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 도잉아트에 다녀왔다. 예술의 전당 앞, 유명 두부집 백년옥 너머에 있다.


포토리얼리즘을 추구하면서 광학법칙을 왜곡하는 Annie Duncan의 네 점과 극사실적 표현의 Kayla Witt의 한 점에 특히 눈길이 간다. Annie Duncan의 다른 한 작품과 유일하게 출품된 Kayla Witt의 한 작품은 이후 포스팅에 이야기하고 오늘은 애니 던칸만 조금 깊게 이야기해보자.


회화인데 세라믹적이다, 라는 것이 핵심이다.


작품 세 점 모두 빛을 과하게 굴절하고 정상적인 물리법칙을 초월해 투영을 왜곡하는듯 하나, 묘하게도 하이퍼리얼리즘의 극치에 있다. 


평면화된 색면, 명확한 테두리, 그림자의 불연속성 등은 조형적으로 연출된 인위성에 가까워 회화적 왜곡과 회화적 유희의 접점 어느 경계에서 노닌다. 색채는 밝고 경쾌한데 그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Annie Duncan, Diary, Acrylic on Canvas, 76.2x60.9cm, 2023


우선 시각적 묘사만 해보자. 첫 번째 작품에서 DIARY라는 단어가 수면 너머 유리병에 반사되어 비틀려 보이며 그 아래 딱딱한데 물렁한(이 감각이 핵심) 일기장이 있다. 


Annie Duncan, Bureau, Acrylic on Canvas, 119.3x78.7cm, 2023


두 번째 그림에서는 탕후루 같은 분홍빛 진주 목걸이가 향수병에 감겨 있고 그 뒤에는 일렁이는 나무 나이테 배경에 헤어브러시와 폴라로이드 사진이 있다. 각기 다른 크기의 염주알 같은 진주와 불가능한 다층 레이어의 파란 그림자가 특이하다. 


Annie Duncan, Three Wishes, Oil on Canvas, 121.9x121.9cm, 2025


세 번째 회화에 이르러 영원한 청춘(ETERNAL YOUTH), 장엄함의 망상(delusions of grandeur) 같은 양각 문구가 유리병이나 스테인리스 스틸 덫에 새겨진 듯 돋을새김 되어있고, 수상할정도로 돌돌말린 꽃 가지, 체리, 망치, 8볼, 메이크업 브러시, 못 등이 비현실적 크기와 비정상적 구도로 어지럽게 뒤섞여있다.


이러한 오브제들은 실존하는 사물을 따와서 그렸지만, 작가는 그것들을 사진처럼 충실히 재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림자, 유리, 액체, 표면의 반사를 과장해서 마치 감각의 자화상처럼 다룬다. 현실의 고정된 물질성을 벗어나 기억과 감정의 굴절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타이거 옐로우와 버밀리언의 색감에 새벽 1시 취한 바 풍경의 시각적 재즈를 그린 오지은 작가의 최근작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쨍하고 정신이 말짱한 상태다. 


시각적 묘사를 했으니 문맥적 분석도 해보자. 그림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 번째 그림 속 일기장은 감정의 기록을 암시하지만, 그 위에 올려진 물이 차있는 투명한 화병은 노란 꽃을 가두고 진실을 왜곡시킨다. 투명한 액체 속에서 굴절된 다이어리 표지는 사실의 일부만 증폭시키는 응어리진 감정의 왜곡을 시사한다. 또한 선택적 기억이 부유하는 고밀도의 공간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일기장의 핵심인 내부는 글자가 가려진 채 존재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작품의 향수, 헤어브러시와 진주는 모두 여성성을 상징한다. 향수는 기억의 증류물로, 감정의 잔향처럼 번진다. 남성의 손을 붙잡고 어딘가로 데리고 가려는 여성과 이를 머뭇거리는 것 같은 연인의 뒷모습이 찍힌 불분명한 사진은 이심전심의 불가능성, 사랑과 초조, 예정된 이별을 암시하면서도, 서사는 철저히 침묵시킨다.


세 번째 회화의 오브제들은 소비사회의 미학과 자기표현의 방식, 혹은 욕망의 편린들을 연상케 하나, 그 여러 도구들과 소비재를 감정적 환상과 뒤섞어, 자기표상적 정물화로 기능한다. 물리적 현실의 법칙이 느슨해지는 지점에서 이 회화는 시작된다. 명확하게 나뉜 색면과 단절된 그림자, 선명한 윤곽선은 물질의 사실성을 담기보다는 감정의 표면을 조형적으로 정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 세 점의 공통점은 모두 투영과 굴절의 메타포를 중심에 두고, 표현하는 바와 의미하는 바, 즉 형식과 내용을 일치시킨다는 것이다. 물, 유리, 금속, 액체 등은 빛을 반사하거나 왜곡하는 소재이지만, 작가는 그것들을 증폭시켜 내면의 감정이나 기억, 혹은 문화적 고정관념을 비틀고 재구성한다.


그리고 그 투영과 굴절의 왜곡은 마치 세라믹 조각의 느낌을 자아내는데까지 나아간다. 그렇다. 이 작품은 평면의 회화가 아니라 조각이라고까지 읽을 수 있다. 캔버스에 마티에르감을 쌓거나, 조형물을 올리거나, 프레임을 3D로 만들지 않고도 충분히 삼차원의 조각적 느낌을 줄 수 있다.


우리는 회화를 종종 평면에 색을 올리는 일로 단순화한다. 하지만 애니 던컨의 회화를 보고 있자면 마치 점토를 주물러 눌러 만든 성형물의 감각이 느껴진다. 루시안 프로이드가 매만진 살점의 점성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세라믹의 무게, 온기, 미세한 균열이 작가의 붓질을 통해 번역되고 캔버스에 이식된다. 하여, 눈으로만 읽히는 회화가 아니라 촉각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로 재탄생한다.


만약 회화가 도자에서 무언가를 배운다면? 조각은 시간을 만드는 과정이라는 형태로 포박한다. 완성된 조각에는 시간이 안료에 배어들고, 구워지고, 식고, 깨지고, 채색되고 코팅되는 장시간의 결과물로 드러난다. 표면으로, 피부로, 눌림과 울림으로, 주저와 호흡을 기억하는 표면으로. 애니 던컨의 왜곡된 굴절은 점성이 있는 조각을 매만져 뒤틀리게 빚는 행위와 닮았다. 


그렇다면 회화를 조각으로 다시 재해석해 볼 수 있을까? 표면 질감과 색채 대비와 공간성으로 다시 읽어보자.


표면 질감은 유리처럼 매끈하지만, 그 속엔 세라믹의 은밀한 온기가 감돈다. 작가는 미세한 하이라이트와 중간 톤을 조율하여 마치 젖은 유약같은 질감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 투명성은 언제든 금이 갈 듯 섬세하다. 빛은 반사되지 않고, 사부작사부작 머문다. 숨죽인 채 웅얼웅얼거린다.


색채는 충돌한다. 따뜻한 번트 시에나와 카네이션 레드, 차가운 파우더 블루와 스모키 라벤더는 정서적 긴장을 일으킨다. 따뜻함 속엔 갈망이 있고, 차가움 속엔 억제가 숨어 있다. 이는 단순한 색의 대비가 아니라 감정의 온도차다.


공간은 압축되어 있다. 수직성에서 그렇다. 헤어브러시의 돌기는 그리스 신전 기둥처럼 꽃혀있고, 줄기는 물을 빨아들인다기보다 수로 터널 사이를 투과해있는듯하다. 반복패턴도 보인다. 주황색의 일기장 그림자도 다층의 레이어로, 진주알의 파란색 타원형 그림자도 복합 층위로, 테이블 보위 하얀 별모양의 되풀이되는 패턴도 보인다. 위스키처럼 무언가가 응축되어 표면을 둥실둥실 떠다닌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증류된다.


시각적 묘사에 이어 문맥적 분석을 경유했으니 이제 이 모든 것을 유의미한 인사이트로 정리해보자.


이 모든 것은 왜곡의 실험이다. 물이 채워진 유리병을 통해 DIARY라는 단어는 마치 붓글씨처럼 일그러진다. 이 글자는 단지 물속에 잠긴 것이 아니라, 기억의 깊이 속으로 가라앉은 듯하다. 배경의 강렬한 주황색은 거의 살결처럼 뜨겁고 노골적이며 관람자를 어떤 사적이고 동시에 노출된 심리적 공간으로 몰아넣는다. 디퓨저나 향수가 아니다. 빛 아래 펼쳐진 기억의 해부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성성을 코스튬처럼 두르며 간접적으로 비판한다. 진주는 물음표처럼 휘어지고, 향수병은 그것을 구불구불한 반향에코로 뒤틀어낸다. 실패한 사랑의 흔적이 엿보이는 연인의 사진은 응결된 친밀함의 초상이다. 매캐한 버번의 향기가 느껴지는 가운데 쾌락과 균열 사이를 유영하는 어떤 응축된 감정이이 있다.


가장 오브제가 많은 작품은 회화라기보다는 선언문에 가깝다. 화장도구, 시든 꽃이 담긴 디퓨저 화병, 뒷부분 클로가 과장된 분홍 장도리, 한 입 베어먹은 과일, 철제 덫이 난무하는 이 시각적 소란은 인위적인 소녀성과 소비의 의식을 조롱하면서도, 그 기이하고 오페라적인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보존한다. 영원한 청춘이 새겨진 병은 액체가 다 매말랐고, 장엄한의 망상만 확실하게 주문처럼 새겨져있다. 아이러니하고, 우울하며, 날카롭다.


첫 번째 회화의 의미는 이렇다. 기억은 투명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왜곡되어 있다. 반사는 반란이다.


두 번째 회화의 의미는 이렇다. 아름다움과 사랑은 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흐르고, 흔들리며, 고정된 의미를 거부한다.


세 번째 회화의 의미는 이렇다. 소녀의 세계는 무해하지 않다. 그것은 문화적 설계물이며, 그 속에는 무장한 사물들이 존재한다.


애니 던컨의 극사실적으로 왜곡된, 모순적인 정물화는 리얼리즘의 논리를 전유하되, 나른한 마음으로 대충 복제하지 않고 관객들의 시선을 재빠르게 낚아챈다. 정물은 더 이상 정지된 정물이 아니다. 그것은 용암처럼 끓고, 바람처럼 속삭이며, 식물처럼 움찔거린다. 꽃은 피지 않았으되 퍼포먼스한다. 유리는 빛을 너무 굴절시켜 시선을 의도적으로 조작하면서 투명한 진실을 드러낸다. 일기장은 고백하지 않고, 의미를 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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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를 영어로 쓰고 있(싶)다고 했는데 이것도 걍 대충 올려야겠다. 준비가 안된 것 같다고 너무 꽁꽁 싸매고 끙끙 대지말고


At first glance, the two images on these open pages appear to draw from the tradition of Munjado (文字圖, 문자도), the ideograph paintings of the Joseon dynasty. Yet something in their visual logic feels distinctly unconventional, suggesting a departure from orthodoxy toward a more abstract, even modernist sensibility.


Rather than adhering to the balanced symmetry and decorative restraint typical of classical Munjado, these works adopt a more assertive visual language. Thick black contours carve out space with graphic confidence, blocks of color interrupt the composition with bold contrasts, and the overall structure leans toward asymmetry, lending the images a restless, almost kinetic energy. 


On the right-hand page, a two-story cheonggiwa—a traditional wooden building with blue-tiled roof—seems to perch improbably atop a single sweeping line of choseo(草書, 초서), the fluid cursive calligraphy. The effect is at once architectural and gestural, suggesting a deliberate fusion of form and stroke, structure and spontaneity.


Despite the surface textures that evoke the patina of age, the overall aesthetic feels deliberately hybrid. It could be a late 19th reinterpretation, or just as plausibly, a contemporary work that reimagines Confucian form through a modernist lens. Without attribution, one can only speculate—but the ambiguity is part of the intrigue.


On the left, the inscription reads: 「百世淸風夷濟之碑」. This classical Chinese phrase, rendered in a 4-4 rhythm, can be translated as “A stele commemorating the pure and upright conduct of Yi and Ji, passed down over a hundred generations.” The first half—百世淸風(in korean: Baekse Cheongpung/in chinese: Baishiqingfeng, in japanese: hyakuseiseifu)—literally means “the pure breeze of a hundred generations,” a metaphor for moral virtue that transcends time. Its origins trace back to the Zhou dynasty in ancient China, where the brothers Bo Yi and Shu Qi (known in Korean as 백이Baek Yi and 숙제Suk Je) refused to serve the conquering regime after the fall of the Shang(Yin) dynasty. Choosing self-imposed exile, they survived on wild plants(in korean: 고사리 gosari) and ultimately starved rather than compromise their principles.


The renowned Confucian philosopher Mencius revered them as “the purest among sages” (夷齊.聖之淸者), and their story became a cornerstone of moral discourse in East Asia. The line appears in the Mencius, Wan Zhang Xia(만장하), the second volume of the fifth chapter of Mengzi(맹자). I recall vividly from my year in traditional school, where I memorized the Sishu(사서) in its entirety through daily recitation. That rigorous training embedded these classical texts not only in memory but also in instinct, making the resonance of this stele's inscription all the more immediate.


In Korea, the brothers' legacy was especially admired during the Joseon dynasty, referenced by figures such as Prince Suyang(수양대군) In modern times, the independence activist An Jung-geun(안중근) invoked their names in calligraphy, underscoring their continued relevance as emblems of integrity.


The pure breeze of hundred generations, Baekse Cheongpung(百世淸風) serves as a kind of moral shorthand—an ideal encapsulated in a phrase—symbolizing the endurance of ethical clarity in an age of ambiguity. The stark formal treatment in these images, particularly the sculptural density of the black forms, reflects that clarity with unexpected visual power. Whether a historical artifact or a modern intervention, the work reclaims the language of virtue and repurposes it within a bold, expressive framework. It is a deeply Confucian message, refracted through a strikingly experimental visual idiom.


사진출처: https://www.threads.com/@o.binyoun.o/post/CuZWva5LL-Y?xmt=AQF06SiyRP-vtYfjx7SdgS241J14oUZYO1TY9wHdHg8bJ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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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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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구매해서 단숨에 읽었다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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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2025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단편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된 안경(15분)과 함께 상영된 파라노이드 키드(7분) 보고 왔다. 메가박스에서 연속 상영한다. 3천원에. 할인해서 2천원에도 풀렸다.


정유미 감독이 직접 쓴 동명의 그림책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김해김 패션브랜드와 협업이 돋보인다.


자신이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는 화두가 느껴지는 안경은 액자구조와 김해김 패션의상 털,진주,이불 소재 세 점이 눈에 띄고


파라노이드 키드는 배두나의 나레이션으로 불면의 고통과 불안이 관건이다.


보통 고통을 다루는 이야기는 고통의 해소가 목적이 아니라 고통의 온전한 표현이 목적이다. 자신의 고뇌의 시간을 세밀하고 투명하게 표현하는 것에서 극복이 시작되기 때문.


둥근 머리에 아이같은 얼굴을 하지만 순수함보다 내면의 고독과 불안이 돋보이는 캐릭터 디자인은 묘하게 요시모토 나라의 인물이 생각난다. 그러나 라모나처럼 새침하거나 퉁명스럽지는 않다.


공간배경 디자인은 르네 마기리트의 이중 현실 구성같기도, 미국의 영화 감독 데이비드 린치의 실내 미장센같기도 하다.(개인적으로 린치의 작품은 대부분 수작이라고 생각)


시선과 감시, 자기 검열과 기억의 환각, 자아 속의 자아 같은 라이트모티프는 카프카적이다.


다와다 요코의 헌등사처럼 문자와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탐색하려하는데, 다와다 요코는 언어를 통해서 하고, 정유미 감독은 이미지를 통해서 시도한다.


파라노이드 키드는 배두나의 나레이션이라도 있었으나, 안경은 아예 나레이션이 없는, 침묵의 영화다. 침묵으로 무언의 울림과 감동을 추구한다.


안경은 일종의 액자구조를 취하고 있는데, 안경이 깨져서 안경 맞추러 갔다가 안경검안기 안에 늘 보이는 목가적인 넓은 풀밭 위 2층집에 들어가게 된다.


안경검안기 안에서 비현실적인 이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어쩐지 아주 오래 전, 2001년에 개봉했던 이성강 감독의 마리이야기의 어떤 등대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묘한 데자뷰다.


완전히 털로 뒤덮인 사람의 털을 다듬어 패션으로 만들어주는 장면에서 패션이야 말로 곧 자아정체성, 즉 외면과 내면의 일치를 보여준다.


털, 진주, 이불 등으로 김해김의 의상을 만들어나가는 세 여정이 자아를 찾는 여정과 겹쳐있다. 의상이 완성되는 순간 의상을 입고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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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고재에서 열린 정수영 개인전에 다녀왔다. 


작가의 팬트리 연작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물질문화를 전시한 정물화의 현대버전이다. 정수영 작가의 현대판 저장고 정물화를 17세기와 비교해보자. 무엇이 공통되고 무엇이 차이이며, 정수영은 무엇을 그리지 않았고, 이 팬트리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 것이며, 미래 AI, 바이오테크, 양자역학과 우주식민지 시대의 팬트리는 어떤 모습일까?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21세기의 저장고를 생각할 수 없었듯, 지금 우리도 23세기의 저장고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몇 가지 트렌드는 있다. 양갱형태의 곤충프로틴식 같은.


아, 물론 학고재를 오늘 다녀온 것은 아니다. 거의 초기에 다녀왔다. 이번 주말부터 장마시즌이 시작되니 비축분이 슬슬 풀릴 예정이다. 지난 네 달간 거의 매일마다 많은 전시장을 부지런히 다녔다. 다 이유가 있다. 본격적으로 장마시즌이 되면 우르릉 쾅쾅 쏴아아아 하고 내리는 비때문에 이동이 힘드니 매일 올리기 위한 비축분을 쟁여놓은 것이다. 장마와 폭염에는 습도로 인해 찌는 듯이 더워 여러 곳을 다니기 힘들다. 따라서 봄가을처럼 하루에 여러 곳을 이동할 수는 없다. 그럴 때는 1일 3끼하듯, 1일 3곳이 최대다. 안국역을 서둘러 졸래졸래 빠져나와 국현미 한 번 들어가서 달래 먹는 곰처럼 동굴 속에서 안 나온다랄지, 시청역에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쏙 들어가버리고 땅거미가 거뭇거뭇할 때 나온다랄지


다니지 않을 때 밀린 책과 OTT를 챙겨야하는 기간이다. 쌀 농사에도 모내기와 추수의 타이밍이 있듯이, 지식 농사에도 시즌별로 해야하는 작업이 있다. 이동이 적절할 풍년의 때에 많이 추수해 미리 사일로에 7년 어치 곡식을 저장해 이후 7년의 흉년에 대비해 둔 조셉처럼. 그 날과 시를 알지 못하지만 기름을 미리 준비해둔 이들의 옛 이야기처럼.

정수영, Pantry, 2025, Acrylic on linen, 120x120cm

Clara Peeter’s Still Life with Cheeses, Artichoke, and Cherries (ca. 1625)





정수영 작가의 팬트리 연작은 당대의 풍요로운 물질문화를 집요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정물화가 페테르 클라스(Pieter Claesz, 1597-1660), 얀 데 헤엠(Jan Davidsz de Heem, 1606-1684), 클라라 피터스(Clara Peeters, 1594-?) 등이 생각난다. 이 두 시대 속은 사조를 비교해보자. 


먼저, 두 시대의 작품 모두 사물의 배열이 과시적이고, 묘사가 섬세하다는 점에서 닮았다. 네덜란드 정물화는 육류의 마블링, 레몬 껍질의 나선, 은잔에 비친 빛, 조개껍질의 질감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팬트리 연작은 스팸 통조림, 리츠 크래커, 김치통, 심지어 휴지 롤까지 표면의 광택, 라벨의 구김, 포장의 질감을 놓치지 않고 상세히 묘사한다. 폴리프로필렌 원료의 과자포장재가 부드럽게 구겨지는 질감까지 표현한 점이 특히 인상깊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든 오브제는 그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관객에 보여주기 위한 광고 연출처럼 의도적으로 정돈되어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과시적 소비리스트이자 문화적 전시로 읽힌다. 네덜란드가 혁신적인 주식회사 시스템을 통해 거대 상단을 만들어 식민지 무역으로 부유해진 결과,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향신료, 이국적 과일, 값비싼 식기류 등이 부르주아의 테이블을 장식하게 되었다. 당대 정물화는 이런 풍요로운 물질문화의 과시적 기록이다. 한편 정수영의 팬트리는 프링글스, 엠앤엠, 스키피, 캠벨수프, 코카콜라, 하인즈케챱에 심지어 푸라면, 아니아니 신라면까지, 그리고 온갖 건조 향신료와 일본 간장소스 등을 진열해 오늘날 대중이 즐겨 소비하는 글로벌 브랜드 제품들과 현대 소비자의 취향과 습관을 보여준다. 심지어 아랍어로도 적혀있는 코카콜라 라이트 상자도 있다. 이정도로 많은 식료품을 보관해둘 수 있기 위해서는 나라 전체의 부의 파이가 증가해야한다. 팬트리는 대중적 소비기호의 평준화와 확장된 식탐의 기록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암시하는 장치 또한 흥미로운 비교 지점이다. 헛되다는 뜻의 라틴어 바니타스(vanitas)는 17세기 정물화에서는 부패한 과일, 꺼진 촛불, 해골 등의 정해진 아이콘을 통해 상징적으로 삶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이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죽을 때는 빈 손으로 간다는 깨달음은,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엄격하게 종교적이었던 칼뱅주의파 개신교의 문화적 영향 속에 있었던 네덜란드인의 양가적 감정을 보여준다. 언뜻 현대 팬트리에서는 그런 해골 같은 게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직접적인 상징 없이도 과잉적 소비, 캠벨 수프의 반복되는 패턴, 인스턴트 식품의 차가운 질감으로 소비의 공허함과 지속 불가능한 풍요를 암시한다. 가득 찬 선반은 오히려 결핍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두 회화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도 존재한다.

정수영, Pantry, 2025, Acrylic on linen, 120x120cm

Jan Davidsz De Heem, Still-Life, Breakfast with Champagne Glass and Pipe,  1642. Oil on oak, 47 x 59 cm. Residenzgalerie, Salzburg


첫째, 자연물과 인공물의 차이다. 네덜란드 정물화는 과일, 생선, 고기 등 자연산 생물 재료들이 중심이었다면, 팬트리는 산업화된 가공식품과 화학 조미료, 합성착향료가 들어가 음료 등 전적으로 인공적인 대량생산품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이 더 이상 직접 음식을 길러내기보다, 선택된 소비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둘째, 제품의 양, 종류 그리고 감상자와의 거리감이다. 정물화는 오브제와 감상자의 거리가 상당히 가깝고 보여주는 식료품이 수백 개는 아니다. 소수를 집중해서 보여주는 구도다. 그러면서 감상자가 식탁 위를 내려다보는 구도를 취하면서 어느 정도 경외감과 성찰을 유도했다. 반면 팬트리는 정면 구도로 3단 정도의 찬장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보여주는데,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있을 법한 낯설지 않은 광경이지만, 가짓 수와 종류가 수백 개라 압도적이다. 미국 어느 영화에서 한 번쯤 보았을 법한, 실제로 있을 법한 팬트리를 보는 듯 익숙함이 있지만 오히려 너무 가짓 수가 많고 실제 다 먹을 수 있을 것인지 묘한 불안을 자아낸다. 게다가 팬트리는 음식 뿐 아니라 공구, 장난감, 술, 의약품, 청소도구 등 다양한 사물이 혼재되어 있다. 음식뿐 아니라 다양한 도구가 소유자의 정체성, 기억, 그리고 무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를 보여준다.


셋째, 시간의 감각 혹은 기시감(데자뷰)다. 17세기 정물화는 연회 직전의 활기나 막 지나간 순간의 여운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생동감이 있다. 그런데 팬트리는 반대로 저장고 문이 열려 있는 찰나처럼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느낌을 준다. 냉동된 찰나, 감정도 동작도 없는 정지된 공간이다. 디지털스크린에 있는 쇼핑카트를 보듯, 무표정하고 기능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정말로 먹기 위해 둔 것들일까? 식욕이 아니라 소유욕의 제단은 아닐까


이 마지막 질문의 꼬리를 물고 정수영 팬트리 연작을 다른 방식으로도 읽을 수도 있다.


우선, 이 저장고 안에 무엇이 빠져 있는가? 다시 말해, 많이 그린 것 같은데 무엇은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았는가?

네덜란드 정물화처럼 장기보관용 염지된, 훈제된 고기나, 문어나 유리병 안에 담긴 곤충이 보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방금 도살한 후 해체를 거친 살아있는 가금류, 돼지, 소 등 생물 재료가 보이지 않는다. 당장 먹기 위해 준비할 수 있는, 혹은 먹기 바로 직전의 재료가 아니다. 수많은 상품과 브랜드가 있지만,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은 손맛, 온기, 이야기, 나눔, 자연, 혹은 막 요리된 따끈한 음식이다. 오히려 제품 디자인과 브랜드와 화려한 로고만 강조되어 있는 먹을 수 없는 보관용 제품만 나열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음식은 있지만 요리의 흔적은 없다. 재료는 있지만 조리된 결과는 없다. 통조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공장에서 반조리된 칼로리일 뿐이다. 그러니 생동감있게 살아있는 현실에 기초한, 먹는 삶이 아닌 보관하는 삶의 초상이며, 가득 채움으로써 오히려 결핍을 드러내는 풍경의 파편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의 소비 습관과 욕망을 비판하고, 패스트푸드, 정크푸드, 브랜드 마케팅의 시각적 폭력성을 읽어낼 수 있다.


나아가 두 번째 차이점에 대해 꼬리를 물고 이런 질문도 생긴다. 음식 뿐 아니라 공구에 곤충, 문어까지 갖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팬트리는 누구의 것인가? 어떤 나이, 문화, 인종, 배경, 학력, 계층의 소비 패턴을 반영하고 있는가? 독신의 삶인가, 육아하는 가족의 삶인가? 혼자 먹기에는 너무 양이 많고, 보통 남성이 많이 소비하는 과자류와 여성이 많이 구비해두는 소스류가 충돌하는데 정작 과자를 제외하고 베이비용품은 많지 않다. 팬트리 속 물건들은 모두 일상적인 저가 상품이다. 홀푸드나 트레이더스 조 같은 유기농제품을 취급하는 상류층 타겟 마트보다는 크로거나 월마트같은 데서 많이 보일 법한 상품이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생각은 청소년 아이를 둔 3인 한국-일본계 미국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족이라는 것인데, 특히 신라면과 일본간장류 때문에 그런 추측을 한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17세기 네덜란드인이 상상할 수 없었던 초국적 브랜드 제품으로 가득찬 21세기의 팬트리. 그렇다면 오늘날 상상할 수 없는 23세기 미래의 팬트리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저장고는 시각적 기억의 제단에서 디지털화된 리셋 공간으로 이행할지도 모른다. AI가 제안하는 맞춤 식단, 데이터 기반의 비시각적 저장 방식. 배터리 충전식 식품이 있을 수도. 음, 이번 배터리는 음이온이 많아서 맛있어. 지구의 태양열로 충전한 배터리라 그런지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 하는 식으로. 나아가, 인공지능이 개인 건강관리 프로그램에 따라 식단을 추천하고 무인 드론 배송이 굴뚝으로 팬트리에 바로 드랍해 필요한 물건을 즉각 채울 수도 있겠다. 가상 브랜드가 실체 없는 포장을 디자인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의 팬트리는 더 이상 시각적인 이미지가 아닐 수도 있다. 선반이 아닌 서버 속에 저장된 데이터처럼. 실물이 아닌 디지털 트레이스. 냉장고를 여는 대신, 스마트 글래스 안경으로 눈을 아래로 내려 화면을 스크롤하는 시대... 그런 날에도 팬트리에 무언가를 채워두겠지. 저소득층은 양갱형 곤충프로틴을 먹을 것이고, 중산층은 콩배양육으로 소고기풍미를 입힌 단백질을 먹고, 상류층만 엄선해서 키운 암소의 한우를 먹겠지.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17세기가 좋았어. 21세기가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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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매일씁니다 2025-06-19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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