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의미다. 그런데 예루살렘만큼 폭력과 전쟁으로 자주 뉴스에 오르내리는 도시도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한국인이 성지순례를 위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십자가 대속을 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는 기적을 보여주신 절절한 장소들, 특히 예수의 무덤이 있는 성묘교회가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는 모두가 간절하다.
애환과 눈물이 가득하다.
예루살렘은 박해와 고통의 유랑으로 역사를 써 내려간유대인의 영적인 고향이다. 인류의 원죄를 혼자서 짊어지고만민평등과 보편구원이라는 인류 최고 최대의가르침을 희생으로 증거한 예수의핏빛 고난의 발자취가 영롱한 체취로 되살아나는 성소다.
621년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는 한밤중 메카에서예루살렘으로 날아와서 이곳에서 승천해서신을 만나고 이슬람이란 종교를 구체화한다.
3대 일신교의 소중한 성지에서 방문객은모든 집착과 욕심을 내려놓고 겸손한 인간으로 되돌아간다.
그곳은 회개의 공간이다.

평화의 개념은 고대 가나안 지방의 신인 샬림 (Shalim)을 모시는신전에서 유래했고, 성경에서는 ‘예루샬라임 (Yerushalaim)‘이라는이름으로 등장한다. 아랍어 알꾸두스(Al Qudus)는 ‘신성한 도시‘라는 뜻이다.

바빌론 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 흘렸다.

아!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마비되어 더 이상 현을 연주할 수 없어도 좋다네.

내 생각, 내 기억에서 네가 잊혀진다면

내 혀가 굳어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어도 좋다네.

(<시편> 136: 1-6)

이슬람의 예루살렘 형성과 의미

이슬람에서도 예루살렘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성지다. 이슬람의 역사적 전승에서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621년경 신의 부름을 받고 메카에서 예루살렘으로 꿈의 여행(이스라isra)을 하고 승천하여 하느님을 만나고 내려온 사건(미라즈mi’raj)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 예루살렘의 가장 상징적인 종교 유적은 단연 황금색 돔이빛나는 ‘바위의 돔(Dome of the Rock)‘이다. 우마이야 왕조의 압둘말리크 왕에 의해 건축되었다. 무슬림들은 이곳이 무함마드가 신의 부름을 받고 승천한 장소라고 믿는다.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이 번제로 바쳤던 자식이 이삭이고, 꾸란에서는 그 자식이 이스마엘로 바뀌어 있다. 이슬람에서는 장자의 개념을 앞세우고 기독교에서는 적자의 적통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1099년, 예루살렘은 결국 십자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서양사에서는 이를 1차 십자군 전쟁이라고 한다. 실상은 성전(聖戰)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잔혹한 학살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안에 거주하던 주민들(대부분 무슬림과 유대인)은 남김없이 학살당했다.

예루살렘은 88년간의 기독교 지배를 종식하고 1187년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 장군(1137~1193)에 의해 다시 이슬람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끔찍한 보복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떨던 성안의 기독교인들은 놀라운 관용을 경험했다. 폭력이나 복수극은 벌어지지 않았다.

떠나고 싶은 사람은 일정한 세금을 내고 모든 재산과 소지품을 챙겨 떠날 수 있었고, 머물러 살고 싶은 사람에게는 생명과 재산, 예배 장소를 보장해주었다. 살라딘이 이슬람 역사에서보다 유럽 역사에서 크게 칭송받는 배경이다.

그 후에도 일시적으로 기독교 세력이 예루살렘을 차지한 적이 있지만, 12세기 이후 예루살렘은 줄곧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1516년 셀림 1세의 점령 이후부터는 오스만 제국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술레이만은 솔로몬의 이슬람식 이름이다. 솔로몬의 신전을 또 다른 이슬람의 솔로몬(술레이만)이 복원하고 정비했다는 것도 역사의 매력이다.

이슬람과 유대교라는 두 이질적인 종교와 민족이 1000년 이상 공생해온 인류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발견하기 어렵다. 아랍과 유대인이 서로 반목하고 화합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돌변한 것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이니 고작 7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장한 분열과 갈등의 불행한 산물이다.

국제법상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하에 두는 완충 도시인데 이스라엘이 이를 위반하고 미국이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 바오로 2세가 일찍이 주창한 대로 예루살렘은 어떤 특정 민족이나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일신교의 공동 성지로서 공존과 화해의 상징 도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좁은 성채 공간에 다양한 사람들이 4개로 나뉜 구역에서 각각의 신앙과 의례,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수천 년간 살아가고 있다. 성안은 무슬림 구역, 크리스천 구역, 아르메니아 구역, 유대교 구역으로 구분된다. 편의상 구분일 뿐 거주민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이스라엘 당국이 문제다. 20세기 이후 정치적 시오니즘에 물들어 "모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자들의 후손"이라는 신화를 역사적 사실로 만들어 갈등과 분쟁을 유발했기 때문이다. 영적 고향으로 남아 있어야 할 팔레스타인 땅을 현실적으로 되찾아야 할 국가 건설지로 치환하면서 모든 비극이 잉태되었다.

"저 앞마당에서 우리는 함께 공차고 놀았어요. 친구가 유대인인지, 아르메니아인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고 의미도 없었죠. 그저 깔깔대고 웃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함께 놀던 친구들이었으니까요."

다마스커스"는 여전히 많이 아프다.
아랍 민주화 시위 이후 2011년부터 시작된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와12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삶의 기반이 초토화되었다.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 이제 겨우 안정기를 맞이하고 있다.
독재자 바샤르 아사드 대통령이 러시아와 이란 등의 지원으로정권 연장에 성공했고, 민주화와 개방을 꿈꾸던국가의 미래는 상당 부분 후퇴하게 되었다.
다마스커스는 최초의 아랍 왕조인 우마이야 시대의 수도였고,
가장 아랍적인 도시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많은 이슬람의 역사적 성소가 자리하고 있어서이곳을 찾아오는 무슬림 순례자들에게 다마스커스는
‘낙원의 향기‘가 피어오르는 꿈의 도시로 남아 있다.
이러한 종교적 애틋함은 중세 에스파냐 출신의 무슬림 여행가이븐 주바이르(Ibn Zubayir, 1145∼1217) 의 여행기 《리흘라>에서도생생하게 전달된다. "진정한 낙원이 천국에 있다면,
지상의 낙원은 틀림없이 다마스커스일 것이다."
성스러움이 깃든 카시온 산에 올라 다마스커스를 내려다보면800년 전 이븐 주바이르의 탄성이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다.
* 표준 외국어 표기법에서는 현지어대로 적는 원칙에 따라 ‘다마스쿠스‘로 표기한다고 돼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현지어로는 디마스크, 시리아 지역은 샴이라 불린다. Damascus는라틴어(영어식 표기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다마스커스로 읽어야 한다. 이를 다마스쿠스로읽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공존과 화해를 실천한 중동의 진주  
다마스커스는 비잔틴 제국의 아시아 수도로서 당시의 찬란한 기독교(동로마교회) 전통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중동의 대표적인 종교 공존의 도시다. 지금은 전쟁과 폐허의 연기만이 자욱하지만, 오랜 역사와 문명이 중첩되어 있고, 공존과 화해라는 덕목을 실천한 ‘중동의 진주’다. 그만큼 수많은 스토리와 다양성이 켜켜이 쌓인 향기롭고 영롱한 도시다. 5000년 전 고대 인류 문명이 태어난 곳이자, 로마와 이슬람 문명이 화려하게 꽃피었던 도시다.

역사적으로 다마스커스는 지중해와 아라비아 사막의 내륙을 잇고,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남북의 물류가 거쳐가는 전략적인 요충지였기에 5000년 오리엔트 역사에서 항상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일상으로 만나는 문화 접점

"서로 다른 종교를 믿지만, 우리는 똑같은 아랍인이고 시리아인이에요. 내 모국어는 아랍어이고 내 조국은 시리아죠. 무슬림은 내 형제이고 내 이웃이에요. 그래서 정숙의 상징인 히잡은 나에게도 정숙의 상징이죠."

눈물 나도록 고맙고 감동적인 말이었다.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야만과 탐욕의 시대에, 그 소녀의 마음은 영롱한 여름 석류와도 같았다.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다마스커스를 인류의 큰 스승으로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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