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표현을 못하겠어." 그녀는 말했다. "요즘 계속 그래. 정말말을 잘 못하겠어. 무슨 얘길 하려고 하면 항상 엉뚱한 말만 떠올라. 엉뚱하거나, 완전히 반대거나. 그래서 그걸 고치려고 하면이상하게 더 혼란스러워져서 엉뚱한 말이 나오는 거야. 그러다보면 처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조차 잊어버려. 마치내 몸이 두 개로 나뉘어 술래잡기를 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야. 한가운데 아주 굵은 전봇대가 서 있고, 그 주변을 빙글빙글돌면서 술래잡기를 하는 거야. 제대로 된 말은 언제나 또하나의내가 갖고 있고, 나는 절대로 쫓아가질 못해." - P25

수업을 빼먹고 당구장이나 가는 고등학생이라면 자살을 해도 별로 이상할 것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 P29

그러나 내 안에 무언지 모를 부연 공기 같은 것이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공기는 또렷하고  단순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태를 말로  바꿀 수 있다. 이런 말이다. - P29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 P29

나는 그때까지 죽음이란 것을 타인에게서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 확실히 우리를 붙잡는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를 붙잡는 그날까지 우리는 죽음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다‘라고 지극히 정상적이고 논리적인 생각 같았다. 삶은 이쪽에 있고, 죽음은 저쪽에있다. - P30

그러나 친구가 죽어버린 그날 밤을 경계로 나는 더는 죽음을그렇게 단순히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다. 죽음은 이미 내 안에 있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그것을 잊어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열일곱 살이었던 5월의 밤에 내 친구를 붙잡은 죽음은, 그날 밤 나까지 붙잡았기 때문이다. - P30

플라타너스 잎을 밟을 때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가찾고 있는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누군가의 팔이었다. 그녀가 찾고있는 것은 내 체온이 아니라 누군가의 체온이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 P32

나는 그녀의 이 편지를 몇백 번이나 읽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한없이 슬퍼졌다. 그것은 마치 그녀가 내 눈을 말끄러미 바라볼 때 드는 느낌과도 같은, 어찌할 바 모르는 슬픔이었다. 나는그런 기분을 어디로 가져갈 수도, 어디에다 넣어둘 수도 없었다.
그것은 바람처럼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걸칠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들이하는 말들은 내 귀까지 닿지 않았다. - P42

반딧불이가 사라진 후에도 그 빛의 궤적은 내 안에 오랫동안머물러 있었다. 감은 눈의 두터운 어둠 속에서, 그 약하디약한빛은 마치 갈 곳을 잃은 영혼처럼 언제까지고 떠돌고 있었다. - P47

나는 몇 번이나 그런 어둠 속에 가만히 손을 뻗어보았다. 손가락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작은 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조금 앞에 있었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급관청이 아전과 군교를 조사하면, 비록 그 일이 사리에 어긋나더라도 수령은 순종하고 어기지 않는 것이 좋다. - P95

상관의 명령이 공법(公法)에 어긋나고 민생에 해를  끼치는 것이면 굽히지 말고 꿋꿋이 자신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 - P96

예(禮)는 공손하지 않으면 안되고 의(義)는 결백하지 않으면 안되니,예와 의가 아울러 온전하고 온화한 태도로  도(道)에 맞아야 군자라고한다. - P97

이웃 고을과는 서로 화목하고 예의있게 대하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이웃 고을 수령과는 서로 형제의 우의가 있으니, 저쪽에서 실수가 있더라도서로 틀어짐이 없도록 해야 한다. - P9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옛날, 이라고 해야 겨우 십사년전의 일이지만, 나는 어느학생 기숙사에서 살았다. 대학에 갓 들어간 열여덟 살 때였다. - P9

물론 비용문제도 있었다. 기숙사 비용은 자취생활에 비해 월등히 쌌다. 나야 물론 가능하다면 아파트를 빌려서 마음 편하게 혼자 살고 싶었지만, 입학금이며 등록금이며 매달 송금받을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런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 P9

이 기숙사의 유일한 문제점은 문제점이라고 할지 어떨지는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운영자가 어느 극우 인물을 중심으로한 정체불명의 재단법인이라는 사실이었다. - P10

기숙사 입소 안내 팬플릿과 기숙사생 규칙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교육의 근간을이루어 국가에 유익한 인재를 양성한다.‘ 이것이 이 기숙사의 창설 정신이다. - P10

그리고 일상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우익이든 좌익이든 위선이든 위악이든 별 대단한 차이는 없었다. - P11

기숙사의 하루는 장엄한 국기 게양과 함께 시작된다. 물론 국가도 흐른다. 국기 게양과 국가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것은 스포츠뉴스와 행진곡의 관계 같은 것이다. - P11

어째서 밤에는 국기를 거둬들이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밤에도 국가는 멀쩡히 존속하며,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국기의 비호를 받을 수 없다는 건 아무래도 불공평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런 데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신경쓰는사람은 나 정도이지 않을까. 하긴 나도 어쩌다 문득 그런 생각이들었을 뿐이지 깊은 의미 같은 건 전혀 없다. - P13

"나는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고 있어." 그는 처음에 만났을 때이렇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해?" 나는 물어보았다.
"응, 졸업하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서 말이야, 지, 지도를 만들 거야."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소망이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 P15

그때까지 나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지도를 만드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도‘라는 말을 할때마다 더듬는 인간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도신기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말을 더듬기도 하고 안 더듬기도했지만, ‘지도‘라는 말이 나올 때만큼은 백 퍼센트 확실히 더듬었다. - P15

"체력이 상당히 좋구나." 국수를 다 먹고 나서 내가 말했다.
"놀랐어?"
"응."
"이래 봬도 중학교 때는 장거리 선수였어. 게다가 아버지가 산을 좋아한 탓에 어릴 적부터 일요일만 되면 등산을 했고. 그래서 지금도 다리 하나는 튼튼해."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녀는 웃었다. - P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평소에는 거의 사람들을 만나지않기 때문에, 이따금 이런 일이 있으면 꽤 신선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영어회화연습도되고, 또 문화 교류에 일조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있고(실제로 되는지 안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 P26

오스틴은 꽤 살기 좋을 것 같은 도시였다. 텍사스 주라고 하면 자못 황량한 사막, 평원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곳을 상상하기 쉽다. 또 실제로 그런 토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긴 한다. 하지만 오스틴은 그 같은 일반적인 텍사스 이미지와는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시내 한가운데에 깨끗한 강이 흐르고 나무도상당히 많은데다가 완만한 구릉지가 펼쳐지는 곳이다. 여기저기에서 차분하고도 지적인 향기가 느껴진다. - P29

그런데 그 뒤 닉슨의 죽음을 보도하는 잡지를 읽었는데, 그가 평소 자주 입에 담았다는 이런 말이 실려 있었다.

Always remember, others may hate you, but thosewho hate you don‘t win unless you hate them. - P33

"이것을 잘 기억해두게. 만일 상대가 자네를 미워했다고 하더라도 자네가 상대를 같이 미워하지 않는 한, 그들은 자네를이길 수 없다네" 정도로 번역하면 될까? 단순하지만 상당히 깊은 맛이 우러나는 좋은 말이다. - P33

오스틴은 고양이가 엄청나게 많은 곳이었다. 더군다나 이곳의 고양이들은 대부분 애교가 있어서, 부르면 금세 "야옹" 하고 대답하면서 다가온다. (미국 고양이인데 일본말로 불러도 가까이 다가오니까 신기하다.) - P34

역시 인간은 첫째가 건강‘이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 P37

생물학과에서 실험용으로 사육하고 있던 것이 밖으로 도망쳐서 불어났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 학생 전체 인구 중에서 흑인 학생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기 때문에 그걸 벌충하기위해 대학에서 들여왔다는 또 다른 설도 있다. 이건 물론 싱거운 우스갯소리지만, 이곳에 살고 있으면 깜박 속아 넘어갈 만큼 설득력 있게 들리기도 한다. 프린스턴 대학에는 그런 믿기어려운, 그렇다고 무조건 부정할 수도 없는 속물적인 구석이약간 있으니까. - P41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달리는 여성은 낮에도 강간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고(이런 일은 상당히 자주 일어난다), 조금만 도시를떠나면 이번에는 퓨마니 곰이니 하는 동물에 대해서도 조심을하지 않으면 안 되고, 끝에 가서는 조깅 중인 대통령을 라이플총으로 저격하는 계획까지 나온다. 그래서 미국의 조깅 애호가는 마음이 편치 못한가보다. - P45

그리스에서는 조깅 같은 한가한 짓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사람이 달리는 걸 보면 개들은 모두 ‘무언가 심상치 않은사태가 벌어지고 있다‘고 인식하고 한층 더 흥분하는 것 같다.
덕분에 하마터면 큰 부상을 당할 뻔한 적도 몇 번인가 있다. - P45

터키를 여행하고 있을 때에는, 그리스보다 개가 더 많고 흉포한 것 같아 결국 한 번도 달리기를 할 수 없었다. - P45

지금부터라도 미국의 산속에서는 가급적 달리지 않도록조심하자. - P46

이곳은 존 워터스 풍으로을씨년스러운 대신 싫증이 나지 않는 호텔이지만 레스토랑에 가면 주의해야 한다. 주문하고 나서 음식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상당히 걸린다. 아침으로 주문한오믈렛은 한 시간이 지나도 끝내 나오지 않았다. - P51

많은 작가가 모이니까 역시 각자의 개성이 돋보였다. 자메이카 킨케이드는 가장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녔고, 니컬슨 베이커는 큰 키에 싹싹한 성품을 지녔다. (최신작 《페르마타》가 특히여성 독자에게 비난을 받아서, 그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보비 앤 메이슨은 왜소한 몸집에 몹시 초조해하고, 앤 비티는 가장 화려해 보이며, 존 업다이크는 역시 리더 격이라는 느낌이들었다. 하지만 내가 얘기를 나눈 가장 재미있던 사람은 워싱턴 주에서 온 톰 존스Thom Jones라는 작가였다. 창피스럽게도나는 이 사람의 작품을 읽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로 레이먼드 카버, 팀 오브라이언, 코맥 매카시의 이름을 열거하자 "그렇다면 당신은 분명히 내 책을 좋아하게 될 거요" 하고 명쾌하게 잘라 말했다. - P52

나의 극단적 중국요리 알레르기
6월 28일에 ANA 비행기로 나리타 공항에서 다롄으로 향했다. 어떤 잡지의 취재차, 사진 찍는 마쓰무라 에이조와 둘이서 중국의 만저우 지역과 몽골을도는 2주일간의 여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 P57

태어나서부터라면 같은 것은 한 번도 먹어본적이 없다. 그런 얘기를 하면 모두들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이건 진짜로 정말로 사실이다. - P57

얼마 전에 아내는 라면이 먹고 싶어져서 점심때 혼자 라면가게에 들어가 라면을 먹고 있었다. 그러자 옆 테이블에 앉았던 젊은 아가씨가 일행에게 들으라는 듯이, "나이가 들어서도혼자 라면을 먹으러 오는 여자만은 되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아내는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모두 당신이 라면을 먹지 못하는 탓이라고!" 하고 마구마구 화를 냈다. 그러니까 혼자서 묵묵히 라면을 먹고 있는 40대 여성을 어딘가에서 보더라도 너무 흉보지 말아주길 바란다. - P58

"하지만 라면을 먹지 못하다니, 정말 인생의 커다란 불행이네요. 정말 맛있으니까요." 아내는 말한다.
분명히 그럴지도 모른다. 나도할수만있다면 눈앞에 놓인음식은 무엇이든지 가리지 않고 맛있게 먹고 싶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는 좀 더 단순하고 행복한 장소가 될 것이다. - P59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해도 말린 죽순이나 용의 무늬가 그려진 그릇이라든가 그런 걸 보기만 해도 나의 용기는 장마 때의 불꽃놀이처럼 푹 꺼져버리고 만다. - P59

식사만은 정말 비극이었다. 다롄에서는 일본 음식을 먹었다. 하얼빈에서는 피자를 먹었다. (중국에 가서 피자를 먹는얼간이는 아마 이 세상에 나밖에 없겠지.) 창춘에서는 보르스치(고기와채소 등을 넣은 러시아식 수프-옮긴이)를 먹었다(후후, 맛없었다). - P60

양을 한 마리 죽여서 대접을 하는데 엄청나게 매웠다. 게다가눈앞에서 양을 죽이고 잘라서는,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가지고 뼈가 붙은 채로 산더미처럼 쌓아 내오니까, 나로서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나는 그 자리의 주빈이었기때문에 모두가 꼼짝 않고 바라보면서 "자아, 드시지요" 하고권하는데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고기를 먹는 것은 사회적 견지에서 볼 때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하고 말한다고 해서 통할 세계도 아니었다. 여기는 매사추세츠 주의 케임브리지가 아닌 것이다. 거의 꿀꺽 삼키다시피 해서 그럭저럭 조금씩 먹었다. - P64

사실을 말하면, 사진작가인 에이조 군도 양고기는 딱 질색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이 사람은 사진작가라는 이유로 "이런 것은 도저히 먹을 수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대신 "미안합니다. 잠시 밖에서 촬영하고 오겠습니다" 하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입안에 집어 넣은 것을 적당히 토해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짓을할 수 없어서 입안에 넣은 것을 고지식하게 그대로 씹어 넘겼다. - P64

비행기를 탔다가 내리면 ‘자아, 이곳은 이제 다른 장소다‘ 하는 단호한 듯한 느낌을 주지만, 페리라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 그곳에 실제로 적응하기까지는 기묘할정도로 시간이 더디게 걸린다. - P72

그리고 거기에는(특히 자동차로 이동하는 경우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강한데), 어딘가 떳떳하지 못한 일종의 서글픔이 따라다니는 것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그런 걸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좋아하지만. - P72

나는 학교를 졸업한 이래 어떤 조직에도 속하는 일 없이 혼자서 꾸준히 살아왔지만, 그 20여 년 동안에 몸으로 터득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개인과 조직이 싸움을 하면 틀림없이 조직이 이긴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결론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개인이조직에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어수룩하지 않다. 분명히일시적으로는 개인이 조직에 대해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마지막에는 반드시조직이 승리를 거두고야 만다. - P78

재료가 신선하고 공기도 깨끗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다만 버몬트는 유제품과 메이플시럽이 특산품이기 때문에, 맛있다면서 자꾸 먹으면 확실히 ‘정말로 아름답지 않게 되어버린다. 실제로 버몬트에서 만난 여성 가운데 85퍼센트는 완전히 ‘헤비급체형‘이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푸짐하게 살이 쪘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허리둘레같은 것은 이불을 두르고 걸어다니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살이 쪄 있었다. 미국 여러 곳을 돌아다녀봤지만, 이렇게 살찐 사람이 많은 지방도 처음이다. - P87

미국인에게 "무엇 때문에 당신은 지긋지긋하게 무더운 여름에 그렇게 책을 열심히 읽는 거죠?" 하고 물어보면, 모두들 의아스러운 얼굴을 하며 이렇게 대답한다. 
"글쎄, 여름에는 긴 휴가도 있고, 그때 평소에  시간이 없어서 읽지 못했던 책을 읽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 P91

그곳에 들어가면 그녀는 생긋이 미소를 지으며 뜸을 들이다가 느릿한 억양으로 "헬로, 하우아유?" 하고 인사한다. 내가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그 고양이 이름은XXX라고 해요" 하고 가르쳐주기도 한다. 모든 것이 작년 여름부터 계속되고 있는 환영처럼 보인다. 꽤 쓸만한 풍경이다. - P92

‘스컴‘은 쓰레기란 뜻이니까 문자 그대로 말하면 ‘쓰레기 자루‘라는 말이다. 사전을 찾아보니까 ‘무가치하고 도덕심이 없는 자들에게 던지는 모멸의 말, 또는 콘돔‘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무가치하고 도덕심이 없는 놈이란 말이구나. 이전부터 어쩌면 그런 녀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그러나 별로 들어보지 못한 이런 새로운 말(물론 나에게 그렇다는 얘기다)로 욕을 얻어먹으면 그다지 나쁜 느낌이 들진 않는다. - P95

미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마찬가지지만, 세간의 지저분한 말, 황폐한 영혼을 채집하고 싶으면 도시에서 차창을 내리고 차를 운전하면 된다. - P95

고전 만담 같은 것을 듣거나 혹은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같은 것을 읽으면, 옛날 일본어의 경우 욕지거리의 어휘가 상당히 풍부한 것 같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아니 유감스러운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 P96

"그렇게 내향적으로 고독한인생을 보내면서 도대체 뭐가 즐거운가?"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생활 방식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니까………… - P111

버몬트에서는 겨울동안에 자살이나 살인 건수가 굉장히 많아진다고 한다.
눈때문에 집안에 갇혀 있어서 음울한 기분이 되기 때문인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캐빈 피버cabin fever‘라 부른다. - P113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조직에도 소속된적이 없었기 때문에, ‘소속되는 것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동안에 실컷 즐겨두자고 생각한다. - P118

도로가 한산하면(대부분 한산하다) 운전하는 데 상당히 기분이 좋다. 게다가 미국의 고속도로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그 추악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교통 표어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 P119

매우 기분 좋다. 이 문제는 이전부터 내가 끈질기게 역설해왔지만, 도대체 ‘교통사고 제로를 지향하자‘는 식의 현수막 하나를 걸어놓는 정도로 과연 세상의 교통사고가 한 건이라도 줄어드는 걸까? 그런 아무 의미도 없는, 전혀 쓸모없는 짓을 아까운시간과 돈을 들여서 거창하게 도로에 걸어놓는 그 신경 구조를 나는 잘 이해할 수 없다. 쓰여 있는 문구도 대개의 경우 센스가 없어서, 읽고 있으면 불쾌해지기만 한다. 굳이 미국이 일본보다 잘났다고 두둔하는 건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미국인은교통 표어를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본인보다 훌륭하다. - P120

"그렇죠. 먹는다eat, 잔다nap, play, 그것이 인생이네99요・・・・・…" 하고 한숨을 섞어가며 말한다. 그런 생각은 세계의 어디서나 대체로 같은 모양이다. - P130

그래도 디자인만 보면, 결코 싫증이 나지 않는 심플하고 멋진 모양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켤레 더 사겠느냐고 물어오면, 아니, 이젠 됐다고 대답할 게 뻔하지만. - P134

예를 들면 꾹 참고 격렬하게 운동을 한 뒤에 마시는 시원한 맥주 같은 것이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하고 혼자 눈을감고 자기도 모르는 새 중얼거리는 것 같은 즐거움, 그건 누가 뭐래도 ‘작지만 확실한 행복‘의 참된 맛이다.그리고 그러한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없는 인생은 메마른 사막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 P136

형사가 나오는 영화에서는 젊고 미인인 여자 경찰관이 클린트 이스트우드나 멜 깁슨 같은 사람과 콤비를 이루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내는데, 현실에서는그렇지 않다. 현실은 좀 더 현실적이다. - P144

(몇 가지 내 개인적인 체험으로 말한다면, 미국에서 가장 기분 나쁜 시간을 보내려면 자동차보험 대리점에 가면 된다. 모두들 정말로 죽기 싫어서 하는 듯이 일하고 있다. 이것은 아메리칸드림의 종말과무슨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 P147

친구인 제이 루빈에게 렌터카 사무실까지 태워다달라고 부탁했다. 하루에 21 달러의 가격으로 포드의 에스코트(놀랍게도 에어백이 붙어 있는데 조수석 쪽에는 사이드미러가 없었다) - P147

무엇보다 외국이고 외국어만 통하니까, 화가 치밀어서 고함을 치고 싶어도 제대로 고함을 칠 수 없는 게 가장 괴롭다. ‘그렇구나, 세상이란이렇게 골치 아픈 것이구나. 무슨 일이든 모두 경험해야 해‘ 하고 생각하며 의젓하게 행동하고 싶지만 실제로는 도저히 그런생각이 들지 않는다. 쓸모없는 소모인 것이다. - P152

관광이부진한 이유를 물으니 "세계적인 불경기, 정부의 홍보 부족, 최근의 범죄 보도죠"라고 명쾌하게 분석했다. 자메이카에서는최근 얼마 동안 살인 사건이 급격히 증가해서 얼마 전에도 시카고에서 온 시나리오 작가가 고급 리조트가 늘어서 있는 해변에서 강도한테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 P164

톰 클랜시의 소설 <붉은 10월The Hunt For Red October)에서 망명하려고 하는 소련 시대의 러시아인을 향해 주인공 잭 라이언이 이렇게 설명하는 장면이나온다. "미국의 슈퍼마켓에서는 겨울에도 토마토를 살 수 있어. 약간 값이 비싸긴하지만 말이야." 러시아인은 그 말을 듣고도 그다지 믿지 않는다. "농담하지 말라고요. 겨울에 어떻게토마토를 살 수 있습니까?" - P172

그런데 생각해보면 문호 톨스토이는 일찍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대개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전부각각 다르다‘는 의미의 글을 썼다. 이 말은 확실히 인간의 얼굴에도 해당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굉장한 미인"이라고 말하면 대개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머리가 아찔할정도로 어처구니없이 못생긴 추녀"라고 말하면 전혀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 P195

"사물은 어두운 측면 쪽이 보다 명확하게 법칙화될 수있다"는 것도 무라카미 - 피터의 법칙 중 하나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앞에는 호랑이문, 뒤에는 경비병 초소‘
라는 말이 문득 생각났는데, 이건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겠지? - P200

나는 뉴스 이외에는 TV 프로그램을 보는 일이 거의 없다(미국에서나 일본에서나 특히 이건 꼭 봐야지 하고 생각되는 프로그램은 유감스럽게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도 이따금 진귀한 영화라든가 예전에 못 본 영화를 방영하는 때가 있으면 그때는 맥주와 마른안주를 준비하여 TV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한가로이 두 시간쯤 시청하면서 즐기곤 한다. - P2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라카미 하루키 감성에세이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

글쓰는 틈새에 고양이와 마라톤 그리고 여행을 즐긴다 - P1

너무 딱딱하고 긴장된 자세로 이 책을 집어 들지 말고 한가로이 읽어주기 바랍니다. - P7

잡지에 게재할 때부터 "부드러운 그림일기풍으로 하면 좋겠네"라는 의견으로 안자이 미즈마루 씨의 순수한 아트풍의 그림과 아내의 아마추어 스냅사진을 곁들여 발표했습니다. - P7

소설을 쓰는 것은 대체로 검소하고 과묵한 작업이다. 일찍이 조이스 캐럴 오츠가 "조용하고 단정하게 작업을 하는 사람은 그다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라고 말한 것처럼. - P12

"하지만 작가가 지나치게 건강하면 병적인 어두움(이른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싹 사라져버려서 문학이라는 게 성립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하고 지적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 P12

하지만 다소 기록의 차이도 있고 때에 따라서는 기쁘거나분하기도 하지만, 보스턴 마라톤은 언제 달려도 진짜 멋진 레이스다. - P17

42 킬로미터를 실제로 달리고 있을 때는 ‘도대체 내가 왜 일부러 이런 지독한 꼴을 자처하는 거지? 이래봤자 좋은 일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몸에 해로울 뿐이지 (발톱이 빠지고, 물집도 생긴다. 그다음 날에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도 힘이 든다‘ 하고상당히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캐묻는다. - P21

인간에게는 이따금 자신을 알 수 없는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가보려는 내재된 욕망 같은 것이 있는 것일까?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