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설을 따르든 간에 신화 속의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만큼 그 미모가 출중했다. 이런 아프로디테의 미모를 심상찮게 여긴 제우스는 자존심 강한 신들 사이에 치졸한 사랑 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려고 그녀를 신들 중 가장 못생겼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Hephaestos에게 시집보내는 현명한 선택을 하였다. - P45

이 ‘천하절색의 팜므파탈 여신 아프로디테와 천생연분인 마초 아레스의 불륜이 낳은 자식만 에로스를비롯하여 다섯이나 되었다고 하니, 오죽했으면 남편인 헤파이스토스가 지금도 시칠리아 -Sicilia의 에트나Eina 화산 아래에서 뜨거운 풀무질로 용암을 녹이며 그 화를 삭이고 있겠는가. - P45

아프로디테의 여사제들이 춤과 노래로 뭇 사내를 유혹하여 웃음을 팔던 곳. 환락과 퇴폐의 역사가 전사들이 흘린 선연한 피 아래 묻혀 있다. - P47

이런 이유로 이곳은, 성지순례를 온 단체 여행자들이 가이드에게서상반된 두 가지 이야기를 듣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즉 성채 아래쪽 코린토스 초기 교회의 자리에서는 교회의 분열과 신자의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이곳에 올라와서는 몸 파는 아프로디테 여사제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소돔과 고모라의 교훈을 듣는 ‘말씀의 장소‘가 되는 명예 혹은 불명예를 얻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방탕한 여신과 그를 모신여사제들의 타락이 코린토스의 역사를 질곡으로 밀어넣었던 것일까? - P48

이런 물음에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는 없다. 역사는 그리 단순하지도 또한 윤리적이지도 않으니 말이다. - P48

하지만 나는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는 겹겹의 무덤들 속에는 단지 그녀들의 향기 나는 허리띠만 묻혀 있는 것이 아니라, 긴 역사 속에서 이성채를 지키다 쓰러져간 전사들의 투구와 이곳을 다스리던 지배자의 왕홀들이 함께 묻혀 있음을 알게 됐다. 그리하여 그 한 겹 한 겹의 무덤들모두에 온전한 그리스 역사의 연대기이자, 때로는 용맹하고 때로는 비겁했던 코린토스인들의 전설과 신화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야 했다. - P48

로마의 점령
분열과 대립의 대가를 치르다
고대 이후 아크로코린토스 역사의 두 번째막은 로마에 의해 올랐다. 로마 제국은 전 점령지를 통틀어 그리스인에게 가장 관대했고, 나아가 그리스를 흠모했다. - P49

그러고 보면 그리스 땅이야 로마가 점령했을지언정, 정신은 도리어 그리스가 로마를점령했던 셈이다.
로마 시대에 재건된 외벽 위에 올라서서 아래쪽 고대 유적지를 바라보자니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마인들과 그리스인들의 관계는 애증의 관계였다네. 하지만 그들이 코린토스에 대해 가진 집착은 유별난 데가 있었어.‘ - P49

"진정한 구원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 법이라네. 모두가 강가에서 발을 동동 구를 때, 누군가는 그 강에 다리를놓지. 나머지 사람들이 그다리를 건너며 ‘구원‘이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구원은 바로 그 구원의로부터 구원받는 것‘이거든." -3 - P50

결국 각 도시국가의 대표들이 코린토스 남쪽 나우팍토스 Nauractus 에 모여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올림포스의 신들조차 로마의 일곱 언덕으로 이주하여, 제우스는 ‘유피테르Jupiter‘로 아프로디테는 ‘비너스 Venus‘로 창씨개명까지 마친 뒤였다. 그리고 태양신 헬리오스 Helios의 불 마차는 그리스를 떠나 이미 로마의 하늘을 밝히기 시작한 후였다. - P50

하지만 그것은 사막에 쏟아지는 소나기와 같은 것일 뿐. 물이 있다 한들 모래를 뭉칠 수 없듯, 모래 알갱이처럼 흩어진 그리스인들이 뒤늦게 하나가 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P51

"로마는 그리스 도시의 시민들에게 자유를 허락한다. 로마의 수비대를 이곳에 두지 않을 것이며 공물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처럼 스스로의 법에 따라 다스려질 것을 약속한다." - P54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민족은 노예의 신세를 면할 수가 없지, 아무렴, 분열은 반드시 역사의 대가를 치르는 법이야." - P55

"자유를 사랑하기 때문에 천국을 준다고 하더라도 영혼의 종속을용납하지 않으려는 거부, 사랑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초월하는 험난한승부, 그것이 바로 저항이라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은 그런 것이 아니었어. 그냥 뱃속의 본능을 따른 것뿐이었지." -4 - P55

"사람들이 왜 뱀을 섬기는 줄 아시는가? 이라는 놈은 언제나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 그렇다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간파하는 것이지. 뱀은 늘 어머니인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하는 존재거든.
마치 조르바처럼 말일세." - P58

전설의 샘페이레네
역사는 전설이 되고 전설은 신화가 된다

"신은 이렇게 말한다네. ‘너희가 비록 가장 힘든 오름길에 나서기는했어도 꼭대기에 이르려는 마음에 너무 조급한 나머지 날개 달린 독수리라도 된 듯 산기슭과 등성이는 거치지 않고 곧장 목적을 달성하려고하지 말라. 결코 너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너희는 더 낫지도 않고 더 못하지도 않은 인간일 뿐, 너희에게는 날개가 아니라 다리가 달렸을 뿐이다‘라고 말이지. 델피 신전의 상인방에도 ‘모든 것을과도하지 않게‘라는 신의 경고가 새겨져 있다네. 하지만 그는 달랐어." —5 - P60

"나는 지금 벨레로폰의 잔인한 운명을 상기하며 겁없는 동경을 간신히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다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지. 천국의 뱀이쉭쉭거리는 소리처럼 자만과 경멸이 넘치는 한 목소리가 내 내장 속에서 피어올라 위대하면서도 위험한 조언을 속삭인다네. ‘징벌의 신의말을 듣지 마라. 두려워하지마라. 너의 눈을 열고 보라! 눈을 꼭 감고보호받으면서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합법적 울타리 안에 갇혀 있기보다 차라리 끔찍한 비밀을 흘깃 엿본 다음에 눈멀어버리는 편이 더 낫다‘ 라고 말이지." 6 - P60

고대 로마는 코린토스를 폐허로 만든 후 다시 재건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카이사르가 부하들이 살 땅을 이곳에 마련해주려고 재건을 시작했다고 하지만, 코린토스의 지정학적 매력과환락에 대한 추억이 그곳을 다시 로마식으로 재건하고픈 욕망으로치환됐을 것이다. 왜 안 그랬겠는가. 이곳이 바로 부와 환락의 상징이자 그리스의 열쇠도시였으니 말이다. - P68

그리스 음식
독창성과 자부심이 담기다
너무 배가 고파 앞이 보이지 않거나 정신이 혼미하지 않는 한 유적지나 기차역 앞 식당에 들어가는 것은 여행자의 오래된 금기 중 하나다. 하지만 그때 나는 정말 정신이 혼미했다.
엄살이 아니었다. 트위터에 밤마다 야식 사진을 올리며 친구들을 괴롭히는 게 내 취미 중 하나일 정도로 먹는 것을 밝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역만리 그리스까지 와서 유적지 정문 앞에 달랑 하나 있는초라한 식당에 불쑥 들어갈 만큼 취향이 없지는 않았다. - P69

웃으며 빵 접시를 들고 나왔다. 아, 단언컨대 나는 그때의 빵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상은 배고플 때 먹는밥상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 P70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유달리 맛있다고 생각했던 그수블라키와 빵 맛이 단순히 ‘시장‘이라는 조미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충분히 배가 부른 후에 다시 먹어도 그 맛은 진심으로 칭찬할만했고, 가격마저 착하디 착한 수준이었다. - P70

아무려나 그리스에서는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그대로 남기더라도 일단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내가 워낙 고기를 싫어해서 그렇지 음식은 훌륭했다."라고해주는 것이 예의다. 나 역시 게눈감추듯이 접시를 비운 후 정말 흡족한 표정으로 주인에게 엄지를 세워 보였다. - P72

"예술이란 위대한 현실과의 접촉을 도모하면서, 통찰력 속에서 원천을 찾아내는 일이지. 하나의 환상이랄까. 그러면 상당히 간단하고도힘을 들이지 않으며 모든 세부적인 요소들이 제자리를 찾아들어가 표현 방법을 찾아내게 되거든." ---7 - P76

"그렇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얼굴을 보고는 그것이 지닌 아름다움의 정수를 추출하려고 했다네. 하지만 나는 자동차를 보고도 똑같은 시도를 하지. 인간의 얼굴이나 자동차나 전반적인 현상들의 정수를 추출한다는 행위란, 예술에서 동원하는 수단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네. 그러나 그 본질은 이 현상들의 뒤에서 장인이 찾아내고, 이 현상들을 통해서 정수를 추출하려고 항상 노력해온 바로 그것이지." ---8 - P77

결국 예술과 기술의 차이는 대상에서 어떤 얼굴을 보느냐 하는 것이다. 즉 남들은 무심결에 지나치는 사물의 이면 속에서 어떤 것을 보느냐 하는 관점의차이말이다. 기술자는 대상을 정교하게 모방하지만예술가는 대상의 본질을 꿰뚫고 재해석하는 사람이며, 그것이 탁월할경우에 예술이 당대를 넘어 영원한 시대성을 얻게 된다는 뜻이리라.
나는 그의 현학적인 말 속에서 일거에 현상을 절단하고 그 속을 들여다보는 매운 통찰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거듭 발견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 P77

"고대의 위대한 시대에는 젊은 육체의 이상형을 창조하던 예술가들이, 어느 순간 무겁고 야만적인 몸을 꾸밈없는 사실주의적 눈으로 보고 묘사하기 시작했지. 어디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리스에서 사실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하자 문명이 몰락하기 시작했거든. 그 다음에 과장되며, 사상이 없고, 초인간적 이상이 결여된 헬레니즘 Hellenisan 시대가따라왔던 게지." —9 - P79

"아무렴, 그렇지. 하지만 신앙 그 자체보다 내 마음을 더 매혹시키고 내게 더 많은 용기를 주었던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깨달은 인간이 어떻게 벅찬 투쟁과 만용과 미친듯한 희망을 품고 신에 도달해서, 신과 한 덩어리 한몸이 되려고 노력했느냐 하는 사실, 그 자체였다네." 10 - P84

"악마는 우리들에게 영혼을 거부하라고 설득하며, 신은 육체를 거부하라고 하지. 언제쯤 그리스도의 마음이 두 야수를 화해시킬 만큼넓어질까?" 11 - P86

원래 그리스인들이 신전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입지였다. 그런 점에서 진정한 문명은 자연과의 조화를 중히 여겼던 게 틀림없다. 동양의 풍수가 그러한 것처럼 그리스에서도 자연과 인간, 산과바다의 조화를 제일 먼저 고려했다. 사실 그리스 신전과 로마 신전의가장 큰 차이가 바로 이 점이기도 하다. - P87

"아폴론은 세상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꿈꾸고, 초연한 형태로 그것들을 이해한다네. 개체성으로 몸을 숨기며 그는 현상들의 광포한 바다한가운데 꼼짝 않고 소용히 자신 있게 서서, 꿈속에서 열망했던 큰 놀음을 즐기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나 자신이 이룩한제신들의 신비주의적 계보에서 현재를 가장 단순하고 가장 통렬하게 표현할 길을 찾곤 한다네." -12 - P90

"진리보다 더 진실한 것이 무어라 생각하나? 그것은 바로 전설이라네. 전설은 덧없는 진실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하지." —13 - P92

"우리가 살아내기 위해서는 잉어처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네. 아니, 잉어처럼도 아니고, 가파른 절벽에서 절벽으로, 바위에서바위로 건너뛰면서 물의 원천을 찾아 올라가는 늙은 어부처럼 미끄러지고, 일어나고, 주춤거리고, 허리를 숙이고, 손바닥으로 물을 조금 뜨고, 갈증을 풀고, 또 말없이 떠나야 한단 말일세. 그러면 저 바위들과돌멩이들은 우리를 위한 달력과 이정표 노릇을 할 테고 말이지." -15 - P97

"위대한 예술가란 표면에 덧씌워진 형상을 투과해서 이면에 드리운본질을 본다네.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즉흥적이고 위선적인 행위너머에 있는 거대한 물결을 발견하는 것이지. 증발해버리는 일상을 불변의 상징물로 재배열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그러니 위대한 장인은 영원성과 즉흥성을 동시에 표현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20 - P104

"그런가. 그럴 만도 하군. 낯익은 새파란 바다와 황금빛 햇살이 쏟아지는 산, 하얀 흙과 돌멩이, 나무와 풀 그리고 낯익은 문, 젊고 낯선 청년들과 이미 나이 들어버린 여자들을 둘러보고, 나는 마치 어떤 오래된 꿈속에서  살아가며, 깊고도 투명한 물을 통해서 그 밑에 가라앉은 전에 내가 알았던 도시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네." —21 - P109

"오른쪽으로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바다는 언제보아도 무심 쾌활하지. 이 바다는 슬픈 기억일랑 간직하지 않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 영원히 자기 자신을 활기차게 한다네. 만약 바다가 그 자신의 가슴을 가로지르던 고대의 배들이 남긴 흔적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녀의 얼굴은 온통 주름살투성이가 되었을 테지. 바다는 그것을 잊어버리고그리하여 젊음을 유지하는 것일 게야." -23 - P112

고대 코린토스의 땅은 번영의 땅이었지만, 운명의 신 모이라Moira의 실타래는 늘 공정하다. 코린토스 땅은 번영의 땅인 동시에 약탈의 땅이기도 했고, 탐욕의 땅인 동시에 몰락의 운명을 품은 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코린토스는 진정 고대 그리스의 ‘소돔과 고모라‘ 였으며, 스스로덫에 걸려 몰락해버린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땅이기도 했다. - P119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능력보다 대중에게서 공적 헌신성을 인정받는 것이 더 중요했던 셈이다. - P121

"각 시대는 그 시대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을 의식하지못하는 법이지. 각 시대는 지나간 시간 속의 사상과 사건들 중에서 오늘의 시대에 동화하고 변화시켜 행동화할 수 있는 것만을 적절히 선택할 뿐이거든."-25 - P125

멀리서봐도 한국 사람들은금세 알아볼 수 있는데 그 비결은 바로 노스페이스 상표가 물결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그 문제의 ‘노스페이스‘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있었으니 아마 그들도 멀리서 나를 보고, "저기 한국 사람이다!"라고 외쳤을지 모른다. - P127

그는 자신이 지닌 성정과는 달리 2,000에 달하는 통찰력 넘치는경구들을 남기기도 했고, 마키아벨리 뺨치는 통치술의 대가이기도 했다. 실제 그가 남긴 경구를 보면 가혹한 독재자라는 평가를 믿을 수 없을 정도인데, ‘평정은 아름답고, 무분별은 재앙의 원천이다‘, ‘불운할 때는 사려를, 행운이 있을 때는 절제를 앞세우라‘, ‘참주제보다 민주제가더 훌륭한 제도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천한 것이며, 명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귀한 것이다‘ 등 별처럼 반짝이는 격언들이 무수히 많다. - P130

"고대와 현대의 지혜는 영혼에게 필연성의 법칙에 순종하라고 꾸짖지. 지혜는 식물과 짐승과 신들이 다 같이 앞으로 달려나가 정복하고,
정복당하며, 똑같은 방법으로 멸망한다는 비겁한 위로의 말을 통해 필연성을 설명하려 하지. 하지만 빈틈없는 영혼은 그런 위안을 섣불리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네. 왜그러는지 알겠는가? 영혼은 필연성의 법칙에 선전포고를 하려고 태어났기 때문이라네." —28 - P138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기 자신을 이상화한 모습을 창조하고, 그것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육체뿐 아니라 생각, 인식, 용기, 행동, 태도 등 모든 면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망상으로 지은 집이 아니다. 세상에 망상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인간은 없을 테니까. 그들은 성스러움, 고행, 투쟁, 심오한 슬픔 등 전체적으로 볼때 신비롭지만 성스럽기까지 한 존재를 창조하고, 그것을 ‘영웅‘이라 불렀다. 나아가 그들 스스로 그 영웅 혹은 영웅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그리스 문명이 발화한 원천이었을 것이다. - P142

"영웅이라....... 영웅이 된다는 말은 한 인간의 개인적인 양상을 초월하는 율동에 자신을 종속시킨다는 걸 의미하지." -29 - P146

어쩌면 이런 남의 나라 독립전쟁 이야기야 이방인에게는 지나가면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독립전쟁의 영웅을 헤라클레스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그리스인들에게, 그의 입지는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장군과 필적할 만큼 큰 것이었다. 그래서 유로화 이전 그리스의 5,000드라크마 지폐에는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었고 아테네 국립 역사박물관 앞에는 말을 탄 그의 동상이 세워져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리고 있다. 아쉽고도 서운한 일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바로 역사이며 영웅의진실인지도 모른다.

콜로코트로니스 - P150

"고대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릇 영웅이 되려면 그래야할 테지. 다만 거기에 하나 더 보탤 게 있다고 보네. 다름 아닌 상승에대한 의지! 보통 사람들은 중간에 주저앉고 말았을 가파른 오름길을지치지 않고 끝없이 올라가는 의지 말일세. 끝이 보이지 않는 상승의길・・・・・・ 설령 그것이 신의 자리라 할지라도 말일세." - P152

"늙거나 병들었거나 불운이 닥치게 되면, 인간의 내면에선 모든 요소들이 서로 분열하고 맞서 싸우게 된다네. 때로는 육체가 지배하고싶어하고, 때로는 이성이 반란의 깃발을 올리고 도망치려 하지. 그리고 이성은 무감각하게 물러서서 붕괴의 과정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라네. 그러나 인간이 어리고 튼튼할 때는 이성도 육체도 같은 젖을 빨면서 쌍둥이처럼 우애롭게 하나로 단결되지 않던가?"-30 - P152

육체와 영혼의 갈등과 분열을 이겨낸 자라. 그럴지도 모른다. 특별한수양을 쌓지 않는 한, 정신이육체를지배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성이 건강을 생각해서 담배를끊자고 결단을 내려도 얼마 안 가서 금세 ‘까짓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고 싶은 것 하고 사는 게 인생 아니든가‘라는 식으로 육체의 유혹에항복해버리기 십상이다. 공부를 할 때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성적으로생각할 때 결심은 굳건하지만 ‘피곤하면 효율이 떨어지니 오늘 하루만쉬자‘라고 쉽사리 무릎을 꿇고 마는 게 현실이다. 즉 오래된 육체의 습관이나 안락에의 유혹이 이성을 지배하는 게 보통이다. 이렇게 볼 때두려움과 공포 혹은 환락과 평안은 이성이 아닌 육체의 요구에 따른것이어서 우리는 늘 이 둘 사이의 갈등과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헤라클레스는 공포나 나태 따위는 추호도 없이 육체의 한계를 극복해냄으로써 결국은 신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 P153

그들은 상대가 이교도건 피부색이 어떻건 어디에서 왔건 괘념치 않는다. 그곳을 찾아온 주님의양 떼들에게 작은 사랑과 선의를 표시하는 관행일 따름이다. 이 목적없는 환대는 그리스를 여행하는 내내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던원천이기도 하다. - P174

"저들과 나의 차이는 이런 것이라네. 저들은 구원의 길을 찾았다고믿으며, 그것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지.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러한 구원의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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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를 품고 그리스를 가다!˝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문명의 배꼽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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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를 품고그리스를 가다!"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문명의 배꼽 그리스

그런 까닭에 이 여행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인도 없이는 불가능한일이었습니다. 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가 쓴 거의 모든 저작들을 구하여, 읽고 또 읽었습니다. 영국의 문예비평가 콜린 윌슨이 그를두고, "이름이 ‘카잔초프스키‘였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썼더라면 그는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을 것"이라 했을 만큼 대단한 문학가였던 그의 소설들은 물론 여행기와 자서전 그리고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각을 좇을 수 있는것이라면 모조리 읽었습니다.  - P6

어찌 보면 이 모든 것이 그리스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그리스의 참모습은 아닐 테지요. 니코스는 "그리스의 얼굴은 열두번씩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 "라고 표현합니다. 쓰인 글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쓰게 되어 있는 양피지인 팰림프세스트처럼 열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색깔을 가진 나라 그리스의 속살은 도통 한눈에 파악하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신화나 철학,
정치나 사회, 문학과 예술이라는 하나의 틀로만 바라본다면 그리스의참모습을 찾을 길이 묘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 P7

한 권의 책은 저자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책을쓰기까지 그 저자가 밑줄 그으며 읽었던 모든 책과 깨우침을 준 모든스승들이 함께 쓴 것일 터, 다시 한 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있을 오류는 모두 저자의 몫임을 밝힌다. - P10

평생 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굶주린 듯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는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침내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고운체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순례>, <영혼의 자서전> 중에서 - P15

이번 여행을 하면서는 일정을 따로 정하지 않았다. 지도 한 장 달랑들고 비행기와 배로 대륙을 건너고 국경을 넘었다. 철도와 버스, 렌터카와 바이크 그리고 도보로 무수한 경계를 넘고 또 다른 경계에 다다르기도 했다. 해 뜨면 떠나고 해 저물면 머무는 ‘노마드‘ 처럼 동가식서가날들을 보냈다. 더러는 낡은 호텔에 묵고 또 더러는 유스호스텔이나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향토사학자나 현지 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그리스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가 그리스의 참모습에 한 발짝씩 다가가려 했다. 그런 방랑자에게 매끼를 챙기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종종 한 끼 식사에도 감사하며 길을 재촉한 꽤 치열한 여행이었다. - P16

즉물궁리卽物窮理
곧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는 가르침 - P16

그리하여 책과 논문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삼되, 직접 찾아가 그곳 시간의 무덤에서 들려오는 옛 영웅들의 웅변과 민초들의 함성을 만나고자 했다. 이미 무너진 신전의 잔해를 직접 쓰다듬으며 무너지지 않은 문명의 기둥을 확인하고자 했다. 더디고고될지라도 이렇게현장으로 나아가야만 비로소 내가 만나고자 한 문명과 역사를 온전히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그렇게 이해한 그리스를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다. - P17

그 공간 여행의 출발지를 펠로폰네소스로 정했다. 바로 이곳 펠로폰네소스가 그리스 문명의 어머니이자 서구 문명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 P18

그런 까닭에 ‘그리스‘라는 미궁의 출발점은 펠로폰네소스여야 했다. - P18

더불어 펠로폰네소스는 헬레네의 고향이다. 아시다시피 헬레네는사상 최초의 팜므파탈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여인이다. 바다 건너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스파르타의 왕비,
오직 그녀를 되찾기 위해 그녀의 남편 메넬라오스와 시숙 아가멤논은전 그리스의 영웅호걸을 불러 모아 피의 응징에 나선다. 무참한 죽음과 엄청난 피바람을 무릅쓴 끝에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왕비를 되찾지만, 그녀의 목을 베기는커녕 다시 품에 안고 만다. 헬레네는 마치영웅처럼 귀환했고, 훗날 스파르타에서 여신으로 거듭난다. - P18

바로 그리스, 혹은 그리스인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른 스펀지처럼엄청난 수용성을 자랑한다. 숱한 이민족의 침략을 받고 그들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어느새 침략자들을 그리스인으로 만들어버린다. 멋있다고 느끼면 페르시아의 신이건 이집트의 신이건 가리지 않고 올림포스산정에 함께 모시고 경배한다. 심지어 기독교가 그들의 신앙을 완전히대체한 후에도 그 신들의 이름을 살짝 바꾸어 곳곳의 교회에 수호성인으로 삼기까지 한다. - P19

"하느님의 가호가 우리와 함께하시길! 자, 갑시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조르바>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5쪽 - P19

내 삶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탕!‘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의회 앞 신타그마 광장 쪽이었다.
시위대가 운집해 있던 그곳에서 은퇴한 약사가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평생 약사로 일하다가 은퇴 후 연금으로 생활하던 이 노인은
정부의 연금 삭감에 죽음으로 저항한 것이다.
그가 남긴 유서는 다음날 그리스 사회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나는 조국을 믿고 성실하게 일하며 연금을 납부했다.
하지만 조국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내게 이런 조국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하지만 내 삶을 선택할 권리는 나에게 있다!"
아테네에 도착하여 공항버스에서 막 짐을 내리려는 순간,
아테네 민주주의의 심장인 신타그마 광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스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으로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더구나 이곳은 한때 유럽 최고의 깍쟁이라 불리던 사람들의 후예가 사는 코린토스가 아닌가! - P26

코린토스
번영의 땅이자 약탈의 땅을 가다 - P27

"오래된 조상 아가멤논에서 모레아의 위대한 애국자에 이르기까지고통받는 모레아(모레아는 펠로폰네소스를 가리키는 옛말이다)‘는 재앙과 영광의 충격을 동시에 견디어왔다네. 그러니 그리스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언제나 오래된 어머니인 펠로폰네소스로부터 시작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나. 여기가 바로 그 굶주리고 피에 물든 문명의 뿌리라네." —1 - P28

그러니 이 길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영원한 주제였던 ‘금기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신과 어깨를 겨루던 당대의 영웅조차도결국에는 인간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신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는
‘나약한 인간의 실제‘에 대한 내러티브가 담긴 비디오 가이드인 셈이다 - P29

코린토스의 첫인상
생기 없는 얼굴과 마주하다
우리는 코린토스 시청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내렸다. 코린토스에 대한 첫인상은 활력을 잃은 ‘주름‘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주름은 땡볕에 그을린 농부의 그것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노신사의 그것도 아니었다. 거리는 누추했고 상가도 쇠락했다. 그리스에서 손에 꼽히는 인구와 그 이름에 걸맞은 관광도시라는 느낌은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 P31

결국 손짓 발짓을 동원한 희안한 보디랭귀지와 구글 번역기까지 총동원된 끝에 게츠 한 대를 하루 20유로에 빌릴 수 있었다.
‘신이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실로 멋진 가격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9월에서 4월까지의 비수기에그리스를 여행한다는 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 P33

그리스는 어떤 일이든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곳‘이라 한다. 그리스의 이런 특징을 모르고 이 나라를 방문하면 대개
‘그리스에는 그리스가 없다‘라거나 ‘돌멩이만 보고 왔다‘ 라는 등 불평가득한 후기만 쏟아내기 십상이다. - P34

어쨌든 내가 빌린 차는 유럽인의 체형에 맞춘 액셀러레이터 유격이하데스의 지하 동굴만큼이나 멀었고, 오랜만에 만져본 수동 기어는 연신 딸꾹질을 하며 쉽게 고삐를 내주지 않았다. 나중에 이 문제로 300유로를 배상하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바퀴는 굴러갔고, 교차로마다 시동을 꺼트리기를 몇 차례 반복한 끝에 구코린토스(코린토스는 코린토스와 1858년 대지진 이후 다시 건설한 신코린토스로나뉜다)의 유적지 인근에 도착할 수 있었다. - P35

"여기에 올 때마다 나는 레온 스구로스의 섬뜩한 광기가 느껴진다.
네."
"나프폴리오의 영주 레온 스구로스 말인가요?"
내가 되물었다.
"바로 그 레온 스구로스 말일세. 저기 저 성채의 남쪽 벽에서 자신의애마를 탄 채로 뛰어내렸지."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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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무덤이 고고학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무덤 주인과 순장당한 자가 같은 시대에 죽었어야 한다. 무덤의 주인공이 생을 다한 지 수십 수백년이 흐른 후에야 산 자를 죽이는 것은 순장이 아니라 제사나 희생으로 취급된다. 두 번째 조건은강제성이다. 순장당하는 사람이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목숨을 버린다면 그것은 순장이 아니라순사로 취급된다. 마지막 조건은 종속성이다. 윗사람을 위해 아랫사람이 죽어야 순장이지, 그 반대의 경우는 순장이 아니다. 

이와 같은 동시성과 강제성, 종속성은 순장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므로 최소한 이 세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순장 여부를 논할 수 있다.

순장 연구는 한국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연구사적 의미를 지닌다. 당시의 사회구조를 규명하는데 순장 실시 여부가 유효하기 때문이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리보다 먼저 순장제도에 주목했던중국 학계의 사례를 살펴보자. 흔히 우리가 은나라라고 부르는 국가의 정식 명칭은 상인데,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종합한 결과 상나라는 고대 노예제 사회였음이 밝혀졌다. 

노예제 사회의 성격을 드러내는 대표적 현상이 바로 광범위하게 실시한 순장제도인데, 이 풍속은 상나라에서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까지 이어졌다. 

순장을 실시한 사람은 노예 소유주이고, 당하는 사람은노예이며, 많은 사람을 순장할수록 노예를 많이 소유했다.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 이르러 순장체도가 점차 사라지고 사람 대신 흙으로 빚은 인형을 무덤에 넣게 되는데, 이때부터 고대 노예제 사회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순장 실시 여부는 고대 노예제 사회의 징표이다.

결론적으로 북한 학계는 고조선 사회가 이토록 많은 노예를 순장할 정도로 계층 분화가 심화된 노예제 사회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필자는 강상묘 등의 무덤이 순장으로 인정받기 위한 세 가지 필요조건, 즉 동시성, 강제성, 종속성을 만족시키지 못했으므로 순장묘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강상묘를 순장묘로 보려는 북한 학계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순장을 통해 당시 사회의 면모를 보려는 시도 자체는 바른 방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중국의 사례를 보아도 그렇고 한국사에서도 순장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던 때와 소멸되던 때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사이에 일어난 사회적 변혁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순장은 단순한 장례 풍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계층분화 현상과 신분제 사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실마리라 할 수 있다.

순장은 단순한 장례 풍습의 의미만이 아니라 계층분화 현상과 신분제 사회의 실체를 규명하는 실마리라 할 수 있다.

확실한 사실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고대 사회의 인식은 현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 사회를 유토피아처럼 그려서는 안 된다. 소수의 지배 집단이 사회적 특권과 부를 독점하고 대다수의 백성은 고통 속에서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생을 마친 경우가많았다. 순장된 인골들은 고대 사회의 내면을 숨김없이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이 무덤의 주인공이 건장한 남자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키가 146센티미터 정도 되는 작은 체형의 40대 여성이란 점도 확인되었다. 지배자가 당연히 남성일 거라 추측했던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말을 탈 때 사용하는 안장과 발걸이에서 볼 수 있는 푸른 형광 물체이다. 비단벌레를 잡아 날개 수천 개를 이어 붙이고 그 위에 화려한 무늬를 투조해 금판을 씌운 것이니, 요즘 시중에 판매되는 명품이 제아무리 고가라도 이에 비할 수 있을까? 

이같은 후장품들은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휘황찬란함을 자랑한다. 그렇다면 우리 선조들은 왜 이렇게까지 장례에 막대한 투자를 했을까? 바로 이승의 안락함이 저승까지 이어진다는 계세사상 때문이다.

이후 신라 지증왕이 502년에 순장을 폐지하면서 후장의 풍습도 사라져갔다. 경쟁적으로 대형 무덤을 축조하던 신라의 사회적 분위기는 6세기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순장과 후장을 폐지하고 현실세계의 삶에 무게를 두면서 산성을 축조하고 군사력을 키운 것이다. 

반면 가야는 여전히 종전의 장례 풍습을 버리지 못했다. 어찌 보면 가야는 망하고 신라는 흥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에서 순장이 사라진 배경에는 유교의 영향도 있겠으나 많은 사람을 아깝게 희생시킬 바에야 노동을 시키거나 군대로 동원하는 것이 낫다는 현실적 이유가 작용했다. 진시황릉 병마용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된다.

고대인들은 사후세계를 어떻게 인식했을까
한나라 이후 중국에서는 불로장생하는 약과 선도를 갖고 있어 장생을 주관한다는 서쪽의 여신서왕모를 찾아가 신선이 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았다. 

대형 고분의 시대에서 불교 사원의 시대로
고대인들이 내세관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은 불교의 도입과 공인이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를따르게 된 신자들에게 순상은 용납하기 어려운 풍습이 됐다. ‘공수래공수거‘라는 가르침을 생각하면 무덤에 많은 부장품을 넣는 일이 부끄럽게 여겨졌을 것이다.

왕릉을 만드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소음과 순장당하는 사람의 비탄으로 그득하던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황룡사와 분황사 등 수많은 사찰이 세워져 불국토가 구현됐다. 초대형 무덤을 축조하던 토목기술과 건축기술, 화려한 부장품을 만드는 금속기술은 사찰과 탑 그리고 불상과 각종 공양구를만드는 기술로 변했다. 사회가 바뀐 것이다. 대형 고분의 시대에서 불교 사원으로의 이행은 다시말해 고대 사회에서 중세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한편 무덤과 인골이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는 중세 사회에서 또 다른 형태로 계속된다.

수도유적,
삼국의 심장이 깨어나다

앞서 살핀 것처럼 고대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순장자와 피순장자가 엄격히 구분되는 사회였다. 삶의 여건도 수도와 지방 사이, 즉 영위하는 공간에 따라 크게 달랐다. 과거에도 유토피아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삼국시대의 도성 혹은 왕성 등을 일컫는 수도유적은 심장부 역할과 동시에 모든 차별의 발원지로 자리했다.
3부에서는 삼국의 수도유적을 면밀히 살펴 고대 국가의 진면목을 확인할 것이다.

작은 취락이 거대한 도시가 되기까지
수도유적과 방어시설, 고대 국가 출현의 상관관계
수도유적이란 용어는 역사학 영역에서 다소 생소한 표현으로 왕궁과 왕성, 도성과 왕경 등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수도유적이 아우른 다양한 내용을 영어로 번역하면 모두 ‘royalpalace‘나 ‘royal capital‘이란 단어로 귀결된다.

이처럼 환호를 짓지 않더라도 높은 산 위에 위치하면서 방어력을 최대로 높인 고지성 취락이 발달하기도 한다. 대전의 보문산 유적은 해발고도가 457 미터나 돼 일반인은 쉽게 올라갈 수 없을 정도인데, 정상부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유물이 발견됐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높은 산 위에 거주했음을보여준다. 극단적인 고지성 방어취락의 한 사례다.

취락의 발전과 계급의 탄생
청동기시대부터는 신석기시대까지 이어져 오던 평등한 사회가 깨지며, 잘 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으로 나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가진 집단과 못 가진 집단 간의 대립, 사회적 갈등, 긴장된분위기 등이 청동기시대를 대변하는 이미지인 것이다. 이때부터 등장한 환호취락은 지속해서 발전한다. 방어적인 측면을 강조한 취락은 산 위로 올라가고, 많은 주민이 사는 취락은 나지막한 구릉위에 마련된다. 환호는 방어기능 외에도 마을 안팎을 나누는 역할을 했는데, 이 때문에 수도 안에사는 중앙인과 바깥에 사는 지방인을 구분 짓는 차별의 시발점이 됐다. 이렇게 발전한 취락을 중심취락 혹은 거점취락이라고 부른다.

한편 길성리처럼 대규모의 토성을 축조한 것은 아니지만 세종시에서는 취락 안에 자신의 가옥만을 위한 도랑을 두르고, 외관을 멋지게 꾸미며, 창고에 잔뜩 물건을 쌓아놓은 고위층 호화주택이발견되기도 했다. 지금은 과거의 지명이 됐지만, 연기 나성리 유적이라 이름 지어진 이곳에서는 금강과 미호천 유역을 무대로 성장한 지방 우두머리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지방 도시들은 형성초기에는 중앙의 수도와 경쟁했지만, 국가체제를 정비할수록 독자성을 상실해 중앙에 종속된 지방도시로 강등되었다.

어떤 연구자의 통계에 따르면 남한 지역에만 2000개가 넘는 성이 존재한다. 조선 전기의 문나라를 지키는 10가지 방책 중 ‘성보를 수선하고 관방을 정하는는신이자 학자였던 양성지일‘을 거론하는데, 이를 달리 말하면 성곽을 잘 관리하는 것이다. 즉 삼국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산성을 축조하고 관리하는 일은 중요국방사항에 포함됐다.

서울의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도 일반인이 방문하면 언제든지 발굴현장을 관람할 수 있도록시스템화했다. "아저씨,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나가주세요!" 같은 말을 외치는 조사원은 이제찾아볼 수 없다. 이제는 밀실에서 전투적인 자세로 속전속결 진행하는 발굴조사 대신 공개된 장소에서 여유를 갖고 교육과 관광 효과까지 누리는 방향으로 발굴조사가 전환되고 있다.

도다이지를 건설하는 데에도 백제계 인물들의 역할이 컸다. 대표적인 인물이 행기라는 승려다.
그는 대규모의 사찰을 짓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정신적으로달래주며 빈민 구제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민심이 흉흉해지는 일이 미연에 방지되었다. 거대한 사원을 지은 기술자는 백제인이었으며, 대불에 쓸 금을 채취해 바친 이도 백제인이었다. 당시 백제는망했지만, 백제계 유민들이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건축 토목분야는 물론이고 불교, 회화, 음악 등여러 분야를 주도하며 일본 고대 문명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것이다.

풍납토성의 우월함은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설명할 수 있다. 당시로는 최첨단 토목기술인 판축기법을 사용했는데, 중국에서 유래한 이 기술은 나무로 틀을 짜고 그 안에 흙을 채운 후 나무나 돌로만든 공이로 흙을 다져 강도를 높이는 공법이다. 백제는 중국과 다른 풍토, 토질을 지녔기에 풍납토성에는 백제식으로 변형한 판축공법을 적용했으며 부엽공법을 추가했다. 부엽공법이란 흙과 흙사이에 부직포를 깔 듯 나뭇잎과 줄기를 깔아서 토층 간의 마찰력을 높이고 이 층을 통하여 구조물에 스며든 물이 배수되게 하는 공법이다. 요즘 토목공학에서 이야기하는 지오텍스타일 Geotextile 공법과 동일한 원리로, 훗날 김제 벽골제와 같은 제방을 축조할 때 자주 활용했다. 이런 최첨단의 판축공법과 부엽공법은 백제인에 의해 일본으로 전래돼 토성과 궁궐, 고분, 제방 축조에 활용되었다.
이렇게 풍납토성을 짓는 데는 최첨단 기술과 최고의 기술자가 동원되었다. 풍납토성이란 걸작을만든 이들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임이 틀림없다.

이처럼 화장실은 왕족과 귀족들의 일상 생활상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환경과 위생 상태를보여준다. 오물에 섞여 있는 기생충알을 통해 위생 상태를 알 수 있으며 소화되지 않고 배출된 음식물을 통해 식생활을 엿볼 수도 있다. 실수로 화장실에 떨어뜨린 짚신이나 목간 같은 유기질 유물도 소중하다. 이처럼 화장실의 고고학은 왕궁과 왕릉 같은 유적만으로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은밀한모습을 보여주기에 그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교류의 길,
글로벌 삼국시대를 열다

3부까지 땅에서 발견한 유물과 유적을 통해 삼국시대를 탐험했다면, 이제는 고대선인들이 교역했던 3개의 길을 따라가 볼 차례다.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떠나는 초원길, 사막과 오아시스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과 일본을 넘어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대외교섭의 범위를 넓혔던 삼국시대의 흔적을 함께 추적해보자.

초원길에서 시작된 다문화의 역사
한반도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다양한 대외관계

그동안 우리는 이런 실상을 보지 못한 채, 동북아시아만을 보도록 강요받아 왔다. 한국과 중국, 한국과 일본의 관계만을 바라보는 좁은 시야 때문에 한과 경쟁했던 고조선을 조망하며 ‘외로운 동쪽의 섬나라‘였던 우리의 처지를 한탄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금만 시각을 넓히면 고조선과 같은 시기 고대 국가를 형성하며 비슷한 운명에 처했던 여러 세력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만 그토록 외롭게항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한국은 동쪽의 고요한 은자의나라가 아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에 자리잡고 유라시아 곳곳의 이웃들과 다양하게 교섭했다. 그리고 당시 이웃을 맺었던 나라들 중 일부는 지금도 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21세기를 주도할 후손들에게 넓은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시각을 전해줘야 한다. 앞으로 ‘코리안‘이란 정체성은 태어난 장소와 얼굴 형태, 핏줄을 통해 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코리안의 인종적 스펙트럼은 훨씬 넓어질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총을 어깨에 짊어지고 야간 보초를 서며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은이들의 얼굴도 지금보다 다양해질 것이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의 미래를 맡겨야 한다.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이 지닌 공격성 때문에 곳곳에서 파열음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상호공존을 원칙 삼아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짜야 할 것이다. 이때 역사학은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까? 역사학은 과거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교류 모델을 찾아내 국가 발전전략 수립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돌궐족의 유적은 지금도 몽골지역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은 수백 년에 걸쳐 서쪽으로 계속 이주해가면서 혼혈을 거듭했고 따라서 생김새가 점차 변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위구르족,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이 모두 투르크계 국가이다. 투르크 벨트의 동쪽에 해당하는 카자흐스탄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비슷한 생김새를 지녔다. 그리고 서쪽으로 갈수록 백인에 가깝다. 이런 양상은 돌궐족의 이동과정 중 생성된 변화다.

한편 기원전 6세기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에 걸친 대제국 페르시아를 건국한 고레스(키로스) 왕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을 해방시키면서 인종과 종교, 언어가 다르다고 차별하지 말고 모두를 공평하게 대하라 명령했다. 세계 최초의 인권 선언인 셈이다. 이러한 관용과 포용으로고레스 왕은 제국을 유지했다. 고레스 칙령은 점토로 된 원통에 새겨졌으며, 훗날 발굴돼 영국의브리티시 뮤지엄에 전시되어 있다. 복제품은 뉴욕의 UN 본부에 걸렸다. 대한민국이 제국과 같은강대한 국가가 되려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여전히 순수한 단일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고집하며 다문화 사회를 거부할 것인가?

중앙아시아 속 한국 고대사의 흔적들
소그드족의 벽화에 등장한 고구려인
중국 서안에서부터 우즈베키스탄, 이란, 터키, 로마로 이어지는 길은 대부분 황량한 사막길이다.
중간중간 섬처럼 분포하는 오아시스를 징검다리 삼아 이어지는 여정은 낭만적이기보다 목숨을 건모험에 가깝다. 그러나 그 끝에 다다른 목적지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장사치들은 ‘대상‘ 혹은 ‘캐러밴caravan‘ 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은 매번 목숨 건 모험의 끝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을 마주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내게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을 몇 군데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사막길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이란의 이스파한을 꼽는다. 특히 사마르칸트에 있는 비비하눔 모스크의 눈 내리는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소드그족은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입에다 꿀을, 손에는 아교를 발랐다고 한다. 꿀처럼 달콤한 말로 상대방을 현혹해 돈을 벌고, 한번 손에 들어온 돈은 절대 놓치지 말라는 의미다. 이들은 이 어린 시절의 배움을 교훈 삼아 천하제일의 장사꾼으로 자란다. 수나라와 당나라는 물론 신라와 일본까지 진출해 장사를 벌였던 이들이 바로 소그드족이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은 대개 소그드와 투르크, 몽골의 혼혈인데, 자칫 이들을 상대로 물건값을 흥정하려 들었다간 손해를 보기 쉽다. 필자도 시장에서 흥정에 실패해 손해를 본 후 역시 소그드의 후예는 다르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왜 사마르칸트를 조사해야 할까?
국제관계학을 전공하는 분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이다. 국익을 위한 이합집산이 무궁무진하게 반복되는 외교 무대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으려면 항상 우리편을 들어주는 국가가 셋 이상은 있어야 하는데, 가장 유력한 후보는 단연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라는 것이다. 중국이라는 초강대국 주변에서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하는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우리와 비슷한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우리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을 수 있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많다.

이제 대한민국도 민족사를 넘어 세계사 연구에 공헌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욕심을 내 참여한 것이 2018년부터 시작한 시베리아 남부의 거대왕릉인 쿠르간 조사다. 몽골과 러시아, 카자흐스탄과중국이 만나는 알타이지역 동편에는 러시아에 속한 투바공화국이 있고, 여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아르잔 유적이 있다. 이 유적이 유명해진 것은 1호분과 2호분, 단 두 기의 쿠르간을 조사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아르잔 2호분은 러시아와 독일 연구팀이 공동 조사한 것으로, 세계사 서술을 바꿀만한 위대한 발견을 이뤄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흑해 연안에서 발생한 스키타이 문화가 점차 동으로 퍼졌다는 기존의 정설을 뒤집은 것이다. 기원전 9~8세기에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아르잔에서발생했으며 점차 서쪽으로 퍼져나간 사실이 입증되었다.

비록 한국사와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더라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유적이라면 조사와 보존에 뛰어들어야 한다. 민족사를 넘어서서 인류 공동의 역사 연구에 앞장서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진정한 선진국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내일을 앞당기기 위해 젊은 연구자들이 지금도 현장에서 땀 흘리고있음을 밝히며, 그들이 진심으로 자랑스럽다. 그들은 우리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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