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을 먼저 찾는 것은 나의 오랜 습관이다. 그래야 원하는 곳을 마음껏 돌아볼 수 있고, 나머지 것들을 포기해도 덜 아쉽기 때문이다.

외관의 투박함과 내부의 화려함, 이것이 이슬람 건축의 기본적인 철학이다. 바깥은 속세이고, 내부는 천국인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이렇게 문 하나를 경계로 두 세상이 만나고 단절된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샬리마르 정원은 그러한 이슬람 건축 정신의 상징과도 같다. 이 아름다운 정원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비교적 잘 보존되고 있어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라호르 박물관의 간다라관에서 압권은 ‘고행하는 불타상(Fasting Buddha)’이다. 간다라의 방 중앙에 전시된 고행상 앞에서 관람객은 충격과 전율에 빠져든다. 높이 약 80센티미터의 부처님 고행상은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고 혈관이 간신히 붙어 있는 모습이다. 극도의 고통을 극복한 뒤에 찾아오는 해탈과 열반의 미소는 평온함을 넘어 숙연한 자기성찰의 채찍으로 다가온다. 종교와 사상을 뛰어넘어 이토록 절절하게 인간다움을 가르치는 누군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타지마할을 만나러 가는 길

인도 전역에서 혹은 인도 바깥에서 타지마할이라는 인류 최고의 걸작을 만나기 위해 아그라행을 손꼽아 기다린다. 누구에게는 버킷 리스트이고, 누구에게는 사랑의 메카 순례일지도 모른다.

아그라는 타지마할의 도시다.
무굴 제국이 남긴 찬연한 인류 문화유산이다.
무굴 제국은 중앙아시아 티무르 제국의 후예다.
티무르 제국의 마지막 왕자 바부르가 권력 투쟁에 패배한 뒤새로운 세상을 찾아 인도 북쪽으로 갔다.
바로 그 바부르 왕자가 무굴 제국의 창건자다.
이전 왕조들도 그러했지만, 무굴 제국은 토착문화와 융합하고종교 간 화해와 다른 가치에 대한 관용을 바탕으로독특하고 창의적인 문화를 이룩했다.
이슬람의 가치와 티무르 제국이 남긴 페르시아 문명,
중앙아시아 튀르크인에게 물려받은 역동적인 유목 문화를힌두적 토양에 이식함으로써 문화의 용광로를 가동할 수 있었다.
수학·천문학·의학 분야는 물론, 건축 분야에서도타지마할로 대표되는 불멸의 문화를 꽃피웠다.
무굴 제국은 1857년 영국에 항복하고인도 아대륙에 잔혹한 식민 통치가 시작되면서 끝을 맺었다.
1947년 마하트마 간디의 주도로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힌두 중심의 정치체제를 받아들였다.
한편 800년 이상 인도 아대륙의 정치와 경제를 주름잡았던북부의 이슬람 공동체는 동서 파키스탄으로 떨어져 나가오늘날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오랜 사회적 연결망과 삶의 기반을 포기할 수 없었던약 2억 명의 인도 본토 이슬람 공동체는 인도 서부를 중심으로지금도 활발하게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아그라는 수백 년 동안 이슬람 문화가 지배하던 곳인데 힌두교도들이 기득권을 내세우며 행패를 부린다"라며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과 방관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에어컨도 없이 4시간을 달린 버스는 긴 경적 소리와 함께 아그라에 도착했다. 그토록 그리던 꿈의 도시 아그라에.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

곧바로 야무나강 가의 타지마할로 갔다. 순백색 대리석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운 자태를 그저 멍하게 서서 몇 시간이고 보기만 했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에 공감하는 순간이었다.

타지마할(‘왕궁의 왕관’이라는 뜻)은 샤 자한이 사랑하던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하며 예술적 정열과 국력을 쏟아 완성한 무덤 궁전이다.

두 사람은 열네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녀는 결국 출산 후유증으로 서른아홉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놀라운 기술력과 디테일에 경의를!

타지마할은 무굴 건축가 무함마드 이사와 바그다드의 세계적 돔 건축 기술자인 무함마드 샤리프의 지휘로 1632년에 착공해 약 22년 만인 1654년에 완성되었다. 약 2만 명의 노동력과 1000마리 이상의 코끼리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절대권력자의 사치와 집착으로 결국 국가 재정은 파탄이 났고, 샤 자한은 아들에 의해 폐위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타지마할의 디테일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타지마할은 알함브라 궁전을 참고하여 설계한 전형적인 페르시아-이슬람 건축 양식이기 때문이리라.

기원전 3000년경에 발달한 이집트 문명은 피라미드와스핑크스로 대표된다.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하는나일강 변의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세계 최고의 고대문명이 이집트에서 번성했다.
태양력과 측량술, 천문학을 발전시켰으며,
파피루스에 상형문자를 만들어 쓰던 이집트 문명은사방이 사막과 바다로 고립되어 있어 오랫동안외적의 침입을 받으면서도 문명의 독자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5000년 전 고대문명에서 인간이 배울 수 있는 것은 겸손뿐이다"라는어느 고고학자의 고백을 떠올리며, 숙연한 마음으로카이로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겨울의 이른 새벽이었다. 짐을 풀고 고층 호텔의창문 커튼을 열어젖히자 시내 한가운데를 흘러가는나일강 위로 막 일출이 시작되었다. 이집트 문명은나일강의 선물이라는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표현을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전 국토의 97퍼센트가 사막인이집트에서 나일강이 갖는 의미가피부로 느껴졌다.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고원에서 그리고 빅토리아 호수에서 아프리카 6000킬로미터를 남에서 북으로 거꾸로 흐르는 나일강이 그 하구에 만들어 놓은 마지막 선물 같은 곳이 카이로다. 카이로를 중심으로 피라미드 시대인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와 태양신 ‘라’ 신앙의 발상지인 헬리오폴리스가 펼쳐진다. 카이로 일대야말로 고대문명의 요람이요 ‘문화’라는 인류 최고의 산물을 본격적으로 일구어낸 실험장이었던 셈이다.

나는 사막의 지평선 너머로 어김없이 찾아오는 첫 햇살이 스핑크스의 두 눈을 정확히 비추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스핑크스가 더이상 피라미드의 수호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피라미드보다 훨씬 먼저 세워진 스핑크스는 빛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 고대 이집트인의 신앙 작품인 것이다.

해가 떠올라 피라미드 사이에 걸릴 때쯤이면 카이로는 금방 1000만 시민이 빚어내는 거대한 시장으로 변한다. 길을 메운 사람들과 자동차, 왁자지껄한 소음과 경적, 남루한 가난, 세속에 찌들어 시간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는 카이로의 도시 문명을 피라미드는 그저 묵묵히 안타까운 듯 지켜보고 서 있다.

한 면의 길이가 250미터, 높이가 170미터인 돌 600만 톤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몇 센티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 완벽한 축조물 앞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인간의 지혜와 초월성이라는 숙제를 생각했다.

피라미드에는 강제 노역의 아픔이 서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압제를 뛰어넘는 인간의 위대한 생명력과 절대적 신앙이 배어 있음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태양신의 아들인 파라오를 신으로 섬기는 백성들의 믿음과 정성이 파라오의 영원한 안식처인 피라미드를 세운 원동력일 것이다. 그들에게 피라미드는 신전이었고, 그 속에 모신 파라오를 수호신으로 받듦으로써 불멸의 파라오와의 일체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다.

"과학으로는 이 신비를 풀 수 없다"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 | 이희수 저

모처럼 맞이하는 관광객이라며 집주인 하산은 2500년이나 되었다는 미라를 보여주었다. 거의 완벽한 형체를 가진 조상을 이제는 불멸의 신앙으로서가 아니라 생계의 방편으로 집집마다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구경을 시켜주고 사진을 찍게 하고는 약간의 돈을 받아갔다.

미라 연구에 평생을 바친 프랑스 생화학자 모리스 뷔카이유는 한 강연회에서 미라 제작의 신비를 묻는 질문에 "인간의 지식과 과학으로는 이 신비를 풀 수 없다. 이것은 신의 작품임에 틀림없다"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신에 귀의하게 되었노라고 말했다.

이슬람 사람들은 고려 말에도 대거 한반도로 이주했는데, 그들을 회회(回回, 위구르인)라고 불렀다. 고려가사 <쌍화점>에 개경 한복판에서 회회아비(이슬람 사람)가 운영하는 만두가게가 나올 정도니 적지 않은 이슬람 이주자들이 고려사회에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도시는 아프리카와 유럽, 오리엔트 여러 지역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튀르키예, 이라크, 러시아,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불가리아에도 알렉산드리아가 있다. 아랍에서는 ‘이스칸다리야’, 튀르키예에서는 ‘이스켄데룬’, 그리스에서는 ‘알렉산드로폴리스’ 등 이름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이 모든 중심은 이집트 지중해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있다.

낙타가 열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것은 한번에 거의 100리터의 물을 마시고 200리터를 3개의 위에 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500킬로그램의 짐을 싣고 400킬로미터를 걸어간다. 2킬로미터 밖에서 물 냄새를 맡고 정확하게 물 있는 곳으로 찾아가는 천부적인 후각을 갖고 있다. 콧구멍과 귓속에 난 털을 이용해 모래 먼지를 차단하는 놀라운 장치까지 갖고 있는 완벽한 사막의 배다.

알렉산드로스 왕의 돌연한 죽음으로 세계 제국의 꿈은 사라진다. 그는 결국 제국을 완성하지 못했다. 힘과 야망으로 거대한 땅을 정복만 했지, 그곳에 영속적인 문화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세계 역사는 그를 대왕으로 부르길 주저한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였을 뿐이다. 오리엔트의 정복지에 셀레우코스와 안티오코스 왕조가 들어서고 서서히 토착문화에 동화되어갈 때, 이 도시는 300년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30)가 이어간다.

리비아는 북아프리카 지중해의 가장 아름다운해변을 갖고 있으며 로마시대 유적지를 품고 있는 나라다.
그리고 20세기 역동의 시대, 혁명과 반미노선으로서방세계를 흔들었던 카다피가 통치하던 나라다.
카다피 제거 이후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해10년 가까이 내전 중인 혼란과 고통의 현장이기도 하다.
동시에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주도했던북아프리카 최대의 유전 강국이다.
이처럼 로마시대 역사와 현대사의 파란만장한질곡의 중심에 수도 트리폴리가 있다.
리비아의 모든 것을 압축해서 볼 수 있는 수도다.
국토 대부분이 사막으로 덮여 있는 가운데 가장비옥한 지역이기도 하다.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트리폴리 주변에 모여 살고,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리비아를 지탱하는 곡물 생산지가 형성돼 있다.
밀, 보리, 토마토, 컬리플라워, 대추야자, 아몬드, 올리브,
감귤 등이 리비아에 주어진 신의 선물이다.

리비아는 2011년까지만 해도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통치하는 독재국가였다. 나는 대학원 시절 카다피 혁명사상을 연구한 적이 있다. 그 인연으로 1983년 트리폴리의 알파타대학에서 4시간에 걸친 카다피의 연설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패기만만한 정열과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미국에 의해 오염된 정신과 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세계를 설파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줄이고 인민에 의한 인민의 직접 통치를 실현하는 ‘그린북(Green Book)’ 이론을 장황하면서도 자신감 있게 전개했다. 당시 학생들은 열광했고, 트리폴리 시내 그린스퀘어(녹색 광장)를 중심으로 반미 구호와 시위의 함성이 날마다 하늘을 뒤덮었다.

2000년 가을 벵가지 교외 베이다의 한 병원 앞뜰에서 다시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초췌해 보였고 연설에는 힘이 빠져 있었다. 미국을 향한 독설은 조심스러워졌고, 리비아의 당면 과제에 대해 매우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노선을 피력했다.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국’이라는 기다란 국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랍과 이슬람, 사회주의라는 세 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트리폴리타니아와 키레나이카라는 고대 지명을 행정 구역상의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다소 놀랍다.

리비아의 나이든 세대는 사회주의 체제의 후유증이라는 중병을 앓고 있다. 사유 재산의 개념에 크게 얽매이지 않고 자족하고 살아가는 그들이기에, 하나라도 더 팔아보겠다고 억지 웃음과 친절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게 좋은 삶인지, 여행을 하다 보면 자주 고민하게 된다.

카다피와 함께 막을 내린 녹색의 시대

1969년 카다피의 혁명 이후 리비아는 녹색을 국가의 상징으로 삼았다. 국기도 녹색이고 교복도 녹색이다. 원래 녹색은 이슬람의 상징색이지만, 카다피는 이슬람에 충실한 자신의 이념과, 사막을 녹색의 옥토로 바꾸겠다는 강한 신념에서 녹색을 리비아와 카다피의 상징색으로 삼았다. 그래서 트리폴리에서 모든 길은 그린스퀘어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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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거처 창비시선 100
김남주 지음 / 창비 / 199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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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누는 폼으로

앉아서 기다리는 자여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누는 폼으로
새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여
아리랑고개에다 물찌똥 싸놓고
쉬파리 오기나 기다리는 자여

산에 들에 봄이 오고

누가 와서 물었네 지나가는 말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대답했네 거기에 갔다고

누가 와서 물었네 거기가 어디냐고
나는 대답했네 담 너머 하얀 집을 가리키며자유가 묶여 발버둥치는 곳이라고

산에 들에 봄이 오고
누가 와서 물었네 지나가는 말로
그는 이번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나는 대답했네 무덤 하나를 가리키며
그는 지금 저기에 있다고

똥누는 폼으로

앉아서 기다리는 자여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누는 폼으로
새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여
아리랑고개에다 물찌똥 싸놓고
쉬파리 오기나 기다리는 자여 - P100

산에 들에 봄이 오고

누가 와서 물었네 지나가는 말로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대답했네 거기에 갔다고

누가 와서 물었네 거기가 어디냐고
나는 대답했네 담 너머 하얀 집을 가리키며자유가 묶여 발버둥치는 곳이라고

산에 들에 봄이 오고
누가 와서 물었네 지나가는 말로
그는 이번에 나오지 않았느냐고
나는 대답했네 무덤 하나를 가리키며
그는 지금 저기에 있다고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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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사랑의 무기, 사상의 거처, 1992년 구입
31년 된 책.

1. 어떤 관료, 사랑의 무기 180쪽
2. 사랑은, 사랑의 무기 168쪽
3. 똥누는 폼으로, 사상의 거처 100쪽

나는 관료?이다 미관말직 26호봉 관료다.


1. 어떤 관료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정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공화당 시절에 그는 서기관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공정했기 때문이다

민정당 시절에 그는 청백리상을 받았다
반평생을 국가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봉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2. 사랑은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가질 줄 안다
너와 나와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3. 똥누는 폼으로

앉아서 기다리는 자여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누는 폼으로
새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여
아리랑고개에다 물찌똥 싸놓고
쉬파리 오기나 기다리는 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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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세계의 심장부이자
‘이란의 진주‘로 알려진 이스파한은 사파비 왕조(1501~1732)의수도였고, 이 왕국이 시아파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오늘날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스파한의 영화는 사파비 왕조를 부흥시킨압바스 1세(1571~1629)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598 년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압바스 1세는왕조의 수도를 북쪽 변방 카즈빈에서 이란 대륙의 중심부인이스파한으로 옮겼다. 뛰어난 외교술과 리더십으로건국 군벌집단인 키질바시(Qizilbashi) 정예군을 정치적으로 제압하고,
동쪽 우즈베키스탄과 서북쪽 오스만제국에 맞서든든한 국경 정비에 성공했다. 학문과 문화를 숭상하는열린 정책을 펼친 그는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학자들과장인들을 초청했고, 실크로드를 잇는 교역망을 확충해세상의 부와 문화를 이곳으로 흘러들게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스파한은 인구 100만에 160개의 모스크,
학교 48개, 대상을 위한 여관 1800여 개, 공중목욕탕 273개가 있는세계적인 도시였다. 그래서 17세기에 이스파한은
‘네스페이 자한(Nesfe-i Jahan)‘, 곧 ‘세상의 절반‘이라 불렸다.
얼마나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라.

이스파한이 사파비 왕조 때 처음 등장한 도시는 아니었다. 이곳은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고도였다. 기원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는 ‘가발’이라 불리며 번성했고, 7세기 이후에도 수많은 왕조와 국가가 거쳐갔다. 이스파한이라는 이름은 군영 도시를 의미하는 세파한(Sepaha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앙과 건축 예술의 정수,이맘 모스크

이스파한의 상징인 이곳은 압바스 1세의 명령으로 1612년에 공사를 시작해 1638년에 완성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가운데 하나다. 모스크의 문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천국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꽃 모양을 기하학적 문양으로 디자인하여, 은은하고 절제된 색감의 청색 타일로 표현해놓았다. 과연 건축 예술의 금자탑이라 불릴 만했다. 차가운 기운이 도도한 색감을 타고 심장을 파고드는 듯했다.

이란 전통 마을에는 좁은 골목이 많이 있다. 좁은 골목은 화해의 공간이다. 이웃과 다투었어도 좁은 골목에서 수시로 마주치게 되니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시선을 피할 공간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 사람들은 좀처럼 이웃과 언성을 높여 싸우는 일이 없다. 싸우고 난 후의 민망함을 감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은 그래서 정겨움이 넘쳐나는 화해의 공간이다.

페르시아라는 말은 수 세기 동안 주로 서구에서 사용해왔으며 그 기원은 과거 페르시스로 알려진 이란 남부 지역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스는 파르스Pars 또는 파르사Parsa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는 파르스Fars라고 부른다. 파르사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을 가리킨다. 파르사인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844년 아시리아 왕인 샬마네세르 3세가 편찬한 연대기에 처음으로 나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9~330)가 영토를 확장하며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시절에 이란 고원에서 처음으로 페르시스의 거주민과 접촉했다. 고대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다른 서구인들도 점차 페르시스라는 말을 이란 고원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그들의 조국을 가리켜 ‘아리아인의 땅’이라 부른다.

중앙아시아에는 실크로드가 있어항상 우리의 호기심과 낭만을 자극한다.
그곳에는 찬연한 도시 문화가 있었고,
함께 살아 더욱 아름다웠던 인류의 지혜가 번뜩였다.
고대부터 실크로드라는 문명의 젖줄을 통해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과 정보, 신화와 종교,
진귀한 물품과 발명품이 몰려들고 재창조되는그리고 소중한 결실을 사방팔방으로 실어나르는 문명의 허브였다.
14세기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도 그런 도시였다.
신라와 중국에서 출발한 비단이나 인삼 같은 동방의 교역품은사마르칸트를 경유해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로 향하고,
지중해와 동부 아프리카의 값비싼 물품 역시사마르칸트를 거쳐 아시아 전역에 전달되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티무르는 한때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던오스만튀르크를 공격해 술탄을 생포할 정도로 강성했다.
티무르는 칭기즈칸 이후 중앙아시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고사마르칸트를 지식과 문화가 넘치는독특한 도시로 만들었다.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속해 있는 사마르칸트는 부하라와 함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가장 오래된 교역 도시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14~15세기 티무르 제국 시대의 작품이지만, 이 도시의 역사는 2500년이 넘는다. 1996년 사마르칸트는 유네스코 주관으로 도시 건설 25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기념식과 축제를 열기도 했다. 이어 2001년 실크로드를 이어주는 문명의 교차로로서의 역사적 역할에 주목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목을 축이기 위해 길쭉하게 못생긴 큰 멜론 하나를 5000숨(약 500원)에 사서 입에 넣어본다. 달고 부드럽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사마르칸트의 멜론이다. 수박과 참외, 포도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란다.

사마르칸트는 푸르름을 머금은 중세의 보석 같은 도시다.

소그드인도 페르시아 문명권 종족이고 보면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화는 오랜 전통과 문화적 축적의 결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지금도 사마르칸트의 많은 지역에서는 페르시아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8세기 중엽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한 이슬람 압바스 제국의 동진으로 이번에는 당나라와 이 도시를 두고 격돌을 벌이게 된다. 751년 탈라스 전투가 그것이다.

이슬람 군대가 완벽한 승리를 거두면서 사마르칸트는 새로운 이슬람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중앙아시아 전역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스탄’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영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포로들을 통해 중국의 제지술, 비단 직조술, 나침판, 화약 제조 기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이런 과학적 결실이 후일 유럽 세계로 건너가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칭기즈칸의 사마르칸트 및 부하라 침공과 약탈을 이슬람 문화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묘사한다.

철저하게 폐허가 되고 잊힌 사마르칸트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티무르 제국(1370~1507)이 이곳을 수도로 삼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면서부터였다. 오늘날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의 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티무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이처럼 뛰어난 영웅이나 성자를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를 수피즘이라 하는데 이슬람이 토착종교와 섞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와 신의 섭리를 담은 아라베스크 문양의 독특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묘당 내부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티무르의 별명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절름발이’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1841년 소련 발굴팀은 티무르 무덤을 조사하면서 그가 이란과의 전쟁 때 부상당해 오른쪽 팔과 오른쪽 발이 부자유스러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잔혹한 파괴자’로 티무르를 묘사한 서구 학자들의 시각과는 달리 실제로 티무르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 통치자였다.

티무르 묘역 앞뜰에서는 우즈베크 아낙네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토마토 절임(피클)을 만들고 있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에서 접한 절임문화는 우리 음식문화와 너무나 비슷해 더욱 친근감을 주었다.

중앙아시아 화보집을 펼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실크로드의 노인’은 사마르칸트 여행 내내 나에게 삶의 참맛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특히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고구려 사절로 보이는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소그디아나 왕국 시절의 아프라시압 벽화에는 새 깃털이 달린 모자(조우관)를 쓰고 환두대도(둥근 고리가 달린 큰 칼)를 차고 이곳까지 찾아온 두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벽화는 현재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당시(7세기 중엽) 고구려는 중국(당나라)이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하기 위해 멀리 소그디아나 왕국에 사절을 보내 상호교역과 동맹을 논의했을 것이다. 여행 중 옛 조상을 만난 반가움에 가슴이 뭉클하다.

고구려-사마르칸트 교류사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다.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의 논문에서 제기된 바보 온달 장군의 사마르칸트 도래설이다. 오랫동안 고구려와 긴밀하게 상호교류를 해오던 사마르칸트 왕국의 온씨 지배층이 정치적 대격변기를 거치면서 고구려로 이주했고, 그 집단이 바로 온달 집안이었다는 것이다. 사료 부족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당시 양국 간의 교류 정황에 비추어 본다면 가능성이 있는 스토리다.

1403년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프랑스 사절 클라비호는 "바자르가 성을 가로질러 형성되어 세계의 사방에서 몰려든 물건으로 가득 차고 거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그 많은 상품이 금방 동이 나버리곤 했다"라고 묘사했다.

수박, 참외, 오이, 포도, 석류 외에도 참깨, 시금치, 파, 마늘 같은 먹을거리가 모두 이곳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애착이 간다.

더욱이 식품을 파는 이들 중에 카레이스키라 불리는 한국계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김치와 채소절임, 마늘장아찌를 팔고 있었다. 김치는 우즈베크인의 입맛을 고려해 고춧가루나 젓갈을 넣지 않은 백김치였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고 바쁜 중에도 고국의 소식이 궁금해 차 한잔을 권하며 소매를 잡아끈다. 따뜻한 동포의 정을 나누는 짧은 순간에 김옌나 할머니의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85년 전 동부 시베리아에서 한 많은 사연을 안고 강제 이주해와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들은 우즈베키스탄 시민으로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한국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동서가 만나고 문화가 섞이던 옛 실크로드의 중심지에서 우리 동포인 카레이스키를 만날 수 있어 사마르칸트는 더욱 정이 가는 도시였다.

파키스탄의 고도 라호르는 인도의 델리,
아그라와 더불어 무굴시대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1524 년 무굴 제국 창건자인바부르에게 정복당한 뒤 1584년 아크바르 대제 시기에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던 까닭에, 라호르에는 지금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많은이슬람 문화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바드샤히 모스크,
아름다운 궁정 요새인 라호르 성채 등 화려하고 장대한유물과 유적을 만나다 보면 무굴 제국의 영광이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 느껴질 정도다.
무굴 제국은 1526년부터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330년 넘게 인도 아대륙에 번성했던 이슬람 왕조다.
라호르는 그 무굴 제국의 중심 도시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라호르를 보지 않으면 세상에태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라호르는 문화 유적과 예술품 등볼거리로 가득하다.

아크바르 대제 시대 문화적 번영을 이끌었던 중심 도시이자 수도가 라호르다. 라호르의 찬연한 문화적 성취를 바탕으로 아크바르 대제가 세상을 떠난 뒤 자한기르(Jahangir 1569~1627), 샤 자한(ShahJahan, 1592~1666), 아우랑제브(Aurangzeb, 1618~1707)로 이어지는 시기에 무굴 제국은 전성기를 누렸다.

이슬람 집권세력은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국가 통치를 위해 과감하게 피정복지의 문화와 습속을 수용하는 융합과 종교적 관용 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메카를 기점으로 동서로 퍼져 나간 이슬람은 다양한 문화를 만나면서 건축에는 세련미가, 미술에는 화려함이 더해져 문화적 풍성함을 얻게 되었다. 이슬람의 성공과 위대성은 이처럼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힘에 있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라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두 문명을 일시에 제압하고 받아들인 이슬람은,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에스파냐 땅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전이라는 걸출한 건축 예술을 남겼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는 인도의 토착 문화를 받아들여 타지마할이라는 인류 최고의 건축을 남겼다. 우리는 타지마할만 기억하지만 무굴시대 모스크 건축은 라호르에서 더욱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무굴시대 라호르의 대표적인 건축이 바드샤히 모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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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4월 막 봄철이 시작되는 어느 날 유학을 위해 이스탄불 이을드즈 공원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스탄불을 찾았다. 그리고 이스탄불과 헤어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올해 169번째. 여권에 찍힌 입국 도장 기준이다. 매년 네다섯 차례 다녔나 보다. 대체 무슨 매력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일까? 가끔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많다. 무언가 대답을 준비하고 있어야겠는데, 한마디로 그 매력을 표현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내 말 한마디에 이스탄불을 그렇게 평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스탄불은 그냥 그런 도시가 아니다.

나는 특히 슐레이마니예 모스크 뒷골목을 좋아한다. 가장 튀르키예적이고 가장 이슬람다운 향취가 가득하다.

너무나 인간적인 튀르키예 사람들

끊임없는 외세의 간섭과 정치·경제의 불안으로 인해 오늘날 튀르키예는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고, 동서 문화의 교차로에 자리하여 동양의 정신에 유럽의 옷을 걸친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심성과 문화적 바탕에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다. 두 민족이 비록 아시아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서로 다른 문화를 일구었지만, 오랜 역사적 정통성과 주체적 문화의 계승이 궤를 같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시간쯤 지나 휴게소에 들른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갑자기 택시 한 대가 우리 버스 앞을 막아서는 거예요. 택시에서 내리는 사람은 내가 묵은 집 주인 아저씨였어요. 너무 놀라 버스에서 내려 인사를 하러 갔어요. 아저씨는 나를 보자 딸에게 들었다며, 보름 동안 저를 식구로 대접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냈는네, 돈을 받을 수 없다고, 자신의 행복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는 거예요. 제가 드린 돈을 내밀면서 말린 살구 꾸러미까지 주시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니 튀르키예를 다녀오기만 하면 누구든지 열렬한 튀르키예 팬이 되고 만다.

이스탄불 골목길

이스탄불 골목길에는 사람 사는 정이 넘친다. 골목길 아파트 생활에는 따로 시계가 필요 없다. 일정한 시각에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시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침 7시, 갓 짠 신선한 양유를 노새 등에 실은 아저씨가 제일 먼저 지나간다. 따로 외치지는 않는다. 노새 목에 달린 딸랑이 소리만으로도 충분하다.

바구니에 줄을 매달아 창문으로 그릇이나 병을 내려주면, 필요한 양을 담아준다. 줄을 당기기만 하면 된다.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 과거와 현재, 낮과 밤이 이어져 하나가 되는 인류 역사의 희망으로 남아 있다.

동서 학문의 산실, 이스탄불대학교

국립 이스탄불대학의 웅장한 정문 위에는 라틴어와 아라비아 숫자로 1453년이라는 설립 연도가 새겨져 있다. 1453년은, 1113년간의 동로마 제국 수도에서 오스만튀르크의 수도 이스탄불로 운명이 바뀐 해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튀르크가 병든 비잔틴을 멸함으로써 중세가 종식되고 근세가 열렸다. 튀르크인은 유럽과 동양을 동시에 통치하려는 거대한 이상을 가지고 콘스탄티노플의 혼이 어린 옛터에 이슬람식 전문 교육기관을 세웠다. 이것이 초기 오스만 왕궁 터에 자리 잡고 있는 이스탄불대학의 시초다. 그 뒤 오스만 제국이 600년에 걸쳐 세 대륙에 강대한 위세를 떨치면서, 이스탄불대학은 동서양 문화가 만나는 인류 문화 창출의 산실이 되었다.

옛 튀르키예의 정치·상업 중심지

코냐가 자리 잡은 아나톨리아 평원에서는 히타이트와 프리기아, 리디아, 페르시아 제국 같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이 번성했다. 그 토양 위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런데 이슬람 문화를 향유하는 튀르크인들이 이곳에 터전을 잡으면서 아나톨리아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물론 튀르크인들이 1만 년 역사의 아나톨리아반도에 뿌리를 내린 기간은 고작 1000년 정도다. 10세기 말, 셀주크튀르크는 중앙아시아에서 조금씩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비잔틴 제국이 지배하고 있던 아나톨리아를 넘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오랫동안 그리스·로마 문명의 요람이라 여겨지던 아나톨리아가 전혀 새로운 문명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튀르키예 중부의 비옥한 평원에 위치한고대도시 코나는 11세기 이후(1097~1243) 셀주크튀르크의룸술탄국(Seljuk Sultanate of Rum)의 수도였다.
50년경에는 사도 바울이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했던초기 기독교의 전통이 남아 있는 성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가장 튀르키예다운 도시로 불린다.
중세 이슬람 시기 이후 메블라나라고 불리는이슬람 신비주의 종단의 총본산으로종교적 영성이 가득한 정신적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한실크로드 대상(카라반)들이 멀리 동방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기 전에반드시 거쳐가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이런 점에서 코냐 역시 인류 문명의 본류인아나톨리아반도의 문명사와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번성했던메소포타미아 상류 문명으로서 고대 왕국은 물론 리디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동로마(비잔틴 등 강대국들의침략과 지배를 고스란히 경험했다.
코냐라는 명칭도 로마시대 이 도시의 이름인이코니움(Iconium)에서 비롯되었다.

그 변곡점은 1071년이었다. 꺾일 줄 모르던 천년 제국 동로마가 중앙아시아에서 진출한 의외의 적에게 허를 찔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1071년 셀주크튀르크와 동로마 사이에 벌어진 만지케르트(Manzikert) 전투다. 중세 최대 규모의 세계대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동로마 제국이 패배하고 말았다.

만지게르트 전투 승리는 오늘날 튀르키예 공화국이 아나톨리아에 뿌리를 내리는 역사적 기점이 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8000만이 넘는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정도의 농작물을 이곳에서 생산한다고 하니 정말 은총의 땅이다. 풍성한 식탁과 세계 최고라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넉넉한 인정은 모두 코냐 평원에서 솟아나는 듯하다.

인류 최초의 도시 문명 차탈회위크 유적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 | 이희수 저

신석기시대 도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문명을 구가했던 차탈회위크는 인류 최초의 계획 도시이자 도시 문명의 뿌리로 여겨진다. 1958년 영국 고고학자 제임스 멜라트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었으나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1993년부터 영국 고고학자 이안 호들러의 발굴 작업이 25여 년 만에 성과를 내면서 새로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발굴 지점 옆에 원형을 그대로 재현한 진흙집이 있어서 9000년 전 주민들의 삶을 상상해보기에 충분했다.

독수리와 머리 없는 사람의 형상이 그려진 벽화가 눈길을 끌었다. 정확히 해석하기는 어렵지만 독수리에게 시신을 바치고 하늘과 가까이 다가가려는 하늘 사상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추측해보았다. 하지만 궁금증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신이 내린 유한한 자원을 당대는 물론 후세를 위한 자원으로 여겨 적게 욕망하고 적게 생산하며 살아간 차탈회위크의 생태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이들의 삶의 방식은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교훈을 준다.

‘살아 있는 사자’란 음부티라는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태어난 응고르라는 아이가 할아버지 사후에도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면, 산 사람과 똑같이 할아버지를 대하는 개념이다. 즉, 할아버지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공동체의 일을 상의하면서 할아버지의 지혜와 경륜을 유지하고 계승한다. 응고르가 죽고 그 마을에 음부티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을 때 비로소 음부티는 ‘자마니’, 즉 과거의 시간, 망각의 세계로 돌아간다.

메블라나를 만나는 시간

코냐 시내에 들어서자 곧바로 메블라나 기념관으로 달려갔다. 메블라나는 코냐 여행의 핵심이다. 메블라나 잘랄레딘 루미(1207~ 1273)는 종교적 관용과 깊은 사랑을 전한 인류의 대스승이었다.

페르시아 태생의 루미는 셀주크 술탄의 요청으로 튀르키예로 와서 이슬람 신비주의의 중요한 갈래인 메블라나 수피즘을 열었다. 아랍어로 쓰인 꾸란은 비아랍권의 일반인이 배우기에는 너무 어려워 신에 대한 접근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많은 이슬람 학자들은 명상, 노래, 염원, 수도 생활 등을 통해 신을 만나는 다양한 대중적 방식을 펼쳐 보였다. 루미가 창시한 메블라나 종단은 세마라는 회전춤을 통해 신과 합일하는 독특한 수피즘이다.

유럽 지성계에도큰 영향을 미친 루미의 사상
대스승 메블라나 루미는 인류에게 일곱 가지 교훈을 남겼다.

남에게 친절하고 도움 주기를 흐르는 물처럼 하라.

연민과 사랑을 태양처럼 하라.

남의 허물을 덮는 것을 밤처럼 하라.

분노와 원망을 죽음처럼 하라.

자신을 낮추고 겸허하기를 땅처럼 하라.

너그러움과 용서를 바다처럼 하라.

있는 대로 보고 보는 대로 행하라.

루미의 사상과 낮은 곳을 향한 사랑은 유럽 지성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17세기 화가 렘브란트, 18세기 작곡가 베토벤, 19세기 대문호 괴테도 직접·간접적으로 루미 사상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지성이었다.

호메이니와 이란 시민혁명

세예드 루홀라 무사비 호메이니(1902~1989)는 이란의 시아파 성직자이자, 모함메드 샤 레자 팔레비 왕정의 독재에 맞서 민중혁명을 이끈 정치 지도자이다. 그는 시아파 성지 도시 콤에 사는 평범한 성직자였으나 1963년 팔레비 국왕이 추진한 이슬람 모스크의 토지와 재산 몰수, 여성 참정권 허용 정책에 반대하여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리고 1979년 2월 이란으로 귀국해 이슬람 민중혁명을 이끌었다. 그가 초석을 다진 이슬람 신정정치 체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79년 호메이니의 열렬한 추종자인 과격파 학생들은 테헤란 미국 대사관을 급습해 미국 대사와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잡고 444일 동안 억류하면서 강한 반미노선을 표명했다. 이 일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강력한 경제 제재의 빌미가 되었다.

1979년 2월 1일 테헤란 공항에는 이미 발포 명령이떨어진 가운데 삼엄한 경비가 펼쳐지고 있었다.
파리를 출발한 비행기에는 15년 긴 망명 생활 끝에귀국하는 호메이니라는 백발의 노인이 타고 있었다.
테헤란 시민들은 물론 이란 전역에서 몰려든 수백만 군중은호메이니 옹의 귀국이라는 믿어지지 않는 역사의 증인이 되기 위해공항과 베헤슈티 자흐라 순교자 공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가! 지난 15년 동안팔레비 왕정의 압제와 극심한 탄압을 견디게 한 힘은 오직 하나,
신에 대한 믿음과 이맘 호메이니에 대한 확고한 신뢰였다.
파리에서 녹음된 호메이니의 메시지는 며칠 만에수십만 개의 테이프로 복사되어 이란 전역에생생한 목소리로 전달되었다. 왕정의 매서운 감시에도 불구하고그들은 호메이니의 육성 명령에 충실히 따랐다.
호메이니가 트랩에 모습을 드러내자 북받치는 흐느낌과감격의 환호가 교차되었다. 그들은 목메어 외쳤다.
"신은 위대하다! 이맘 호메이니 만세! 이슬람 이란에 영광을!"
경찰은 이미 사태를 수습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날 발포는 일어나지 않았고, 호메이니는 향리인 콤시로 향했다.
정부는 즉각 전군을 동원해 24시간 통행금지를 실시하고호메이니와 그 지지자들을 급습하고자 했다.
이를 눈치챈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탱크 앞을 가로막으며호메이니 옹의 집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호메이니는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가 없는 이란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25년간 이란을 폭정과 방탕으로 몰아 넣었던 레자 팔레비(왕)는 부인과 함께 이란을 빠져나갔다. 군부는 드디어 발포를 중지하고 호메이니 옹에 대한 충성을 다짐했다. 1979년 2월 11일 이란 시민혁명은 성공했다. 이슬람 정신을 국가의 근본으로 삼고 외세를 배격하는 자주성과 국민 경제의 자립을 표방하는 새로운 이란이 탄생한 것이다.

국제정치의 역설이 항상 그렇듯이 이란의 신정체제를 유지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우군은 미국의 극단적인 이란 제재와 고강도 압박 정책이다. 40년 봉쇄와 제재에도 끄떡없이 버티며 내성만 강해진 이란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미국이 잘 알고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기에는 이란과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상호 윈-윈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전격적인 핵 평화 협정을 체결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핵 협정 합의를 파기했다. 그로 인해 현재 바이든 행정부는 다시 원점에서 관계 복원을 힘들게 모색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국 사이의 불신과 적대적 대치 기간이 너무 길어 완전한 신뢰 회복까지는 갈 길이 너무 멀어 보인다.

"동양도 서양도 아닌 이슬람으로!"

이란은 찬연했던 페르시아 문화의 본바탕이고 계승이다. 다리우스 대왕 때 전성기를 누린 고대 페르시아는 기원전 5세기경 오리엔트와 그리스, 인도와 동양의 문화를 고루 받아들여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다.

이란의 한 교수는 이란 혁명은 위대한 여성의 승리였다고 강조한다. 자식이나 남편을 기꺼이 조국을 위해 바친 어머니와 아내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이란은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페르세폴리스,페르시아 대제국의 심장

테헤란에 온 이상 이란 문명의 진수이자 인류 문명의 자존심이 걸린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의 면모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페르세폴리스로 날아갔다.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2500여 년 전에 건설된 페르시아 대제국의 수도다. 인도-아리안계인 ‘파르스족’의 아케메네스 가문이 이룬 국가라 하여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페르시아는 고대 아시아의 마지막 자존심이었고, 힘으로 서양을 실어 날랐던 알렉산드로스의 도도한 행군에 정신적 가르침을 준 마지막 스승이었다. 페르세폴리스는 바로 그 동양 정신의 심장부였다.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시가 완성된 것은 100년이 더 지난 후였다. 세계정부가 있던 곳이며, 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장엄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시가 완성된 것은 100년이 더 지난 후였다. 세계정부가 있던 곳이며, 당시 지구상에 번성하던 모든 문화의 집결지였다. 외국 사신이 빈번히 내왕하고, 동서양의 상인이 북적거렸다. 중앙아시아에서 연결되는 육상 실크로드와 인도에서 건너오는 해로의 요지에 위치하여 풍부한 물자와 다양한 외국 문물이 페르세폴리스를 살찌웠다.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다.

페르세폴리스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마케도니아의 20대 청년 알렉산드로스의 광풍을 견뎌낸 세력은 없었다. 페르세폴리스는 최고의 약탈 대상이었다. 그리고 철저히 불태워졌다. 페르시아 제국의 여름 궁전이었던 페르세폴리스의 ‘보물창고’(재무성 창고)의 재물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그 책에 따르면 당나귀 2만 마리와 낙타 5000 마리를 동원해서 보물을 실어날랐다. 고대 역사학자들의 과장과 허풍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부의 규모였던 것 같다.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운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풀어 다리우스 3세를 추격했다. 카스피해 연안까지 쫓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 총독이자 자신의 후계자였던 베소스의 배반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아시아의 대왕은 온몸이 열 군데 이상 칼에 찔린 채 마케도니아 병사에게 발견되었다. 포로로 잡힌 다리우스는 그 병사에게 물 한 모금을 받아 마신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기원전 330년 7월, 막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페르시아 대제국도, 그 수도였던 화려한 도시 페르세폴리스도 기나긴 망각의 역사 속으로 묻혀갔다.

대제국이 남긴 유산,다문화 정책과 지방 분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대제국이 남긴 문화적 유산은 그 후에도 계승되었다. 세계 최초 대제국의 거버넌스의 핵심은 로마 제국 성립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조로아스터는 기원전 1000년경에 살았던 성인이나 예언자 혹은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조로아스터 자신은 스스로 선지자나 특별한 존재로 내세운 적이 없다. 그는 철학자에 가까웠다. 그의 출생 시기나 생애, 구체적인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77세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니체의 철학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자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페르시아식 발음이다.

이맘 호메이니 탄생 100주년

한 민족이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고 축복인가. 나는 이란 사람들이 호메이니에 대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을 표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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