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산독일지
나의 사랑하는 아내이자 34년지기 친구인 그녀는 지난 1주일간 제주여행의 고된 몸과 마음을 푼다며 그녀의 언니(나의 처형은 나의 형의 중학 동창이고, 그녀의 여동생은 나의 여동생의 동창이고, 그녀의 막내 여동생은 나이보다 학교를 일찍들어가지 않았다면 나의 막내동생과 중학 동창이었을 것이다.그녀의 오빠는 중학 선배다)와 가까운 ㄹㄷ백화점에 바람쐬러 가고, 나는 혼자서 지금은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백제의 숨결을 느끼려 계백장군의 혼이 서린 황산벌에 갔다.
나는 아내와 주민번호가 거의 같다. 추석 즈음에 태어난 나는 작고하신 아버님께서 농사일에 바빠 호적신고를 늦게하면서 공교롭게 아내와 비슷해지게 되었다. 앞 여섯자리는 모두 같은 숫자이며 마지막 두자만 순서가 다르다. 뒤 여섯자리는 맨앞, 맨뒤 숫자만 다르다. 이만하면 천생연분이지 않은가?
그때는 호적신고를 대부분 늦게했으며, 나의 여동생은 심지어 남자로 호적신고가 돼 있었다. 후에 홍성법원에가서 고치긴 했지만
충남 논산 계백의 혼이 살아 숨쉬는 솔바람길
촐발점. 논산 연산 임리에 있는 돈암서원. 광산 김씨 사계 김장생을 주향으로 그의 아들 김집, 노론거두 은진 송씨 송시열, 송준길을 배향했다. 송시열, 그는 기호학파에서는 주자의 반열에 올리며 송자로 추앙했지만 영남학파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 개 이름을 시열이라 불렀다 한다. 본관은 은진. 사약을 받아 죽을때도 한사발에 안돼 몇사발을 들이키고 구멍을 다 막은뒤 절명했다 한다. 송시열은 그의 제자 명재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비문을 시열에게 부탁했으나 시열은 거절하였고 그 뒤 시대를 바라보는 시각차로 서로 대립했다. 우암은 노론, 명재는 소론. 논산 노성면 노성산 밑에 명재고택이 있다. 우암 관련 재밌게 읽은 책, 천고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사화로 읽는 조선역사, 당쟁으로 읽는 조선역사. 충남 아산출신 재야학자로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역사인식과는 다른 사관을 보여준다.
이 걷기 길에는 세개의 사원이 존재한다.
충곡서원. 사육신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계백장군, 김익겸(누군지 모름) 외 11인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굳게 잠겨 들어갈수 없다.
휴정서원. 류무, 송익필, 김공휘, 김호, 이항길, 김상연, 김진일, 김우택을 배향. ㅠㅠ 아는 사람은 공작정치의 대가 송익필 하나.
논산이 의외로 충절의 고장이다. 앞서 언급한 3개 서원과 명재고택외 지금은 논산시에서 분리된 계룡시(구 논산군 두마면)에 위치한 김장생이 말년에 학문을 연구하던 두계 은농재. 계백장군을 모신 충장사.
이곳은 우리 고장의 나라 백제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황산벌. 백제 부흥운동으로 흑치상지, 부여복신, 도침의 임존성, 주류성 전투등이 있지만.
황산벌 전투
황산벌 전투는 660년 7월 9일(음력) 백제군과신라군이 이곳 황산벌에서 벌인 전투이다. 660년 신라와 당은 군사동맹을 맺어 사비성을 공략할 계획을 세우고 백제를 침략하였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5만여명은 탄현을 넘어 황산벌(지금의 연산면 신양리)로 진군하였다.계백은 스스로 가족의 목숨을 거두고 비장한 각오로 출전,황산벌에 먼저 도착하여 세곳의 진영(三營 : 황령산성, 산직리산성, 모촌리산성으로 추정)을 설치하였다.
계백의 결사대는 세갈래길(三道)로 나누어 진격하는 신라군을 맞아 네번을 싸워 이겼으나 수적 열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였으며, 계백장군은장렬히 전사하였다. 황산벌 전투의 패배로 백제는 멸망하였지만, 계백장군과 5,000 결사대는 충절과 호국의표상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 한편 황산벌 일대의지리적 요충지에는 황령산성, 산직리산성, 모촌리산성 등 다수의 산성이 분포하고 있다.
산직리산성 아래에는백제군이 신라군과 싸워 승리했다고 하는 승적(勝)골이란 지명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이곳 계백장군유적지(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 일대는 백제의 유민들이 계백장군의 시신을 가매장했다고 하여 가장골이란 지명이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현재는 계백장군묘소와 백제군사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