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아랍 제국,우마이야 왕조의 수도 다마스커스

메카에서 출발한 이슬람은 메디나 시대를 거쳐 661년 드디어 다마스커스에 최초의 아랍 왕조를 탄생시켰다. 우마이야 왕조(661~750)다. 그 과정에서 이슬람은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누구를 후계자인 칼리파로 정할 것인가를 두고 치열한 정치 투쟁이 벌어졌고, 무함마드의 유일한 부계 혈통이자 사위였던 알리가 후계 논쟁에서 밀리다가 656년 네 번째 칼리파가 되었다.

그러나 시리아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던 무아위야(재위 661~680) 장군은 3대 칼리파이자 그의 사촌 우스만을 살해한 데 불만을 품고 알리의 칼리파 승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661년 알리가 극단적인 이슬람 종파인 하와리지에 의해 살해당한 후, 무아위야는 스스로 칼리파로 자칭하며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하는 우마이야 왕조를 새롭게 열었다.

관용과 화합의 상징, 살라딘의 묘 앞에서

다른 출구로 나오니 핑크빛 돔 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 통치자인 술탄이기에 앞서 용기와 지혜, 덕을 겸비한 장군이었던, 십자군 전쟁의 아랍 영웅 살라딘*의 묘다.

유럽이 성지 탈환을 목적으로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침공했을 때, 무슬림과 유대인 등 이교도는 대량 살육을 당했다. 이교도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교황청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말이 성스러운 전쟁이지, 1099년(1차 십자군 전쟁)에 예루살렘 성을 빼앗은 뒤 벌어진 나머지 여덟 차례의 전쟁은 주로 동방 여러 나라나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 치고받는 탐욕스러운 약탈 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십자군의 포위를 세 차례나 물리치고 성채를 지켰던 다마스커스 사람들은 살라딘을 중심으로 다시 힘을 규합해 십자군이 차지하고 있던 본거지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살라딘: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로, 살라딘은 유럽식 호칭이며 본명은 ‘살라흐 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다. 북아프리카에서 시리아·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한편, 새로운 군사 기술을 도입하여 1187년 팔레스타인 북동부 하틴(Hattin) 전투에서 십자군을 무찌르고 약 90년 만에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특히 그는 교양 있고 예의 바르며, 가장 강력하고 관대한 왕으로, 이슬람 세계는 물론 유럽에서도 영웅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187년 10월 2일 금요일,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한 살라딘은 성안에 갇혀 보복의 두려움에 떨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고, 몸값 10디나르만 내면 재산을 챙겨 성안을 탈출하도록 허용했다. 살라딘의 관용에 기독교인들은 머리를 숙였고 존경을 표했다.

바로 그 시각 이스라엘은 시리아를 향해 시도 때도 없이 미사일 폭격을 가하고 있고, 시리아에서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왜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가. 살라딘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강하게 솟구쳐 올랐다.

바그다드는 이슬람의 영광과 좌절을함축적으로 상징하는 도시다.
티그리스강 변의 바그다드는고대 아카드 왕국의 바빌론과 사산조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크테시폰과 맞닿아 있는 고도 중의 고도다.
이슬람 제국의 번성기라고 할 수 있는압바스 대제국(750~1258)의 500년 수도로서100만이 넘는 인구를 가진 당대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세계 각지에서 인재가 몰려들었고유프라테스-티스리스강을 끼고 자리한천혜의 입지 덕분에 세상의 물자와 지식, 정보가 넘쳐났다.
이 시기 바그다드는 ‘마디나트 알살람(Madinat al-Salam)‘,
즉 평화의 도시로 불렸다. 바그다드는 오늘날에도 이슬람교시아파의 중심지로, 이웃한 카르발라를 중심으로핵심적인 시아파 성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중세는 이슬람의 시대였다. 그 중심이 바그다드였다. 유럽이 스스로의 표현대로 ‘암흑의 시대’라는 깊은 질곡에 빠져 있을 때,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과 문명 시대를 열어준 첨단 도시가 압바스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였다. 10세기 한때 인구 120만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도시로서 당시 인류 문명의 최첨단을 선도해 갔다.

세계 문명을 주도하는 학문의 전당은 ‘바이트 알히크마(Bait ul-Hikma, 지혜의 집)’였다.

도시 안과 밖을 연결하는 4개의 문은 쿠파 문, 호라산 문, 다마스커스 문, 바스라 문으로 명명되었다. 각 성문을 나서면 향하게 되는 도시의 이름을 붙였다.

카르발라의 비극

바그다드를 이야기하면서 시아파 최대의 성지 카르발라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바그다드에서 남서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다. 680년은 이슬람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 해다. 이슬람의 창시자이자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의 외손자 후세인이 그의 가족들과 함께 잔혹하게 처형당한 사건이다. 그 장소가 다름 아닌 카르발라였다.

바그다드는 9세기 중엽에 이르면 세상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모든 것을 갖춘 대도시로 우뚝 빛났다. 골목마다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카페 같은 공간이 들어섰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바자르(시장)가 있어 상품과 정보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여유로움이 가져다주는 해학과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유럽에서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진 《천일야화(千一夜話)》의 주요 무대가 된 것도 이 시기의 번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1401년 티무르가 동방 원정 과정에서 바그다드를 공격함으로써 또 한 번 참상을 겪었다. 이때 약 2만여 명의 바그다드 시민이 학살되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바그다드는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이곳에는 사원도, 신도도 없고, 기도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시장도 열리지 않는다. 야자수 대부분은 말라비틀어졌다. 이곳은 이제 도시라고 부를 수 없는 상태다." 아랍 역사학자 알 마크리지(Al-Maqrizi, 1364~1442)의 전언이다. 이제 바그다드는 이 도시를 탐하는 수많은 왕조를 위한 보급기지나 지방 소도시로 전락했다.

1001일 밤이나 계속되는 《천일야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년은 바그다드에 머물러야 할 것 같다. 그만큼 매력과 호기심이 넘쳐나는 도시다. 《천일야화》의 주무대는 바그다드이지만, 스토리 콘텐츠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동의 파리‘라 불리는 두바이는 아랍에미리트를 대표하는 토후국이자 국제무역 중심 도시이지만 석유가 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인구 수천 명에 불과하던 자그마한 어촌이 반세기 만에 최고의 첨단 창의 도시로 우뚝 섰다.
두바이에는 3개의 브랜드만 존재한다.
"The Best, The Most, The First." 세계 최고, 세계 최대,
세계 최초라는 세 브랜드만으로 지구촌이 부러워하는21세기 개혁 도시 모델을 창출해냈다.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오만, 바레인, 카타르 등 다른 아랍 왕정 산유국들은두바이 성공을 모델로 삼아 미래 도시를 설계해나가고 있다.
두바이 성공의 배경에는 ‘오아시스 싱크탱크‘로 불리는 2000여 명의 글로벌 브레인이 창안해내는 탁월한 콘텐츠도 있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매직 리더십의 주인공 무함마드 막툼 왕세자의 헌신과 역할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술과 돼지고기가 허용되는 아랍 도시

슈퍼마켓에서는 술을 팔고 고급 호텔 레스토랑 뷔페 코너에서는 돼지고기 음식이 나온다. 다른 문화와 가치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고 존중이라 하지만 자본주의의 위력 앞에 무릎 꿇는 모습이 정상일 리는 없어 보인다. 두바이가 더 이상 아랍 도시가 아니라 글로벌 도시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전통시장에서 만나는 또 다른 두바이

아랍 커피의 본산지에 왔으니 쓰디쓴 모카커피 오리지널 한 잔 마셔보고 싶으나, 스타벅스 커피와 인스턴트 커피에 밀려 어느 카페에서도 튀르키예 커피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카르다몸과 향을 섞어 우려낸 은은한 아랍 커피로 기분을 돋우며 다시 무더운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제 텐트를 칠 공간마저 부동산 개발로 빼앗긴 두바이 사람들은 모래 대신 아파트의 화려한 카펫 위에서 전혀 새로운 밤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꿈속에서나마 신드바드 꿈을 꾸면서 옛날을 희미하게 기억하려나?

오만은 아프리카와 유럽, 인도양을 잇는 해상 교역의 중심지였다.
고대에 이 지역에서 해상 활동을 주도한 민족은 예멘인이었다.
‘솔로몬과 시바‘로 유명한 시바국의 여왕은 현재 예멘의 수도인사나 근처에 도읍해 해상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장미수, 안식향, 유향을 비롯한 진귀한 향료와 모카커피는지금도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오만의 주요 교역품이다.
오만인은 선박 제조 기술을 개발해 8~9세기경 아랍인이 주도하는해양 교통 혁명을 일으켜 동서의 만남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들은 뛰어난 항해 기술과 앞선 과학 문명을 바탕으로한반도 신라에까지 진출했다.
무엇보다 오만은 세계 최대의 최고급 유향 산지다.
아라비아반도 남쪽, 인도양을 바라보는오만의 항구 살랄라에는 향료 냄새가 그득하다.
살랄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인천에서 두바이까지 가서오만의 수도 무스카트에 도착한 후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물론 시간이 되면 육로도 가능하지만12시간이 넘게 걸린다. 살랄라 도심을 벗어나사막으로 몇 시간 낙타를 타고 들어가야 비로소유향나무를 만날 수 있다. 메마른 사막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해풍의 습기를 머금어 생존을 유지한다.
유향나무에서 흘러내리는 하얀 수액이 응고된 것이 유향이다.
날카로운 금속 끝으로 나무껍질을 가볍게 벗겨내니우유 같은 하얀 수액이 망울망울 맺힌다.
송진 같은 독특한 향이 은은하게 코에 스며든다.

살랄라는 한때 고대 로마나 오늘의 뉴욕처럼 번성했던 세계적 교역 도시였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에 이르는 500년 동안 인도에서 출발해 로마와 지중해로 흐르는 향료의 젖줄은 살랄라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곳의 유향과 몰약이 인도에서 몰려오는 육계, 후추, 육두구, 정향, 백단향 같은 다양한 향료와 함께 지구촌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런 점에서 살랄라는 인류의 입맛과 의약품, 삶의 형태를 뒤바꾼 문화혁명의 진원지였다.

신라 사찰을 정화한 아라비아 유향

유향은 신라에도 전해졌다. 불교 사찰에서 향불이 널리 쓰이면서 향료문화의 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인류 역사는 오랫동안 향료와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한 교역과 전쟁의 시기를 맞게 된다. 금에 맞먹는 향신료를 찾다가 신대륙을 발견하게 되었고, 험난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를 찾아 나섰다. 그로 인해 인류의 삶은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다.

고대 오만은 조선술의 선진국이었다. 교역의 지역답게 수르(Sur) 항구에서는 일찍부터 교역선 제조가 발달했다. 오만은 신드바드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유향 교역으로 출발한 국제 경제 경험과 비즈니스 노하우로 주변 아랍 국가와 로마는 물론 인도와 멀리 중국과 한반도에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튀르키예의 역사 도시 이스탄불을 일컬어
‘인류 문명의 살아 있는 거대한 옥외 박물관‘이라고 표현했다.
최근까지 연구된 결과와 학문적 결실을 종합해보면토인비의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제국과 수많은 군소 왕국이 거쳐가면서 이스탄불은그야말로 지구 속의 작은 지구, 고대-중세의코즈모폴리턴이었다. 이스탄불 역사지구의베야지트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 안에인류가 이룩한 5000년 역사의 문화유산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있기 때문이다. 트로이, 히타이트, 프리기아, 아시리아,
페르시아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에서부터그리스·로마 문화, 초기 기독교 문화, 비잔틴 문화,
그리고 이슬람 문화의 진수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는 한 점에서 서로 만나고 있다.

일생에 딱 한 번 여행할 수 있다면,이스탄불!

가보고 싶은 곳이 참으로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20여 년 전만 해도 꿈꾸기 어려웠던 세상 구경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왔다. 그렇다고 가고 싶은 곳에 다 가볼 수도 없다. 일생에 딱 한 곳을 갈 수 있다면 단연 이스탄불이다. 주저없이 나는 이스탄불을 추천한다. 그곳은 세상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의 요람인 메소포타미아에 오리엔트 문화가 깊이 뿌리 내린 곳이고, 그리스-로마-비잔틴-셀주크-오스만 제국 등이 연이어 화려한 꽃을 피운 무대다. 인류 문명 5000년 역사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과거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귀한 공간이다. 유적이 있고, 자연이 있다.

육상 실크로드의 끝이고 해상 실크로드의 시작이었다. 북아프리카나 로마에서 실려 온 물품이 이곳에서 동방 상인들에게 건네졌다. 떠들썩한 흥정과 환락과 사치가 있었고, 전 세계 미녀들이 몰려들어 흥청거렸다. 그리하여 피부색이 다른 각양의 민족, 수많은 종교와 사상, 신화가 이스탄불이라는 용광로에서 하나가 되어 공존과 화해라는 문화를 일구어냈다.

326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곳을 로마의 새 수도로 정하면서 화려한 도시 콘스탄티노플로 태어나게 된다. 1000년간 종교와 사상의 중심지이자 세계 부의 상징이었던 인구 100만의 콘스탄티노플이 만들어낸 문화유산은 인류가 이룩한 가장 눈부신 업적이었다.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여야 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동로마 교회(그리스 정교)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이 도시는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결국 성문 열쇠를 내주고 말았다.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팔레올로고스는 처연하게 결사 항전하며 자신의 모든 영예를 마쳤지만 오갈 데 없는 시민들은 새로운 술탄을 맞아 일상을 이어가야만 했다.

1935년 튀르키예 공화국이 ‘성 소피아 성당 특별법’에 의해 박물관으로 선포하면서 정교와 이슬람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남았다. 아라베스크 문양이 번뜩이는 꾸란 장식 뒤로 회칠을 벗겨낸 장엄한 기독교 성화들이 찬연한 금빛을 발하고 있다. 문화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관용의 미덕 앞에 독선에 빠진 현대인은 숙연함을 느끼게 된다.

성 소피아는 2020년 7월 10일, 또다시 정치적 소용돌이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이슬람 성향이 강한 튀르키예 정부가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모스크로 개조하고 이슬람식 종교의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물론 예배시간 이외에 외부인의 관람을 허용하고 성당 내 기독교 유물을 보호하고는 있지만 성 소피아 성당은 다시 한번 역사의 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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