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보라색 블라우스에 소박한 마 재킷을 입은 키가 큰 여자였다. 가볍게 웨이브 진 갈색 머리가 어깨쯤에 가지런히 닿아 있다. 하얀 목덜미를 장식하고 있는 목걸이가 금빛으로 반짝여, 순간 눈이 부셨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 색다른 향수 냄새가 가물가물 잠이 올 것처럼 풍겼다.
선글라스 탓에 정확한 얼굴 생김은 알 수 없지만, 미인 축에 속하는 것만은 틀림없다.
어디선가 본 얼굴이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만난 것은 아니더라도, 무슨 사진에선가 아무튼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저, 벌써 4시 반이 넘었는데요." "그거 이상하군. 우리 집 시계는 아직 4시가 안 됐는데." 혹 방금 전에 일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움푹 패인 눈을 열심히 비벼대면서 방 안쪽을 돌아보았다.
과연 시계는 4시 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뭐야? 나 참, 죽었잖아." 가와미나미가 지적하기 전에 그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거 참. 얼마 전에 골동품 가게에서 사 왔는데 벌써 말썽이로군." "그렇습니까?"
"뭐, 아무려면 어떤가." 별 문제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하고 그―신진 추리소설 작가 시시야 가도미, 즉 시마다 기요시는 3년 전과 다름없이 천진스럽게 웃었다.
가와미나미 다카아키가 시마다 기요시를 처음 만난 것은 1986년 봄이었다. 3월 26일, 가와미나미는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다. 당시 가와미나미는 스물한 살. 규슈 오이타 현의 ○■시에 있는 K대학 공학부의 3학년생이었다.
그를 만나게 된 계기는 그날 가와미나미에게 배달된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발송인의 이름은 나카무라 세이지. 오이타 현의 츠노시마라는 조그만 섬에 ‘청옥부青屋敷’와 ‘십각관十角館’이라 불리는 기묘한 건물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건축가의 이름이다.
대처승의 셋째 아들로 남아돌아가는 시간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그는 가와미나미 못지않게 호기심이 왕성한지 발송인이 세이지로 되어 있는 그 편지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또 열렬한 미스터리 마니아로, 가와미나미가 한때 학교 동아리인 ‘미스터리 연구회’에 몸담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것만으로도 가와미나미에게 호감을 품었다.
두 사람은 츠노시마의 십각관을 방문한 가와미나미의 친구들을 덮친 살인 사건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그러니까 ‘3년 전의 그 사건’ 말이다.
시마다와는 사건 후에도 한동안은 만났는데 점차 소원해졌다. 가와미나미가 졸업 논문과 대학원 수험 준비에 쫓겨 상당히 바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아마 그해 7월이었을 것이다.
대학원에서 2년 간 석사 과정을 마친 가와미나미는 도쿄에 있는 기단샤라는 출판사에 취직했다. 올 4월의 일이다. 규슈를 떠나 도쿄로 올라오게 되자 오랜만에 시마다에게 전화라도 해볼까 하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그는 작년에 도쿄로 이사를 와 있었다. 가와미나미는 그때야 비로소 그가 시시야 가도미라는 필명의 추리소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야말로 놀랐어. 공학부 출신인 자네가 출판사에, 그것도 공교롭게 기단샤에 취직을 했다니 놀랄 일이지."
작년 9월, 시시야 가도미는 『미로관의 살인』이란 작품으로 데뷔했다.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가 기단샤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가와미나미 역시 정말 질긴 인연이다 싶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맨션의 오너가 옛날부터 아는 사람이라, 신출내기 작가의 궁핍함을 동정해서 싼 가격에 빌려 주었거든." "그래요?" "대학 시절에 하숙하던 아파트 주인의 아들이야. 나이도 같은데다, 같은 아파트에서 살았기 때문에 친해졌지. ‘미도리장綠荘’이란 아파트였는데……."
"그 책을 낸 다음, 의외로 반응이 컸어. ‘악마’의 오리지널을 고안한 종이 접기 연구가에게서도 편지가 왔었지. 나도 그 사람의 책을 보고 접는 방법을 알았는데, 새로 고안한 ‘개량형 악마’를 그가 가르쳐 주었어. 이걸 봐. 구형은 손가락이 다섯 개밖에 없지 않았잖아."
그가 내민 ‘악마’를 손에 들고 보았다. 과연, 이전에는 다섯 개였던 손가락이 일곱으로 갈라져 있었다.
"손가락이 일곱 개인 악마인가요?" "응.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은 읽었나? 그 작품에 나오는 ‘오버 로드’를 의식하고 만든 모양이야." "굉장하군요. 이게 종이 한 장을 한 군데도 오리지 않고 접어 만든 것이라니."
"그런데, 시마다 씨―아니, 시시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편이 좋겠죠. 저도 일단은 기단샤의 편집자니까요." "아무래도 좋지만, 그 선생이라는 소리는 좀 참아주게나." "그럼 시시야 씨."
"가마쿠라에 ‘시계저택’이란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시계저택?" 시마다 기요시―시시야 가도미는 재빠른 반응을 보였다. 짙은 눈썹을 바짝 치켜올리고, 날카로워진 눈초리로 가와미나미를 쳐다본다. "설마, 코난." "그 설마입니다."
"‘시계관’이라고 불리기도 한다더군요. 짐작하시는 대로, 그 집도 그 나카무라 세이지가 설계한 건물의 하나인 모양입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입수했지? 자네가 독자적으로 조사한 것도 아닐 텐데. 자네는 가능하면 나카무라 세이지란 이름과 관계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그 《카오스》에서 지금 제가 담당하고 있는 ‘특별 기획’ 건이 바로, ‘가마쿠라 시계저택의 망령에 도전한다’는 것입니다."
"망령?"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나도 잘 몰랐는데, 현지에서는 꽤 유명한 모양입니다. 그 집이 원래는 고가 미치노리란 사람의 소유였다고 하는데, 그가 죽은 9년 전을 전후로 해서 유난히 사람이 많이 죽었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 소녀의 유령이 저택에서 나와 일대의 숲을 배회한다는 소문이 동네에 나돌기 시작했답니다. 그 유령의 정체가 옛날에 죽은 고가 미치노리의 딸이라는데요."
"‘기묘한 건물’이라는 소리를 듣고, 설마 하고 여기면서 이번 기획안을 낸 부편집장에게 물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런 좀 이상한 건물만 지었던 나카무라 뭐라고 하는 건축가가 설계를 한 모양이라고 그러더군요."
가와미나미가 내민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뽑아든 시시야는 "오늘의 한 개비"라 중얼거리면서 입에 물었다. 3년 전 서로 알고 지낼 때도 시시야는 과거에 폐를 앓은 적이 있다면서 하루에 한 개비만 피운다고 했다. 그 맹세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성이 고묘지라고 하지 아마." "고묘지 미코토."
아까 스쳐지나간 여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가와미나미는 말했다. "최근 유행하는, 소위 초능력자입니다." "초능력자?" 시시야는 놀랍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정말인가, 그 말?" "강한 힘을 지닌 발군의 미인 초능력자로 통하고 있습니다. 우리 잡지에서도 몇 번 그녀의 협력을 얻어 기사를 실은 일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아까 현관 로비에서 우연히 봤을 때, 금방 알아본 겁니다."
"텔레비전에 출연할 때면 온통 새카맣게 차려 입고, 시체처럼 창백한 화장을 해서 아주 신비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런 유의 초자연 현상에 대해서 자네의 입장은 어떤가? 긍정하는 입장인가 부정하는 입장인가?" "옛날에는 완전히 부정하는 입장이었는데, 지금 하는 일 때문에 여러 가지 자료를 읽고 취재도 하다 보니까, 다소는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기야 잡지에 실리는 그런 기사는 90퍼센트는 신빙성이 없다고 봐야겠지만요." "그렇겠지. 나머지 10퍼센트에 대해서는 반드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인가?" "그런 셈입니다."
"그 시계저택의 망령을 취재하기 위해, 《카오스》의 편집부에서 당대 제일의 미인 초능력자를 기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아까는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그 고묘지 미코토가 이 맨션에, 그것도 옆방에 살고 있으니." "과연 놀랄 만한 우연의 연속이군."
"그렇지만 뭐, 어떤 종류의 사건은 그런 식으로 얽히고설킬 수가 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묘한 우연이 겹치는 곳에는 반드시 그 나름의 무언가가 있는 법이야."
"무슨 나쁜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그런 예감……?" "아니, 아니. 설사 내가 그렇게 말한다 해도, 무슨 논리적 근거가 없질 않나. 쓸데없는 노파심이라고 생각해 주게나."
"그래. 아무튼 조심하는 게 좋겠어. 가능하면 나도 동행하고 싶은데. 30일이면 두 주일 후인가?" "그 때쯤 바쁜 일이 없으면." "지금 쓰고 있는 장편의 마감 날짜가 열흘 후야. 날짜에 맞게 제대로 써지면 시간은 날 텐데."
1989년 7월 16일, 일요일. 밖에서는 장마의 끝을 알리는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뭔가 있는 듯한 시시야의 말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끼면서도 가와미나미는 그 시점에서는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두 주일 후에 방문할 시계관에서, 설마 자신이 그처럼 어처구니없는 악몽을 꾸게 되리라고는.
"그건 그렇고, 참 이상한 일도 다 있습니다. 전에는 분명히 바늘이 있었는데, 왜 떼어 버렸는지……."
7월 30일, 일요일 오후. JR 오후나역에 집합한 취재반 일행은 세 대의 차에 나누어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두 대는 택시, 한 대는 《카오스》지의 부편집장인 고바야가와 시게오가 요코하마의 자택에서부터 타고 온 왜건이다.
"십 년 만이잖아. 이 근처에 오는 거." "아니, 옛날에 온 적이 있다는 말입니까?" 가와미나미가 그렇게 묻자, 처음 만나는 상대가 편집자라 다소 긴장한 듯 사키코가 어색한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했다.
"우리들, 그러니까 저랑 사키코, 그리고 뒤차에 타고 있는 가와라자키, 오늘 오지 못한 후쿠니시, 그렇게 네 명이 초등학교 때 같은 학원에 다녔었거든요. 그 학원에서 여름 방학에 ‘강화 합숙’이란 것을 이 근처에서 했어요."
"우리가 시험을 본 중학교는 W대학의 부속 중학교였는데, 사이좋게 모두 합격했어요. 그 다음에는 에스컬레이터 식으로 대학교까지 올라갔으니까." "흐음. 중학교에서 대학까지 죽 함께 올라갔다니, 흔한 일은 아니군." "뭐, 그런 셈이죠. 게다가 대학에서 미스터리 연구회라는 묘한 동아리에도 나란히 들어갔으니까 소꿉친구라기보다는 차라리 끈질긴 인연이죠."
이번 ‘특별 기획’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그들 두 명과 1, 2학년생인 와타나베 료스케와 니이미 고즈에 등 모두 다섯 명이다. 그 중 니이미 고즈에의 참가 여부는 어제서야 결정되었다. 처음에는 지금 우류가 말한 후쿠니시라는 3학년생이 팀에 참가할 예정이었는데, 엊그제 친척이 상을 당해 올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급기야 그녀가 대신 따라온 것이다.
앞서 가던 은색 왜건이 정지하자, 뚱뚱한 몸집에 베이지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고바야가와 시게오, 마흔 네 살. 이번 ‘특별 기획’의 제안자이며 이 취재반의 리더이다.
고가 미치노리가 죽은 후 이 집은 유키야라는 이름의 아들이 상속해 지금까지 살고 있는 듯했다. 다만 무슨 사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 실질적으로 저택의 관리를 맡고 있는 사람은 이전부터 고가 가문에서 일하던 이나미 사요코라는 여자라고 한다.
시각은 오후 4시를 약간 넘었다. 슬슬 땅거미가 몰려들 시간인데 여름의 태양은 아직도 높이 떠 있고 하늘은 장마 끝이라 그런지 활짝 개어 있다. 숲의 향, 매미 소리.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덕분인가 바람이 시원해서 기분은 상쾌하다. 그러나 그 바람에 소슬거리는 잡초와 나무의 모양새는 환한 태양 빛 아래에서도 왠지 음침하고 으스스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츠미가 말한 ‘나무 숲 너머’ 부분이 세 번째다. 짙은 초록색 잎이 무성한 회양목 화단이 중앙에서 오른쪽과 앞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그 뒤로 칙칙한 벽돌 벽이 언뜻언뜻 보인다. 도중에 한 군데, 돔 형태로 튀어나와 있는 지붕이 눈에 띄는 특징이랄 수 있을 것 같았다. 복도인 듯한 길쭉한 통로가 왼쪽의 서양식 건물과 연결되어 있는 이 편평한 건물이 오늘부터 사흘간 그들이 기거할 예정인 시계관의 본채라는 것을 가와미나미는 사전 지식으로 알고 있었다.
바늘이 없다는 시계의 문자판은 이쪽에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암갈색 외벽 오른쪽 끝에는 조그만 타원형 창문이 세로로 한 줄 나란하다. 문득, 그 창문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탑의 중간 정도―지상에서 3층 정도 높이에 나 있는 창문에 사람 그림자 같은 것이 언뜻 비쳤던 것이다. ‘누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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