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9쪽)
프롤로그 나경희
ㅡ우리 가족은 정말 운이 좋았다
할머니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엄마였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방에서 할머니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던 엄마가 가족을 불러 모았다. 할머니의 눈자위가 누르스름했다. 여행을 떠나는 주말 아침이었다. 들떠 있는 손주들 앞에서 할머니는 황달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가 봐요" 말하면서도 엄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주말이 지나고 할머니는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검사는 오래 걸렸다. 결과가 나오자 엄마와 아빠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손을 쓸 수 없는 췌장암 말기였다. 항암 요법을 받거나 수술을 해도 나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했다. 10살이었던 나는 할머니를 '고쳐달라'고 울면서 떼를 썼다. 엄마는 그렇게 하기에는 할머니의 나이가 너무 많고 할머니가 받을 고통도 너무 클 거라고 말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도 분에 못 이겨 씩씩거렸다. '할머니가 이 세상에 없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내 고통은 알지도 못하면서.'
할머니는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집에서 가족과 함꼐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할머니의 몸은 천천히 느려졌다. 결국 부축 없이는 걷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충격을 받지 않았다. 할머니가 하루하루 약해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그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했다면, 그래서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병문안을 갔다면 그때마다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돼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 같다.
할머니와 부모님의 선택은 옳았다. 가족들에게도, 할머니 자신에게도 죄책감을 주지 않았다. 서로에게 지난 날을 정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의사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6개월이 더 지나 할머니는 집에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무척 슬펐지만 그뿐이었다. 아쉬움이나 분노 같은, 슬픔 이외의 마음은 들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그리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취재를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됐다.
우리 가족은 운이 좋았다. 당시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던 엄마는 고령의 암 환자들이 병원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임종에 이르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행운이었다. 초ㆍ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우리는 일찍 집에 돌아와 할머니를 돌봤다. 문방구고 놀이터고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만 끝나면 달리고 달려서 할머니 곁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우리를 사랑했고 우리는 할머니를 사랑했다. 할머니가 수십 년간 살아온 집은 수십 년간 쌓여온 사랑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수술로 암이 치료될 가능성이 '조금' 있었다고 해도 할머니는 병원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 행운이었다.
우리 가족은 정말 운이 좋았다. '운이 좋았다'고 거듭 말하는 건 그렇지 못한 가족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96년 집에서 사망한 사람이 전체 사망자의 63.2%,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이 25.2%를 차지한다. 이 비율은 2003년을 기점으로 뒤바뀐다. 2019년 집에서 사망한 사람은 전체의 13.8%에 불과하고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77.1%나 된다.
꼭 집에서 죽어야만 좋은 죽음이라는 말은 아니다. 문제는 집을 대신할 수 있는 공간이 병원밖에 없다는 점이다. 병원은 효율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게 목표인 공간이다. 질병과의 싸움에서 승리와 패배가 명확히 갈리는 곳이다. 비효율적이더라도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어떻게 잘 죽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다.
죽는 그 순간까지 후회를 걱정해야 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지친 몸과 마음은 얼마나 두렵고 쓸쓸할까. 모든 순간이 단 한 번뿐이지만 죽음은 정말이지 단 한 번뿐이다. 우리는 단 한 번 맞이할 죽음에 대해 좀 더 다양한 상상을 해야 하고, 좀 더 다양한 경험을 이야기해야 한다.
취재를 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나는 엄마와 아빠를 할머니만큼 잘 보내드릴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나와 형제들은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고, 명절 때나 서로 얼굴을 볼 뿐이다. 이제 부모님 집에는 엄마와 아빠의 쇠잔한 몸을 보완해줄 수 있는 장치가 하나씩 늘어가고 있다. 부엌 가스 밸브에 자동잠금 장치가 새로 달렸고, 욕실 슬리퍼는 미끄러지지 않는 고무 재질로 바뀌었다. 온갖 예방책에도 불구하고 생기게 될 돌봄 공백은 누가 채울 수 있을까.
부모님의 죽음보다 더 자신 없는 건 나의 죽음이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면, 내게 함께 사는 사람이 없다면 노령의 나를 누가 부축해줄 수 있을까. 나는 할머니만큼 잘 떠날 수 있을까. 다행인 건 이 걱정을 나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과연 잘 죽을 수 있을까. '죽음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 끝에 나온 결론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나의 죽음을 운에만 맡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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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집에서 사망한 사람은 전체의 13.8%에 불과하고 병원에서 사망한 사람은 77.1%나 된다.'는 통계 자료에 놀랐다. 이런식이면 대부분 병원에서 죽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인가? (통계청 자료 검색해보니 2023년 '사망 장소별 사망자 수 비중은 의료기관(병의원, 요양병원 등) 75.4%,
주택 15.5%, 기타(사회복지시설, 산업장, 도로 등) 9.1%임') 와아. 정신 든다. 번쩍 번쩍. 집에서 죽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다니. 절대 공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나의 죽음을 운에만 맡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