고야밖에 모르면서 들어갔지만 예술가 고야와 철학자 고야를 마음에 담고 프라도를 나왔다. 프라도에서 한 ‘행군’은 넘치는 보상을 받았다. 뿌듯해서 남모르게 내 엉덩이를 툭 치며 혼자 말했다. ‘잘했어, 프라도는 고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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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3 -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리스본, 뽀르투 편 ㅣ 유럽 도시 기행 3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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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눈을 따라 다시 유럽의 도시를 걷다
― 『유럽도시기행 3』을 읽으며

나는 유시민의 글을 오래 읽어왔다. 학생운동가 출신으로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을 지냈고, 국회에 청바지를 입고 등장해 화제가 되던 시절부터 그의 직설적인 화법을 좋아했다. 자신의 생각을 에둘러 말하지 않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한때는 유시민이 자기 생각과 편견에 지나치게 갇혀 있다는 느낌을 받아 그의 글에서 조금 멀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다시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지금도 새 책이 나오면 거의 빠짐없이 읽고 있다. 좋아한다고 해서 모든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문장으로 풀어내는지는 늘 궁금하다.

『유럽도시기행』 1권과 2권도 처음에는 종이책으로 구입해 읽었다. 읽는 동안에는 충분히 재미있었지만, 책의 깊이가 아주 깊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한 번 읽은 뒤 계속 책장에 두고 자료처럼 다시 찾아볼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해 두 권 모두 중고로 팔았다. 그래서 3권이 나왔을 때는 종이책 대신 전자책을 기다렸다가 구입했다. 어차피 앞선 두 권도 책장에 남아 있지 않았고, 요즘은 전자책이 필요한 단어나 지명을 검색하기에도 훨씬 편하다.

그렇다고 내가 유시민의 책을 소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비롯해『경제학 카페』,『청춘의 독서』등 예전에 나온 그의 책들은 대부분 종이책으로 가지고 있다. 유시민을 오래 좋아해왔고, 그의 책 역시 적지 않게 읽고 모았다. 다만 최근에 나온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럽도시기행』처럼 책에 따라서는 읽고 난 뒤의 활용도와 소장 가치를 따져 종이책으로 남길지 전자책으로 읽을지를 달리 선택하고 있다.(얘네들은 중고책으로 팔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정수일 교수의 책은 처음부터 종이책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두 분의 책은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다시 펼쳐보게 되는 자료의 성격이 강하다. 책꽂이에 권별로 나란히 꽂혀 있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크고, 이미 종이책으로 모으기 시작한 시리즈를 계속 채워가는 맛도 있다.

물론 책을 모으는 즐거움과 출판 방식에 대한 평가는 별개의 문제다. 유홍준의 일본 답사기 5권이 나왔을 때 나는 새로운 내용인 줄 알고 목차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덥석 구입했다. 그러나 막상 받아보니 앞서 나온 3권과 4권의 교토 관련 내용을 발췌해 작은 판형으로 다시 엮은 책이었다. 기존 내용을 재구성한 책이라는 사실을 독자가 분명히 알 수 있게 밝혔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일로 한동안 유홍준과 창비출판사를 사기꾼이라 마음속으로 욕하며 살기도 했다. 반면 제주편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권의 표지만 바꿔 낸 감귤 에디션은 기존 7권과 같은 내용이라고 미리 알렸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도 소장용으로 다시 샀다. 같은 책을 또 사는 것은 독자의 선택이지만, 같은 책인지 모르고 또 사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유럽도시기행 3』을 읽기 시작하며 알라딘 북플에 올라온 여러 독자의 리뷰도 읽어보았다. 생각보다 악평이 많았다. 저자가 짧은 기간 동안 유명 관광지만 둘러봤다는 지적, 현지인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는 지적, 역사 설명이 인터넷 검색 수준이라는 비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지나치게 많이 담았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일부 지적에는 공감할 만한 부분도 있었다. 나 역시 이 시리즈가 깊이 있는 역사서나 장기 체류형 여행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가치까지 낮게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는 애초에 이 책에서 현지인의 삶을 깊이 취재한 기록이나 새로운 역사 연구의 성과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유시민의 눈을 따라 도시를 바라보고, 그가 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함께 따라가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는 이유였다.

사람마다 여행하는 방식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골목과 시장을 찾아다니고, 누군가는 현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긴다. 또 누군가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중심으로 여행하고, 누군가는 역사 유적을 따라 도시를 걷는다. 어느 하나만이 올바른 여행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행기를 쓰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저마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록한다.

김용택의 시를 읽으며 왜 섬진강과 시골 이야기만 하느냐고 말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그것이 바로 김용택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시민의 책을 읽으며 왜 역사와 정치 이야기를 하느냐고 비판하는 것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원래 역사와 정치, 국가와 시민사회의 문제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 관점이 지나치게 반복되어 도시 자체가 가려졌는지를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정치 이야기가 들어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책의 단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유시민이라는 저자의 개성에 가깝다.

물론 저자의 개성과 책의 완성도는 별개의 문제다. 『유럽도시기행』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나 정수일 교수의 문명교류 관련 저술처럼 한 장소와 문명을 깊고 촘촘하게 파고드는 책은 아니다. 깊이에서는 분명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이 책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유럽을 공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시민이라는 한 사람이 바라본 유럽을 함께 걸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에게 모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유홍준에게서는 문화유산을 바라보는 안목을 얻고, 정수일 교수에게서는 문명이 만나고 이동한 길을 배운다. 유시민에게서는 그가 바라본 역사와 도시의 풍경을 만난다. 작가마다 걷는 길이 다르고, 독자는 그 길 가운데 자신이 가보고 싶은 길을 함께 걸으면 된다. 자기 취향과 맞지 않는 길이라면 다른 책을 읽으면 된다. 모든 여행기가 모든 독자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아직 『유럽도시기행 3』을 읽는 초반이지만, 지금까지의 느낌은 앞선 두 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깊고 방대한 역사서를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유시민이라는 한 사람의 시선을 따라 유럽의 도시를 함께 걷는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나는 그의 판단에 모두 동의하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한 사람의 시선을 빌려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히 즐거운 독서다.

여행에는 정답이 없고, 여행기에도 하나의 정답은 없다. 유홍준의 답사와 유시민의 도시기행은 애초에 출발점이 다르다. 바로 그 차이 때문에 여러 작가의 여행기를 읽는 재미가 생긴다. 『유럽도시기행 3』은 깊고 묵직한 자료집은 아닐지라도, 유시민의 눈으로 도시의 역사와 풍경을 함께 바라보게 해주는 책이다. 나는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하나씩 비교해보고 싶다.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읽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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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 이베리아반도의 마드리드·바르셀로나·리스본·뽀르투를 다녀왔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유럽의 변방이었으나 15세기 대항해 시대의 문을 열어 문명사의 진로를 크게 바꾸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를 이루고 유럽연합 회원국이 되었지만, 경제와 정치 등 여러 면에서 이웃 나라들보다 뒤처져 있다.

이번 『유럽도시기행 3』의 도시에서는 지금 거기 사는 사람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다.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반드시 보아야 할 대상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전보다 ‘놀러 다닌 이야기‘가 많아졌다.

지금까지 다녀본 도시 중에 고르라면 이번 『유럽도시기행 3』의 도시 가운데 하나를 뽑겠다. 체류 기간이 한 달이 넘는다면 바르셀로나, 보름 정도면 리스본, 열흘 이내라면 뽀르투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재미난 곳은 바르셀로나, 제일 독특한 도시는 뽀르투였다.

무엇보다도 역사와 문화양식의 차이가 분명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이베리아반도는 8세기 이후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에 속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기독교인들이 무슬림 세력을 몰아내고 땅을 되찾았지만, 언어와 건축과 예술 등 문화의 모든 영역에 이슬람의 흔적이 남았다. 피레네산맥 동쪽의 유럽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도 소문만큼 치안이 나쁘지는 않았고, 리스본과 뽀르투는 긴장을 풀고 다녀도 괜찮았다.

마드리드 사람은 스페인어를 쓴다. 스페인어는 최초의 통일 왕국을 이루어 낸 까스띠야 왕국의 언어인 ‘까스떼야노‘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까딸루냐말인 ‘까딸란‘이 제1공용어이고 스페인어는 제2 공용어다. 리스본과 뽀르투 사람은 다 포르투갈어를 쓴다. 세 언어 모두 경음이 흔하다. ‘c‘는 ‘‘이나 ‘ㅆ‘, ‘t‘는 ‘ㄷㄸ‘, ‘p‘는 ‘ㅂ‘ 소리가 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국립국어원 규칙에따르면 ‘c’는 ‘ㅋ‘이나 ‘ㅅ‘, ‘t‘는 ‘ㅌ‘, ‘p‘는 ‘ㅍ‘으로 적어야 한다. 뜻을 전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듣는 맛이 크게 달라진다.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을 무시하기로 결심한 것은 문어 때문이었다. 문어는 스페인어로 ‘뿔뽀(pulpo)‘, 포르투갈어로 ‘뽈보(polvo)‘인데 우리는 여행을 다니며 줄곧 이탈리아어 ‘뽈뽀(polpo)‘를 썼다. 무슨 차이가 있냐고? ‘뿔뽀, ‘뽈보‘, ‘뽈뽀‘는 쫄깃한 식감을 전해 주지만 ‘풀포‘, ‘폴보‘, ‘폴포‘는 그렇지 않다. 축 늘어져 맛이 없는 것 같다. ‘따빠(tapa)‘와 ‘삔초(pincho)‘도 마찬가지다. ‘타파‘와 ‘핀초‘는 맛이 없는 소리다. 쎄비체(cebiche)와 ‘깔라마리(calamari)‘도 그렇다. ‘세비체‘나 ‘칼라마리‘라고 하면 입안에 군침이 돌지 않는다.

이왕이면 제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음식 이름뿐 아니라 사람과 지역 등 고유명사도 현지 발음에 가깝게 적었다. 다만 널리알려진 단어는 국립국어원 표기법을 따랐다. 예컨대 피카소,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것이다.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봐. 걸음을 아예 멈추면 더 좋아. 가까이 있는데도 몰랐던 소중한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

이미 지나간 것과 돌이킬 방법이 없는 일은 잊고, 영원한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을 접고, 내일에 대한 근심을 던져버리고, 지금 여기에 집중해 봐. 오늘, 이 순간을 즐겨.

피낯선 도시의 새로운 길을 걸으며, 가슴을 열고 다른 사람들을 껴안아 봐. 삶은 길 위에 있는지도 몰라.‘ 독자들도 그런 환청을 듣게 되기를 바란다.

공항에서 만난 스페인 민주주의
공항에서 만난 스페인 민주주의2026.08.05인천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열여섯 시간 걸려 ‘아돌포 수아레스 마드리드-바라하스 공항‘에 안착했다. 북한 영공을 우회하고 우크라이나 상공을 피하느라 항로가 예전보다 길어졌다.

‘바라하스(Barajas)‘는 공항이 있는 마드리드 외곽의 동네 이름이라 특별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아돌포 수아레스(AdolfoSuárez, 1932~2014)‘라는 이름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화폐에 조선시대 사람들을 넣었고 광화문에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웠으나 인천 공항에는 아예 사람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후 인물에 대해서는 소위 ‘국민적 합의‘라는 걸 이루지 못해서 어디에도 넣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이 살짝 부러웠다.

프랑스 파리에는 샤를 드골 공항, 미국 뉴욕에는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이 있다. 스페인 국민에게는 수아레스가 그런 의미를 가진사람이다

독재자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철권통치를 시행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18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장기독재였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더했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냉전의 예고편이었다. 20세기의 모든 이념이 충돌해 참혹한 비극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공화정을 폐지하고 바르셀로나 백작의 어린 아들 후안 카를로스(Juan Carlos, 1938~)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즉위하지 못하게 했다.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등에 업고 군대의 폭력을 동원해 무한 권력을 휘두르면서 학살·언론탄압·인신매매 등의 악행을 저질렀던그는 1975년 노환으로 죽었다.

수아레스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리를 지키면서 총을 난사하는 군인들을 꾸짖었다. 카메라가 그 광경을 포착해 국민에게 보여주자, 비난 여론이 폭발했다.

사람 사는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 스페인 민주화는 그런 일의 연속이었다.

사회의 역사는 모순과 역설로 가득하다.

정식 국호가 에스파냐 왕국(Reino de Espana)인 스페인은 유럽연합 회원국이고 유로를 화폐로 쓴다. 국토가 한국보다 다섯배 넓지만, 인구는 5천만 명 정도로 거의 같으며, 평균수명과 1인당 국민소득도 큰 차이가 없다.

한국과 다른 점도 많다. 무엇보다도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것 같지 않다. 국민 열 명 가운데 여섯 정도는 가톨릭 신도이다. 스페인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개신교 세력이 미약하다. 가장 뚜렷한 문화적 특징은 언어·건축·음악·미술·공예 등 거의 모든 영역에 남은 이슬람의 흔적이다.

피스페인은 피레네산맥을 경계로 프랑스와 나뉘는데, 산맥 동쪽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베리아반도를 ‘아프리카‘로 취급했다.

스페인은 택시 요금이 싼 편이다. 파리나 런던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느낌으로는 서울 택시 요금과 비슷했다.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요금이 더 저렴했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이번처럼 자주 택시를 탄 적은 없었다.

마드리드도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미술관과 공연장뿐만 아니라 식당과 술집도 시간을 정해 입장권을 예매해야 하는 곳이 많았다.

콜론은 유럽인으로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콜럼버스의 스페인 이름이고 세라노 공작은 이사벨 2세의 외무장관이었다

한때 여왕의 연인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던 그는 1868년 자유주의 혁명군을 이끌고 정부를 공격해 여왕을 프랑스로 쫓아내고 공화정을 세웠다. 군부의 공격에 금방 무너져 왕정복고를 허용했지만, 그 정부는 스페인 최초의 공화정으로 큰 역사적 의미를 남겼다.

스페인에 건국 신화가 없는 이유를 MAN에서 이해했다. 땅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통일국가를 뒤늦게 형성했으니 어찌 건국 신화가 있겠는가. MAN이 자랑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스페인 땅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스페인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벽화를 그린 이가 호모 사피엔스인지 크로마뇽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스페인에 건국 신화가 없는 이유를 MAN에서 이해했다. 땅의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고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가 달랐으며 통일국가를 뒤늦게 형성했으니 어찌 건국 신화가 있겠는가. MAN이 자랑하는 알타미라 동굴벽화도 스페인 땅에 있다는 사실 말고는 스페인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벽화를 그린 이가 호모 사피엔스인지 크로마뇽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이베리아‘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는 최초의 인간 집단 ‘이베로‘ 부족은 3,600여 년 전 아프리카에서 바다를 건너거나 해변을걸어서 들어왔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철기를 들고 남하한 셀따(켈트)족이 이베로 부족과 결합해 오늘의 스페인 사람과 관련이있는 셀띠베로(celtibero) 부족을 형성했다.

피서로마제국이 무너진 5세기 이후에는 게르만의 일파인 서고트족이 토착민과 손잡고 똘레도에 왕국을 세웠다.

이베리아반도는 8세기에 큰 변화를 맞았다. 유럽인들이 ‘무어인‘ 또는 ‘베르베르인‘이라고도 했던 북아프리카 무슬림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부 해안의 극히 일부를 제외한 반도 전역을 점령했다

기독교인들은 북부 산악지역에서 최초의 저항군을 조직한 후 7백 년 동안 싸운 끝에 무슬림을 축출하고 땅을 되찾았다.

그 과정을 가리키는 ‘레콩키스타’는 그들이 만든 말이다. 보통 ‘재정복(再征服)‘이라 번역하는데 ‘수복(收復)‘ 또는 ‘탈환(奪還)‘으로 이해하면 된다.

스페인은 1479년 까스띠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연합 왕국 창설을 계기로 통합을 향해 나아갔다

중세 유럽의 왕족들은 혼인을 비즈니스로 여겼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혼인도 그랬는데 경위가 특이했다. 왕위 계승권을 빼앗길 위험에 직면해 있었던 둘은 권력 공유에 합의하고 1469년 마드리드 북쪽 바야돌리드에서 남몰래 혼인했으며, 숱한 위기를 이겨내고 십 년을 버틴 끝에 왕좌에 올라 ‘에스파냐 왕국‘을 창설하고 ‘공동왕‘으로서 각자의 영토를 다스렸다.

이사벨 1세는 콜럼버스의 대서양 신항로 개척을 지원했고 광대한 해외 영토를 확보했다. 에르난 꼬르테스와 프란시스꼬 삐사로가 총과 균으로 멕시코의 아스테카 문명과 페루의 잉카제국을 무참히 파괴한 뒤 남아메리카의 대부분을 식민지로 삼았다.

자녀는 모두 이웃 나라 왕가와 정략결혼했는데 큰딸 이사벨은 아이를 낳다가 죽었고 아들 후안은 병으로 죽었다. 셋째 딸 마리아는 형부였던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혼인했고 막내딸 캐서린은 영국 헨리 8세의 아내가 되었다.

정말 가치있는 예술품인지 의심하는 내게 ‘엘체의 여인‘은 이렇게 말했다. ‘문화재와 예술품의 가치는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야. 대중이 좋아하면 가치가 생기는 거야.‘

‘아름다움‘의 실체는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대상 자체인가, 아니면 대상을 포착하는 인간의 감각인가?

‘스페인이 무엇인지 묻지 마.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의 모든 도시에서 네가 보고 겪고 마주치는 것을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스페인 땅에 있는 모든 것, 스페인 사람이 가진 모든 것, 그게 스페인이거든!

바르셀로나에 이사벨-페르난도 공동왕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은 ‘왕의 광장‘ 하나뿐이었다. 안달루시아나 바스끄 지역도 크게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한다.

무엇이 스페인 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걸까?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지만 굳이 찾자면 축구와 음식 정도일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스페인은 식당마다 음식 맛이 달랐다. 이름이 같은 음식도 재료와 조리법이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커피는 그렇지 않았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모든 면에서 달랐지만, 커피 맛만큼은 같았다.

꼬르따도는 ‘끊는다’는 뜻인데, ‘따’에 악센트를 넣고 길게 소리를 낸다. 서둘러 우유를 끊으면 꼬르따도가 되고 여유 있게 끊으면 플랫 화이트에 가까워진다. 잔이 작아서 카페라테 수준까지 우유를 넣을 수는 없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어디서나 아메리카노·카페라테·카푸치노를 주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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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날 - 사라져 가는 순간의 기억들
이흥재 사진, 김용택.안도현 글 / 시공아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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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라지는 것은 장터만이 아니었다

갈담장이든 웅천장이든 장터가 쇠퇴한 이유는 시장의 경쟁력이 약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장터를 찾던 사람들이 먼저 고향을 떠났고,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 장터의 활기도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 집만 보더라도 형제들은 대전과 서울, 대천으로 흩어졌고, 사촌들 역시 모두 학업과 직장을 따라 도회지로 떠났다. 부모 세대도 이제 고향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 형제분들 가운데 셋째아버지 내외분은 모두 세상을 떠나셨고, 넷째아버지 내외분과 어머니는 대천으로 옮겨 사신다. 지금 웅천 성동리에 남아 계신 분은 둘째아버지 내외분뿐이다. 자녀 세대가 떠난 뒤에도 고향을 지키던 부모 세대마저 하나둘 사라지거나 생활이 편리한 도시로 옮겨가면서, 마을은 두 세대에 걸쳐 비어 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집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 농촌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성동리는 1리, 2리, 3리로 나뉘어 있었고, 우리가 살던 성동1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같은 동네 동갑내기 친구가 나를 포함해 여덟 명이나 있었다. 그중 다섯 명은 어려서부터 함께 뛰놀던 불알친구였고, 나머지 세 명은 안불알 친구들이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아이들 웃음소리만큼은 어느 곳에도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모두 고향을 떠났다. 둘째집 사촌여동생은 성동1리의 마지막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 아이가 졸업한 뒤에는 마을에서 더 이상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한 아이의 졸업은 학생 한 명이 줄어든 일이 아니라, 마을의 다음 세대가 거기서 멈추었다는 뜻이었다.

인구가 줄어들면 학교가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면 아이들이 떠난다. 아이들이 떠나면 장터도, 가게도, 마을도 조금씩 활기를 잃는다. 빈집이 늘어나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오르지 않으며, 저녁 무렵 골목을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어느새 기억 속으로만 남게 된다. 농촌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목소리와 발자국, 집집마다 밝혀지던 불빛을 하나씩 잃어가며 아주 천천히 비어 간다.

과거의 인구와 장터의 활기를 다시 그대로 되돌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길을 걸어 장을 보러 다녔는지, 어떤 풍경 속에서 서로의 삶을 나누었는지는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기록은 사라짐을 막지는 못하지만, 사라진 삶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잊히는 일은 막아준다.

이번 비교를 통해 확인한 것은 갈담장이 크냐, 웅천장이 크냐가 아니었다. 숫자로는 장세를 비교할 수 있었지만, 숫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삶과 기억이 장터 안에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다. 갈담장과 웅천장을 돌아보는 일은 결국 장터의 크기를 따지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장터를 중심으로 살아온 사람들과, 그들이 떠난 뒤 조용해진 마을을 함께 돌아보는 일이다.

성동리 골목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에 한때 여덟 명의 동갑내기가 함께 뛰놀았고, 여러 집의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수많은 사람들이 장날을 기다리며 살아갔다는 사실만은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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