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 - 이 계절을 함께 건너는 당신에게
하태완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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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로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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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 어려움, 아니 고급 영어의 어려움


학창시절에는 문법과 단어암기가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사회생활을 하면 독해가 더 중요하고 독해는 어휘에 기반한다.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에 비해 영어문법은 그렇게 어려운 편이 아니다. 영어의 위대함은 사실 어마무시한 어휘량에 있다.

최근 10년간 수능지문은 전문가도 이해 못할정도로 어렵지만 학생들은 문제풀이 스킬로 푼다. 진정한 독해가 아니다. 대입의 고비를 지나면 토익 토플이 기다리고 있는데 뉘앙스 구분없이 일단 동의어로 암기하고 템플렛 외워서 시험보고 끝이다. 독서하며 맥락 속에 학습한 어휘가 아니어 다 휘발된다. 시험용 입시용 영어다.

대학, 유학, 취업 등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한 허들을 넘고나면 독해의 망망대해가 기다리고 있다. 유학가서 thesis를 쓰고 전문 용어는 해도 소설, 문학책을 읽어오지 않았으니 꼬꼬마영어가 안된다.


잡다한 독서량이 적으니 전문영역만 넘으면 소통이 잘 안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래핀, 양자역학, 전기화학식은 줄줄 나와도 shiver, grin같은 어린이도서에 나오는 말은 잘 모른다. 잘못이라기보다, 현지인과 깊이 소통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말. 꼬꼬마 영어부터 쌓인 독해량이 없으면 내 마음 속 진심을 전하는데 한계가 있다. 석박사 논문을 코퍼스로 삼아 소통하는게 아니기 때문. 말이란건 내가 보고 듣고 읽고 느낀 문장에서 비롯된다.


예컨대 국제학교를 다녀서 영어 회화를 잘 해도 정작 미국에 가면 대화의 주제를 따라잡기 어렵다. 미국인은 이 친구가 말은 잘 하고 발음은 좋은데 뭔가 어색하고 이상하다고 느낀다. 슈퍼볼, 셀레브리티 이슈 등등 미국인이 관심갖고 있는 이슈에 대해 숟가락을 얹지 못한다.


한국인도 휴남동이나 경애의 마음이나 김지영같은 도서를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잘 표현할지 배워나간다. 서울대 권장도서 우파니샤드가 아니라 이런 독서에서 소통을 위한 문장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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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allerycrane.com/past/1


평창 신상 갤러리 크레인에 다녀왔다. 갤러리 鶴, 고고한 평창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가나아트센터 앞에 있다. 전시장 앞에는 하얗고 검고 검숭검숭한 학의 깃털을 닮은 설치작품도 있다. 다니는 곳은 많으나 떠다니는 생각을 다 붙잡아 정리할 시간이 없어 전시가 끝나고서야 펜을 든다.


잘그당잘그당거릴 법한 전선 구조물 뒤로 폴록풍의 거친 물감회화와 바스키아와 신표현주의 풍의 집그림이 있다. 중심의 조형물은 잘강잘강거리는 샹들리에의 형식을 차용하지만 유리 크리스탈 대신 검은 전선, 형광주황빛 필라멘트, 파손된 형광등, 고무선, 플라스틱 부속으로 대체되어 기계문명의 폐기물과 빛의 은유가 잘그랑거리며 미약하게 충돌하는 긴장감을 형성한다. 사선으로 비스듬히 윗쪽을 바라보는 방향성과 함께 유기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구조는 마치 살아 있는 학처럼 퍼덕이며 날갯짓해 하늘로 날아갈 듯한 역동성을 지니며 정돈된 형태를 의도적으로 회피하여 해체주의적 데포르메를 강조한다.


세련된 인테리어라도 천장과 벽 뒷편에는 먼지 가득한 공조시설과 어지러진 전선 케이블이 있는 법. 예술과 쓰레기도 앞뒷면의 관계다. 조각과 파편덩어리, 회화와 난잡한 물감, 드로잉과 목탄, 흑연 부스러기. 이 작품 역시 샹들리에라는 귀족적 장식이라는 형식에 산업 폐기물로 내용물을 채움으로써 그러한 작품의 경계를 지우고 미술의 순수성에 도전하며 쓰레기라는 문명의 잉여물로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는 것이다.



주변의 회화작품 또한 탈형식적 미학의 맥락에 동참한다. 좌측 캔버스는 거대한 수직성 드리핑 기법으로 마치 폐허가 된 도시의 실루엣이나 검은 산성비가 창문에 흘러내리는듯하며, 검은 물감이 중력에 의해 낙하하는 듯한 이미지는 서서히 무너지는 시간, 폐허와 퇴락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우측 캔버스에는 웰컴홈welcome home이라는 문구와 함께 왜곡된 집의 이미지가 있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여러 장치가 부착되고 나름의 질서대로 조립된 집처럼 보이지만 안전과 귀환의 장소로서의 집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따뜻한 고향이라는 홈의 심상과는 정반대로 왜곡되고 일그러진 집으로서의 의미를 표현해 루카치가 말한 고향없음의 감각과 현대사회의 심리적 불안을 시각화한다. 텍스트는 심리적 안정감, 이미지는 불안과 위협과 왜곡. 환대의 메시지와 비틀리고 찌그러진 집. 이렇게 이중코드화된 집을 통해 감각적 피로감과 시각적 충돌을 느끼는 관객은 귀환 불가능성에 직면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진다. 찌그러진 집도 집인가? 돌아갈 수 있는 집이 맞는가? 내게 집이 있는가? 


바스키아풍의 낙서와 겹쳐진 마티에르와 정돈되지 않은 드리즐은 의도적으로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이로써 성숙한 고급예술이라는 보수적인 미의식에 반발하고 지식권력의 공고한 계층화에 대한 도전해 예술을 천진난만한 이들의 감각적 해방의 도구로 재구성했다.


집은 피난처가 아니라 애매하고 이질적인 장소다. 그것도 인더스티얼하고 브루탈한 폐기물 들리에 앞에서. 

공간에 대한 기억, 낯섦, 해체, 재구성. 고정된 장소와 정체성을 믿을 수 없는 오늘날에 친숙함과 불쾌함의 교차점을 노출시키고 불안하고 부유하며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사하고 전근가고 퇴근하고 이동하는 도시인의 심리상태를 예술적 이미지로 전이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돌아가는 집이 원래 저러한 모습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입지에 신축아파트라고 해도. 심리적 해체의 현장으로 초대된 관객은 환대와 소외라는 이중의 정치성에 대해 고민해보게 된다.


다른 크기의 섬유에 그린 그림을 천장에 매달고 중첩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된 원형의 수묵작품도 인상적이다. 각각의 천은 서로 어깨를 겨누듯, 프레임에 걸쳐지듯, 혹은 겹쳐지듯 배치되어 평면회화의 틀에서 탈출한다. 반복되는 원형의 드로잉은 작품 전체에 리듬감을 부여하고 공간적 밀도를 높인다.


원형은 반복, 순환, 시간, 혹은 우주의 움직임 등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는 기호학적 상징이다. 다중원의 무한반복은 일견 명상적이기도, 기계적이기도하다는 점에서 함께 전시된 작품과 결을 같이한다. 천 위에 묻어나는 들쭉날쭉한 붓질은 자동화된 알고리즘과 AI패턴생성과 대척점에 있는 노동집약적인 손의 흔적을 보여준다. 디지털시대의 감각상실에 대한 저항이자 행위의 순수한 회복이다. 


겹겹이 쌓인 천과 물감이 고르게 퍼지지 않은 표면과 조잡한 측면 마감은 의도된 미완성 상태처럼 보이며, 단일 이미지로의 귀결보다는 보는 이 나름의 지층적 해석과 열린 결말을 추구한다. 본디 예술은 닫힌 결과물이 아니라 만드는 과정 그 자체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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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양지에 있는 벗이미술관에 다녀왔다. 남부터미널에서 양지IC까지 고속버스로 3700원이다. 보통 양지IC는 이천, 곤지암, 충청을 거쳐가기 위해 지나가는 곳인데 중간에 내리니 똥싸다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너무 일찍 정거장에 내렸다, 이게 맞나 같은 의뭉스러움. 주변은 아파트가 많은 베드타운보다는 교통의 길목에 있는 조금 세련된 읍내같은 느낌이 든다. 조선으로 치면 파발로, 역로에 있는 중간 기항지나 나루터의 감각이다. 은하철도 999의 모든 행성이 그러한 스쳐가는 우주의 주막같았다.


벗이미술관은 비제도권 작가, 소외계층, 장애인, 영세민의 아웃사이더아트 전문미술관으로 미술관 이름은 영어의 가치v 노력e 책임r 배움s 자립i의 첫 글자를 따온 베르시VERSI라고 표기하고 한국말의 친구라는 뜻의 벗이로 읽는다.

지금은 오스트리아 작가 4명과 미국 작가 1명의 전시를 하고 있다. 거친 표현주의전. 개중 미국 작가는 전문미술교육을 받은 적 없는 독학파(self-taught)작가다.


이로써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오래된 전제를 정면으로 맞서고 부순다. 미대출신만이 예술가인가? 제도 밖에서 솟구친 창작의 본능을 원초적인 언어로 드러낸다. 이러한 아웃사이더 아트는 테크닉 부족이 결핍이 아니라 독창성의 원천으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하고, 배우지 않음이 되려 창의성의 촉매임을 드러내면서 예술가로서 훈련되지 않은 상태를 미학으로 삼았다.


아웃사이더 아트는 관객은 어떤 이득이 있는가? 다른 전시와 어떻게 차별되는가? 예술가의 학벌, 출신이나 배경에서 손을 떼고 작품 자체의 감각적 언어에만 집중하게 된다. 어느 교수님 밑에서 어느 학파의 기법으로 배웠는가? 라는 전통적 배경보다 작품 자체의 감정적 언어, 반복, 색채 등을 중심으로 평가하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 조건이 아닌 감각적 결과물로서의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전시설명에선 아웃사이더 아트(비제도권 미술)와 아트 브뤼(거친 미술)의 관계가 명료하지 않은데 추측해보자면 아웃사이더 아트는 작가의 배경에 집중한 것이고, 아트 브뤼는 작품의 표현에 집중한 것이다. 그럼 대각선으로 꼬아보자면 아웃사이더 아티스트가 만든 정교한 그림이나 제도권 작가가 만든 브루탈한 작품은 다루지 않게되는 문제가 생긴다. 아웃사이더의 모든 작품, 혹은 아무나 만든 아트 브뤼가 아니라 아웃사이더의 아트 브뤼로 다루는 작품범위의 교집합이 한층 더 좁혀지게 된다는 뜻

허나 아트 브뤼를 따로 뗀 것은 아마 재단이 병원이기에 자폐나 정신질환을 미술치료로 접근하고 싶은 목적이 있지 않을까 싶다. 병리적 상태를 미적 경험으로 전환하고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을 해체해 비정상을 비범함으로 해석하고자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아트 브뤼 작품은 거칠지만 섬세하고 반복적이지만 충동적이며 설명보다 감각으로 존재한다. 사회적 고립, 정신적 균열, 자폐 스펙트럼, 제도와의 거리감 속에서 태어난 시각언어는 통념적 조형어휘를 넘어선다. 색은 감정의 코드이고, 충동의 기록이며, 치료의 자료다. 형상은 질문이며 리듬은 감각의 고백이도다


슈미트는 폴록적 표현으로 원형을, 사이어는 무의식을, 스트로블은 이중섭처럼 작은면에 독일건물을, 레너는 목가적이고 여백의 미가 있는 풍경을, 그리블러는 윌리를 찾아서처럼 화면에 강박적으로 얼굴을 반복해서 그린다.


미술 시스템의 외부에 있는 아웃사이더와 정상의 외부에 있는 거친 마음 모두의 내부를 거울처럼 비추는 작품이다.


하여, 우리가 진짜 예술이라 믿어온 설명 가능성, 고도의 테크닉기술, 학술 담론이 기우뚱 흔들린다. 친구미술관에서 가장 낯선 친구들을 만나며 우리는 예술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깊게 해볼 수 있다. 이것도 미술인가? 이들도 미술가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믿어왔던 편견을 해체하고 꽉 쥐고 있던 고집스러운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논다. 그래 이들도 미술가야 그래 이것도 미술일 수 있어. 와이 낫? 바룸 니히트? 왜 안돼겠어? 미술은 모두의 것인데. 어쩌면 순수한 예술은 다듬어진 것이 아니라 감정선 위에서 아른아른거리다가 캔버스 위로 우르르 쏟아진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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