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4월 막 봄철이 시작되는 어느 날 유학을 위해 이스탄불 이을드즈 공원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스탄불을 찾았다. 그리고 이스탄불과 헤어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올해 169번째. 여권에 찍힌 입국 도장 기준이다. 매년 네다섯 차례 다녔나 보다. 대체 무슨 매력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많다. 무언가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겠는데, 한마디로 그 매력을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내 말 한마디에 이스탄불을 그렇게 평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탄불은 그냥 그런 도시가 아니다.
나는 특히 슐레이마니예 모스크 뒷골목을 좋아한다. 가장 튀르키예적이고 가장 이슬람다운 향취가 가득하다.
너무나 인간적인 튀르키예 사람들
끊임없는 외세의 간섭과 정치·경제의 불안으로 인해 오늘날 튀르키예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고, 동서 문화의 교차로에 자리하여 동양의 정신에 유럽의 옷을 걸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심성과 문화적 바탕에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두 민족이 비록 아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일구었지만, 오랜 역사적 정통성과 주체적 문화의 계승이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시간쯤 지나 휴게소에 들른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택시 한 대가 우리 버스 앞을 막아서는 거예요.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은 내가 묵은 집 주인 아저씨였어요. 너무 놀라 버스에서 내려 인사를 하러 갔어요. 아저씨는 나를 보자 딸에게 들었다며, 보름 동안 저를 식구로 대접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네, 돈을 받을 수 없다고, 자신의 행복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는 거예요. 제가 드린 돈을 내밀면서 말린 살구 꾸러미까지 주시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니 튀르키예를 다녀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열렬한 튀르키예 팬이 되고 만다.
이스탄불 골목길
이스탄불 골목길에는 사람 사는 정이 넘친다. 골목길 아파트 생활에는 따로 시계가 필요 없다. 일정한 시각에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침 7시, 갓 짠 신선한 양유를 노새 등에 실은 아저씨가 제일 먼저 지나간다. 따로 외치지는 않는다. 노새 목에 달린 딸랑이 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바구니에 줄을 매달아 창문으로 그릇이나 병을 내려주면, 필요한 양을 담아준다. 줄을 당기기만 하면 된다.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 과거와 현재, 낮과 밤이 이어져 하나가 되는 인류 역사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동서 학문의 산실, 이스탄불대학교
국립 이스탄불대학의 웅장한 정문 위에는 라틴어와 아라비아 숫자로 1453년이라는 설립 연도가 새겨져 있다. 1453년은, 1113년간의 동로마 제국 수도에서 오스만튀르크의 수도 이스탄불로 운명이 바뀐 해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튀르크가 병든 비잔틴을 멸함으로써 중세가 종식되고 근세가 열렸다. 튀르크인은 유럽과 동양을 동시에 통치하려는 거대한 이상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의 혼이 어린 옛터에 이슬람식 전문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것이 초기 오스만 왕궁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이스탄불대학의 시초다. 그 뒤 오스만 제국이 600년에 걸쳐 세 대륙에 강대한 위세를 떨치면서, 이스탄불대학은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인류 문화 창출의 산실이 되었다.
옛 튀르키예의 정치·상업 중심지
코냐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 평원에서는 히타이트와 프리기아, 리디아, 페르시아 제국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이 번성했다. 그 토양 위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런데 이슬람 문화를 향유하는 튀르크인들이 이곳에 터전을 잡으면서 아나톨리아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물론 튀르크인들이 1만 년 역사의 아나톨리아반도에 뿌리를 내린 기간은 고작 1000년 정도다. 10세기 말, 셀주크튀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나톨리아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랫동안 그리스·로마 문명의 요람이라 여겨지던 아나톨리아가 전혀 새로운 문명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튀르키예 중부의 비옥한 평원에 위치한고대도시 코나는 11세기 이후(1097~1243) 셀주크튀르크의룸술탄국(Seljuk Sultanate of Rum)의 수도였다. 50년경에는 사도 바울이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했던초기 기독교의 전통이 남아 있는 성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가장 튀르키예다운 도시로 불린다. 중세 이슬람 시기 이후 메블라나라고 불리는이슬람 신비주의 종단의 총본산으로종교적 영성이 가득한 정신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한실크로드 대상(카라반)들이 멀리 동방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기 전에반드시 거쳐가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이런 점에서 코냐 역시 인류 문명의 본류인아나톨리아반도의 문명사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번성했던메소포타미아 상류 문명으로서 고대 왕국은 물론 리디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동로마(비잔틴 등 강대국들의침략과 지배를 고스란히 경험했다. 코냐라는 명칭도 로마시대 이 도시의 이름인이코니움(Iconium)에서 비롯되었다.
그 변곡점은 1071년이었다. 꺾일 줄 모르던 천년 제국 동로마가 중앙아시아에서 진출한 의외의 적에게 허를 찔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1071년 셀주크튀르크와 동로마 사이에 벌어진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다. 중세 최대 규모의 세계대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패배하고 말았다.
만지게르트 전투 승리는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이 아나톨리아에 뿌리를 내리는 역사적 기점이 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8000만이 넘는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정도의 농작물을 이곳에서 생산한다고 하니 정말 은총의 땅이다. 풍성한 식탁과 세계 최고라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넉넉한 인정은 모두 코냐 평원에서 솟아나는 듯하다.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 차탈회위크 유적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 | 이희수 저
신석기시대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문명을 구가했던 차탈회위크는 인류 최초의 계획 도시이자 도시 문명의 뿌리로 여겨진다. 1958년 영국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었으나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1993년부터 영국 고고학자 이안 호들러의 발굴 작업이 25여 년 만에 성과를 내면서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발굴 지점 옆에 원형을 그대로 재현한 진흙집이 있어서 9000년 전 주민들의 삶을 상상해보기에 충분했다.
독수리와 머리 없는 사람의 형상이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정확히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독수리에게 시신을 바치고 하늘과 가까이 다가가려는 하늘 사상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궁금증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신이 내린 유한한 자원을 당대는 물론 후세를 위한 자원으로 여겨 적게 욕망하고 적게 생산하며 살아간 차탈회위크의 생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교훈을 준다.
‘살아 있는 사자’란 음부티라는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태어난 응고르라는 아이가 할아버지 사후에도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면, 산 사람과 똑같이 할아버지를 대하는 개념이다. 즉, 할아버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공동체의 일을 상의하면서 할아버지의 지혜와 경륜을 유지하고 계승한다. 응고르가 죽고 그 마을에 음부티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음부티는 ‘자마니’, 즉 과거의 시간, 망각의 세계로 돌아간다.
메블라나를 만나는 시간
코냐 시내에 들어서자 곧바로 메블라나 기념관으로 달려갔다. 메블라나는 코냐 여행의 핵심이다.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1207~ 1273)는 종교적 관용과 깊은 사랑을 전한 인류의 대스승이었다.
페르시아 태생의 루미는 셀주크 술탄의 요청으로 튀르키예로 와서 이슬람 신비주의의 중요한 갈래인 메블라나 수피즘을 열었다. 아랍어로 쓰인 꾸란은 비아랍권의 일반인이 배우기에는 너무 어려워 신에 대한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 학자들은 명상, 노래, 염원, 수도 생활 등을 통해 신을 만나는 다양한 대중적 방식을 펼쳐 보였다. 루미가 창시한 메블라나 종단은 세마라는 회전춤을 통해 신과 합일하는 독특한 수피즘이다.
유럽 지성계에도큰 영향을 미친 루미의 사상 대스승 메블라나 루미는 인류에게 일곱 가지 교훈을 남겼다.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 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루미의 사상과 낮은 곳을 향한 사랑은 유럽 지성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18세기 작곡가 베토벤, 19세기 대문호 괴테도 직접·간접적으로 루미 사상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지성이었다.
호메이니와 이란 시민혁명
세예드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1902~1989)는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이자, 모함메드 샤 레자 팔레비 왕정의 독재에 맞서 민중혁명을 이끈 정치 지도자이다. 그는 시아파 성지 도시 콤에 사는 평범한 성직자였으나 1963년 팔레비 국왕이 추진한 이슬람 모스크의 토지와 재산 몰수, 여성 참정권 허용 정책에 반대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리고 1979년 2월 이란으로 귀국해 이슬람 민중혁명을 이끌었다. 그가 초석을 다진 이슬람 신정정치 체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9년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인 과격파 학생들은 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급습해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444일 동안 억류하면서 강한 반미노선을 표명했다. 이 일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의 빌미가 되었다.
1979년 2월 1일 테헤란 공항에는 이미 발포 명령이떨어진 가운데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파리를 출발한 비행기에는 15년 긴 망명 생활 끝에귀국하는 호메이니라는 백발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테헤란 시민들은 물론 이란 전역에서 몰려든 수백만 군중은호메이니 옹의 귀국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공항과 베헤슈티 자흐라 순교자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지난 15년 동안팔레비 왕정의 압제와 극심한 탄압을 견디게 한 힘은 오직 하나, 신에 대한 믿음과 이맘 호메이니에 대한 확고한 신뢰였다. 파리에서 녹음된 호메이니의 메시지는 며칠 만에수십만 개의 테이프로 복사되어 이란 전역에생생한 목소리로 전달되었다. 왕정의 매서운 감시에도 불구하고그들은 호메이니의 육성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호메이니가 트랩에 모습을 드러내자 북받치는 흐느낌과감격의 환호가 교차되었다. 그들은 목메어 외쳤다. "신은 위대하다! 이맘 호메이니 만세! 이슬람 이란에 영광을!" 경찰은 이미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날 발포는 일어나지 않았고, 호메이니는 향리인 콤시로 향했다. 정부는 즉각 전군을 동원해 24시간 통행금지를 실시하고호메이니와 그 지지자들을 급습하고자 했다. 이를 눈치챈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탱크 앞을 가로막으며호메이니 옹의 집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호메이니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가 없는 이란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25년간 이란을 폭정과 방탕으로 몰아 넣었던 레자 팔레비(왕)는 부인과 함께 이란을 빠져나갔다. 군부는 드디어 발포를 중지하고 호메이니 옹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1979년 2월 11일 이란 시민혁명은 성공했다. 이슬람 정신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성과 국민 경제의 자립을 표방하는 새로운 이란이 탄생한 것이다.
국제정치의 역설이 항상 그렇듯이 이란의 신정체제를 유지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우군은 미국의 극단적인 이란 제재와 고강도 압박 정책이다. 40년 봉쇄와 제재에도 끄떡없이 버티며 내성만 강해진 이란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미국이 잘 알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기에는 이란과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상호 윈-윈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전격적인 핵 평화 협정을 체결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핵 협정 합의를 파기했다. 그로 인해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다시 원점에서 관계 복원을 힘들게 모색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국 사이의 불신과 적대적 대치 기간이 너무 길어 완전한 신뢰 회복까지는 갈 길이 너무 멀어 보인다.
"동양도 서양도 아닌 이슬람으로!"
이란은 찬연했던 페르시아 문화의 본바탕이고 계승이다. 다리우스 대왕 때 전성기를 누린 고대 페르시아는 기원전 5세기경 오리엔트와 그리스, 인도와 동양의 문화를 고루 받아들여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이란의 한 교수는 이란 혁명은 위대한 여성의 승리였다고 강조한다. 자식이나 남편을 기꺼이 조국을 위해 바친 어머니와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이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페르세폴리스,페르시아 대제국의 심장
테헤란에 온 이상 이란 문명의 진수이자 인류 문명의 자존심이 걸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면모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페르세폴리스로 날아갔다.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2500여 년 전에 건설된 페르시아 대제국의 수도다. 인도-아리안계인 ‘파르스족’의 아케메네스 가문이 이룬 국가라 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는 고대 아시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힘으로 서양을 실어 날랐던 알렉산드로스의 도도한 행군에 정신적 가르침을 준 마지막 스승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바로 그 동양 정신의 심장부였다.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시가 완성된 것은 100년이 더 지난 후였다. 세계정부가 있던 곳이며, 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시가 완성된 것은 100년이 더 지난 후였다. 세계정부가 있던 곳이며, 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드로스의 광풍을 견뎌낸 세력은 없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최고의 약탈 대상이었다. 그리고 철저히 불태워졌다.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궁전이었던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창고’(재무성 창고)의 재물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책에 따르면 당나귀 2만 마리와 낙타 5000 마리를 동원해서 보물을 실어날랐다. 고대 역사학자들의 과장과 허풍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부의 규모였던 것 같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풀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 카스피해 연안까지 쫓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총독이자 자신의 후계자였던 베소스의 배반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아시아의 대왕은 온몸이 열 군데 이상 칼에 찔린 채 마케도니아 병사에게 발견되었다. 포로로 잡힌 다리우스는 그 병사에게 물 한 모금을 받아 마신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원전 330년 7월, 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페르시아 대제국도, 그 수도였던 화려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도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갔다.
대제국이 남긴 유산,다문화 정책과 지방 분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대제국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그 후에도 계승되었다. 세계 최초 대제국의 거버넌스의 핵심은 로마 제국 성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1000년경에 살았던 성인이나 예언자 혹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조로아스터 자신은 스스로 선지자나 특별한 존재로 내세운 적이 없다. 그는 철학자에 가까웠다. 그의 출생 시기나 생애, 구체적인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77세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니체의 철학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자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페르시아식 발음이다.
이맘 호메이니 탄생 100주년
한 민족이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인가. 나는 이란 사람들이 호메이니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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