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에서 열린 정수영 개인전에 다녀왔다. 


작가의 팬트리 연작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물질문화를 전시한 정물화의 현대버전이다. 정수영 작가의 현대판 저장고 정물화를 17세기와 비교해보자. 무엇이 공통되고 무엇이 차이이며, 정수영은 무엇을 그리지 않았고, 이 팬트리의 주인은 과연 누구일 것이며, 미래 AI, 바이오테크, 양자역학과 우주식민지 시대의 팬트리는 어떤 모습일까?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21세기의 저장고를 생각할 수 없었듯, 지금 우리도 23세기의 저장고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몇 가지 트렌드는 있다. 양갱형태의 곤충프로틴식 같은.


아, 물론 학고재를 오늘 다녀온 것은 아니다. 거의 초기에 다녀왔다. 이번 주말부터 장마시즌이 시작되니 비축분이 슬슬 풀릴 예정이다. 지난 네 달간 거의 매일마다 많은 전시장을 부지런히 다녔다. 다 이유가 있다. 본격적으로 장마시즌이 되면 우르릉 쾅쾅 쏴아아아 하고 내리는 비때문에 이동이 힘드니 매일 올리기 위한 비축분을 쟁여놓은 것이다. 장마와 폭염에는 습도로 인해 찌는 듯이 더워 여러 곳을 다니기 힘들다. 따라서 봄가을처럼 하루에 여러 곳을 이동할 수는 없다. 그럴 때는 1일 3끼하듯, 1일 3곳이 최대다. 안국역을 서둘러 졸래졸래 빠져나와 국현미 한 번 들어가서 달래 먹는 곰처럼 동굴 속에서 안 나온다랄지, 시청역에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쏙 들어가버리고 땅거미가 거뭇거뭇할 때 나온다랄지


다니지 않을 때 밀린 책과 OTT를 챙겨야하는 기간이다. 쌀 농사에도 모내기와 추수의 타이밍이 있듯이, 지식 농사에도 시즌별로 해야하는 작업이 있다. 이동이 적절할 풍년의 때에 많이 추수해 미리 사일로에 7년 어치 곡식을 저장해 이후 7년의 흉년에 대비해 둔 조셉처럼. 그 날과 시를 알지 못하지만 기름을 미리 준비해둔 이들의 옛 이야기처럼.

정수영, Pantry, 2025, Acrylic on linen, 120x120cm

Clara Peeter’s Still Life with Cheeses, Artichoke, and Cherries (ca. 1625)





정수영 작가의 팬트리 연작은 당대의 풍요로운 물질문화를 집요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의 정물화가 페테르 클라스(Pieter Claesz, 1597-1660), 얀 데 헤엠(Jan Davidsz de Heem, 1606-1684), 클라라 피터스(Clara Peeters, 1594-?) 등이 생각난다. 이 두 시대 속은 사조를 비교해보자. 


먼저, 두 시대의 작품 모두 사물의 배열이 과시적이고, 묘사가 섬세하다는 점에서 닮았다. 네덜란드 정물화는 육류의 마블링, 레몬 껍질의 나선, 은잔에 비친 빛, 조개껍질의 질감을 세밀하게 그려냈다. 팬트리 연작은 스팸 통조림, 리츠 크래커, 김치통, 심지어 휴지 롤까지 표면의 광택, 라벨의 구김, 포장의 질감을 놓치지 않고 상세히 묘사한다. 폴리프로필렌 원료의 과자포장재가 부드럽게 구겨지는 질감까지 표현한 점이 특히 인상깊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든 오브제는 그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관객에 보여주기 위한 광고 연출처럼 의도적으로 정돈되어 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과시적 소비리스트이자 문화적 전시로 읽힌다. 네덜란드가 혁신적인 주식회사 시스템을 통해 거대 상단을 만들어 식민지 무역으로 부유해진 결과,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향신료, 이국적 과일, 값비싼 식기류 등이 부르주아의 테이블을 장식하게 되었다. 당대 정물화는 이런 풍요로운 물질문화의 과시적 기록이다. 한편 정수영의 팬트리는 프링글스, 엠앤엠, 스키피, 캠벨수프, 코카콜라, 하인즈케챱에 심지어 푸라면, 아니아니 신라면까지, 그리고 온갖 건조 향신료와 일본 간장소스 등을 진열해 오늘날 대중이 즐겨 소비하는 글로벌 브랜드 제품들과 현대 소비자의 취향과 습관을 보여준다. 심지어 아랍어로도 적혀있는 코카콜라 라이트 상자도 있다. 이정도로 많은 식료품을 보관해둘 수 있기 위해서는 나라 전체의 부의 파이가 증가해야한다. 팬트리는 대중적 소비기호의 평준화와 확장된 식탐의 기록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암시하는 장치 또한 흥미로운 비교 지점이다. 헛되다는 뜻의 라틴어 바니타스(vanitas)는 17세기 정물화에서는 부패한 과일, 꺼진 촛불, 해골 등의 정해진 아이콘을 통해 상징적으로 삶의 덧없음을 표현했다. 이처럼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죽을 때는 빈 손으로 간다는 깨달음은,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엄격하게 종교적이었던 칼뱅주의파 개신교의 문화적 영향 속에 있었던 네덜란드인의 양가적 감정을 보여준다. 언뜻 현대 팬트리에서는 그런 해골 같은 게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직접적인 상징 없이도 과잉적 소비, 캠벨 수프의 반복되는 패턴, 인스턴트 식품의 차가운 질감으로 소비의 공허함과 지속 불가능한 풍요를 암시한다. 가득 찬 선반은 오히려 결핍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두 회화 사이에는 뚜렷한 차이도 존재한다.

정수영, Pantry, 2025, Acrylic on linen, 120x120cm

Jan Davidsz De Heem, Still-Life, Breakfast with Champagne Glass and Pipe,  1642. Oil on oak, 47 x 59 cm. Residenzgalerie, Salzburg


첫째, 자연물과 인공물의 차이다. 네덜란드 정물화는 과일, 생선, 고기 등 자연산 생물 재료들이 중심이었다면, 팬트리는 산업화된 가공식품과 화학 조미료, 합성착향료가 들어가 음료 등 전적으로 인공적인 대량생산품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오늘날 인간이 더 이상 직접 음식을 길러내기보다, 선택된 소비자로 살아가고 있음을 반영한다.


둘째, 제품의 양, 종류 그리고 감상자와의 거리감이다. 정물화는 오브제와 감상자의 거리가 상당히 가깝고 보여주는 식료품이 수백 개는 아니다. 소수를 집중해서 보여주는 구도다. 그러면서 감상자가 식탁 위를 내려다보는 구도를 취하면서 어느 정도 경외감과 성찰을 유도했다. 반면 팬트리는 정면 구도로 3단 정도의 찬장을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보여주는데, 미국 중산층 가정에서 있을 법한 낯설지 않은 광경이지만, 가짓 수와 종류가 수백 개라 압도적이다. 미국 어느 영화에서 한 번쯤 보았을 법한, 실제로 있을 법한 팬트리를 보는 듯 익숙함이 있지만 오히려 너무 가짓 수가 많고 실제 다 먹을 수 있을 것인지 묘한 불안을 자아낸다. 게다가 팬트리는 음식 뿐 아니라 공구, 장난감, 술, 의약품, 청소도구 등 다양한 사물이 혼재되어 있다. 음식뿐 아니라 다양한 도구가 소유자의 정체성, 기억, 그리고 무의식적인 선택의 결과를 보여준다.


셋째, 시간의 감각 혹은 기시감(데자뷰)다. 17세기 정물화는 연회 직전의 활기나 막 지나간 순간의 여운을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생동감이 있다. 그런데 팬트리는 반대로 저장고 문이 열려 있는 찰나처럼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느낌을 준다. 냉동된 찰나, 감정도 동작도 없는 정지된 공간이다. 디지털스크린에 있는 쇼핑카트를 보듯, 무표정하고 기능적인 구성을 하고 있다. 정말로 먹기 위해 둔 것들일까? 식욕이 아니라 소유욕의 제단은 아닐까


이 마지막 질문의 꼬리를 물고 정수영 팬트리 연작을 다른 방식으로도 읽을 수도 있다.


우선, 이 저장고 안에 무엇이 빠져 있는가? 다시 말해, 많이 그린 것 같은데 무엇은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았는가?

네덜란드 정물화처럼 장기보관용 염지된, 훈제된 고기나, 문어나 유리병 안에 담긴 곤충이 보이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유럽에서 그랬던 것처럼 방금 도살한 후 해체를 거친 살아있는 가금류, 돼지, 소 등 생물 재료가 보이지 않는다. 당장 먹기 위해 준비할 수 있는, 혹은 먹기 바로 직전의 재료가 아니다. 수많은 상품과 브랜드가 있지만, 정작 보이지 않는 것은 손맛, 온기, 이야기, 나눔, 자연, 혹은 막 요리된 따끈한 음식이다. 오히려 제품 디자인과 브랜드와 화려한 로고만 강조되어 있는 먹을 수 없는 보관용 제품만 나열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음식은 있지만 요리의 흔적은 없다. 재료는 있지만 조리된 결과는 없다. 통조림에서 느껴지는 것은 공장에서 반조리된 칼로리일 뿐이다. 그러니 생동감있게 살아있는 현실에 기초한, 먹는 삶이 아닌 보관하는 삶의 초상이며, 가득 채움으로써 오히려 결핍을 드러내는 풍경의 파편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인의 소비 습관과 욕망을 비판하고, 패스트푸드, 정크푸드, 브랜드 마케팅의 시각적 폭력성을 읽어낼 수 있다.


나아가 두 번째 차이점에 대해 꼬리를 물고 이런 질문도 생긴다. 음식 뿐 아니라 공구에 곤충, 문어까지 갖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팬트리는 누구의 것인가? 어떤 나이, 문화, 인종, 배경, 학력, 계층의 소비 패턴을 반영하고 있는가? 독신의 삶인가, 육아하는 가족의 삶인가? 혼자 먹기에는 너무 양이 많고, 보통 남성이 많이 소비하는 과자류와 여성이 많이 구비해두는 소스류가 충돌하는데 정작 과자를 제외하고 베이비용품은 많지 않다. 팬트리 속 물건들은 모두 일상적인 저가 상품이다. 홀푸드나 트레이더스 조 같은 유기농제품을 취급하는 상류층 타겟 마트보다는 크로거나 월마트같은 데서 많이 보일 법한 상품이다. 따라서 가장 합리적인 생각은 청소년 아이를 둔 3인 한국-일본계 미국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족이라는 것인데, 특히 신라면과 일본간장류 때문에 그런 추측을 한다. 


이런 생각도 해본다. 17세기 네덜란드인이 상상할 수 없었던 초국적 브랜드 제품으로 가득찬 21세기의 팬트리. 그렇다면 오늘날 상상할 수 없는 23세기 미래의 팬트리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저장고는 시각적 기억의 제단에서 디지털화된 리셋 공간으로 이행할지도 모른다. AI가 제안하는 맞춤 식단, 데이터 기반의 비시각적 저장 방식. 배터리 충전식 식품이 있을 수도. 음, 이번 배터리는 음이온이 많아서 맛있어. 지구의 태양열로 충전한 배터리라 그런지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 하는 식으로. 나아가, 인공지능이 개인 건강관리 프로그램에 따라 식단을 추천하고 무인 드론 배송이 굴뚝으로 팬트리에 바로 드랍해 필요한 물건을 즉각 채울 수도 있겠다. 가상 브랜드가 실체 없는 포장을 디자인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의 팬트리는 더 이상 시각적인 이미지가 아닐 수도 있다. 선반이 아닌 서버 속에 저장된 데이터처럼. 실물이 아닌 디지털 트레이스. 냉장고를 여는 대신, 스마트 글래스 안경으로 눈을 아래로 내려 화면을 스크롤하는 시대... 그런 날에도 팬트리에 무언가를 채워두겠지. 저소득층은 양갱형 곤충프로틴을 먹을 것이고, 중산층은 콩배양육으로 소고기풍미를 입힌 단백질을 먹고, 상류층만 엄선해서 키운 암소의 한우를 먹겠지.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17세기가 좋았어. 21세기가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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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매일씁니다 2025-06-19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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