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몸으로
김초엽 외 지음, 김이삭 옮김 / 래빗홀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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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소리탈출연구소 1 - 집중력 도둑을 잡아라 잔소리탈출연구소 1
윤선아 지음, 원혜진 그림 / 어크로스주니어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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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가 타츠키 료(70세)는 올해 7월 5일에 일본대지진이 난다고 했다. 이전 동일본대지진을 적중했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정보가 몇 달전부터 바이럴되고 있고, 실제로 미신과 풍수를 믿는 인구가 많은 홍콩에서는 일본 7월 관광객이 대거 줄었다고 한다.


과연 지진은 발생할까? 이에 대해 메타적으로 분석해보자. 문화현상적, 마케팅적 등 6가지 프레임으로


1) 확률적으로는 지진이 난다와 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다. 50% vs 50%.

그러나 결과가 둘 중 하나라는 이유만으로 각 결과가 동일한 확률을 가진다고 착각하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따. 현실의 지진 발생확률은 지질학적 데이터에 따라 매우 낮거나 높게 편향되어 있다.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다는 이항 논리(binary logic)는 확률론적 무지(probabilistic ignorance) 또는 사건 균등 오류(equiprobability bias)로 이어진다.


지질학자들은 난카이 대지진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예견하지만 그 날은 반드시 7/5이 아닐 수 있다. 정답은 모른다, 이다. 확률은 예언이 아니다.


이에 수반되는 현상은 확증편향이다. 심해어가 잡혔다느니 수백 차례 여진이 있었다느니하는 현상은 과거에도 존재했지만 미디어에 포착되지 않았는데 타츠키 료의 예측이 충분히 바이럴되니 이런 기사도 이제 덩달아 조회수를 올리기 때문에 대거 양산되고 다시 이 지진에 대한 공포를 강화한다. 말콤 글레드웰이 말한 부익부 빈익빈의 마태복음 효과다. 베스트셀러가 베스트셀러를 낳는 것이다.


2) 예언 실패 후 날짜를 바꾼다. 재해석적 종말론. 근대 유럽의 그리스도교 종말론 운동에서 빈번했던 접근이다. 세상이 망한다고 봉기하고 사람들을 겁박하고 긴장감을 주다가 실현되지 않으면 해석을 바꾼다. 사실 그 날이 그 날이 아니었다고.

토마스 뮌처와 독일 농민전쟁(1524–1525)은 새 천년왕국이 세워져 악한 봉건영주는 정복된다고 말하며 농민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심판의 날을 잘못 계산했다며 소규모 신비주의 종말론으로 이어졌다. 네덜란드의 아나뱁티스트 뮌스터 왕국(1534–1535)는 새 예루살렘을 뮌스터에 건립하려고 사람들을 동원했으나 도시는 함락되었다. 그러나 17세기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멘노나이트로 에소테리즘이 이어지며 종말의 시점이 미래로 연기되었다.


3) 예언의 적용 범위를 조정할 수 있다. 진리의 그 날은 일부에게만 알려져있다는 것이다. 예언은 일부에게만 유효하다는 선택적 계시주의다. 타츠키 료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 창조주와 접신은 파워스폿에 가야만 느낄 수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만화 같은 시각적으로 직관적인 매체로 출판해서 굳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렸다가 해석 공동체를 전환하는 사례다.

예언의 실패를 숨기기 위해 특별한 장소에서 특별한 사람만 인지가 가능하다고, 영적인 준비가 된 자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식으로 예언의 적용 대상을 축소할 수 있다.


4) 주식시장에서 많이 보이는 사례도 생각난다. 예측이 알려지면 오히려 실현이 안되는 자기무산적 예언이다. 폭락을 예상하면 사람들이 방어적으로 행동해서 예측이 엇나간다. 예측을 회피해서 결과적으로 예측이 적중하지 않는다. 예언을 한 의미가 없는 예언 효과의 역설이다. 어떤 예측이 공표되어 사람들이 행동을 바꾸면서 예측된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는 역설적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지진예언은 이와 큰 관계는 없다. 지진은 사람들의 인식이 바뀐다고 방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 예언의 핵심은 빗나가지만 주변 징후는 실현되는 경우도 있다. Y2K 밀레니엄이 대표적이다. 전자기기 신호가 고장나서 2000년 이전에 생산한 컴퓨터가 2000년 이후의 연도를 인식하지 못해서 밀레니엄 버그의 시스템 결함으로 세상이 망한다고 했는데 실제로 망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잘 살아간다. 다만 그때 예상한 징후, 해킹, 디도스 공격같은 것은 계속 받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을 겁박하는 핵심 예언메시지가 아니라 그 주변의 현상만 사실이 되는 것이다. 즉, 본체는 맞지 않고 부수적 현상만 맞는 부분적 실현이자 잔여적 진실인 셈.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예언의 책을 1501년에 저술해 신대륙탐사를 신앙적 소명으로 정당화했다. 기독교가 온세계에 전파되어야하며 에덴동산을 찾아야만하고 마지막 황제를 찾아야하는데 그게 바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라는 것이었다. 컬럼버스의 이 부분은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예를 들어 위키피디아 이런 부분에서 읽어볼 수 있다. 컬럼버스 이전에도 바이킹이 아메리카대륙으로 건너갔던 고고학적 기록이 있다. 컬럼버스의 신앙적 정당화가 중요한 이유는 이후 많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으로 넘어가는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컬럼버스의 신앙적 예언보다, 신대륙 탐사라는 부산물이 더 중요한 것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Book_of_Prophecies


6) 보다 핵심적으로 위기 마케팅(Crisis Marketing)이 있다. 예언가가 책, 굿즈, 후원금, 강연료 등으로 경제적 이득을 얻거나 유튜버들이 불안심리를 활용해 알고리즘 상위 노출을 노리는 사례다. 이게 사실 현실에서 실제 발생하는 일이다. 그의 책은 불티나게 팔리고, 관련뉴스와 유투버들은 조회수가 폭발한다. 지진이 실제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상관이 없이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있다. 통조림 같은 방재용 식료품도 많이 팔릴 것이다. 대신 시코쿠 지역의 관광업계가 타격을 입었을 것. 이런 지진말고도 위기 마케팅은 여럿있다. 미국에는 대표적으로 외계인 침공설도 있고 여전히 그리스도교의 문화전쟁론, 종말론이 득세하고 있다. 꼼꼼히 확인해야한다 누가 어디서 어떤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지.


지진이 나도 나지 않아도 여전히 사람들은 살아갈 것이다. 재해는 참혹한 것이지만 사람들은 복원하고 살아갈 것이다. 재해를 어떻게 대비하고, 또 주변인은 그 허탈한 상황에 어떤 도움을 기여할지 생각해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살아갈 것이다. 바나나맛 감자칩 같은 괴식을 먹고, 한정판이라고 광고한 홈런볼 메론우유는 허니버터칩처럼 우후죽순팔리다가 어느순간 마트에 번들로 묶여 떨이로 팔릴 것이다. 그리고 진실은 그렇게나 위협적이었던 예언의 순간이 지나가면 마치 없던 일처럼 너무 오래 전 일처럼 기억된다는 것이다 .Y2K의 공포에 전재산을 팔았던 사람들이 그러하였듯, 진심으로 천년왕국의 도래를 믿었던 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이 그러하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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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계 역사학자이자 오스트리아 빈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니샤 맥 스위니(Naoíse Mac Sweeney) 책이 번역되었다. 펭귄에서 2023년에 나왔는데 10-20년 후 번역되는 케이스도 많은 역사학분야에서 이례적으로 빨리 번역되었다.

아일랜드계 이름이라 나오이스가 아니라 니샤로 읽는다. 작은 아씨, 레이드버드 등으로 유명한 시어샤 로난(Saoirse Ronan)도 이렇게 읽는다. ao합쳐서 이로 읽는다.


서양은 단일하지 않다. 목적에 의해 만들어졌고, 후대에 구성되었고, 필요에 의해 발명되었다, 라는 주장은 이미 학계에서도 검증되고 대중에게도 널리 퍼져있는 주장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에드워드 사이드, 블랙 아테나를 쓴 마틴 버널, 폼페이의 메리 비어드가 이미 서양은 단일한 문명체가 아니며, 그리스로마 중심주의, 르네상스의 재해석, 계몽주의적 전통 모두역사적으로 구성되었다고 수차례 일갈했다. 고인물이다 못해 화석이 된 이야기다. 그런데 무엇이 특별한가?


인종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만들어진 서양이라는 오래된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은 아닌가?

특별한 점은 기존 비판이 제국사 비판, 지성사적 접근으로 거시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 책은 14명의 개별 인물의 생애를 통해 퀼트형 전기적 역사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고대 그리스인도 동양, 아프리카의 경계를 명확하게 긋지 않았다는 익숙한 헤도로도토스로 시작했다가 특히 사피예 술탄이나 기독교 개종한 앙골라의 은징가나 남성 교양인의 전유물 시를 짓는 여성노예 필리스 휘틀리 같은 여러 여성, 소수자를 발굴해서 작은 인물을 통해 거대 담론을 드러냈다.


또한 서양성이라는 개념이 상속된다는 점을 제기했는데, 이 상속은 선택적이다. 아까 말한 필립스 모리스는 고전과 시에 정통했지만 "노예화된 유명인 enslaved celebrity"였고 백인 주류 사회는 진정한 서양의 후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서삼경, 전서와 초서에 정통하고 국악을 전공한 동남아시아인, 흑인, 인도인이 있다면 우리도 진정한 우리문화의 후예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역으로 할 수 있다. 과연 주류가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이 책의 이야기는 서양을 케이스스터디한 것일 뿐, 서양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문화가 다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인 듯 보이나, 인종, 계급, 성별에 따라 배제적으로 작동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펭귄에서 출판되었는데 읽기 쉬운 편이다. 영어 원서를 보면 조금 더 알 수 있다. 기존 탈서양 비판은 대중적이지 않았다. 술술 읽기 어려웠고 고매한 학술 언어에 갖혀있었다. 각주도 많았고 다른 인접분야 이론과 학자명이 수없이 튀어나왔다. 박식한 빌 브라이슨이 튀는 문체로 종횡무진 역사를 서술한 것이 가독성이 좋으나 스펙트럼이 넓은 책의 예외다. (우리나라에는 고 남경태 선생이 있었다)



원서는 영국 12파운드, 미국 17달러, 약 2만1천원선의 400페이지짜리 책이다. 펭귄은 100% 친환경 재생지라 가벼워 들고 다니기 좋다. 물론 재질 냄새는 어쩔 수 없지만. 그리고 친환경이라고 홍보하고 사실 비용절감이 목적이다.


한국은 3만2천원(10% 할인 후 2만9700원)이다. 종이재질이 더 좋고 더 무거워 들고다니기 어렵다. 사실상 소장용이다. 한국인은 이런 고급스러운 인문학분야는 양장이 아니면 사질 않는다. 문고본 인문학책은 팔리지 않는다.


이 책에서 다룬 14명 목록은 이렇다

제1장 순수성을 거부하다: 헤로도토스

제2장 아시아계 유럽인: 리빌라

제3장 고대 세계의 국제적 계승자: 알킨디

제4장 재등장한 아시아계 유럽인: 비테르보의 고프레도

제5장 기독교 세계라는 환상: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

제6장 고대를 재상상하다: 툴리아 다라고나

제7장 미답의 길: 사피예 술탄

제8장 서양과 지식: 프랜시스 베이컨

제9장 서양과 제국주의: 앙골라의 은징가

제10장 서양과 정치: 조지프 워런

제11장 서양과 인종: 필리스 휘틀리

제12장 서양과 근대성: 윌리엄 글래드스턴

제13장 서양과 그 비판자들: 에드워드 사이드

제14장 서양과 그 적수들: 캐리 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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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화이트큐브에 다녀왔다. 후난성출신으로 광저우미대졸업 후 프랑스에서 8년 활동하다가 다시 광저우로 귀국해 활동하는 저우리 작가의 전시가 그저께 열렸다. 전시는 보기 편하고 직관적인 추상계열인데, 둔황의 석굴과 폼페이의 프레스코화가 묻어나는 벽화풍이라 특이하다. 바랜 꽃 그림을 통해 시간의 변화와 메타모포시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참고로 화이트로 시작하는 갤러리는 이렇게 외우자. 

서울역 ㅅ→화이트스톤 ㅅ, 청담의 ㅁ(네모)→화이트큐브(cube), 헤이리 화이트블럭(예술인마을=커뮤니티블럭)


급변하는 시대에 회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화는 다른 리듬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무한한 양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소비하는 우리들. 정보가 경이로운 속도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지만 대부분은 무용지물이다. 우리의 몸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하고, 기억 속에 자리잡지도 못하고, 감정과도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회화는 다르다. 그것은 느린 예술이다. 그 평면을 제대로 마주하기 위해 걸어야하고, 걷다가 멈추어야 하고, 온전히 응시해야 하며, 느끼고 체험해야 한다. 회화는 다시금 우리에게 신체의 존재를 자각하게 하고 정신의 질서를 회복하게 한다.


화이트큐브의 전시장을 거닐며 저우리의 작품을 보는 경험은 마치 봄의 흐드러진 벚꽃축제, 한여름밤을 수놓는 불꽃놀이, 가을의 애잔한 단풍과 어둑한 겨울하늘에 빛나는 LED 드론쇼를 보는 경험과 닮았다. 춤추는 듯 흩날리는 화면을 볼 때의 흥분, 경탄과 바로 이어지는 무상함. 한순간의 시각적 향연에 눈에 멀다가 이내 집에 돌아가면 망막에 맺힌 그 장면이 잊혀지는 것 같은 화려함의 무상함. 각양각색의 불빛과 다채로운 꽃잎이 하늘을 가르며 아름다운 궤적을 그리지만 눈부신 순간을 남긴 뒤엔 아무것도 머무르지 않는다. 특별한 감흥은 분명히 있으나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수 없는 젊음, 첫사랑의 짜릿함과도 같은 것. 어떤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는 심지어 카메라를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완전히 몰입해 주변의 환호는 백색소음이 되고 눈은 붙박이마냥 좀처럼 떼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당연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


푸른 것 중 하나, 즉, 밤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허구다. 특별한 리듬도, 서사도, 가늠할 수 없는 깊이에, 유의미한 공간관계도 없이, 마치 모든 모퉁이가 보이지 않고, 빛의 궤적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인간은 그 사이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도 없다. 밤하늘의 특별함은 고요함과 불안이 공존하는 데에 있다. 그리고 저우리는 그 밤하늘의 고요한 리듬을 캐치해냈다. 우리는 그 고즈넉한 화면에서 무엇을 응시하게될까? 저우리는 우리와 함께, 혹은 우리의 이전에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을까?


날아다니는 선과 떠도는 꽃은 구체적인 조형이나 선명한 사물보다는 어떤 감정으로 연결되는 미로다. 희망, 동경, 감정, 그리고 작가가 우주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사적인 감정으로 얽힌 미로같다. 거대한 스케일은 세밀한 필치를 뒤흔들고 외향적인 구도는 내향적인 감정을 전달하며 화면은 작은데서 붕괴되어 큰 울림의 진폭으로 나아간다. 내면의 정신적인 명상이 색면의 덩어리라기보다 잘게 부서지고 다듬은 선으로 잘린다. 감정이 편린으로 절단되고 전체적인 정서는 수축하다가 어느 순간 관객에게 직설적으로 말을 건내며 대폭발한다. 안과 밖, 크고 작음, 전체와 부분은 이렇게 하나에서 만난다.


이러한 화면 속에서 추상과 비어있음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저우리의 회화는 추상적인 도식이나 일관적인 패턴을 형성하려는 시도는 아닌 것 같다. 형태를 추출하거나 조합하여 만들어진 인위적 추상도 아니고, 현실의 사물에서 분리되어 압축된 구조적 표현도 아니다. 외려 거침없는 필치로 호쾌히 그린 기운생동의 공간에서 직관적으로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외, 그리지 않음으로서 그리는 도교적 화면이다. 비어있음을 붓끝으로 밀어내고 시간성의 흐름을 만든다. 구상의 소거이고 조형의 제거라고 함직하다. 서양 추상표현주의의 부정적 공간이나 전통 산수화의 여백의 시적 공간도 아니다. 선과 조형을 그리되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공간에는 기운과 움직임과 펼쳐짐과 주름, 여밈과 스밈, 구름과 감정,  거대하고 만질 수 없는 격류, 말로 서술할 수는 없으나 침묵으로 감각될 수 있는 정신적 차원이 있다.


당대의 시각적언어가 보여주어야 할 하나의 상태로 저우리는 뚜벅뚜벅 나아간다. 겉으로는 빈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관객이 보이지 않는 영적 차원을 자각하게 하여 회화의 존재 방식이 부단히 변화하고 있음을 느끼도록한다. 회화의 에너지는 동기감응의 흐름이자 정신적이며 신체적인 합일, 언어이자 무언, 감정이자 이성이다. 푸른색은 흐르고, 번지고, 스며들고, 분홍색은 분출하고, 타오르고, 폭발하며, 흰색은 증발하고, 확산되고, 떠오른다. 서양적 맥락에서와 같이, 고정되어 포집할 수 있는 색의 레이어가 아니라 감각될 수 있는 존재 자체다. 하여, 회화는 시대를 관통하며 정신의 심연으로 뻗어나가 전생과 후생의 우리 모두와 대화한다.


회화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믿어왔다. 회화는 쓸모 있는 것, 수익을 창출하는 것만이 아니다. 회화는 우리 존재의 증거이자 감정의 그릇이고, 의식의 투영인 한편 신체의 연장이다. 이러한 특성을 여실하게 드러내는 저우리의 캔버스는 묘사하기보다 기록한다. 몸과 감정의 움직임이며, 그 너풀너풀 흐르는 궤적이며, 잊고있었던 호흡의 흐름과 에너지의 번뜩임같은 것들을 말이다. 우리는 터렐의 간츠필드의 중국적 현현, 오래 그 자리에 존재하며 풍화되는 벽화풍 회화를 보기 위해 저우리가 있는 화이트큐브로 발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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