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이라고 해야 겨우 십사년전의 일이지만, 나는 어느학생 기숙사에서 살았다. 대학에 갓 들어간 열여덟 살 때였다. - P9

물론 비용문제도 있었다. 기숙사 비용은 자취생활에 비해 월등히 쌌다. 나야 물론 가능하다면 아파트를 빌려서 마음 편하게 혼자 살고 싶었지만, 입학금이며 등록금이며 매달 송금받을 생활비를 생각하면 그런 욕심을 부릴 수가 없었다. - P9

이 기숙사의 유일한 문제점은 문제점이라고 할지 어떨지는보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운영자가 어느 극우 인물을 중심으로한 정체불명의 재단법인이라는 사실이었다. - P10

기숙사 입소 안내 팬플릿과 기숙사생 규칙을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교육의 근간을이루어 국가에 유익한 인재를 양성한다.‘ 이것이 이 기숙사의 창설 정신이다. - P10

그리고 일상생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우익이든 좌익이든 위선이든 위악이든 별 대단한 차이는 없었다. - P11

기숙사의 하루는 장엄한 국기 게양과 함께 시작된다. 물론 국가도 흐른다. 국기 게양과 국가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이것은 스포츠뉴스와 행진곡의 관계 같은 것이다. - P11

어째서 밤에는 국기를 거둬들이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밤에도 국가는 멀쩡히 존속하며,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국기의 비호를 받을 수 없다는 건 아무래도 불공평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무도 그런 데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신경쓰는사람은 나 정도이지 않을까. 하긴 나도 어쩌다 문득 그런 생각이들었을 뿐이지 깊은 의미 같은 건 전혀 없다. - P13

"나는 지, 지, 지도 공부를 하고 있어." 그는 처음에 만났을 때이렇게 말했다.
"지도를 좋아해?" 나는 물어보았다.
"응, 졸업하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서 말이야, 지, 지도를 만들 거야."
세상에는 실로 다양한 종류의 소망이 있구나, 나는 생각했다. - P15

그때까지 나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지도를 만드는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도‘라는 말을 할때마다 더듬는 인간이 국토지리원에 들어가고 싶어한다는 것도신기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말을 더듬기도 하고 안 더듬기도했지만, ‘지도‘라는 말이 나올 때만큼은 백 퍼센트 확실히 더듬었다. - P15

"체력이 상당히 좋구나." 국수를 다 먹고 나서 내가 말했다.
"놀랐어?"
"응."
"이래 봬도 중학교 때는 장거리 선수였어. 게다가 아버지가 산을 좋아한 탓에 어릴 적부터 일요일만 되면 등산을 했고. 그래서 지금도 다리 하나는 튼튼해."
"그렇게 안 보이는데."
그녀는 웃었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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