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아랍 제국,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커스

메카에서 출발한 이슬람은 메디나 시대를 거쳐 661년 드디어 다마스커스에 최초의 아랍 왕조를 탄생시켰다. 우마이야 왕조(661~750)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누구를 후계자인 칼리파로 정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정치 투쟁이 벌어졌고, 무함마드의 유일한 부계 혈통이자 사위였던 알리가 후계 논쟁에서 밀리다가 656년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던 무아위야(재위 661~680) 장군은 3대 칼리파이자 그의 사촌 우스만을 살해한 데 불만을 품고 알리의 칼리파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661년 알리가 극단적인 이슬람 종파인 하와리지에 의해 살해당한 후, 무아위야는 스스로 칼리파로 자칭하며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이야 왕조를 새롭게 열었다.

관용과 화합의 상징, 살라딘의 묘 앞에서

다른 출구로 나오니 핑크빛 돔 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 통치자인 술탄이기에 앞서 용기와 지혜, 덕을 겸비한 장군이었던, 십자군 전쟁의 아랍 영웅 살라딘*의 묘다.

유럽이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무슬림과 유대인 등 이교도는 대량 살육을 당했다. 이교도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교황청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말이 성스러운 전쟁이지, 1099년(1차 십자군 전쟁)에 예루살렘 성을 빼앗은 뒤 벌어진 나머지 여덟 차례의 전쟁은 주로 동방 여러 나라나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 치고받는 탐욕스러운 약탈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십자군의 포위를 세 차례나 물리치고 성채를 지켰던 다마스커스 사람들은 살라딘을 중심으로 다시 힘을 규합해 십자군이 차지하고 있던 본거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살라딘: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로, 살라딘은 유럽식 호칭이며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다.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한편, 새로운 군사 기술을 도입하여 1187년 팔레스타인 북동부 하틴(Hattin) 전투에서 십자군을 무찌르고 약 90년 만에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특히 그는 교양 있고 예의 바르며, 가장 강력하고 관대한 왕으로, 이슬람 세계는 물론 유럽에서도 영웅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187년 10월 2일 금요일,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한 살라딘은 성안에 갇혀 보복의 두려움에 떨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몸값 10디나르만 내면 재산을 챙겨 성안을 탈출하도록 허용했다. 살라딘의 관용에 기독교인들은 머리를 숙였고 존경을 표했다.

바로 그 시각 이스라엘은 시리아를 향해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 폭격을 가하고 있고, 시리아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살라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강하게 솟구쳐 올랐다.

바그다드는 이슬람의 영광과 좌절을함축적으로 상징하는 도시다.
티그리스강 변의 바그다드는고대 아카드 왕국의 바빌론과 사산조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크테시폰과 맞닿아 있는 고도 중의 고도다.
이슬람 제국의 번성기라고 할 수 있는압바스 대제국(750~1258)의 500년 수도로서1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세계 각지에서 인재가 몰려들었고유프라테스-티스리스강을 끼고 자리한천혜의 입지 덕분에 세상의 물자와 지식, 정보가 넘쳐났다.
이 시기 바그다드는 ‘마디나트 알살람(Madinat al-Salam)‘,
즉 평화의 도시로 불렸다. 바그다드는 오늘날에도 이슬람교시아파의 중심지로, 이웃한 카르발라를 중심으로핵심적인 시아파 성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중세는 이슬람의 시대였다. 그 중심이 바그다드였다. 유럽이 스스로의 표현대로 ‘암흑의 시대’라는 깊은 질곡에 빠져 있을 때,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과 문명 시대를 열어준 첨단 도시가 압바스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였다. 10세기 한때 인구 120만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도시로서 당시 인류 문명의 최첨단을 선도해 갔다.

세계 문명을 주도하는 학문의 전당은 ‘바이트 알히크마(Bait ul-Hikma, 지혜의 집)’였다.

도시 안과 밖을 연결하는 4개의 문은 쿠파 문, 호라산 문, 다마스커스 문, 바스라 문으로 명명되었다. 각 성문을 나서면 향하게 되는 도시의 이름을 붙였다.

카르발라의 비극

바그다드를 이야기하면서 시아파 최대의 성지 카르발라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680년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 해다.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외손자 후세인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잔혹하게 처형당한 사건이다. 그 장소가 다름 아닌 카르발라였다.

바그다드는 9세기 중엽에 이르면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모든 것을 갖춘 대도시로 우뚝 빛났다. 골목마다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카페 같은 공간이 들어섰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바자르(시장)가 있어 상품과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여유로움이 가져다주는 해학과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유럽에서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진 《천일야화(千一夜話)》의 주요 무대가 된 것도 이 시기의 번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1401년 티무르가 동방 원정 과정에서 바그다드를 공격함으로써 또 한 번 참상을 겪었다. 이때 약 2만여 명의 바그다드 시민이 학살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바그다드는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는 사원도, 신도도 없고, 기도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시장도 열리지 않는다. 야자수 대부분은 말라비틀어졌다. 이곳은 이제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다." 아랍 역사학자 알 마크리지(Al-Maqrizi, 1364~1442)의 전언이다. 이제 바그다드는 이 도시를 탐하는 수많은 왕조를 위한 보급기지나 지방 소도시로 전락했다.

1001일 밤이나 계속되는 《천일야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년은 바그다드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그만큼 매력과 호기심이 넘쳐나는 도시다. 《천일야화》의 주무대는 바그다드이지만, 스토리 콘텐츠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동의 파리‘라 불리는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를 대표하는 토후국이자 국제무역 중심 도시이지만 석유가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하던 자그마한 어촌이 반세기 만에 최고의 첨단 창의 도시로 우뚝 섰다.
두바이에는 3개의 브랜드만 존재한다.
"The Best, The Most, The First."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라는 세 브랜드만으로 지구촌이 부러워하는21세기 개혁 도시 모델을 창출해냈다.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오만, 바레인, 카타르 등 다른 아랍 왕정 산유국들은두바이 성공을 모델로 삼아 미래 도시를 설계해나가고 있다.
두바이 성공의 배경에는 ‘오아시스 싱크탱크‘로 불리는 2000여 명의 글로벌 브레인이 창안해내는 탁월한 콘텐츠도 있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매직 리더십의 주인공 무함마드 막툼 왕세자의 헌신과 역할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술과 돼지고기가 허용되는 아랍 도시

슈퍼마켓에서는 술을 팔고 고급 호텔 레스토랑 뷔페 코너에서는 돼지고기 음식이 나온다. 다른 문화와 가치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고 존중이라 하지만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이 정상일 리는 없어 보인다. 두바이가 더 이상 아랍 도시가 아니라 글로벌 도시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전통시장에서 만나는 또 다른 두바이

아랍 커피의 본산지에 왔으니 쓰디쓴 모카커피 오리지널 한 잔 마셔보고 싶으나, 스타벅스 커피와 인스턴트 커피에 밀려 어느 카페에서도 튀르키예 커피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카르다몸과 향을 섞어 우려낸 은은한 아랍 커피로 기분을 돋우며 다시 무더운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제 텐트를 칠 공간마저 부동산 개발로 빼앗긴 두바이 사람들은 모래 대신 아파트의 화려한 카펫 위에서 전혀 새로운 밤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꿈속에서나마 신드바드 꿈을 꾸면서 옛날을 희미하게 기억하려나?

오만은 아프리카와 유럽, 인도양을 잇는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다.
고대에 이 지역에서 해상 활동을 주도한 민족은 예멘인이었다.
‘솔로몬과 시바‘로 유명한 시바국의 여왕은 현재 예멘의 수도인사나 근처에 도읍해 해상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장미수, 안식향, 유향을 비롯한 진귀한 향료와 모카커피는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오만의 주요 교역품이다.
오만인은 선박 제조 기술을 개발해 8~9세기경 아랍인이 주도하는해양 교통 혁명을 일으켜 동서의 만남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들은 뛰어난 항해 기술과 앞선 과학 문명을 바탕으로한반도 신라에까지 진출했다.
무엇보다 오만은 세계 최대의 최고급 유향 산지다.
아라비아반도 남쪽, 인도양을 바라보는오만의 항구 살랄라에는 향료 냄새가 그득하다.
살랄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인천에서 두바이까지 가서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 도착한 후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물론 시간이 되면 육로도 가능하지만12시간이 넘게 걸린다. 살랄라 도심을 벗어나사막으로 몇 시간 낙타를 타고 들어가야 비로소유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메마른 사막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의 습기를 머금어 생존을 유지한다.
유향나무에서 흘러내리는 하얀 수액이 응고된 것이 유향이다.
날카로운 금속 끝으로 나무껍질을 가볍게 벗겨내니우유 같은 하얀 수액이 망울망울 맺힌다.
송진 같은 독특한 향이 은은하게 코에 스며든다.

살랄라는 한때 고대 로마나 오늘의 뉴욕처럼 번성했던 세계적 교역 도시였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인도에서 출발해 로마와 지중해로 흐르는 향료의 젖줄은 살랄라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곳의 유향과 몰약이 인도에서 몰려오는 육계, 후추, 육두구, 정향, 백단향 같은 다양한 향료와 함께 지구촌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런 점에서 살랄라는 인류의 입맛과 의약품, 삶의 형태를 뒤바꾼 문화혁명의 진원지였다.

신라 사찰을 정화한 아라비아 유향

유향은 신라에도 전해졌다. 불교 사찰에서 향불이 널리 쓰이면서 향료문화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인류 역사는 오랫동안 향료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교역과 전쟁의 시기를 맞게 된다. 금에 맞먹는 향신료를 찾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험난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를 찾아 나섰다. 그로 인해 인류의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고대 오만은 조선술의 선진국이었다. 교역의 지역답게 수르(Sur) 항구에서는 일찍부터 교역선 제조가 발달했다. 오만은 신드바드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향 교역으로 출발한 국제 경제 경험과 비즈니스 노하우로 주변 아랍 국가와 로마는 물론 인도와 멀리 중국과 한반도에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튀르키예의 역사 도시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고 표현했다.
최근까지 연구된 결과와 학문적 결실을 종합해보면토인비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제국과 수많은 군소 왕국이 거쳐가면서 이스탄불은그야말로 지구 속의 작은 지구, 고대-중세의코즈모폴리턴이었다. 이스탄불 역사지구의베야지트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 안에인류가 이룩한 5000년 역사의 문화유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히타이트, 프리기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그리스·로마 문화, 초기 기독교 문화, 비잔틴 문화,
그리고 이슬람 문화의 진수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는 한 점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일생에 딱 한 번 여행할 수 있다면,이스탄불!

가보고 싶은 곳이 참으로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꿈꾸기 어려웠던 세상 구경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렇다고 가고 싶은 곳에 다 가볼 수도 없다. 일생에 딱 한 곳을 갈 수 있다면 단연 이스탄불이다. 주저없이 나는 이스탄불을 추천한다. 그곳은 세상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요람인 메소포타미아에 오리엔트 문화가 깊이 뿌리 내린 곳이고, 그리스-로마-비잔틴-셀주크-오스만 제국 등이 연이어 화려한 꽃을 피운 무대다. 인류 문명 5000년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과거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귀한 공간이다. 유적이 있고, 자연이 있다.

육상 실크로드의 끝이고 해상 실크로드의 시작이었다. 북아프리카나 로마에서 실려 온 물품이 이곳에서 동방 상인들에게 건네졌다. 떠들썩한 흥정과 환락과 사치가 있었고, 전 세계 미녀들이 몰려들어 흥청거렸다. 그리하여 피부색이 다른 각양의 민족, 수많은 종교와 사상, 신화가 이스탄불이라는 용광로에서 하나가 되어 공존과 화해라는 문화를 일구어냈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곳을 로마의 새 수도로 정하면서 화려한 도시 콘스탄티노플로 태어나게 된다. 1000년간 종교와 사상의 중심지이자 세계 부의 상징이었던 인구 100만의 콘스탄티노플이 만들어낸 문화유산은 인류가 이룩한 가장 눈부신 업적이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로마 교회(그리스 정교)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이 도시는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결국 성문 열쇠를 내주고 말았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처연하게 결사 항전하며 자신의 모든 영예를 마쳤지만 오갈 데 없는 시민들은 새로운 술탄을 맞아 일상을 이어가야만 했다.

1935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성 소피아 성당 특별법’에 의해 박물관으로 선포하면서 정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남았다. 아라베스크 문양이 번뜩이는 꾸란 장식 뒤로 회칠을 벗겨낸 장엄한 기독교 성화들이 찬연한 금빛을 발하고 있다. 문화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관용의 미덕 앞에 독선에 빠진 현대인은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성 소피아는 2020년 7월 10일, 또다시 정치적 소용돌이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슬람 성향이 강한 튀르키예 정부가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모스크로 개조하고 이슬람식 종교의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배시간 이외에 외부인의 관람을 허용하고 성당 내 기독교 유물을 보호하고는 있지만 성 소피아 성당은 다시 한번 역사의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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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다. 그런데 예루살렘만큼 폭력과 전쟁으로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한국인이 성지순례를 위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는 기적을 보여주신 절절한 장소들, 특히 예수의 무덤이 있는 성묘교회가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는 모두가 간절하다.
애환과 눈물이 가득하다.
예루살렘은 박해와 고통의 유랑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유대인의 영적인 고향이다. 인류의 원죄를 혼자서 짊어지고만민평등과 보편구원이라는 인류 최고 최대의가르침을 희생으로 증거한 예수의핏빛 고난의 발자취가 영롱한 체취로 되살아나는 성소다.
621년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한밤중 메카에서예루살렘으로 날아와서 이곳에서 승천해서신을 만나고 이슬람이란 종교를 구체화한다.
3대 일신교의 소중한 성지에서 방문객은모든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한 인간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은 회개의 공간이다.

평화의 개념은 고대 가나안 지방의 신인 샬림 (Shalim)을 모시는신전에서 유래했고, 성경에서는 ‘예루샬라임 (Yerushalaim)‘이라는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랍어 알꾸두스(Al Qudus)는 ‘신성한 도시‘라는 뜻이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아!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마비되어 더 이상 현을 연주할 수 없어도 좋다네.

내 생각, 내 기억에서 네가 잊혀진다면

내 혀가 굳어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어도 좋다네.

(<시편> 136: 1-6)

이슬람의 예루살렘 형성과 의미

이슬람에서도 예루살렘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성지다. 이슬람의 역사적 전승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621년경 신의 부름을 받고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꿈의 여행(이스라isra)을 하고 승천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내려온 사건(미라즈mi’raj)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 예루살렘의 가장 상징적인 종교 유적은 단연 황금색 돔이빛나는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압둘말리크 왕에 의해 건축되었다. 무슬림들은 이곳이 무함마드가 신의 부름을 받고 승천한 장소라고 믿는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번제로 바쳤던 자식이 이삭이고, 꾸란에서는 그 자식이 이스마엘로 바뀌어 있다. 이슬람에서는 장자의 개념을 앞세우고 기독교에서는 적자의 적통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1099년, 예루살렘은 결국 십자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서양사에서는 이를 1차 십자군 전쟁이라고 한다. 실상은 성전(聖戰)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잔혹한 학살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던 주민들(대부분 무슬림과 유대인)은 남김없이 학살당했다.

예루살렘은 88년간의 기독교 지배를 종식하고 1187년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장군(1137~1193)에 의해 다시 이슬람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끔찍한 보복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던 성안의 기독교인들은 놀라운 관용을 경험했다. 폭력이나 복수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떠나고 싶은 사람은 일정한 세금을 내고 모든 재산과 소지품을 챙겨 떠날 수 있었고, 머물러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생명과 재산, 예배 장소를 보장해주었다. 살라딘이 이슬람 역사에서보다 유럽 역사에서 크게 칭송받는 배경이다.

그 후에도 일시적으로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을 차지한 적이 있지만, 12세기 이후 예루살렘은 줄곧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1516년 셀림 1세의 점령 이후부터는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술레이만은 솔로몬의 이슬람식 이름이다. 솔로몬의 신전을 또 다른 이슬람의 솔로몬(술레이만)이 복원하고 정비했다는 것도 역사의 매력이다.

이슬람과 유대교라는 두 이질적인 종교와 민족이 1000년 이상 공생해온 인류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아랍과 유대인이 서로 반목하고 화합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돌변한 것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이니 고작 7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장한 분열과 갈등의 불행한 산물이다.

국제법상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하에 두는 완충 도시인데 이스라엘이 이를 위반하고 미국이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2세가 일찍이 주창한 대로 예루살렘은 어떤 특정 민족이나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일신교의 공동 성지로서 공존과 화해의 상징 도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좁은 성채 공간에 다양한 사람들이 4개로 나뉜 구역에서 각각의 신앙과 의례,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수천 년간 살아가고 있다. 성안은 무슬림 구역, 크리스천 구역, 아르메니아 구역, 유대교 구역으로 구분된다. 편의상 구분일 뿐 거주민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이스라엘 당국이 문제다. 20세기 이후 정치적 시오니즘에 물들어 "모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자들의 후손"이라는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 갈등과 분쟁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영적 고향으로 남아 있어야 할 팔레스타인 땅을 현실적으로 되찾아야 할 국가 건설지로 치환하면서 모든 비극이 잉태되었다.

"저 앞마당에서 우리는 함께 공차고 놀았어요. 친구가 유대인인지, 아르메니아인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죠. 그저 깔깔대고 웃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함께 놀던 친구들이었으니까요."

다마스커스"는 여전히 많이 아프다.
아랍 민주화 시위 이후 2011년부터 시작된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와12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삶의 기반이 초토화되었다.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 이제 겨우 안정기를 맞이하고 있다.
독재자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이 러시아와 이란 등의 지원으로정권 연장에 성공했고, 민주화와 개방을 꿈꾸던국가의 미래는 상당 부분 후퇴하게 되었다.
다마스커스는 최초의 아랍 왕조인 우마이야 시대의 수도였고,
가장 아랍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많은 이슬람의 역사적 성소가 자리하고 있어서이곳을 찾아오는 무슬림 순례자들에게 다마스커스는
‘낙원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꿈의 도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종교적 애틋함은 중세 에스파냐 출신의 무슬림 여행가이븐 주바이르(Ibn Zubayir, 1145∼1217) 의 여행기 《리흘라>에서도생생하게 전달된다. "진정한 낙원이 천국에 있다면,
지상의 낙원은 틀림없이 다마스커스일 것이다."
성스러움이 깃든 카시온 산에 올라 다마스커스를 내려다보면800년 전 이븐 주바이르의 탄성이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 표준 외국어 표기법에서는 현지어대로 적는 원칙에 따라 ‘다마스쿠스‘로 표기한다고 돼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현지어로는 디마스크, 시리아 지역은 샴이라 불린다. Damascus는라틴어(영어식 표기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마스커스로 읽어야 한다. 이를 다마스쿠스로읽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공존과 화해를 실천한 중동의 진주  
다마스커스는 비잔틴 제국의 아시아 수도로서 당시의 찬란한 기독교(동로마교회) 전통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중동의 대표적인 종교 공존의 도시다. 지금은 전쟁과 폐허의 연기만이 자욱하지만, 오랜 역사와 문명이 중첩되어 있고, 공존과 화해라는 덕목을 실천한 ‘중동의 진주’다. 그만큼 수많은 스토리와 다양성이 켜켜이 쌓인 향기롭고 영롱한 도시다. 5000년 전 고대 인류 문명이 태어난 곳이자, 로마와 이슬람 문명이 화려하게 꽃피었던 도시다.

역사적으로 다마스커스는 지중해와 아라비아 사막의 내륙을 잇고,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남북의 물류가 거쳐가는 전략적인 요충지였기에 5000년 오리엔트 역사에서 항상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일상으로 만나는 문화 접점

"서로 다른 종교를 믿지만, 우리는 똑같은 아랍인이고 시리아인이에요. 내 모국어는 아랍어이고 내 조국은 시리아죠. 무슬림은 내 형제이고 내 이웃이에요. 그래서 정숙의 상징인 히잡은 나에게도 정숙의 상징이죠."

눈물 나도록 고맙고 감동적인 말이었다.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야만과 탐욕의 시대에, 그 소녀의 마음은 영롱한 여름 석류와도 같았다.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다마스커스를 인류의 큰 스승으로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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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꿈행자

수학자들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 간의 관계를 다룬다.
-푸앵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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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자들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 간의 관계를 다룬다.
-푸앵카레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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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4-02-08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라이트 쎈에 저런 문구가 써 있나요?^^ 와! 멋진 말이네요.
사물이 아닌 사물관의 관계라..


bookholic 2024-02-1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들이 싫어하는, 집에서 자주 보이는 책을 여기서 보니 반갑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도시는 이슬람 문명의 모태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 | 이희수 저

참 많이 돌아다녔다.

튀르키예(옛 터키)만 169번을 다녀왔으니 이슬람권 전역은 족히 200회 이상 다녀왔을 것이다.

세계적인 통계조사기관인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의 발표에 의하면 이슬람을 믿는 인구는 20억 명을 넘어섰다(2021년도 기준).

이슬람 국가는 유엔 회원국 기준으로 57개국에 이른다. 지구촌 4분의 1에 해당하는 최대 단일 문화권이다.

공동체의 가치가 살아 있는 곳
어느 사회나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

이처럼 같은 이슬람 국가라고 해도 그 모습이 다양하고,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슬람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편견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이제는 이슬람 문화를 찬찬히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선하고 고마운 사람들을 만나서 감동받는 일이 훨씬 더 많다. "다정함은 인류 진화의 열쇠"라는 진화인류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선한 마음은 인류공동체의 참모습이다.

만나보지 않고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 편견과 오류가 생겨난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나쁜 습성이 고정관념이다.

그들에게는 가족 중심 생활과 공동체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 그들은 "내일 당장 굶는 한이 있어도 오늘 도움을 청하거나 찾아온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지 않는" 사람들이다.

"부자의 곳간에 곡물이 한 톨이라도 남아 있는데 그 마을에 굶주리는 사람이 생긴다면 구성원 전체가 천국에 들지 못한다"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물질적 탐욕에 함몰되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놓쳐버린 삶의 가치를 그들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이슬람 도시의 매력
이슬람은 상업 중시 종교로 출발해서 역동적인 교류가 빈번한 도시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렸다.

단단한 도시 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교역과 정복이라는 두 축으로 천년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카이로, 이스탄불, 다마스커스, 바그다드. 이스파한, 라호르, 아그라, 사마르칸트, 팀북투.

"라호르를 보지 않으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과 같고, 이스파한을 놓치면 지구의 절반을 놓친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이슬람에 큰 신세를 지고 있다. 이슬람은 중세에는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과 문화를 향유한 문화권이었다. AI 시대의 핵심 요소는 알고리즘(Algorithm)이다.

알고리즘을 창안한 이는 9세기 페르시아 수학자 알콰리즈미(Al-Khwarizmi)로, 알고리즘이라는 용어는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시장, 뒷골목, 카페에서 만나는 무슬림의 진짜 모습

이슬람 도시 어디에서나 빛바랜 고서의 향이 그득하다. 나는 오래된 헌책방을 좋아한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긴다.

역사는 기록의 결실이다. 빛바랜 종이 위에 선명한 대나무 펜으로 써 내려간 지식의 총량이 그 도시의 품격이고 존재 가치다.

책방 주인이 건네주는 차 한잔 마시면서 두 시대, 두 주인공은 책을 통해 영적으로 접선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슬람 도시를 방문하면 반드시 바자르(시장)로 달려간다. 내게 바자르는 시간이 쌓아놓은 역사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삶의 고단함과 한숨 소리, 왁자지껄한 담소와 노랫소리가 그득한 공동체 공간이다.

이슬람 도시에서는 커피 원두를 가루째 넣고 끓이는 튀르크 커피를 마신다. 인류가 처음 이스탄불의 ‘차이하네(Cayhane)’ 카페에서 마시던 바로 그 커피다.

카페는 여론 형성의 장이자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민초와 혁명가들의 저항의 산실이었다.

사람들은 카페에 모여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군주와 지방 영주의 정책이나 행동을 비판했다. 이런 연유로 한때 이슬람 세계에서 카페가 폐쇄되기도 했다.

차이와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삶의 태도를 다잡게 된다.

이슬람력 12월이 시작되면 수백만 무슬림은고향을 떠나 메카로 모여든다.
순례객들은 신을 간절히 부르며 회개하고 찬양한다.
"오! 주여, 제가 왔나이다. 자비롭고 자애로우신,
만물의 주인이신 당신을 찾아 수만 리 길을 헤쳐 왔나이다.
저의 죄를 사해주시고 천국에서영원히 당신 곁에 머물게 해주시옵소서."
Labbaik Allahumma labbaik.
Labbaik la sharika laka labbaik.

이슬람의 최고 성지 메카는 신성한 도시이자 금지된 도시다. 이슬람교도인 무슬림만 출입이 허용된다.

메카(Mecca)는 아랍어 도시 명칭 마카(Makkah)의 라틴어 표기이다. 꾸란에서는 이 도시를 바카(Bakkah)라고 부른다. "진실로 인류를 위한 신앙의 첫 번째 집은 바카에 지어졌으니…."(꾸란 3:96).

공식 표기는 마카 무카라마(Makkah Mukarramah)다. ‘신성한 도시’라는 의미다.

성경이나 역사 기록에서 성 파란(Faran, Paran), 티하마(Tihamah)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려왔지만, 신앙심 깊은 무슬림에게 메카는 ‘우물꾸라(Umm al-Qurā)’란 이름으로 더 친숙하다. ‘거주자들의 어머니’란 뜻이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정통 승계를 본처 사라에게서 태어난 적자인 이삭으로 보지만, 꾸란에서는 그 적통성을 장자인 이스마엘로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공통 조상으로 보면서도 두 종교가 계보를 달리하는 결정적 분기점이다. 그만큼 메카는 아랍인이나 무슬림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

험난한 교역 과정에서 경험했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만연한 부조리와 세기말의 윤리적 타락’을 깊이 고뇌하던 그는 20년에 걸친 오랜 명상과 기도 끝에 메카에서 610년 알라로부터 첫 계시를 받아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완성하게 된다. 메카가 인류 공동체에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빛을 던져준 성스러운 도시가 된 배경이다.

이슬람은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 성서의 인물들을 모두 훌륭한 예언자, 선지자로 받아들이고, 중재자나 대속자 없는 유일신(알라)과 인간의 직접 소통과 구원을 주장했다.

카바신전,
비무슬림에게는 금지된 하느님의 집

메카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모스크가 있다. 638년에 세워진 마스지드 알하람(Masjid al-Haram) 사원이다. ‘금지된 사원’이란 의미다.

꾸란에 의하면 이스마엘이 어머니 하갈과 광야로 내쫓긴 이후 메카에 정착하고, 다시 돌아온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느님의 집이자 신앙의 중심으로 카바신전을 지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은 카바신전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일곱 번 돌았다. 이 일곱 번 도는 의식을 ‘타와프’라 하는데, 오늘날 성지순례의 핵심 의례가 되었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회개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신을 끌어안고 살아가면서 신의 뜻과 어긋나는 길을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한번은 가게 주인에게 왜 그렇게 허술하게 그물을 얹어놓느냐고 물었다. 상인은 "가져가지 말라는 뜻보다는 지금 주인이 없으니 거래할 수 없다는 의미이지요"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나는 숙연해졌다.

순례가 시작되면 흰 물결이 파도를 이룬다. 한 생애를 정리하며 천국을 준비하는 순례자들의 기도 소리가 거룩한 합창을 이룬다. 순례기간은 둘히자(이슬람력 12월) 8일에서 12일까지 5일간이다.

메디나, 예언자를 만나러 가는두 번째 순례 여정

신앙이 충만한 상태에서 많은 순례자는 메카를 떠나 350킬로미터 북쪽 메디나(Medina)로 이동한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모스크가 있는 곳이고 이슬람이 뿌리내린 도시다.

무함마드만큼 평가절하되어 있고, 심지어 악의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는 종교 창시자도 드물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 기적을 행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사후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나는 죽어서 썩어 한 줌 흙으로 사라질 뿐이다. 나를 기억할 어떤 형상과 이미지도 만들지 말라. 오직 하느님, 유일신이고 절대자이신 그분만 믿고 그분만 따르라."

빌딩숲으로 변해가는 영성의 도시

오늘날 메카에는 대도시의 세속이 많이 스며들었다. 첨단기술과 과학을 앞세운 편의라는 무기 앞에 영적인 신앙의 영역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가장 다처율이 높은 아랍 산유국에서도 다처 비율은 6퍼센트 정도다. 노후를 보장할 정도의 결혼 지참금을 아내에게 지급해야 하고, 모든 아내의 동의를 받고 나서 새로운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경제적 문제나 상속 문제 등이 얽혀 있어 일부다처가 그리 쉽지 않겠다 싶다.

이제 메카는 무슬림에게 영성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재미와 편의를 찾아 떠나는 새로운 순례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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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구하고 천착하는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을 이해해보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언젠가 우리는 지금과 다른 모습으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게 되겠지만, 그렇게 먼 미래에도 누군가는 외롭고 고독하며 닿기를 갈망할 것이다.

어디서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서로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싶다. 앞으로 소설을 계속 써나가며 그 이해의 단편들을, 맞부딪히는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찾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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