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지붕인 알프스 여러 산들 중, 그 최고봉은 몽블랑 MontBlanc, 4,807m이다. 우리의 백두산(白山. 2,744m과 이름이 같다. 둘 다 ‘하얀Blanc 머리의 산Mont‘이다.  만년설이나 부석으로 정상 봉우리가사시사철 하얗게 보이는 데서 유래한다. - P10

‘알프스 등반‘을 뜻하는 ‘알피니즘Alpinism‘이란 용어는 두 사람이 몽블랑 정상을 밟은 1786년 어느 여름날부터 ‘고산 등반‘을 뜻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넓어졌다. 이후, 세상의 설산들은 인류에게두려움과 신비의 대상이 아닌 도전과 탐험의 영역으로 바뀌었다. - P10

십 일간의 트레킹은 프랑스 이틀, 이탈리아 사흘, 스위스 사흘그리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이틀, 이런 식으로 이어지며 이 책 열개의 장을 순차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프랑스 남동쪽 샤모니 인근레우슈에서 시작해 레우슈에서 끝나는, 총 거리 170킬로미터의 원점회귀 순환길이다. 나라와 나라의 오래된 길들이 하나의 길로 이어지며, 산과 산이 계곡과 산골마을들로 연결되다가 결국은 처음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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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남산 투어‘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출발지는 명동역이다.
반민특위 터-나석주 의거지 - 이회영 거주지 이재명 의거지-남산 예장공원-김익상 의거지 조선총독부 터 - 노기 신사터-경성신사 터 - 남산 중앙정보부 - 국치 현장- 와룡묘- 조선신궁터 - 안중근 장군 동상 - 안중근 기념관 - 백범 동상 - 성재동상 - 조선신궁 계단 - 서울역 강우규 의거지 - P278

최근에는 ‘명동-종로 의열독립투쟁 투어‘를 주제로 새로운 코스도 만들었다. 명동 코스는 기존 코스와 같고, 이재명 의사 의거지 방문 후 남산대신 방향을 바꿔 종로로 향하는데, 코스는 다음과 같다.
반민특위터 - 나석주 의거지 - 이회영 거주지 이재명 의거지(종로로 이동) - 김상옥 의거지 -3.1독립선언서 인쇄소 터 수송공원-신흥대학 창립지 - 태화관 - 신채호 부인 박자혜 지사 운영산파소 터 -3.1혁명 발상지 탑골공원 - 종묘공원 이상재 지사 동상 - 김상옥로 - 김상옥 최후의 격전지 - 마로니에 공원 김상옥 의사상 - P278

양 손에 안중근 장군과 윤봉길 의사 배지를 각각 쥔 채 가만히 서서 참배 행렬을 바라보자니, 야스쿠니 신사에 잠들고 싶다고 말했던 국가공인친일파 신태영이 떠올랐다. 그는 바라던 이곳 대신 대한민국 최고의 명당인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 P279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장군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께 하얼빈역 승차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쐈다. 안중근 장군의 간절함과 운이 닿아 의거는 성공했다. - P289

그날 오전 9시께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멈췄다. 이토는러시아 재무대신 코코체프와 약 25분간 대화를 나눈 뒤, 의장대 사열하고 각국 사절단의 인사를 받았다. 러시아군 의장대 뒤에서 대기하던 안장군은 의장대 사이로 나와 품속에 있던 브라우닝 권총을 꺼내 열 발자국 거리 앞에 있는 이토를 향해 조준하고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이토의 팔을뚫어 가슴에 도달했고 안 장군은 두 발을 추가로 발포했다. 이토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 장군은 혹여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중 하얼빈 총영사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혔다.
의거에 성공했다고 생각한 안 장군은 러시아 군인에 의해 붙잡히는 가운데 "코레아 우라!"를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다. - P-1

안중근 장군이 밝힌 이토를 죽인 이유는 15가지다. 1. 대한제국민 황후를 시해한 죄 2. 대한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을사늑약과 정미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 5. 국권을 강탈한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게 한 죄 8.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대한인들의 외국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불태운 죄 12. 대한인이 스스로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대한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위로 일왕을 속인 죄 14. 동양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왕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 P290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일이니 나를 사형 피고로 다루어서는 안 되며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하시오." - P290

지사들의 삶을 돌아볼 때마다 반복적으로 드는 생각은 하나다. 과연 나는 지사님들처럼 싸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 생각의 정점에 자리한 인물이 바로 후세 다쓰지다. 그는 서슬 퍼런 일제의 압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일본인으로서 조선의 독립투사를 변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다. 아니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만약 나라면 시도할 생각이나 해보았을까 싶다. 그런데 그는 해냈다.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을 위해 살겠다‘는 그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 P295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 P298

반가운 소식은 도쿄 릿쿄대학에서도 교토 도시샤대학처럼 윤동주를 기억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2025년 3월 1일 자 《중앙일보》에 따르면, 올 가을 릿쿄대학은 교정에 윤동주 기념비를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니시하라 렌타 릿쿄대 총장은 기념비를 세우는 이유에 대해 윤동주의 순국 80주년을 언급하며 "윤동주 시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도시샤대와 함께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한·일 양국 간 우호의 상징으로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윤동주 작품을 통해 윤동주의 세계관과 문학관을 학생들이 알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P303

릿쿄대학은 15년째 꾸준히 한국인 유학생에게 ‘윤동주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 또 그의 기일에 맞춰 추도예배를 진행하는데, 그 노력이 기념비라는 결실로 이어졌다고 본다. 물론 내 개인으로서는 시인 윤동주가 걸었을 그 교정을 다시 한번 방문해야할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사실이 더 기쁘다. 여럿이 함께 그곳을 찾아 시인동주를 생각하며 술 한잔 올리고 싶다. - P304

신간회는 3.1혁명 후 일제의 압박이 거세진 1920년대에 독립투쟁의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고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독립투쟁의 선봉에 선 여러세력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결과다. 1927년 2월 15일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대회가 열렸다. 월남 이상재가 회장, 벽초 홍명희가 부회장으로 선출됐다. 강령으로 "우리는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한다. 우리는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한다"를 채택했다. 신간회는, 독립운동의 큰 축인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해 만든 일제 강점기 최대규모의 항일운동 단체였다. - P305

다만 김시현 지사는 해방 후 남긴 기록에서 황옥 경부를 진정한 독립운동가라고 평가했다. 김원봉은 황옥이 스스로 밀정이라고 털어놓아 세상의비난을 자초한 것은 의열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이사건을 주도하고 이끈 두 사람, 김시현 지사와 황옥 경부는 여전히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서훈받지 못하고 있다. 김시현 지사는 한국전쟁 중 발생한 ‘이승만 저격 미수사건‘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일제의 경찰이었지만 목숨걸고 의열단을 지원했던 황옥 경부는 밀정인지 독립투사인지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김시현과 황옥 경부에 대한 평가는 후인들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할 지점이다. - P315

"의열단 국내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시현(82)옹이 심한 생활고에 빠져 있다. (중략) 불광동 산비탈 단칸방 두 개를 전세 들어 팔 식구가 살고 있으나 이달 말 그 셋방마저 내놓게 되었다. 김옹은 1923년 폭탄을 갖고 상하이에서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본 관헌에 잡혀 1년간 투옥된 것을 비롯, 전삼회 17년간, 그리고 8.15 이후엔 52년 6월 이승만 박사 저격사건에 관련되어 9년, 합쳐 약 30년 동안 옥고를 겪었다. 무상배급밀가루(한 달에 52킬로)로 연명하는 (중략) 기거가 부자유해 누워서 지낸다는 김옹은 ‘아직 정부의 별다른 혜택을 받은 건 없으나 오는 8월쯤 원호대상에 든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그날만 기다리고 있다. - P318

김시현은 아내 권애리를 평생토록 ‘동지‘라고 불렀다. 마지막 가는 길에도
"권 동지, 미안하오. 내가 조국독립을 위해 몸바쳐 투쟁했는데 반쪽 독립밖에 이룩하지 못했소. 남은 생을 조국통일 사업에 이바지해 주오"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권애라 지사는 1990년에야 서훈됐고 1995년 10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464번 무덤에 안장됐다. 김시현 지사는 앞서 말한 이유로합장되지 못했다. 그의 묘는 경북 예천군 호명읍 직산리 야산에 위치해 있다. 2021년 그의 묘를 발견한 후 매년 찾아 술 한잔 올리고 있다. - P319

당시에 관헌, 이재민, 주변 주민에 의한 살상 행위가 다수 발생했다. 무기를 가진 다수의 사람이 비무장 소수자에게 폭행을 가한 끝에 살해한 경우가 많았으며, 이는 ‘학살‘이라는 표현이 타당한 사례들이었다. 살상의 대상이 된 이들 가운데 가장 많았던것은 조선인이었지만, 중국인과 내지인 또한 적지 않게 피해를입었다. 가해자의 유형은 관헌에 의한 경우부터, 관헌이 보호하고 있던 피해자를 민간인이 관헌의 제지를 무시하고 살해한 경우까지 다양했다.
살상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의 정확한 수는 파악할 수 없지만, 지진재해로 인한 사망자 수의 1%에서 수%에 해당하며, 인적 손실의 원인으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 P322

이 비는 다른 위령비와 분명한 차이가 있는데, 비석 뒷면에 학살의 주체를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의 군대·경찰· 유언비어에 현혹된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도쿄의서민 거주지에서도 식민지하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를 가슴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고, 인권의 회복과 두 민족 사이의 화해를 염원하여 이 비를 세운다." - P328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는 대림사는 절이 있다. 안중근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찰이다. 절 마당에는 안중근 장군이 일본 헌병 출신 치바 도시치(千葉十七, 1885~1934)에게 마지막으로 써준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이 새겨진 유묵비도 세워져있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은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다. - P338

도쿄에서 43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이곳에 왜 안중근 장군의 유비와위패가 존재하는 것일까? 1909년 이토를 격살한 안중근 장군이 뤼순감옥에 수감되었을 당시, 치바 도시치는 안 장군의 전담 교도관이었다. 처음에는 일본의 심장이라 불리던 이토를 죽인 안 장군에게 분노와 적대감을드러냈으나, 동양평화에 대한 그의 의지와 인품에 감화되어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 - P338

1910년 3월 26일 안중근 장군의 사형은 예정대로 집행됐다. 교도관 치바가 아무리 안 장군에게 감화받았을지라도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슬퍼하는 그에게 안 장군은 ‘위국헌신군인본분‘ 여덟 글자를 남긴다. 눈물로안 장군을 보낸 그는 제대를 자청했고, 고향 미야기현 센다이로 돌아왔다. - P338

스님은(사이토 다이켄) 두사람을 기리는 현창비와 기념관을 세워 둘의 영정을 모셨다. 하지만 이 때문에스님은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매년 대림사는 빠짐없이 안 장군의 추모제를 열고 있다. 교도관 치바의 후손이 안중근 장군탄생 100주년을 맞아 1979년 유묵을 우리 정부에 기증했고, 안 장군을 기리는 숭모회는 1981년 대림사에 안 장군의 유묵비를 세웠다.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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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무덤을 바라보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석재로 만들어진 거대한 도리이가 눈에 들어온다. 히데요시가 죽은 이듬해에 건립된 도요쿠니 신사의 정문인데, 신사 이름 도요쿠니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도요와, 나라를 의미하는 쿠니를 합친 것이다. 코무덤 앞에 서서 도리이를 바라보니이상하게도 히데요시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가 떠오른다.

이슬로 와서 / 이슬로 사라지니 / 
나의 몸이여 / 나니와(오사카)의 영화는 /
꿈속의 꿈이로다

삶의 끝자락에서 마치 관조하듯 떠나는 이의 모습이 담겼다. 아름답고목가적이다. 하지만 그의 삶이 이 시처럼 아름다웠다 할 수 있을까? - P160

"전쟁의 시대가 있었고, 많은 학생들이 그 시대의 희생자가 되었던 사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중략) 그 역사 속에 윤동주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시대를 전망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2024년 12월 윤동주에게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증정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P166

"단 하나의 조선백자항아리에 이끌려 고미술상 가게 앞에 멈춰 선것이 사십여 년 전이었습니다.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나 자신은 아직 돌아갈 길이 없던 날의 일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기념품 하나쯤 하자는 마음으로가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오늘‘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 P176

그는 미술관이 개관한지 4개월 만에 지병으로 세상을 등진다. 통일 조국이 생기기 전까지 고향에 가지 않겠다고 했던 그는 "단 한 점의 문화재도 유산으로 남기지 않겠다. 나중에 통일되면 통일조국에 기증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생전에 그는 "문화 앞에 나라라는 건 의미가 없다. 정치를 떠나 민간인의 문화 교류를 통해 우리가 하나의 민족임을 깨달을 수있다"라고 늘 말하곤 했다.28 - P179

물론 이에야스가 막부를 에도(도쿄)에 두었기 때문에 니조성은 치소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전국 시대에 만들어진 다른 성들에 비해 해자의 폭이 좁고 천수각도 높지 않다. 참고로 니조성 니노마루 어전을 걷다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나는데, 자객의 습격을 우려한 조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걸쇠와 복도를 지탱하는 못이 닿으면서 휘파람새가지저귀는 듯한 소리가 난다고 해서 ‘휘파람새 복도‘라고 불린다. 윤동주의 도시샤대학을 거쳐 교토 어소, 니조성을 함께 걸어 보자. - P184

2005년 윤동주를 애정하는 교토 시민들이 ‘시인 윤동주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만들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아 시비를 제작해 우지시에 세우고자 했다. 그런데 교토부가 우지시와 시인 윤동주 사이의 연고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하다며 장소를 내주지 않았다. 위원회는 우지시와시인의 인연을 찾는 작업을 펼쳤고, 윤동주가 마지막 사진을 찍은 장소가 우지 강변의 아마가세! 다리라는 것을 알아냈다. 마침내 위원회 설립 후12년 만인 2017년 10월 우지 강변에 윤동주의 시가 새겨진 ‘기억과 화해의 비세워졌다. 시비에는 윤동주가 1938년에 쓴 <새로가운길>이 새겨져 있다. - P188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P188

기념관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사진이 사람들을맞이한다. 팻말에는 손글씨로 "우토로에서 살아왔고 우토로에서 죽으리라"라고 적혀 있다. 긴 시간을 버텨 온 우토로 주민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기념관 개관 시간은 금·토·일 ·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이다. 화·수·목요일과 12월 28일~1월 4일, 8월 14~16일에는 휴관한다. 입장료는 일반 500엔, 고등학생 이하 100엔, 초등학생 이하 무료다. 시간을잘 알아보고 한 번쯤 가보면 좋겠다. - P194

"진폐증을 앓다 47킬로그램 몸무게로 돌아가신 이정호 선생이나 당시 탄광에 끌려간 광부들의 모습이 다르지 않았다는 거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바닷물과 메탄가스를 뒤집어쓴 채 섭씨 40도가 넘는 지하 1000미터 탄광 속에서 석탄과 광물을 캐다 진폐증을 앓고 떠났다. 젊은 나이에 키도 크고 덩치도 컸던 분들은 다들 갈비뼈와 광대만 남은 앙상한 모습이 됐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처음 만들 때 이들의 보편적인 모습을 모티브로 삼았다." - P197

위도 36° 31′ 30.11" N, 
경도 136° 40′ 17.9" E. 
1932년12월 19일 오전 7시 27분 
천하영웅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순국한 지점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꼭 한 번쯤 들러 술 한잔 올리면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금단의 땅이기도 하다. 윤 의사가 순국했을 당시에는 일본군 제9사단이, 2025년 현재는 일본 육군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기36°31‘30.1"N 136 4017 9‘E오쿠오大樂나가도때문이다. 자위대가 해당 지역을 사격장으로활용하고 있어 허가받은 인원을 제외하고는한국인, 일본인 가릴것 없이 접근이 제한된다.  - P200

현장에 있던 간수가 무릎 꿇려진윤 의사에게 유언이 있느냐고 묻자 윤 의사는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하등 말할 바 없다"라고 했다. 오전 7시 27분 미간에 총을 맞고 13분 뒤인7시 40분에 심장이 완전히 멎었다. 총탄이 이마를 정확히 관통해 피가 별로 흐르지 않았다고 한다. - P203

윤 의사는 의거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두 아들에게 "너희도 만일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로 시작하는 편지를 남긴다. 편지에서 윤 의사는 "태극의 깃발 높이 드날리고,
31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는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라고 강조했다. 이틀 뒤인 1932년 4월 29일 오전윤 의사는 상하이 원창리 13호 김해산의 집에서 백범과 식사를 한다.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아침 7시가 되자 윤봉길은 백범에게 시계를 교환하자며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윤 의사는 훙커우 공원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32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1만여 명의 일본 군경을 뚫고 무대앞쪽으로 나아가 중앙 무대를 바라보고 왼쪽으로 20여 미터 떨어진 곳 - P207

윤 의사는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무대를 향해 4~5미터 정도 뛰어 들어간 뒤 소지하고 있던 두 개의 폭탄 중 하나인 물통형 폭탄을 던졌다.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이 울렸고 이 순간 윤 의사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바로 이어 도시락형 폭탄을 던지려는 순간 주변에 있던 일본 군경의 무차별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윤 의사는 얼굴을 제대로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한 발길질을 당한 뒤 상하이 헌병대로 끌려갔다. - P208

일제는 무자비한 취조를 이어 갔다. 그러나 윤 의사는 분명한 목소리로
‘조선인의 각성과 독립 의지를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강조한다. 일제군사법원은 1932년 5월 25일 윤 의사에게 살인과 살인미수, 폭발물단속벌칙위반 등의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다. - P208

윤 의사 암장지에는 월진회 일본지부가 1992년 세운 암장지적비가 있다. 이 비에는 윤 의사가 집을 나설 때 남긴 말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不‘이 새겨져 있다. ‘사나이 집을 나가니 뜻을 이루지 않고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위에는 손바닥만 한 윤 의사 흉상도 있다. 암장지에서 100미터 떨어진 곳에 재일민단이 주도해 세운 순국기념비도 있다. 둘 다 자위대 부대 안에 있는 순국지에 들어갈 수 없는 탓에 이곳에 세워진 것이다. 같은 이유로 매년 의거일인 4월 29일에 이곳에서 윤봉길 의사의 추모식이 열린다. 함께 들러 윤의사께 술 한잔 더 올리자. - P211

1932년 12월 18일, 윤봉길이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곳은 가나자와성 내부에 자리한 위수구금소다. 현재는 공중화장실이됐다. 처음에는 윤 의사가 생전의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가 화장실이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확인했다. 하지만 옛 지도를 봐도, 관련글을 봐도 변하지 않았다. 천하영웅 윤 의사가 생의 마지막 밤을 보낸 장소는 정말 이곳이었다. - P213

문효세자가 모셔졌던 자리에 삼의사의 묘역이 조성됐고, 의빈 성씨 덕임이 잠들었던 자리에 임정요인들의 묘역이 만들어졌다. 백범은 일제가강제로 흩트려 놓은 왕가의 무덤을 독립투사들을 위한 자리로 바꿨다. 독립유공자를 위한 국립묘지가 없는 상황에서 임시방편으로라도 지사들을모실 수밖에 없었고, 백범은 주인이 사라진 효창원 묘역을 그 장소로 선정한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백범은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그것은 서울 역사 이래 처음 보는 장례식이었다"라고 기록했다. - P224

1990년대 말 김대중 정부 때 기존 테니스장 자리에 백범기념관이 세워졌다. 2000년대 초중반 노무현 정부에서 민족공원화와 독립공원화를 추진하기 위해 효창운동장 철거 및 이전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축구계의주민들의 반발로 이뤄지지 못했다. 2013년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추가지정하는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도 벌어졌으나 창원 일대 주민들의 거센 반발로 무산됐다. 20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문재인 정부는 ‘근린공원시설이었던 효창공원을 ‘독립운동기념공원‘으로 바꾸고 효창원 묘역을 국가차원에서 관리하고 예우하도록 결정했다. - P225

양근환 지사가 1921년 3월 25일(음력 2월 16일) 친일파민원식을 처단한 장소는 도쿄역호텔 2층 14호실이다. 그래서 도쿄에서 답사를 잇는 동안 그곳에 머물려고 했다. 물론 가격을 알아보기 전의 생각이다. 호텔 예약 사이트에서 도쿄스테이션호텔, 4박, 숙박인원 1인, 조식 포함, 스탠다드룸으로 검색했다. 총 68만 3976원이 나왔다. 오호, 가격을 보는 순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도쿄 한복판임에도 하루에 17만 1000원 정도면 양호하다. 물론 10초 뒤 바로 깨달았다. 착각이었다는 것을 예약하기를 누르고 들어가는 순간 가격이 이렇게 나왔다. 세금 포함 355만9784원. - P232

붙잡힌 이후의 법정 싸움에 주목해야 한다. 김 의사의 변호인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에도 등록되어 있는 후세 다쓰지였다(그에대해서는 조선인의 변호인 후세 다쓰지> 편에서 더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미 결론이 정해진 재판, 재판장은 노골적으로 불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 후세 다쓰지 등 변호인들은 재판장의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해 기피신청을 했다.
그러나 김지섭은 이마저도 "나는 조선 사람이므로 일본 사람인 재판장이누가 되든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신청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제1심 검사의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라고 말한다. - P242

경시청 앞 신호등에 서서, 끊임없이 오가는 차들을 보며 90여 년 전이공간에 서 있었을 청년 이봉창을 생각했다. 특히 의거 전 그가 백범을 만나 말한 "영원한 쾌락이 떠올랐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39 - P247

"나는 적성한인애국단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으로써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國團의로 맹세하나이다."
20여일 뒤 의사 이봉창은 영원한 쾌락을 위해 폭탄을 던지고, 이치가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였다. 영원한 쾌락을 말했던 그의 나이 서른둘이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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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서 함께 활동했던 두 사람은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의 주요 인물로 검거되어 2년 형을 선고받고 이곳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윤동주 사후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사망 전보를 받고 와서 시신을 인도받아 화장했다. 그의유해는 1945년 3월 6일 길림성 명동촌 인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송몽규 역시 다른 곳에 안장되었다가 윤동주의 곁에 모셔졌다. - P78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 P79

"우범선이 곤녕전에 도착하니 명성황후는 이미 칼에 베여 마루에 쓰러진 채로 후후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들은 사진을 보며 왕비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금있다가 절명했다. 우범선은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사체를 이불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새끼줄로 묶어 옆창고에 넣었다. 곧 사체를 동산 기슭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어 태웠다.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못에 갖다 버렸다." - P83

우범선은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도 하지만 1903년 11월 24일, 히로시마현구레시 와쇼정 2079번지(현재의 와쇼 17번지)로 알려진 집에서 살해된다. 그를 죽인 사람은 조선에서 온 고영근(高根, 1853~1923)이었다. 고영근은 범행 직후 와쇼 파출소에 가 자수한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이유로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 P84

고종과 명성황후를 향한 고영근의 충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22년 12월 그는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에 ‘고종태황제‘, ‘태황후‘ 등 여덟 글자를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웠다. 고종의 묘비에 ‘황제‘를 쓰지 못하게 하고 ‘대한‘ 앞에 ‘전자를 붙이라 했던 일제 때문에, 고종 사후 4년이 넘도록 묘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조선 땅에서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결국 해낸 것이다. 일제는 발칵 뒤집혔고, 고영근 역시 이 일로 인해 1923년 3월 파직되고 만다. 그는 자신의 일을 다 마쳤다는 듯 한 달 뒤 사망한다. - P84

2024년 초, 영화 <파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영화에서 배우 유해진 씨가 연기한 인물의 이름이 고영근이었다.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에서 차용한 인물이다. - P85

이곳에 서볼 것을 추천하는 이유는, 1400여 년 전 백제인의 숨결이 여전히 이곳 미즈키 유적을 비롯해 열도 전역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만주 벌판에 서면 고구려와 발해의 기상이, 일본 열도에 서면 백제인의 선진 문명이 아로새겨진다. - P89

그러나 시간이 흘러 다자이후의 역할은  축소되었고, 이곳으로 부임되는 것을 ‘좌천‘으로 인식하는 경향 또한 늘었다.  나라 시대인 740년에 당대의 귀존인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가  다자이후로 좌천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자이후 정청 주춧돌과 터만 남아 있다. - P91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토가 이홍장을 불러다 그 유명한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곳에 왔다. 재밌는 건 역사를 뒤흔든 그 장소가춘범루라는 음식점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성업 중인 고급 복어요릿집이다. 여담이지만 시모노세키 지역 특산물이 바로 복어다. 시모노세키곳곳에서 복어 요리를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 시간을 내서 복어탕과 복어지리를 먹어 볼 것을 추천한다. 다만 시모노세키에서는복어3 <, fugu를 일본식 발음인 ‘후구‘가 아니라 ‘후쿠‘로 발음한다. 복자와 음이 같기 때문이다. 복어를 먹으면 복이 들어온다는 이유라고 한다. 식당에 들어가 복을 부르는 ‘후쿠‘를 시켜 먹자. - P106

터널을 걷다 보면 불현듯 머리 위로 거대한 선박이 오간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인간의 기술이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그런 감상 때문에 이 터널에 가보기를 추천하는 것은 아니다. 이곳에서 일본의 역사가 펼쳐졌고, 이곳이 한반도와 조선의 관계에서 주요한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통신사의 왕래부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비극까지, 이 좁은 해협을 오가며 교류도 충돌도 있었다. 이 터널은 마치 과거와 현재를 잇는 듯한 느낌을 준다. - P111

이와쿠라 사절단의 표면적인 목적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과 조약을맺은 서구 제국 수장들에게 일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목표는 최혜국 대우 등으로 점철된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반강제로 개항하면서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불평등 조항을 만국공법(국제법)‘의 취지에 맞게 바꾸는 게 진짜 목표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시구의 선진 문물을 습득하겠다는 것이 두 번째 목표였다. - P113

하지만 이곳 역시 다르지 않다. 자신들이 입은 상처만을 부각한다. 더나아가 오히려 자신들을 전쟁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만들려 한다. 오직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입은 자신들의 피해를 부각하는 주장만 있을 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에 대한 가해 사실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살아남은 자가 함께 풀어내야 할 과업이다. - P129

천하영웅 윤봉길이
마지막 한 달을 보낸 곳 오사카성
오사카성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 뒤쪽에 비석이 하나있다. 일본 육군의 오사카 위수구금소가 있었던 자리임을 알려 주는 비석이다. 바로 이곳이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이 생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낸 장소이다. - P136

윤봉길은 상하이 일본 헌병대 사령부 지하에 6개월 넘게 구금되어 있다가 1932년 11월 18일 일본으로 이송된다. 우편 수송선 타이요마루 편으로 고베항에 도착해 오사카성 내 육군 위수구금소에 수감되어 한 달 동안독방 생활을 한다. 사형 집행지가 일본 육군 제9사단의 주둔지인 가나자와로 결정되면서 12월 18일 오사카 헌병대에 의해 이송된다. 그는 가나자와 제9사단 위수구금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인 12월 19일 오전 7시 27분에 미간에 총을 맞고 미쓰코지산 육군 작업장에서 순국한다. 이에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7부 <가나자와> 편에서 다뤘다. - P137

아이러니한 점은 일본 육군 제1사단이 전쟁을 벌이고 주둔했던 중국, 태국, 한국에서 온 관광객들이 이 쇼핑몰의 주된 고객이라는 사실이다. 제4사단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1937년경에는 관동군에 배속돼 중국과 전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방콕에 주둔했다. 구글 리뷰에도 ‘한국인이 이곳을 참 좋아하는 건 재밌는 일‘이라며 비꼬는 글이종종 올라온다. 오사카성 천수각과 미라이자가 그런 곳이었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좋겠다. - P141

무엇보다 염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덴노지 공원은 3·1운동 기념일을 비롯해 5월 노동절, 8월 국치일, 9월 간토 대지진 조선인 학살일 등항일 집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1927년 6월 1일 열린 조선총독 폭압정치 규탄대회에는 4000여 명이 참가했다. 이 대회는 1925년 11월 검거된 조선공산당원에 대한 가혹행위, 전남 완도군 소안도 소안학교 강제폐쇄 등 국내에서 벌어진 식민통치의 모순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이를 기점으로 같은 해 7월과 8월에도 연설회가 이어졌고, 이후 오사카 조선인노동조합이 반제반일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의 덴노지 공원 어디에서도 관련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P144

조명하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 55분, 대만 타이중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도서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일본 육군 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彥王, 1873~1929)에게 독을 바른 단검을던졌다. 구니노미야는 8개월 뒤인 이듬해 초 세균 감염에 의한 복막염으로 사망한다. - P150

조 의사가 던진 단검에 묻은 독이 사망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현장에서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구니노미야의 죽음보다 앞서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그의 나이 스물셋에 불과했다. 고향에는 부인과어린 아들만 남았다. - P151

당시 구니노미야는 여덟 대 차량 중 두 번째 무개차(지붕 없는 차)에탑승했다. 조명하 의사는 차량에 뛰어올라 칼을 던졌지만 실패했고, 재차칼을 던져 구니노미야의 목덜미와 어깨에 찰과상을 입혔다. 당시 현장에서조 의사는 군중들을 향해 "여러분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단지 조국 대한을 위해 복수를 한 것이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친 뒤 일본 군경에게 체포됐다. 당시 일제는 배후를 캐기 위해 갖은 수를 썼지만 조 의사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단독 의거임을 강조했다. - P153

조 의사는 1928년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다. 순국 직전형리가 마지막 할 말이 없는지 묻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삼한의 원수를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 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 P154

우리 역사는 조명하 의사를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가 한인애국단이나 의열단 등 어떤 항일단체에도 속하지 않았고, 어떤 도움이나 지원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독으로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했던 까닭이다. - P154

•국립서울현충원 조명하 의사 묘: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44번 묘 참배 후 고개를 들면 좌상단에 국가공인 친일파 신태영과 이응준의 묘가 보인다.
조명하 의사 의거 장소: 옛 타이중 도서관 앞 사거리. 2018년5월 14일 의거일에 맞춰 고시패가 세워졌다.
•조명하 의사 순국 장소: 옛 타이베이 형무소 자리. 형무소 옛벽이 온전히 남아 있지만, 조 의사 관련 흔적은 없다. - P155

대만 조명하 의사상: 타이베이 한국학교 교정, 한국인들의 자부심으로 기억하기 위해 2019년 5월 11일 세워졌다.
서울대공원 조명하 의사상: 1988년 5월 14일 조명하 의사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됐다. 인근에 국가공인 친일파 김성수의 상도 함께 있다. - P156

한편 앞서 말한 대담에서 조 선생은 서울대공원에 조명하 의사상을 세우기까지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조 선생에게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훈장이 아니라 멍에였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 죄를 지은 게 분명히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 남은 가족이 겪는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중략) 관청이든 누구든 간에 와서 ‘조명하 의사‘ 이렇게 말만 꺼내면아버님이 돈을 줘야 했고, 아버님은 항상 굽실거리며 살았어요. (중략) 이건 외롭지 않은 겁니다. ‘나라에 목숨을 바친 사람의 후손이 왜 이렇게 항상굽실거리 말해야 하지? 이건 나라가 해줘야 되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솟구쳤습니다. "후손이 아니라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후손의 회한을 넘어 사회와 국가에 던지는 뼈아픈 질문이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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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요시가 처음부터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아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정책을 이어받아 초기에는 선교사의 활동을 어느 정도 묵인했다. 기독교를 서구 문물 수용, 일본 열도 통일, 조선 침략에 유용한 통제할 수있는 자원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1587년 바테렌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면서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집행이 느슨했고 선교사들은 계속 은밀하게 활동했다.
- P63

그런데 1596년 ‘산펠리페호 사건‘이 터진다. 스페인 선박 산 펠리페호가 시코쿠 해안가에 좌초했다. 히데요시는 좌초된 배의 모든 교역물자를 압수할 것을 명령했다. 이 과정에서 선원 중 한 명이 일본 관리에게세계지도를 펼쳐 보이며 스페인은 강대한 국가라면서, 기독교가 세계 정복을 위한 선봉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히데요시는 ‘통제되지 않는 외부의 힘‘에 의해 자신이 구축한 세계에 예상치 못한 균열이 발생할 수 있음을 감지했다. 그는 즉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교토와 오사카 등지에서 활동하던 프란치스코회 선교사와 일본인 예수회원, 신자 등 24명을 체포한다. - P63

히데요시는 본보기로 일본 기독교의 성지였던 나가사키에서 이들의 사형을 집행하기로 했다. 그들은 교토에서 시작해 오사카를 거쳐, 시모노세키, 후쿠오카, 나가사키까지, 10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한겨울에 3개월동안 걸어서 가야 했다. 이미 말할 수 없는 가혹한 징벌을 받은 뒤였다. ‘외부의 힘‘인 기독교를 믿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보여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히데요시에 의해 이뤄진 일본 최초의 기독교 박해 사건이다. - P63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한 26성인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오우라 천주당이라는 곳이 있다. 천주당 정면은 니시자카 언덕을 향해 있으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성당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된 건물 중 유일한 서양식 건물이다. 파리 외방전교회에서 파견된 퓌레 신부가 성당 건립을 주도했고, 뒤이어 부임한 프티장 신부가 그 뜻을 이어갔다. 이곳은 1864년에완공되었으며, 1873년에 금교령이 해제되기 전까지 가쿠레 키리시탄들이신앙을 고백하는 장소였다. 보통 오우라 천주당으로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일본 26성인 순교자 천주당이다. - P65

글로버 가든의 가장 높은 곳에서는 나가사키 조선소가 한눈에 보인다.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의 주요 시설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함을건조하고 어뢰를 제조하던 곳이다. 1945년 8월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이 애초 겨냥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조선소에 최소 5975명의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고, 이 중 원폭 피해를 입은 조선인은 최소 13명이다. 히로시마 조선소에는 2800여 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는데, 이 중원폭 피해자는 45명이다."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고 풍광을 감상하는 것도 좋지만, 잠시라도 그들을 기억해 보자. - P69

<나비부인>은 미국인 장교와 일본인 여성의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는데, 두 주인공의 결혼식 장면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되고,여주인공은 일본 전통 복식 기모노를 입는다. 한편 공영방송 KBS가 2024년 광복절 새벽에 <나비부인>을 방영했다가 시청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고 "제작진의 불찰"이라는 성명과 함께사과한 일이 있었다. - P71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와 청년 문사 송몽규(宋奎, 1917~1945)의 순국지, 후쿠오카 형무소다. 1945년 이곳에서 윤동주는 2월에, 송몽규는 3월에 사망했다. 둘 다 스물여덟이었다. - P76

윤동주와 송몽규가 순국한 후쿠오카 형무소는 대부분 철거되고 그 부지에는 주택과 공공시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후쿠오카 형무소 좌측 공터에 신축한 것이 지금의 후쿠오카 구치소다. 후쿠오카 지하철 후지사키역2번 출구로 나와 5분만 걸어가면 주택가 끝자락에 자리한 후쿠오카구치소 정문을 마주하게 된다. 구치소가 지하철역과 너무나 가까워 놀랍다. 동네를 걷다 보면 구치소 바로 옆에 있는 가나쿠즈강을 따라 산책하는 시민들도 쉬이 마주친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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