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도시에는 ‘관광 맛집’과 ‘현지 맛집’이 있다. E가 소개한 ‘현지 맛집’은 기본 반찬으로 염장 올리브와 볶은 치스또라(chistorra)를 내주었다. 치스또라는 바스끄 지역의 전통 소시지로 크기는 손가락만 한데 돼지고기·마늘·파프리카·파슬리 따위로 속을 채운 것이라 육향이 세고 짭짤해서 맥주 안주로 딱 좋다. - P-1
샐러드와 쇠고기 따빠(tapa)를 전식으로 맛보고 마드리드 대표 음식 꼬시도(cocido)에 적포도주를 곁들였다. 유대 음식에서 기원했다는 꼬시도는 ‘모둠 고기찜’이다. - P-1
한국 갈비찜과 닭백숙을 부대찌개에 넣어 졸이면 비슷한 맛이 날 것 같았다. 꼬시도는 한 번 맛보면 충분하다. 스페인에는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다채로운 음식이 있는데 겨우 열흘 여행하면서 뭐 하러 같은 것을 자꾸 먹겠는가. - P-1
스페인 사람들은 저녁밥을 늦게 먹는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모두 밤 열 시에도 식당이 붐볐다. 마드리드 도착한 날 밤에 갔던 그랑비아 거리의 이름난 따빠 전문 식당에서는 밤 아홉 시가 넘었는데도 한참 기다려 자리를 받았다 - P-1
점심을 먹으면서 스페인 사람들의 문화와 취향에 관해 물어보았더니 E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해외여행보다는 국내여행을 즐긴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가우디·미로·피카소도 좋아하지만 주로 나라 안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고야와 벨라스케스를 더 좋아한다.’ ‘지역마다 언어와 역사와 문화가 다른 것을 스페인의 장점으로 여긴다.’ 그런 점이 내 마음에 들었다. 남의 눈을 의식하기보다는 가치 판단의 무게 중심을 자신의 내면에 두고 사는 사람을 나는 좋아한다. 스페인 여행이 재미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P-1
왕들은 광장에서 결혼식이나 투우 행사를 열었고 죄 없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목매달고 불태우는 방식으로 민중을 지배하고 통제했다. 하지만 다 지나간 일이다. 한가운데 세운 왕의 기마상 말고는 광장이 권력의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게 없다. 오늘의 마요르 광장은 먹고, 마시고,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민중의 생활공간이다. 얼마나 멋진 변화인가. - P-1
5세(Felipe V, 1683~1746)가 새 궁전을 지었다. 방이 2,800개 넘는 유럽 최대 궁전이라지만 베르사유와 달리 넓은 수로나 정원이나 숲이 없다. - P-1
합스부르크제국과 전쟁을 벌인 끝에 왕권을 지켜낸 이야기는 바르셀로나 편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한 가지만 짚어둔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펠리페 5세를 학살자로 여긴다. - P-1
벽과 천장 모두 중국풍 그림으로 장식한 흡연실이다. 왕실의 남자들도 담배를 피울 때만큼은 공식적 예술형식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거기서 담배를 피우면 맛이 두 배일 것 같았다. 여러 해 피우지 않았던 담배의 맛과 향이 떠올랐다. 사람은 기억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1
무슬림이 쳐들어왔을 때 성벽에 숨겼다가 수백 년이 지나 마드리드를 탈환한 후 다시 찾아냈다는 성모상이다. 이 ‘부활 서사’의 진위는 종교 설화가 다 그렇듯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어도 괜찮다. 종교는 논리가 아니라 믿음이다. 신심 깊은 신도들이 다 좋아하는데 뭐 하러 굳이 진위를 밝히려 애쓴다는 말인가. - P-1
고야가 궁정화가 자리를 얻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그 혁명은 극단적 공포정치를 거쳐 나폴레옹의 제정으로 흘렀고, 나폴레옹은 영국과 무역을 한 포르투갈을 응징하겠다며 스페인에 군대를 보냈다. 그런데 프랑스군은 리스본이 아니라 마드리드를 점령해 왕과 왕세자를 감금했고 나폴레옹은 변호사인 형 조제프를 스페인 왕 호세 보나빠르떼(José Bonaparte)로 세웠다. - P-1
스페인 왕과 가족이 프랑스 군인들의 감시를 받으며 마드리드를 떠나 파리로 끌려간 1808년 5월 2일 스페인 민중이 들고일어났다.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무장 항쟁이 다른 도시로 퍼졌고 전국적 게릴라전으로 번져나갔다. - P-1
1813년 프랑스군이 철수할 때까지 이어졌던 그 싸움을 ‘스페인 독립전쟁’이라고 한다. 호세 왕은 종교재판을 폐지하고 귀족의 특권을 제한하는 등 사회개혁을 추진했지만,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동생이 권력을 잃자 함께 몰락했다. - P-1
낮에는 ‘골든 트라이앵글’ 미술관을 보고, 점심과 저녁에는 맛있는 음식과 술을 즐기고, 밤에는 플라멩코 공연장이나 재즈 바에서 놀면 된다. 하지만 평생 단 한 번만 마드리드를 여행할 수 있다면 MAN과 마드리드 역사 박물관 가운데 하나를 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왕궁이나 대성당을 보는 것보다는 낫다고 본다. - P-1
14세기 종교화부터 20세기 팝아트까지 서양미술 전체를 아우르는데, 한 번쯤 이름을 들어본 예술가들의 작품을 한두 점씩만 보여주어서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았다. 지루하지 않다는 말이다. - P-1
티센(Thyssen)은 19세기에 큰 철강회사를 세운 독일 기업인의 이름이다. 정확하게 발음하면 ‘튀센’이지만 다들 티센이라고 하니 받아들인다. 철강기업 티센은 엔지니어링 회사 크룹(Krupp)과 합병해 ‘티센-크룹’이 되었다. 보르네미사(Bornemisza)는 헝가리 귀족 가문 이름이다. 창업자 아우구스트 티센의 아들 하인리히가 1906년 보르네미사 남작의 딸 마르기트와 혼인하자 아들이 없었던 남작이 사위를 양자로 삼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요제프 황제는 귀족 작위를 주었다. 하인리히와 마르기트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후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둘은 이혼했지만, 하인리히의 티센-보르네미사 남작 작위는 남았다. - P-1
미술관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관람해야 힘이 덜 든다. TB는 오래된 작품을 높은 층에 두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시대순으로 감상하게 된다. 중세 종교화 일색인 2층 전시장을 최대한 빠르게 통과했는데 9번 방의 마테우스 슈바르츠 초상화들이 눈에 띄었다.
16세기 초 합스부르크 왕가의 자산을 관리했던 유럽 최강 금융업자의 회계사였다. 슈바르츠는 패션을 취미로 삼고 살았던 덕분에 의상 디자인의 선구자, 세계 최초의 패션 북 제작자, 아날로그 시대의 ‘파워 인플루언서’라는 평가를 얻었다.
TB는 사진이나 영상 촬영을 허락하지 않는다. 프라도도 마찬가지다. 미술관 분위기를 전달하려고 직접 찍은 사진을 책에 싣곤 했는데, 두 미술관은 어쩔 수 없이 온라인에서 구한 사진을 썼다. 관심 있는 독자는 홈페이지에 접속해 슈바르츠의 패션 초상화를 모두 감상하시기 바란다.
32번 전시실의 인물화도 기억에 남았다. 특히 사전트(J. S. Sargent, 1856~1925)의 그림 ‘베네치아의 양파 파는 여인(Vendedora veneciana de cebollas)’에서 아련한 슬픔을 느꼈다. 피렌체에서 태어난 사전트는 세계 주요 도시를 떠돌면서 주로 상류층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는데 거리에서 본 보통 사람을 그린 작품이 나는 더 좋았다.
마드리드 ‘예술의 정원’은 산책을 허락하지 않는다. 유학생이나 외교관이나 회사 주재원이라면 모를까, 단기 여행자는 행군하듯 걸어야 한다. 오전에는 TB에서 오후에는 프라도에서 걷다 서기를 반복했다. 종아리와 허벅지를 거쳐 허리까지 고단함이 차올랐지만 어쩔 수 없었다.
2백 년 역사를 가진 프라도는 보유한 예술품의 극히 일부인 1,700점만 전시하는데 공예품과 조각도 있지만 대부분은 회화 작품이다. 기념사진은 허락하는 구역에서만 찍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작품을 육안으로 감상해야 한다.
‘피레네 서쪽은 아프리카’라는 말이 틀렸다고 해도 스페인의 산업과 정치가 서유럽에 뒤졌다는 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사는 형편이 나쁘면 문화와 예술도 뒤진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서유럽의 미술관 운영자들은 스페인 예술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프라도에서는 고야·벨라스케스·엘 그레꼬 같은 스페인 화가들을 눈여겨보았다. 스페인 예술이 부당하게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나라 예술가의 작품을 빼고 살펴보라. 런던 내셔널 갤러리나 파리 루브르 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프라도를 능가한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원래는 제목이 없었지만,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살아남아 <시녀들>이라는 이름을 얻은 작품에 벨라스케스는 공주·시녀·집사·광대·개와 자기 자신을 그렸다. 펠리페 4세 왕과 왕비는 화가 뒤편의 벽거울에 작고 희미하게 비칠 뿐이다. 천장이 높고 벽에 그림이 빼곡하게 걸린 것으로 보면 방은 화가의 작업실인 듯하다.
무슨 말인지 알고 싶어서 고야의 인생이 어떠했는지 살폈다. 고야는 아라곤의 시골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라고사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보기 드문 재능을 드러냈고 마흔세 살에 왕의 부름을 받아 궁정으로 들어갔다. 일찍이 계몽사상을 학습해 프랑스대혁명의 이상에 공감했던 그는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부제를 달아 성직자의 부패와 교회의 범죄를 비판하는 판화 작품집을 만들었다.
스페인을 점령한 프랑스 군대는 스페인의 주권을 짓밟고 민중을 학살했다. 고야는 스페인 독립전쟁의 중요한 사건과 전투 장면을 그렸고 전쟁의 야만성과 민중의 고통을 알리는 판화를 제작했다. 영국과 손잡고 6년 동안 싸운 끝에 스페인은 프랑스 군대를 내쫓고 주권을 되찾았지만 고야는 왕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어둠의 그림들’을 전쟁의 참상을 묘사한 판화와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였다. 인간 본성에 대한 절망과 세상에 대한 환멸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극소수 권력자들이 종교의 권위로 인간을 억압하고 세속의 권력으로 민중을 착취하며 국가의 대의를 앞세워 대학살을 저지른 시대였다.
괴물이 깨어난 시대를 살았던 그는 괴물을 다시 잠재우려면 잠들어버린 인간의 이성이 눈을 떠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생각을 담은 그림으로 타인의 이성을 깨우려 했다. ‘어둠의 그림들’을 보면서 예술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예술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무엇이라 하든, 괴물이 인간을 잡아먹었던 그 시대에 고야 같은 예술가 한 사람도 없었다면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는 궁정화가 고야밖에 모르면서 들어갔지만 예술가 고야와 철학자 고야를 마음에 담고 프라도를 나왔다. 프라도에서 한 ‘행군’은 넘치는 보상을 받았다. 뿌듯해서 남모르게 내 엉덩이를 툭 치며 혼자 말했다. ‘잘했어, 프라도는 고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