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세계의 심장부이자
‘이란의 진주‘로 알려진 이스파한은 사파비 왕조(1501~1732)의수도였고, 이 왕국이 시아파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오늘날 이란이 시아파의 종주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이스파한의 영화는 사파비 왕조를 부흥시킨압바스 1세(1571~1629)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1598 년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압바스 1세는왕조의 수도를 북쪽 변방 카즈빈에서 이란 대륙의 중심부인이스파한으로 옮겼다. 뛰어난 외교술과 리더십으로건국 군벌집단인 키질바시(Qizilbashi) 정예군을 정치적으로 제압하고,
동쪽 우즈베키스탄과 서북쪽 오스만제국에 맞서든든한 국경 정비에 성공했다. 학문과 문화를 숭상하는열린 정책을 펼친 그는 이슬람 세계의 뛰어난 학자들과장인들을 초청했고, 실크로드를 잇는 교역망을 확충해세상의 부와 문화를 이곳으로 흘러들게 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스파한은 인구 100만에 160개의 모스크,
학교 48개, 대상을 위한 여관 1800여 개, 공중목욕탕 273개가 있는세계적인 도시였다. 그래서 17세기에 이스파한은
‘네스페이 자한(Nesfe-i Jahan)‘, 곧 ‘세상의 절반‘이라 불렸다.
얼마나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이었을지 상상해보라.

이스파한이 사파비 왕조 때 처음 등장한 도시는 아니었다. 이곳은 찬란한 역사를 간직한 고도였다. 기원전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 시절에는 ‘가발’이라 불리며 번성했고, 7세기 이후에도 수많은 왕조와 국가가 거쳐갔다. 이스파한이라는 이름은 군영 도시를 의미하는 세파한(Sepahan)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앙과 건축 예술의 정수,이맘 모스크

이스파한의 상징인 이곳은 압바스 1세의 명령으로 1612년에 공사를 시작해 1638년에 완성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가운데 하나다. 모스크의 문은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천국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꽃 모양을 기하학적 문양으로 디자인하여, 은은하고 절제된 색감의 청색 타일로 표현해놓았다. 과연 건축 예술의 금자탑이라 불릴 만했다. 차가운 기운이 도도한 색감을 타고 심장을 파고드는 듯했다.

이란 전통 마을에는 좁은 골목이 많이 있다. 좁은 골목은 화해의 공간이다. 이웃과 다투었어도 좁은 골목에서 수시로 마주치게 되니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시선을 피할 공간이 아예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란 사람들은 좀처럼 이웃과 언성을 높여 싸우는 일이 없다. 싸우고 난 후의 민망함을 감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좁은 골목은 그래서 정겨움이 넘쳐나는 화해의 공간이다.

페르시아라는 말은 수 세기 동안 주로 서구에서 사용해왔으며 그 기원은 과거 페르시스로 알려진 이란 남부 지역에서 유래한다. 페르시스는 파르스Pars 또는 파르사Parsa라고도 불렸으며 현재는 파르스Fars라고 부른다. 파르사는 기원전 10세기경에 이 지역으로 이주해온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을 가리킨다. 파르사인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844년 아시리아 왕인 샬마네세르 3세가 편찬한 연대기에 처음으로 나온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케메네스 왕조(기원전 559~330)가 영토를 확장하며 페르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시절에 이란 고원에서 처음으로 페르시스의 거주민과 접촉했다. 고대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다른 서구인들도 점차 페르시스라는 말을 이란 고원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이란인들은 그들의 조국을 가리켜 ‘아리아인의 땅’이라 부른다.

중앙아시아에는 실크로드가 있어항상 우리의 호기심과 낭만을 자극한다.
그곳에는 찬연한 도시 문화가 있었고,
함께 살아 더욱 아름다웠던 인류의 지혜가 번뜩였다.
고대부터 실크로드라는 문명의 젖줄을 통해인류가 이룩한 과학기술과 정보, 신화와 종교,
진귀한 물품과 발명품이 몰려들고 재창조되는그리고 소중한 결실을 사방팔방으로 실어나르는 문명의 허브였다.
14세기 티무르 제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도 그런 도시였다.
신라와 중국에서 출발한 비단이나 인삼 같은 동방의 교역품은사마르칸트를 경유해 콘스탄티노플과 이집트로 향하고,
지중해와 동부 아프리카의 값비싼 물품 역시사마르칸트를 거쳐 아시아 전역에 전달되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티무르는 한때 세계 최고의 제국이었던오스만튀르크를 공격해 술탄을 생포할 정도로 강성했다.
티무르는 칭기즈칸 이후 중앙아시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하고사마르칸트를 지식과 문화가 넘치는독특한 도시로 만들었다.

지금은 우즈베키스탄에 속해 있는 사마르칸트는 부하라와 함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의 가장 오래된 교역 도시다.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은 14~15세기 티무르 제국 시대의 작품이지만, 이 도시의 역사는 2500년이 넘는다. 1996년 사마르칸트는 유네스코 주관으로 도시 건설 25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기념식과 축제를 열기도 했다. 이어 2001년 실크로드를 이어주는 문명의 교차로로서의 역사적 역할에 주목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목을 축이기 위해 길쭉하게 못생긴 큰 멜론 하나를 5000숨(약 500원)에 사서 입에 넣어본다. 달고 부드럽고 시원한 맛이 입안에 가득하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는 사마르칸트의 멜론이다. 수박과 참외, 포도의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란다.

사마르칸트는 푸르름을 머금은 중세의 보석 같은 도시다.

소그드인도 페르시아 문명권 종족이고 보면 중앙아시아의 페르시아화는 오랜 전통과 문화적 축적의 결과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지금도 사마르칸트의 많은 지역에서는 페르시아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8세기 중엽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급부상한 이슬람 압바스 제국의 동진으로 이번에는 당나라와 이 도시를 두고 격돌을 벌이게 된다. 751년 탈라스 전투가 그것이다.

이슬람 군대가 완벽한 승리를 거두면서 사마르칸트는 새로운 이슬람의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중앙아시아 전역이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오늘날까지 ‘-스탄’ 국가들을 중심으로 이슬람 영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포로들을 통해 중국의 제지술, 비단 직조술, 나침판, 화약 제조 기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다. 이런 과학적 결실이 후일 유럽 세계로 건너가 르네상스가 일어나는 배경이 된다.

이슬람 역사에서는 칭기즈칸의 사마르칸트 및 부하라 침공과 약탈을 이슬람 문화의 뿌리가 송두리째 뽑혀 나간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으로 묘사한다.

철저하게 폐허가 되고 잊힌 사마르칸트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티무르 제국(1370~1507)이 이곳을 수도로 삼고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면서부터였다. 오늘날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의 도시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학문과 예술을 사랑했던 티무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은 이처럼 뛰어난 영웅이나 성자를 숭배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를 수피즘이라 하는데 이슬람이 토착종교와 섞인 형태라 할 수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와 신의 섭리를 담은 아라베스크 문양의 독특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묘당 내부도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티무르의 별명은 오랫동안 유럽인들에게 ‘절름발이’로 알려져 왔다. 실제로 1841년 소련 발굴팀은 티무르 무덤을 조사하면서 그가 이란과의 전쟁 때 부상당해 오른쪽 팔과 오른쪽 발이 부자유스러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잔혹한 파괴자’로 티무르를 묘사한 서구 학자들의 시각과는 달리 실제로 티무르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 통치자였다.

티무르 묘역 앞뜰에서는 우즈베크 아낙네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토마토 절임(피클)을 만들고 있었다. 실크로드의 중심지에서 접한 절임문화는 우리 음식문화와 너무나 비슷해 더욱 친근감을 주었다.

중앙아시아 화보집을 펼치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실크로드의 노인’은 사마르칸트 여행 내내 나에게 삶의 참맛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특히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고구려 사절로 보이는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소그디아나 왕국 시절의 아프라시압 벽화에는 새 깃털이 달린 모자(조우관)를 쓰고 환두대도(둥근 고리가 달린 큰 칼)를 차고 이곳까지 찾아온 두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선연하게 남아 있다. 벽화는 현재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당시(7세기 중엽) 고구려는 중국(당나라)이라는 거대한 적을 마주하기 위해 멀리 소그디아나 왕국에 사절을 보내 상호교역과 동맹을 논의했을 것이다. 여행 중 옛 조상을 만난 반가움에 가슴이 뭉클하다.

고구려-사마르칸트 교류사에서 또 다른 흥미로운 스토리가 있다. 연세대 사학과 지배선 교수의 논문에서 제기된 바보 온달 장군의 사마르칸트 도래설이다. 오랫동안 고구려와 긴밀하게 상호교류를 해오던 사마르칸트 왕국의 온씨 지배층이 정치적 대격변기를 거치면서 고구려로 이주했고, 그 집단이 바로 온달 집안이었다는 것이다. 사료 부족으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장이기는 하지만 당시 양국 간의 교류 정황에 비추어 본다면 가능성이 있는 스토리다.

1403년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프랑스 사절 클라비호는 "바자르가 성을 가로질러 형성되어 세계의 사방에서 몰려든 물건으로 가득 차고 거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그 많은 상품이 금방 동이 나버리곤 했다"라고 묘사했다.

수박, 참외, 오이, 포도, 석류 외에도 참깨, 시금치, 파, 마늘 같은 먹을거리가 모두 이곳 중앙아시아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사실을 알고 나니 더욱 애착이 간다.

더욱이 식품을 파는 이들 중에 카레이스키라 불리는 한국계 여성들이 많이 눈에 띈다. 김치와 채소절임, 마늘장아찌를 팔고 있었다. 김치는 우즈베크인의 입맛을 고려해 고춧가루나 젓갈을 넣지 않은 백김치였다.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우리말로 인사를 건네고 바쁜 중에도 고국의 소식이 궁금해 차 한잔을 권하며 소매를 잡아끈다. 따뜻한 동포의 정을 나누는 짧은 순간에 김옌나 할머니의 눈가에 물기가 어린다. 85년 전 동부 시베리아에서 한 많은 사연을 안고 강제 이주해와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들은 우즈베키스탄 시민으로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한국의 정신을 잊지 않고 있었다. 동서가 만나고 문화가 섞이던 옛 실크로드의 중심지에서 우리 동포인 카레이스키를 만날 수 있어 사마르칸트는 더욱 정이 가는 도시였다.

파키스탄의 고도 라호르는 인도의 델리,
아그라와 더불어 무굴시대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였다.
특히 1524 년 무굴 제국 창건자인바부르에게 정복당한 뒤 1584년 아크바르 대제 시기에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던 까닭에, 라호르에는 지금도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많은이슬람 문화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바드샤히 모스크,
아름다운 궁정 요새인 라호르 성채 등 화려하고 장대한유물과 유적을 만나다 보면 무굴 제국의 영광이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듯 느껴질 정도다.
무굴 제국은 1526년부터 1857년 영국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330년 넘게 인도 아대륙에 번성했던 이슬람 왕조다.
라호르는 그 무굴 제국의 중심 도시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라호르를 보지 않으면 세상에태어나지 않은 것과 같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라호르는 문화 유적과 예술품 등볼거리로 가득하다.

아크바르 대제 시대 문화적 번영을 이끌었던 중심 도시이자 수도가 라호르다. 라호르의 찬연한 문화적 성취를 바탕으로 아크바르 대제가 세상을 떠난 뒤 자한기르(Jahangir 1569~1627), 샤 자한(ShahJahan, 1592~1666), 아우랑제브(Aurangzeb, 1618~1707)로 이어지는 시기에 무굴 제국은 전성기를 누렸다.

이슬람 집권세력은 장기적이고 지속가능한 국가 통치를 위해 과감하게 피정복지의 문화와 습속을 수용하는 융합과 종교적 관용 정책을 채택했다. 그 결과 메카를 기점으로 동서로 퍼져 나간 이슬람은 다양한 문화를 만나면서 건축에는 세련미가, 미술에는 화려함이 더해져 문화적 풍성함을 얻게 되었다. 이슬람의 성공과 위대성은 이처럼 다른 생각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힘에 있었다.

비잔틴과 페르시아라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두 문명을 일시에 제압하고 받아들인 이슬람은,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거쳐 에스파냐 땅 그라나다에 알함브라 궁전이라는 걸출한 건축 예술을 남겼다. 그리고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가서는 인도의 토착 문화를 받아들여 타지마할이라는 인류 최고의 건축을 남겼다. 우리는 타지마할만 기억하지만 무굴시대 모스크 건축은 라호르에서 더욱 화려하게 빛을 발한다. 무굴시대 라호르의 대표적인 건축이 바드샤히 모스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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